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화 〉2. 로드 투 하비셜 (8)
기억은 때로 불완전하며, 종종 거짓기억이 생겨날 때도 있다.
기억의 재구성이라고 하던가? 인간의 기억은 사실 정보의 조각들을 그때그때 짜 맞추어낸 결과물일 뿐이라고 어딘가에서 주워들었던 기억이 있다.
말인 즉슨, 재구성하는 과정에서 실수가 있다면 기억에 오류가 생길 수 있다는 뜻이다.
그래.
지금 내 머릿속을 생생하게 잠식하는 이 기억이, 내 기억일리가 없다.
음 음. 분명히 재구성하는 과정에서 뭔가 실수가 있었을거야.
세렌에게 안겨서, 울며불며 떼를 쓴 기억이, 내 기억일 리가 없잖아?
그래. 눈을 뜨면 여전히 하비셜로 가는 마차 안 일거고, 세렌이 별일 없었다는 듯이 나를 맞이해주겠지.
나는 눈을 살짝 떴다. 괜히 발을 뻥 차고싶어지는 기억이 꿈이었길 바라며, 천천히 주위를 둘러보았다.
"어머, 위즈. 정신을 차리셨나요?"
"······메디아."
"생각보다 일찍 깨어났네요."
메디아가 나를 머리맡에 뉘인 채 내 머리카락을 쓰다듬고 있었다.
그래. 내 눈 앞에 있는 소녀는 세렌이 아닌 메디아였다.
그렇다는것은.
내 기억이.
거의 전부, 실제로 있었던 일이라는 뜻이 된다.
아아, 아아악!!
열이 오르는 것 같아, 얼굴을 양 손으로 가렸다. 그리고 발을 동동 굴렀다.
"위즈?"
메디아가 살짝 놀란 듯 나를 바라보며 눈을 동그랗게 떴다. 메디아의 검은색 머리카락이 내 뺨을 간질였다.
부끄러움에 몸을 떨던 나는 움직임을 멈추었다. 비현실적이기까지 한 메디아의 아름다운 적안과 시선을 마주했기 때문이었다.
붉은 빛이 감도는 검은색 머리카락은 마치 커텐처럼 내 시야를 차단했다. 세상이 나와 메디아만이 남은 듯 한 착각이 들었다.
으아아. 가까워요, 메디아······!
"어머, 기뻐라."
그런데 별안간 메디아가 싱긋 웃었다. 그러더니 화악 밝아진 얼굴로 자랑하듯 손을 내밀었다.
"보세요, 세리나 바른. 하얀 꽃이에요."
"······위즈의 꽃은 언제 보아도 아름답지."
살짝 가라앉은목소리가 대답했다. 고개를 돌려보니, 마차의 맞은편에서 세렌이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그러자 메디아는 일순간 득의양양한 표정을 짓더니 이내 다시 표정을 수면 아래로 잠재운 후 미소를 지었다.
"후후······ 정신을 차리자마자 선물을 주다니, 고마워요, 위즈."
"나도, 무릎베개를 해주면, 백합 정도는 받을 수 있단 말이다······."
안타까움에 젖어있는 목소리였다. 그러자 메디아는 무슨 소리냐는 듯 세렌에게 말했다.
"당신은 페렐른에서부터 계속 위즈를 독점했죠? 그렇다면 지금은 제가 위즈를 독점할 차례가 아닐까요?"
"하, 하지만."
"그렇죠, 위즈?"
"아, 네? 어, 저기."
저를 물건 취급하시는 것 같은 느낌이 살짝 들긴 하는데요.
네. 황녀님들껜 물건 취급 받아도 상관 없을 것 같아요.
"보세요. 위즈도 그렇다고 하잖아요?"
"위즈는, 그런 말 하지 않았어!"
"저런. 귀에 지병이라도 있던 건가요, 세리나 바른?"
"귀에 문제가 있는 건 그대 쪽이 아닌가?!"
티격태격.
아웅다웅 다투는 두 황녀님의 모습.
백합황녀 초반부는 이런 전개가 지속되곤 했다. 아웅다웅 다투며 미운정이 들기 시작하는 세렌과 메디아. 적국의 황녀이기에 살갑게 대할 수 없는껄끄러운 존재지만, 다투다보니 뭔가 동질감을 느끼게 된 두 사람의 복잡한 마음!
아, 세상에. 내가 그 모습을 두눈으로 직접 보다니.
축복 있으라, 하늘이여. 기쁨 있으라, 대지여.
"위, 위즈. 그대의 마법, 조금 지나친것 아닌가······?"
"꽃으로 목욕하는 것 같은 기분이네요······."
"아, 죄, 죄송합니다!"
"하비셜 로드의 끝이 보이는 것 같군요."
"그런가, 이제 곧 하비셜인가······!"
두 황녀가 들뜬 눈으로 창 밖을 바라보았다. 세렌은 창문쪽으로 몸을 완전히 돌린 채 의자의 위에서 무릎을 세우고 있었고, 메디아는 다소곳이 앉아 있었지만 고개만큼은 창문에 고정시키고 있었다.
며칠간의 여정 끝에, 마침내 목적지인 하비셜에 도착한 것이다.
중간에 사고가 한 번 있긴 했지만, 어쨌든.
"곧 목적지에 도착합니다. 전하."
"그래. 수고했어, 클레소스."
"영광입니다."
마차의 앞쪽에서 굵직한 남성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내가 그 목소리에 깜짝 놀라자 메디아가 말했다.
"제 마차는 두 칸으로 나뉘어 있답니다. 앞 칸은마차꾼의 자리이고, 뒷 칸은 객실로 사용중이죠.
클레소스는 리베른 황실 직속 마차꾼이랍니다. 바른의 마차꾼같은 실수는 하지 않아요."
메디아의 말 끝에서 날카로운 섬광이 한 줄기 스치는 것 같았다. 도발하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물론, 세렌은 그런 메디아의 도발을 유감없이 받아들였다.
"······그대의 발언, 넘어갈 수 없군."
"어머. 마차꾼 하나제대로 두지 못해 위즈를 마수에 오염시켰던 황녀가 무슨 말을 하려는 거죠?"
"마차를 몬 이는 바른의 마차꾼이 아니었어. 하비셜에서 온 마차꾼이었다."
"설마. 황실의 마차를 다른 마차꾼의 손에 두었다는 건가요?"
메디아가 이해할 수 없다는 눈빛으로 세렌을 바라보았다.그러자 세렌은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나는 황실의 마차를 타지 않았다. 본래라면 허술한 저급 마차를 탈 생각이었지. 뭐, 여러 일이 있어 위즈의 마차를 얻어타게 되었지만."
"─그러고 보면, 확실히 황실 마차라고 하기엔 너무 수수했죠."
메디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다, 문득 인상을 찌푸리며 세렌에게 물었다.
"······리베른의 황녀가 저급 마차에 몸을 실었다구요?"
"그러고 싶었기 때문이다."
메디아의 물음에, 세렌이 한치의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하지만 여전히 메디아는 납득할 수 없다며 고개를 저었다.
"그런 말도 안 되는 걸 이유로 삼지 마세요, 세리나 바른. 다른 이유가 있을텐데요?"
"물론이다."
"대체 뭐죠?"
세렌이 고개를 끄덕이자, 메디아가 대답을 재촉했다. 그러자 세렌은 가슴에 손을 얹고, 긴 속눈썹을 살짝 내리깔며, 뺨을 홍조로 물들였다.
그리고 입을 열었다.
"귀족들의 멸시어린 시선을 바꾸고 싶었어."
"······네?"
"허름한 마차를 타고 오며 숱한 시선에 시달렸지. 멸시, 동정, 혐오, 기피, 그리고 무관심까지.
그런 그들에게 작은 깨달음을 주고 싶었어. 마차의 낡은 외관과 허름한 옷가지는, 그 사람 본연의 가치를 나타내지 못한다. 뭐 그런 깨달음을 말이야."
"세리나 바른. 당신······."
"뭐, 지금에서야 공상 수준의 말로 변해버렸지."
세렌이 한숨을 내쉬면서도 유쾌하게 말했다. 그러자 메디아는 붉은 눈을 잠시 감더니, 엷은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말했다.
"아직 가능할 것 같네요."
"뭐?"
"클레소스. 마차의 외관을 변경하고 싶어요."
"전하의 뜻대로 하소서. 아무런 문제도 없나이다."
마차 앞쪽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그러자 메디아는 은은하게 웃으며, 나를 바라보았다.
"잘 봐요, 위즈. 저는 이런 것도 할 수 있답니다."
메디아가 마차에 손을 가져다대고 눈을 감았다.
메디아가 손을 가져다댄 벽부터 조금씩 모습이 바뀌기 시작했다. 고급스러운 비단 천이 둘러쌓고 있던 벽은 구멍이 솔솔 나있는 목재 벽으로 변해버렸고, 융단은 삐그덕대는 나무판자로 변했다. 마차의 크기 자체도 작아져서, 두 황녀님의 거리가 조금 가까워졌다.
"······이건."
"세렌이 타고 왔던 마차보다 상태가 심한데요······."
나는 고개를 저었다. 거대한 황실전용 마차에 타고있었던 것이 환상인 것 처럼 여겨졌다.
당황스러울 정도의 구현력이었다. 평범한 마차가 이 정도의 상태였다면 사실 굴러가는 것 부터가 기적인 수준이었다.
"환상이 아니야······. 마, 마차의 재질을 변환시킨건가, 그대는?!"
"환상 마법은 금방 들통나버릴거에요. 들키지 않기 위해서랍니다. 마차의 재질 자체를 바꾸는 수 밖엔 다른 방법이 없잖아요?"
"하, 하지만요, 메디아. 마차를 장식하던 것들은 다 어디로 간 거에요······?"
"나무로 바꿔버렸죠. 살짝 썩은 나무로."
메디아가 대수롭지 않은 듯 어깨를 으쓱했다.
나무로 바꾸어 버렸다고?
내 주먹만한 보석들을?
"아, 아까운데······!"
"위즈는 보석을 좋아하나요? 어떤 보석을 좋아해요?"
"딱히 좋아하는 건 아닌데요······! 그래도 보석인데! 겨우 썩은 나무로 바꿔버리는 건 좀 그렇지 않아요?"
"······후후. 위즈. 제게 주어진 황실의 개인 자산만 해도, 이런마차정도는 천 개 단위로 살 수 있답니다."
"히익?!"
깜짝 놀라 눈을 크게 떴다. 온갖 보석과 휘황찬란한 조각들,그리고 비단 천으로 치장된 마차를 천 개 단위로 살 수 있다니.
도대체 얼마인지 가늠할 수 조차 없었다.
그렇게 멍 하니 손가락을 꼽아가며 숫자를 세고 있는데, 메디아가 우리의 옷을 건드렸다.
"잠시 실례."
옷의 재질이 조금씩 바뀌어갔다.
음, 이거. 부드럽진 않은데 익숙한 감촉이다.
아, 그래 맞아. 후드티를 대충 걸쳤을 때 느껴지는 감촉이야,이거.
"신분을 숨기려면 이 정도는 해야하지 않겠어요?"
"······그대의 말이 옳다, 메디아 리베른."
세렌이 고개를 끄덕이며 옷매무새를 정리했다.
신기한 광경이었다.
다 쓰러져가는 나무 마차 안에, 조금 거칠고 헤진 후드티를 입은 소녀가 세 명 있다.
그 중 두 명이 황녀님이라고 누가예상이나 할까?
아무도 예상하지 못할 것이다.
솔직히 이런 건 백합황녀의 작가도 예상 못할걸.
앞으로 일어날 일을 상상하며 가슴이 두근두근 뛰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