〈 8화 〉2. 로드 투 하비셜 (4)
누군가가 음식의 모든 것을 보고 싶다 한다면, 그를 페렐른으로 보내라.
프레데리카가 가져다주었던 책에 이런 말이 있었다. 하지만 나는 그 말을 그다지 신용하지 않고 있었다.
아무리 페렐른의 음식이 맛있다고 해도 배달음식만 못할거라는 것이 내 생각이었던 것이다.
실제로 백작가에서 먹었던 음식이 그랬다. 맛있긴 하지만, msg로 절여진 현대인의 입맛에는 조금 심심한, 그런 음식들.
그래서 나는 이 세계의 식문화가 조금 뒤떨어져 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 생각이 틀렸다는 것을 깨닫는 데에는 이 크레이프 하나를 베어무는 것 만으로 충분했다.
페렐른의 식당거리는 저녁 시간대를 맞이해서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바삐 돌아다니는 종업원들, 식사를 하러 온 학생들과 상인. 그리고 그들의 사이에서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는 수 많은 음식들의 향연.
하비셜에서 나온 학생들이 팔고 있는 정체불명의 괴식도 종종 눈에 띄었지만, 눈에 보이는 대부분의 음식들은 굉장히 맛있어보였고, 그 종류 또한 상당히 다양했다.
대륙의 온갖 식재료가 종류별로 모여드는 페렐른이니 만큼 어찌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앙.
나는 산딸기가 군데군데 박혀있는 생크림 크레이프를 베어물었다. 혀가 기뻐하며 생크림을 품은 채 춤을 추었다. 자칫 느끼할 수도 있었으나, 조금 느글느글해지려 할 때마다 산딸기의 새콤함이 악센트를 주며 혀를 자극했다.
맛있었다. 프랜차이즈 가게에서 판매하는 공산품따위와는 비교할 수 없는 최상급 수제 크레이프였다.
"그대는 감정을 숨기지 않아서 좋아."
"네?"
한참 생크림의 부드러움을 음미하던 나에게 황녀님이 말을 걸었다. 나는 갑작스러운 황녀님의 말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자 황녀님이 웃으며 손수건을 꺼내 내 뺨을 닦아주었다.
그리고내 머리카락의 뒤로 손을 가져다대었다.
황녀님의 목덜미가 눈 앞에 들어왔다.
하얗고 곧은 목덜미.
"그대는 자각하고 있는가?"
얼굴에 열기가 몰린 채 돌처럼 굳어있는데, 황녀님이 나에게서 조금 멀어졌다. 그리고 내게 손을 내밀었다.
그 안에 백합이 피어 있었다.
"그대는 기분이 좋을 때 마다 등 뒤로 이 꽃을 피우는 모양이야. 후후, 정말 알기 쉽지 않은가?"
"예?!"
깜짝 놀라 뒤를 돌아보았다. 화악, 하고 백합의 하얀 꽃잎이 날리었다.
그러고 보면 주변 사람들이 나를 신기한듯 바라보고 있었다. 하늘하늘 날아간 꽃을 집어 향기를 맡는 사람들도 있었고, 사라져가는 꽃잎을 휘날리며 장난을 치는 사람들도 있었다.
꽃놀이 하는 사람들을 지켜보는 나무가 이런 느낌일까.
뭔가 민망해졌다.
"어, 어디에 들어갈까요? 아니, 그러면 민폐인가?"
"다른 이들이 그대의 꽃을 보며 기뻐하고 있어."
황녀님이 주위를 둘러보다, 문득 백합 몇 송이를 품에 안았다. 그리고 그것을 나에게 건네주며 싱긋 웃었다.
노을빛을 받은 황녀님의 금빛 머리카락이 화려하게 반짝였다.
"그들에게 이 꽃과 함께할 수 있는 시간을 선물로 주지 않겠나?"
어, 아, 네.
황녀님 하고싶은거 다 하세요.
그런 말을 삼키며, 나는 얼굴을 붉힌 채 고개를 끄덕일 수 밖에 없었다.
한 시간 정도가 지나고 날이 어둑어둑 해지자, 나는 주변의 상인들로부터 굉장한 감사를 받았다. 아름다운 꽃 마법덕에 구경꾼이 몰려 장사가 잘 되었다나. 그래서 지금 나는 양 손에 간식거리를 가득 들고 있었다.
"······그대는 나에게 짐을 넘길 생각이 아직도 없는건가?"
"허억, 헉, 세렌 님께, 폐를, 끼칠 수는······!"
"그렇다면 차라리 간식을 받지 않는 것도 좋은 방법이었을텐데."
"호의를, 주셨는데, 그걸 어떻게 거절해요······!"
"그대는 정말로 아름다운 심성을 가졌구나."
사실 상인 분들이 주셨던 간식이 맛있어 보여서 거절하기 아까웠던 것도 이유였지만, 굳이 말하지는 않기로 했다.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자꾸만 손을 움찔거리는 황녀님의 옆에서, 나는 이를악물고 계단을 하나씩 올라갔다. 황녀님은 내 옆에서 자꾸만 짐을 들어주려 하고 있었지만 그럴 수는 없었다. 짐을 황녀님께 맡기다니, 그런 민폐를 부릴 까보냐.
한 계단을 오를 때 마다 봉지가 덜럭거리며 몸이 휘청였다. 으으, 남자였다면 한 손으로도 들 수 있는 무게였을텐데······!
그러다, 일순간, 몸의 무게중심이 뒤로 휙 쏠렸다.
'어?'
세상이 천천히 기울어졌다. 몸이 공중에 붕 뜨며, 점차 뒤로 넘어가고 있었다.
아.
계단을 떨어지고 있구나.
떨어지면······ 아프겠다.
나는 눈을 질끈 감았다. 그리고 머리를 두 팔로 감싸안았다.
"위즈?!"
황녀님이 비명을 지르는 목소리가 들렸다.
아, 황녀님.
그렇게 소리지르시면, 부드러운 목소리가 망가져 버리는데.
시간이 멈춘 것 같았다.
허공에서 떠 있는 시간이, 너무나도 길어, 영원히 땅바닥에 닿지 않을 것 만 같았다.
······아니, 실제로도 땅바닥에 닿지 않았다.
"위험하셨어요."
"그대는······."
질끈 감았던 눈을 살짝 뜨고 주위를 둘러보자, 황녀님이 당황한 표정을 짓고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황녀님의 시선을 따라간 곳엔,
"자세를 잡아주세요. 천천히 몸을 내려드릴 테니까요."
나에게 길고 하얀 손가락을 뻗고 있는 보라색 로브를 두른 소녀의 모습이 있었다.
거리에서 몸을 부딪혔던, 왜인지 괜히 신경쓰였던 소녀였다. 나는 기억을 떠올리곤 눈을 크게 떴다.
"아, 거리에서······!"
"그 작은 일을 마음에 담아두고 계셨나요."
소녀가 살짝 놀랐다는 듯 고운 손으로 입을 가렸다. 그리곤 작은 웃음소리를 내었다.
"후후······. 제가 당신의 기억에 남아있다니, 기쁘기 그지 없네요."
"예?"
공중에서 천천히 계단으로 내려온 나는 손에 가득 들었던 간식봉지를 털썩내려놓으며 소녀를 바라보았다. 그러자 소녀는 로브의 모자를 벗으며, 손을 가슴팍에 모았다.
황녀님을 처음 만났을 때, 나는 이 이상 아름다운 사람은 없으리라 자신했었다. 하지만······ 아무래도 그 생각을 조금 고쳐야 할 것 같았다.
황녀님만큼이나, 어떤 면에서는 황녀님보다도 아름다운 소녀가 그 곳에 있었다.
물론 황녀님이 저 소녀에 비해서 못났다는 것은결단코 아니었다. 하지만 소녀는 황녀님이 가진 매력과는 전혀 다른 부분에서 매력을 내뿜고 있었다.
노을의 잔영이 남아있는 밤하늘을 그대로 옮긴 듯 한 머리카락 아래에 붉고 요염한 눈이 보석처럼 빛났다. 언뜻 창백해보이기까지 하는 하얀 피부 위에 오똑 솟아있는 코는 달과 같은 호선을 그리고 있었고, 그 아래의 붉은 입술은 묘한 색기마저 머금고 있었다.
비현실적인 외모에 나도 모르게 이질적인 느낌마저 들었다. 실례라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도저히 부정할 수 없는 감정이었다.
"위즈를 구해주어서 고맙다. 그대의 이름을 물어도 되겠나?"
황녀님이 소녀에게 다가가 손을 내밀며 물었다. 당황스러움을 감추며, 동시에 감사를 표하는 몸짓. 소녀는 황녀님의 그런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더니, 일말의 망설임조차 없이 황녀님을 지나치며 말했다.
"여린 소녀에게 무거운 짐을 맡긴 당신에게 댈 이름은 없답니다."
"뭐······?"
그리곤 내게 손을 내밀었다.
"무사하신가요?"
"아, 네······."
나는 당황스러운 눈빛으로 두 소녀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검은 머리카락을 가진 소녀는 기쁜 듯 내 손을 잡았고, 반면 황녀님은 분한듯 시선을 떨구고 있었다.
얼떨결에 소녀의 손에 부축되어 일어선 나는, 소녀가 가까이 얼굴을 들이밀자 움찔 하고 몸을 떨었다.
나를 곧게 바라보는 붉은 눈동자 안에 하늘색 눈동자가 비쳤다.
흔들리고 있었다.
그런 나에게, 소녀는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페렐른은 바른도 리베른도 아닌 중립지대. 이 곳에서는 신분의 권위가 통하지 않는답니다."
"······네?"
이상한 말이었다. 전혀 의미를 파악할 수 없는 말에 나도 모르게 얼빠진 목소리가 나왔다. 그러자 소녀가 한층 더 작은 목소리로, 뜨거운 숨결을 토하듯 내게 말했다.
먹이를 유혹하는 방울뱀을 마주한 것 같아, 온 몸의 솜털이 빠릿 하고 세워졌다.
"그녀가 바른의 후계자라고 해서, 당신이 떠받들 필요는 없다는 이야기지요."
"─?!"
나는 눈을 크게 뜬 채로 한 발자국 뒤로 물러났다.
이 소녀는 황녀님의 정체를 알고 있다. 찍어서 맞춘 것 같지도 않았다. 소녀는 황녀님의 신분을 소름끼치도록 확신하고 있는 눈을 가지고 있었다.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어떻게 황녀님을 알고 있는거지? 사교회에서 본 적이 있는건가? 아니, 하지만 황녀님은 열 살 이후로 사교계에 나오신 적이 없다고 하셨는데? 게다가 저 가시돋힌 말투는 도대체······.
"또한, 하비셜은 저와 당신이 친교를 나눌 수 있는 곳이기도 합니다."
사고가 정지한 채 얼어붙어있는 가운데, 소녀가 나의 손을두 손으로 붙잡았다.
이어서 마주잡은 손을 소녀의 가슴쪽으로 붙이며, 소중하게 감싸안았다.
그리고 나를 바라보았다.
여관 안의 조명을 받은 소녀의 붉은 눈이 나를 빨아들이듯 찬찬히 빛났다.
기대에 부푼 미소.
그리고, 세리나 황녀님에게 보란듯이 들려주는 것 같은 선명한 목소리.
"제 이름은 메디아. 메디아 리베른.
리베른의 황녀가 당신에게 묻습니다.
환경을, 신분을, 그리고 국적마저도 뛰어넘어, 저와 친구가 되어주실 수 있나요?"
소녀─ 메디아 리베른은, 엉켜있던 나의 머릿속을 새햐얗게 표백시키는 말을 입에 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