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화 〉3. 입학 (1)
『하늘을 잘라낸 조각이 땅 위에서 부유했다.』
백합황녀의 이야기를 여는 첫 문장이었다. 3년동안의 대장정의 첫 발을 내딛는 의미깊은 문장.
몇번이고 읽어왔던 글귀였다. 하지만 지금만큼 그 글귀가 마음 속에 와닿은 적은 단 한번도 없었다.
"하늘의 귀퉁이를 떼어 낸 조각같구나."
세렌이 중얼거렸다. 나 역시 멍하니 고개를 끄덕이며 창 밖을 바라보았다.
창 밖에 보이는 거대한 수정은 그야말로 하늘의 조각이라고 불리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턱을 90도로 치켜들어도 눈에 다 담을 수 없는 수정이 푸른 빛을 머금은 채 햇빛을 받아 반짝였다.
내 상상력의 한계를 뛰어넘은 규모를 자랑하는마름모꼴의거대한 마법 수정.
형형색색의 마법문자가 그 주위를 띠처럼 두른 모습은······ 그래. 파일런같았다. 어, 생각해보니까 큰 파일런이랑 비슷하네?
"······유 머스트 콘스트럭트 애디셔널 파일런스."
"뭘 추가로 건설해야 해요?"
"네? 아, 아니요, 그냥 혼잣말입니다!"
음, 음.
말실수를 덮기 위해 일부러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내가 딴청 피우는 모습을 이상하게 바라보는 메디아의 눈총이 조금 따가웠다.
"하비셜의 남쪽에 위치한 이 보호수정은 페렐른과 하비셜을 잇는 길의 결계 유지를 담당한다고 해요."
메디아가 보호수정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보호수정을 바라보는 메디아의 눈빛에서는 마법에 대한 동경과 그 뒤에 감추어진열망이 엿보였다.
'언젠가, 저런 수정을 만들 수 있는 마법사가 되어보이겠어.'
백합황녀에서 나온 메디아의 속마음이었다.
지금도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겠지.
"될 수 있어요, 분명히."
"······위즈?"
"메디아는, 분명히 멋진 마법사가 될 거에요."
즐거운 상상을 했다.
두 황녀가 성장한 미래의 모습을 상상해보았다.
그녀들의 재능이 내 눈 앞에서 꽃피는 나날을 기대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바른의 황제가 되어, 누구보다도 굳센 검으로 세계를 지키는 세렌.
리베른의 황제가 되어, 누구보다도 찬란한 마법으로 세계를 구하는 메디아.
그 모습을 내 눈으로 담는다면.
그들이 피워낸 꽃의 향기에 취할 수먼 있다면.
그래. 정말, 죽어도 여한이 없을거야.
"하비셜에 가는 것이 그대는 그리도 기쁜가."
세렌이 백합을 주워들었다. 그리고는 백합을 내 뺨에 가져다대며 심장을 녹여버릴것 만 같은 미소를 지었다.
"나도 그렇다. 그대와 함께 할 하비셜의 순간순간이 기대되어 참을 수 없어. 마음만 같으면 마차를 박차고 그대를 안은 채 하비셜로 뛰어가고 싶을 정도니까."
"어머, 깨달음을 주고 싶다는 큰 뜻은 버리신 걸까요?"
"······그, 그건 아니다, 메디아 리베른. 말이 그렇다는 거지, 말이."
"그래요. 사실 저도 비슷한 마음을 가지고 있답니다."
눈동자를 낮게 깔며 붉은 눈으로 세렌을 응시하던 메디아가, 별안간 내게로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는 요염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당신도, 똑같은 마음이죠?"
그러자 세렌도 나를 바라보았다.
두 황녀가 나를 바라보며, 질문에 대한 답을 구하고 있다.
다른 대답이 있을 리가 없지.
나는, 그 어느때보다도 행복한 미소를 지어보이며,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네!"
우리가 타고 있는 낡은 마차는 보호수정을 지나 본관 앞 대운동장에 도착했다.
대운동장을 가득 메운 입학생들의 시선이 일순간 우리에게로 향했다.
불온한 기운이, 운동장에 감돌고 있었다.
평범한 농민들이라도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을 것 같은 비주얼 역시 문제였지만, 더 큰 문제는 따로 있었다.
"······저 쓰레기 마차때문에 우릴 기다리게 만든거야?"
"짜증나. 빨리 들어가서 쉬고 싶어······."
사막으로 경로가 이탈되었던 탓에, 우리는 하비셜에 상당히 늦게 도착했던 것이다.
불만어린 시선이 우리의 온 몸을 옥죄었다. 그 이글거리는 시선에 온 몸이 짓눌리는 것 같은 착각마저 들었다.
페렐른에서 세렌의 마차가 받았던 시선은 무관심에 가까웠다. 동정과 기피가 살짝 섞인 무관심. 자신의 감정을 대놓고 드러내는 행위는 귀족의 품위에 흠집을 내는 일이었기에, 신분이 낮은 마차라에게 멸시의 시선을 대놓고 보내는 이들은 그다지 많지 않았던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노골적인 적대. 혐오감. 그리고 경멸어린 시선.
그 시선은 단지 입학식이 지연되었다는 이유만으로 생겨난 것은 아니었다.
왜 자신이 평민을 위해 기다려야 하는가.
가난한 평민을 위해, 귀족인 내가 왜 인내해야 하는가.
신분의 차이를 드러내서는 안 되는 하비셜임에도, 그들은 그런 생각을 가슴에 품고 있었던 것이다.
차가운 시선이 비수가 되어가슴에 꽂혔다. 수많은 신입생들의 사이에서 공공의 적이 된 것 같은 기분이었다. 도저히 마차에서 내릴 엄두가 나지 않았다.
"세, 세렌. 사람들이 화난 것 같아요."
"마수의 습격을 받았다고 사전에 연락을 받았을텐데요······. 이해심이 부족한 걸까요."
"우리들이 늦어, 원래보다 한 시간정도 대기하고 있던 것이겠지. 나는 어느 정도 이해가 가."
"그런가요. 당신은 좋은 사람이군요."
"······갑자기 칭찬이라니. 무슨 꿍꿍이지?"
"칭찬만은 아니랍니다, 바른의 황녀님."
메디아가 미소를 지으며 후드의 모자를 썼다. 그리고는 문을 열어 한 순간의 망설임 없이 마차에서 내렸다.
미간을 살짝 좁히던 세렌 역시 이내 모자를 뒤집어썼다. 그리고 내게 손을 내밀었다.
"가도록 하자, 위즈. 저들의 멸시 어린 시선이 당황으로 바뀌는 모습을 어서 보고 싶구나."
"······네, 세렌."
나는 세렌의 손을 잡고 마차에서 내렸다.
차가운 시선들에 온 몸이 시려왔지만, 세렌을 잡은 손 만큼은 너무나도 따뜻해, 마음을 조금 놓을 수 있었다.
메디아는 신입생들이 서 있는 줄 끝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쪽이에요."
"······역시, 기피하는군."
세렌이 씁쓸하게 중얼거렸다.
세렌의 말대로, 메디아의 주변에서 줄을 선 사람들은 대부분 그녀를 피하고 있었다. 줄이 비뚤어지지 않을 정도로 메디아에게서 최대한 멀어지려고 하는 움직임이었다.
아니 이 사람들이. 메디아 황녀님을 벌레보듯 하는 그 시선, 어서 치우지 못할까.
그들에게 달려가 따져묻고 싶었지만, 세렌이 그런 나의 모자를 조금 더 뒤집어씌워 얼굴을 가렸다. 그리고는 말 없이 메디아의 옆으로 다가갔다. 나 역시 세렌의 손에 딸려갔다.
"─역시 그 때가 적기인가, 메디아 리베른."
"마법을 푸는게 낫나요?"
"아니. 이 상태 그대로 하는게 낫다."
"그런가요. 그래도 위즈의 마법은 푸는게 나을 것 같은걸요."
"그래. 위즈는 이 곳에서 기다려야 할 테니까."
"······저 빼고 무슨 이야기 하세요?"
뭔가 소외된 느낌이 들어 두 사람에게 묻자, 메디아가붉은 입술 위에 하얀 손가락으로 일자를 만들며 속삭였다.
"이제 입학식이 시작하려 한답니다."
"아, 치사해!"
뭐라고 더 말하려고 했지만, 메디아는 눈웃음을 지으며 후드를 깊게 눌러썼다. 세렌 역시 웃음을 참는 듯 한 얼굴로 앞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대운동장 전체를 울리는 목소리가, 사방에서 뻗어나와 귀를 울렸다.
[입학생이 전원 참석했으니, 입학식을 시작합니다.]
묵직하고 낮은 목소리였다. 까치발을 들고 앞을 바라보니, 저 멀리 단상에 희미한 남자의 모습이 비쳤다.
[먼저 교가 연주가 있겠습니다. 신입생 여러분은 하비셜의 교가를 듣고, 교가가 여러분께 알리고자 하는 내용을 곱씹어보시기 바랍니다.
연주는 하비셜 관현악단과 로스트윙 합창단이 맡고 있습니다.]
그 말과 함께, 단상의 양쪽에서 태양빛이 비단처럼 나풀거리기 시작했다.
그와 함께, 태양빛의 베일 아래에서 모습을 드러내는 수십명의 사람들. 갑작스레 공중에서 사람이 나타나자, 일순간 신입생들 사이에서의 웅성거림이 커졌다.
하늘에서 천사가 내려오는 것 같은 광경에, 감탄밖에 나오지를 않았다.
"아름답구나."
"그러게요······."
"하비셜의 입학식은 특별하죠. 양 제국에 비해서 50년은 앞서가는 기술들을 펼쳐, 신입생들에게 하비셜을 소개하는 장이니까요.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이건······ 그래요. 정말 아름답네요."
메디아가 미소를 지으며 다소곳이 양 손을 배 앞에 모았다. 낡은 후드에 가려져 있었지만, 흩날리듯 내뿜는 기품은 누구에게도 지지 않을 모습이었다.
그런 사람을 단지 옷차림새 때문에 멀리하다니.
고개를 저으며 신입생들의 한심함을 개탄하고 있는데, 누군가가 내 옆에 슬그머니 다가와 내 옆구리를 살짝 찔렀다.
"?!"
"······얘."
"어, 안녕?"
우리와 같이 후드를 쓴 소녀였다. 그녀 역시 로브의 모자를 뒤집어쓴 채 남들의 시선을 피하고 있었다.
소녀가 입고 있는 옷은 비록 낡아보이는 하얀색 로브였지만, 소중하게 세탁을 해서 그런지 굉장히 깨끗해보였다.
"너희도 평민이야?"
소녀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로브의 모자 사이로 초록색의 살짝 날카로운 눈이 호기심을 품은 채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당황한 나머지 세렌을 바라보았다. 거짓말을 해야하나, 싶었다.
내 시선을 느낀 세렌은 나 대신 소녀에게 대답했다.
"그대와 마찬가지로, 하비셜의 신입생이다. 여기 있는 모두가 똑같지."
세렌이 미소짓자, 소녀가 순간 몸을 움찔 떨었다. 그리고는 살짝 이상하단 표정을 지었다.
"신분이 다르잖아."
"이제까지는 달랐을지 몰라도, 지금부터는 같은 곳에서 살 사람들이에요."
메디아가 세렌의 말을 거들었다. 그러자 소녀가 잠시 고개를 젓다, 푸욱 한숨을 내쉬었다.
"너희들은 좋겠다. 그렇게 자신감도 넘치고······. 나는 아직 좀 불안하거든."
소녀는 한숨을 내쉬며 걱정어린 눈빛을 보이고 있었다.
사실 소녀의 말에는 어느정도 일리가 있었다. 하비셜 내에서 신분의 차이는 공식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하지만 하비셜을 다니는 학생의 약 80%는 귀족이었고, 따라서 하비셜에 입학한 평민들은 자연스럽게 소수가 되어버리고 만다.
암암리에 차별이 존재하는 것이다. 프레데리카역시 가정수업 도중에 씁쓸한 표정을 지으며 신분의 차별이 일어난다는 사실을 넌지시 일러줄 정도였으니까.
나는 고개를 떨구고 있는 소녀의 손을 잡았다.
"친구할래요?"
"······너랑?"
"싫은가요?"
"아니, 갑작스러워서. 대놓고 친구하자고 하는 애는 좀 특이하잖아."
소녀가 가슴 앞 쪽에서 손을 꼼지락대었다. 그러다가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나랑 친해져도 별 이득 볼 건 없다? 할 줄 아는 마법도 없고, 애초에 하비셜에 올 줄도 몰랐었으니까."
".친구를 이득보려고 사귀어요?"
"······뭐, 그건 그렇긴 하지만."
"그리고 저도 할 줄 아는거 없어요. 기껏해야 꽃 조금 피우는 정도고······."
내가 고개를 젓자, 소녀가 잠시 나를 바라보다 교가의 심벌즈 소리에 움찔 하고 몸을 떨었다.
그리고 고개를 살짝 끄덕이며 씨익 웃었다.
"응. 그러면 친구 하자, 우리. 나는 하스타 비즈야."
"저는 위즈 율릿이에요. 잘 부탁해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때 마침 교가 연주도 끝나 있었다.
"나도 그대와 친교를 맺고 싶지만······ 그런가. 때가 되었어."
"그럼 다녀오겠습니다, 위즈. 옷 변환 마법이 풀릴 테니, 혹시라도 겁 먹지 말아요."
"네? 어디 가세요?"
"계획을 실행하러 간답니다."
후드 사이로 메디아의 붉은 눈이 반짝였다. 순간적으로 나는 뱀 앞에 놓여진 새앙쥐가 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다음은 입학생 소감 발표가 있겠습니다. 모두 자리에 앉아주시기 바랍니다.]
맨바닥에 앉으라구요?
그렇게 생각하려던 순간, 내 뒤에 반투명한 의자가 생겨났다! 마법으로 만들어진 의자였다. 신입생들이 너나할 것 없이 자리에 앉으며 감탄하고 있었다.
단 두 명, 세렌과 메디아만이 자리에 앉지 않았다.
수근거림이커졌다. 왜 앉지 않냐고, 분위기 파악 못하냐고 험악한 말을 내뱉는 사람들도 있었다.
하지만 메디아와 세렌은 자리에 앉지 않았다. 오히려 한걸음 한걸음 걸어나가며, 신입생들이 서 있는 줄 가운데의 뻥 뚫린 길로 발걸음을 옮겼다.
"위, 위즈. 너희 친구들 왜 그래?!"
"생각이 있겠죠, 두 사람 다."
"그렇게 태평하게 있어도 되는거야?! 펴, 평민이 저렇게 눈에 띄면······!"
걱정도 많으셔라.
여기에서 저 두 분보다 높으신 분이 어디 있다고.
나는 고개를 으쓱 하며 두 황녀님의 뒤를 바라보았다. 천천히 신입생들의 사이를 걸어나가는 두 사람은 단 한 번의 망설임도 없었다. 야유와, 비난과, 당황스러움과, 모욕이 담긴 시선임에도 굴하지 않고, 두 명은 계속해서 단상을 향해 걸어나갔다.
그리고, 신입생들의 중간쯤에다다르자, 두 황녀님은 서로 고개를 끄덕인 후 동시에 후드 모자를 벗었다.
일순간 웅성거림이 멎었다.
시간이 멈춘 것 같은 착각 아래에서, 두 황녀님은 찬란한 금발과 단아한 흑발을 드러내었다.
적막 속에서, 누군가가 믿을 수 없는 단어를 입에 담았다.
"황녀전하······?"
설마.
말도 안돼,.
그럴 리가 없어.
신입생들 사이에서 격앙 섞인 말이 터져나왔다. 하스타 역시 눈을 크게 뜬 채 두 사람의 뒷모습만을 쳐다보고 있었다.
그 때, 내 옷이 빛나더니 내가 원래 입고 있었던 옷으로 변했다.
중요한 행사를 위한 드레스.
하얀색의 드레스에 분홍색 천으로 포인트가 가해져 있는, 단정하지만 아름다운 디자인. 그리고 가슴팍의 한 쪽에는 은색 휘장이 새겨져 있었다.
"백작가의 증표? 호, 혹시, 위즈. 귀족이었어······?"
"바깥에서는 그랬을 거에요!"
해맑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하스타의 동공이 폭풍우 속의 배처럼 심하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나는 그런 하스타의 손을 잡았다. 그리고 앞을 바라보며 말했다.
"세렌이 말했어요. 이 곳에서 신분의 차이는 없다고.
그러니까 지켜봐요. 지금 세렌과 메디아가 그걸 몸으로 보여주고 있으니까."
하스타가 멍한 눈빛으로 앞을 바라보았다. 혼란한 신입생들의 사이에서, 황녀님들은 단상을 향해 계속 걸어나가고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단상 앞에 선 두 황녀님은, 품 속에서 빛나는 무언가를 꺼내들었다.
황녀를 상징하는 두 제국의 티아라였다.
[입학생 소감은 양 제국의 황녀. 메디아 리베른과 세리아 바른 학생이 발표하도록하겠습니다.]
안내가 나오자, 다시 한번 정적이 감돌았다.
두 황녀가 들고 있는 티아라로 인해 확신하게 된 것이다.
낡고 삐걱이는 마차에 몸을 실었던, 해어진 옷을 입은 두 소녀가, 제국의 황위를 계승할 황녀라는 사실을.
침묵 가운데서 빛나는 티아라를 머리에 쓴 두 황녀가 단상에 올랐다. 그리고는 입학생들을 한 번 둘러본 뒤 연설을 시작했다.
[하비셜은 배움의 장이다.]
부드러운 목소리가 대운동장을 휘감았다.
세렌의 목소리였다. 하스타는 방금 전 까지 이야기를 나누던 소녀가 황녀였음을 그제서야 확신한 듯, 아연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하비셜에서의 신분고하는 존재치 않는다. 누구나 같은 곳에서 자고, 같은 것을 먹고, 같은 수업을 듣는다.
나는 바른에서는 황녀로 태어났다. 하지만 이곳에서 나는 황녀가 아니다.
이 곳의 스승을 존경하며, 그대들과 친교를 쌓고, 상급생에게서경험을 가르침받는, 일개 학생이다.]
세렌이 잠시 숨을 멈추었다. 그리고 온화한 미소를 지었다.
멀리 있어서 잘 보이지는 않았지만, 나는 그녀가 미소를 지었으리라고 확신할 수 있었다.
[그래서, 나는 기쁘다.
너무나도 기쁘다.
그대들이 격식을 차리지 않고 나를 대해줄거라는 생각에, 가슴이 터질것만 같이 요동치곤 한다.]
세렌의 목소리는부드럽고 감미로웠으나, 그 안에 담겨있는 의지는 강렬했다.
[그러니, 그대들에게 부탁한다.
그대들이 하비셜에서까지 신분의 굴레에 얽매이지 않기를.
신분의, 재력의, 출신의, 가문의 영향을 받지 않는, 그런 아름다운 교우관계를 만들기를.
이루어진다면, 나는 기쁠거라고 생각한다.]
세렌이 연설을 끝마쳤다.
여전히 운동장은 정적으로 가득 차 있었다.
짝짝짝.
세렌의 옆에서 박수소리가 들렸다.
메디아였다. 비록 박수소리는 작았지만, 그 파급력은 어마어마헀다.
드문드문 박수가 터져 나오더니, 그 세를 불려가, 마침내는 모두가 박수를 열광적으로 쳐댔다. 나 역시 손바닥이 새빨개지도록 박수를 보냈다.
음, 음. 박수를 쳐야 마땅한 상황이었다.
백합황녀의 초반부에서, 모든 신입생들에게 자신의 생각을 펼쳤던 세렌의 연설을 직접 들을 수 있게 되다니.
뭔가를 보고 죽어야 하는 날이 있다면 오늘이 바로 그 날이로구나.
문득 어떤 만화에서 보았던 대사가 스치듯 떠올랐다.
그리고 그 대사에 격하게 공감을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