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화 〉2. 로드 투 하비셜 (6)
페렐른을 출발한 마차는 해가 중천에 뜨고서야 초원의 끝자락에도달했다.
페렐른에서 출발한지 대략 여섯 시간이 지났다. 점심시간때 잠깐 정차했던것을 뺀다 해도 다섯 시간.
세렌과 같은 공간에서 보내는 시간이기에 딱히 지루함은 느껴지지 않았지만, 세렌의 지루한 듯 멍을 때리는 얼굴을 보는 것은또 그것 나름대로 고역이었다.
"위즈."
"무슨 일 있어요, 세렌?"
"······별로 할 말은 없지만. 그냥 그대의 이름을 불러보고 싶었다."
"그래요."
이런 상황이 몇 번이나 반복되었던 것이다. 처음에야 내가 어떻게든 말을 이어나갔지만, 그것도 한두시간이었다. 나는 평범한 사람이었고, 몇시간이고 말을 지속할 입담은 가지지 않았으니까.
차라리 자는게 어떨까 하고 생각하던 시점. 긴 마차 행렬의 중앙에서부터 목소리가 울려퍼졌다.
[곧 나엘라이에 도달합니다.]
"드디어 도착했는가······!"
눈을 반쯤 감고있던 세렌이 순식간에 눈을 번쩍 뜨곤 창 밖으로 시선을 옮겼다. 나 역시 기대감을 가득 품고 창문 밖을 내다보았다.
잔디 정도로 짧아져있는 들풀 너머로 반짝이는사막이 눈에 들어왔다.
마차가 지나다닐 수 있도록 다져놓은 길 이외에는 사방이 모래언덕으로만 이루어져있는 사막이었다. 겹겹이 쌓여있는 모래능선과 이따금 솟아올라있는 선인장 비스무리한 식물들. 너무나도 낯이 익은 사막의 모습이었지만, 오히려 그 때문에 단 하나의 차이점이 너무나도 크게 다가왔다.
신록의 사막, 나엘라이.
신록이라는 수식어가 붙어있는 별명은 허언이 아니었다. 내 눈앞에 펼쳐진 사막, 나엘라이는 초록색 모래가 흩뿌려진, 너무나도 아름다운 사막이었다.
"나엘라이다. 나엘라이야, 위즈!"
세렌이 눈을 반짝이며 내 팔을 잡아끌었다. 처음으로 놀이동산에 발을 들인 아이마냥 기뻐하는 얼굴이었다.
나 역시 가슴이 벅차오르는 것 같았다. 백합황녀의 주요 배경인 하비셜은 바로 이 사막 위에 세워져 있는 아카데미였다. 그 말인 즉슨, 이 마차의 여정도 거의 다 끝나간다는 것을 의미한다.
"곧 하비셜에 도착하겠네요! 빨리 도착했으면 좋겠어요."
"그래. 하지만······ 나는 이 풍경도 가슴에 담아두고 싶구나."
세렌이 한 장면이라도 놓칠 수 없다는 듯 사막의 풍경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사막을 어지간히도 좋아하는 모양이었다. 나는 궁금증이 돋아 세렌에게 물었다.
"나엘라이를 좋아하시나요?"
"아아, 그래. 좋아하다마다. 나의 선조가 싸운여파로 만들어진 이 곳을, 내가 좋아하지 않을 수 있을리가 없지!"
"맞아, 그랬죠."
"이 사막의 넓은 풍경을 마주하면, 선조의 힘이 얼마나 강대했는지 짐작조차 가지 않는다. 그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나?"
세렌이 나에게 질문을 던졌다. 물론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세렌의 말대로였기 때문이었다.
사실, 나엘라이는 자연적으로 생성된 사막이 아니다.
백합황녀에서 나온 이야기지만, 나엘라이는 본래 페르그 대초원의 일부였다. 자생하는 풀은 잔디수준이었지만, 명백히 동물들이 풀을 뜯으며 살아가던 초원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지금으로부터 약 700여년 전, 이 곳은 마왕과 용사가 벌인 결전의 여파로 인해 사막으로 변해버렸다. 전투에서부터 뿜어져나온 마력에 의해 푸른 색으로 변질되어 버린, 신록의 사막으로.
소설을 읽을때야 그냥 그런가보다 하고 넘겼던 설정이었지만, 신록의 사막을 직접 마주하니 그 스케일에 대한 실감이 비로소 들기 시작했다. 단 두명의 싸움으로 이렇게나 넓은 나엘라이가 만들어졌다는 사실은 무섭기까지 했다.
"얼마나 강했던 걸까요, 영웅님은······."
멍하니 사막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그러자 세렌이 고개를 끄덕이며 다짐과도 같은말을 입에 담았다.
"아직은 가늠조차 할 수 없다. 하지만 목표로 해야 할 강함이라는 사실만큼은 분명하다. 나는 그대와 나의 백성들을 지켜야 하는 왕이 될 사람이니까."
세렌이 오른 손을 주먹쥐어 자신의 왼쪽 가슴에 대었다. 그리고 나를 향해 환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그러니 하비셜에서 함께 배우며 성장하도록 하자, 위즈 율릿. 그대와 함께라면난 뭐든지 해낼 수 있을 것 같아."
세렌이 자신있는 목소리와 함께 내게 손을 내밀었다. 나는 그 손을 황망히 붙잡으면서도 문득 떠오른 한 가지 걱정을 입에 담았다.
"저 검은 다뤄 본 적 없어요······. 배워도 잘 못 할 것 같은데."
"아하하, 그대는 옆에서 응원만 해 주어도 충분하다. 그렇지, 대련 후의나에게 흰 꽃잎을 띄운 시원한 물이라도 건네준다면 더 바랄 것이 없겠어."
"그 정도라면 할 수 있죠!"
자신감 있게 고개를 끄덕였다. 물 담당 정도는 팔이 빠지는 한이 있어도 열심히할 자신이 있다.
그나저나. 만일 그렇다면, 대련이 끝난 후의 땀에 젖은 세렌의 모습을 볼수 있는건가?
아아, 생각하는 것 만으로도 아름답다. 노력의 결실로서 맺힌 그 땀방울 하나하나가, 너무나도 깨끗한 아침이슬처럼 내 머릿속에 그려졌다. 그 고귀한 모습에 어떤이가 감탄하지 않을 수 있을까. 그런 모습을 가장 가까이에서 볼 수 있을거라고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행복하기 그지없었다.
그런데 별안간 시선을 내 뒤에 둔 세렌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곤 내 머리카락을 가볍게 쓰다듬었다.
"나도 기쁘다, 위즈!"
그렇게 말하는 세렌의 표정은 살짝 상기되어 있었다.
아,또 뒤에 백합이 나왔나보다.
이상한 생각을 한 걸 세렌에게 들키지는 않았겠지?
못 알아차렸을거야.
······아마도.
이변은 신록의 사막이 사방에 펼쳐져있을 때 일어났다.
내가 타고있는 마차가 왜인지 모르게 사막 쪽으로 방향을 튼 것이다.
"······저기, 세렌. 우리 마차만 다른 쪽으로가고 있는 것 같지 않아요?"
"확실히 조금 이상하군. 이너머에는 분명 모래언덕 뿐일텐데······."
세렌이 미간을 좁혔다. 나는 마차 밖을 내다보았다.
확실히 이상했다. 우리 마차만이 경로에서 빠져나와 모래언덕을 달리고 있었다.
마치 납치라도 당하는 것 처럼······.
납치?!
나는 마차 안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백합황녀의 기억을 되짚었다.
그래.백합황녀에서 분명 세렌은 납치 계획의 타겟이었다. 방법도 지금과 똑같았다. 하비셜로 가는 마차를 도중에 이탈시켜 납치하는 것. 그 계획을 위해 마차꾼으로 위장하기까지 하는 등 납치범들의 수는 굉장히 치밀했다.
하지만 이상했다. 백합황녀에서 그 납치계획은 실패했었다. 왜냐하면, 세렌이 평민으로 변장을 한 탓에, 납치범들이 그녀가 탄 마차를 특정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잠깐만.
순간적으로 뇌 속에서 퍼즐이 맞춰지며 소름이 오싹 돋았다.
세렌은 지금 허름한 나무마차가 아니라 내 마차를 타고 있잖아.
서민 변장은······ 마을에서의 일 때문에 포기했고.
그래서 납치범들이 세렌이 타고 있는 마차를 찾아낸건가?
이거 나 때문이잖아?!
"세, 세렌! 마차에서 내려야 해요! 지금 당장!"
"진정해라. 곧 마차꾼이 위험을 알아차리고 우리들을 도우러 와 줄 테니."
우리 마차를 움직이는 마차꾼이 흑막이라니까요?!
차마 증거도 없이 백합황녀의 지식을 꺼내지 못한 나는 떨리는 눈동자로 바깥을 내다보았다. 지금도 마차는 시시각각 행렬과 멀어져가고 있었다.
"이러면 곧 결계에서 벗어나잖아요······!"
"응, 결계?"
"네! 신록의 사막에서 나오는 마수들과 모래바람으로부터 하비셜 로드를 보호하는 결계 말이에요!!"
"······그건, 어. 상당히 큰일인데······."
세렌이 당혹스러운 듯 한 표정을 지었다. 고운 피부 위에 한 방울의 식은 땀이 흘러내렸다.
"지금 우리가 그 상황이라니까요······ 아, 꺄악?!"
무언가 투명한 막을 벗어나는 느낌이 들었다.
아무래도 결계인 것 같았다.
그 말인 즉슨.
우리는 하비셜의 보호 아래에서 벗어났다는 뜻이 되어버린다.
키에에엑─
마차의 방음마법 너머로, 희미한 울음소리가 들린다.
"······그대는 내 뒤에 있도록 해. 황실의 명예를 걸고 그대를 반드시 지켜내겠어."
"세렌의 말은 굉장히 기쁘지만요, 마차는 계속 달리고 있거든요?!"
"어쩔 수 없지. 일단 마정석을 부수는 수 밖에······."
세렌이 짐 속에서 검을 하나 꺼내었다. 그리고 마차를 조종하는 마정석을 깨트렸다. 이걸로 마차를 원격조종할 수 있는 수단은 사라졌다. 하지만 마차는 아직도 앞을 향해 나아가고 있었다. 관성 때문이었다.
그리고, 마차가 달려가는 곳 끝에는.
거대한, 모래의 산이, 움직이고 있었다.
타고있는 마차의 서너배는 되어 보이는 그 산은, 모래에 감싸인 대저택처럼 육중하게그 위엄을 내뿜고 있었다.
"······사막 거북이구나."
"사, 사막 거북이요? 마수는 아닌 거에요?"
"그래. 마수는 아니지. 마수만큼 흉폭하다는게 문제지만─ 그대는 마차 안에서 기다리고 있도록 해!"
세렌이 마차의 문을 열었다. 마차를 둘러싼 방음마법이 막아주던 소음이 날것으로 귀를 찔러대었다. 거대한 울음소리가 지천을 울렸다.
몸 속까지 울리는 것 같아, 괜히 헛구역질이 나왔다.
"다녀오마!"
"아, 세렌······!"
들어오는 모래바람에 눈을 가늘게 뜨며 세렌을 불렀다. 하지만 세렌은 이미 마차의 옥상으로 올라간 상태였다.
마차는 시시각각 사막 거북을 향해 다가가고 있었다. 나는 애타게 세렌을 불렀지만, 대답은 사막 거북의 울음소리때문에 들리지 않았다.
덜컹, 하고 마차의 지붕이 흔들린 것은 바로 그 때였다.
모래바람이 부는 모래의 사이를, 황금처럼 반짝이는 한 줄기 빛이 갈랐다.
─키아아아악!
굉음이 한 차례 거세져, 귀를 틀어막아야 겨우 버틸 수 있을 정도가 되었다. 사막 거북이 난동을 피우며 모래를 이곳 저곳에 흩뿌렸다.
다행히 마차 앞에 흩뿌린 모래 덕에 마차가 속력을 잃고 모래 구덩이에 멈추어섰다. 그러자 사막 거북의 위에서 칼을 박아놓았던 세렌은, 안심한 듯 더 거세게 사막거북의 등껍질을 도려내기 시작했다.
작은 검이었지만, 그 도신에 둘러쌓인 검기는 세렌의 몇 배는 되어보일 정도로 거대했다. 그런 검기에 찔린 거북은 아무리 거대한 몸집을 지니고 있다고 해도 버틸 수 없었고, 오히려 커다란 표적이 될 뿐이었다.
세렌은 강했다.
내게 보여준 귀엽고 아름다운 행동 덕에 잠시동안 잊고 있었다. 그녀가 영웅의 후예라는 사실을.
이 세계관에서 영웅의 피를 타고 난 사람은, 타인이 범접할 수 없는 초월적인 강함을 타고 난다는 사실을 말이다.
─켁, 크에엑.
사막 거북이 몸부림을 점차 줄여가며 몸을 축 늘여뜨렸다. 단단하게 그를 보호해주던 등껍질은 난도질되어 땅에 떨어진 코코넛처럼 갈기갈기 찢어져 있었고, 그 안의 상처에서는 보랏빛 피가 분수처럼 쏟아져나왔다. 초록 빛의 사막에 제비꽃이 피어나는 듯 한 자국이 남았다.
"무사해요?!"
"아아, 그대의 응원 덕에 무사하다!"
죽어버린사막 거북의 등껍질 위에서 세렌이 검을 닦아내며 소리쳤다. 후우. 그렇다면 안심인가─
"앗."
"세, 세렌?!!!!"
삐끗.
세렌이 거북이 등껍질 위에서 발을 헛디뎠다.
싸움이 끝났다고 방심했던 탓일까, 사막거북의 등껍질 위에서 떨어지고 있는 세렌은 완전히 무방비한 상태였다.
아무리 바닥이 푹신한 모래라곤 해도, 떨어지면 자잘한 상처가 세렌을 상처입힐 것이었다.
안 돼.
세렌에겐, 티끌만큼의 상처도 나서는 안 돼!
마차를박차고 세렌에게 달려가기 위해 몸을 일으켰다. 열려있는 마차 문 사이로 들어오는 모래바람 때문에 순간 몸이 휘청였다.
퍼드득.
넘어지려는 나를 백합 꽃잎이 휘감았다. 하지만 그 때문에 마차 밖으로 나갈 수가 없었다. 의도치 않은 방해를 받은 나는 백합에게 괜히 화를 내었다. 황녀님을 구하러 가야하는데 왜 나를 방해하냐며, 백합의 멱살을 잡기 직전이었다.
나는 백합에 휩쌓인 채 천천히 땅으로 내려오는 황녀님을 발견하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얼떨결에 마법을 또 쓴 모양이었다. 노리고 쓴 건 아니었지만······ 내 마법에 저런 기능도 있었구나 싶어 괜히 신기해졌다.
하지만 신기한 감정은 일단 뒤로 밀어두고, 나는 먼저 가슴을 쓸어내리며 안도감을 느꼈다.
"다, 다행이다······."
"마지막에 체면을 구겼군······. 그대 덕에 무사할 수 있었다, 위즈."
세렌이 마차로 올라서 모래를 털어내며 고마워했다. 나는 그런 세렌을 유심히 살펴보았다. 금빛 머리카락이 모래때문에 조금 탁한녹빛이 되어버린 것을 빼면 다행히 상처가 난 것 같지는 않아보였다.
"다치지 않으셔서 다행이에요······. 그나저나, 앞으론 절대로 위험한 일 하시면 안 돼요, 아시겠죠?"
"······으음, 걱정을받아보는 건 참 기분 좋은 일이구나!"
세렌이 웃으며 화제를 돌렸다. 나는 미간을 좁히며 목소리를 높였다.
"대답해주세요!"
"그래 그래. 이거 참 신선한 기분인걸. 영웅의 핏줄인 내가 걱정을 받다니······ 이건 아바마마께서도 경험하지 못하셨을 거야."
하지만 세렌은 건성으로 대답하며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뭐가 그리 기쁜건지. 옆에 있던 사람은 심장이 철렁거렸는데 말야.
살짝 심통이 났다.
물론 세렌의 고귀한 전투장면에감탄하긴 했지만?
그래도 아닌 건 아닌거다.
"고맙다, 위즈."
아니, 다시 생각해보니까 세렌의 행동은 옳았다. 그깟 내 가슴 좀 철렁했다고 그게 별 대수냐! 저 배시시 웃는 세렌의 고귀한 미소가 대수지, 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