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14화 〉3. 입학 (2) (14/86)



〈 14화 〉3. 입학 (2)

한참동안이나 감동에 젖어있던 나는 박수소리가 잦아들자 퍼뜩 정신을 차렸다. 하스타가 옆에서 나를 흔들었기 때문이었다.


"위, 위즈님! 꼬, 꽃이요! 등 뒤에 꽃!"
"위즈라고 불러도 돼요, 하스타. 그런데 꽃이요?"
"대체 이게 뭐에요? 마법인가요?!"
"전처럼 존댓말  쓰셔도 되는데······."

나는 등 뒤를 바라보았다. 꽃이 등 뒤에서 마치 망토처럼 나풀나풀 흘러내리고 있었다.

다행히 내가 있는 곳은 맨 뒤였다. 그래서  뒤로 흐드러지게핀 꽃이 민폐를 끼치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와는 별개로, 백합  뒤 쪽에 있던 신입생들의 시선을 잔뜩 끌어모아버린 모양이었다.

이전처럼 적대적인 시선은 느껴지지 않았다. 뭐라고 할까, 오묘한 감정이라고나 할까.


 청체를 숨겼는지에 대한 의구심,  황녀님과 함께 마차에 타고 있던  정체에 대한 궁금증. 그리고 무엇보다,  등을 수놓는 백합꽃에 대한 의구심.


뭐, 그런 감정들이 적절히 배합된······ 아무튼 복잡한 감정들이었다.


하지만 내가 신경  일은 아니었다. 왜냐하면, 세렌에 이어서메디아가 신입생 소감을 발표할 시간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러고 보면 원작에서 메디아의 소감은 묘사되지 않았었다. 세렌의 충격적인 소감에 대한 반응을 묘사하는데 지면을 할애한 나머지, 메디아의 소감은 뒷전으로 밀려나버렸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현실은 소설이 아니다. 다시 말해서, 분량상의 이유로 삭제되었다는 메디아의 소감을 놓치지 않을 수 있다는 뜻이었다.

[본래라면, 저는 이 종이에 미리 적어놓았던 소감을 발표할 예정이었습니다.]


메디아의 나긋나긋한 목소리가 대운동장을 울렸다. 소란스러운 대운동장의 소음이 조금 줄었다.

주위를 한  둘러 본 메디아는 종이 한 장을 들어올렸다. 그리고 증폭마법이 설치되어있는 마정석의 위에서, 천천히 그 종이를 찢었다.


찌지직.


귀를 갉는 듯 한 소음이 대운동장을 울렸다. 세렌이 소감을 발표하던 중에서도 조금은 소란스러웠던 대운동장은 그 소음에 마비라도  듯 침묵에 빠졌다.


메디아는 그제서야 만족한 듯 다시 말을 시작했다.

[하지만, 저는 세리나 바른 양의 소감을 듣고 생각이 바뀌었습니다. 비록 그녀의 소감은 조금 서툰 부분이 있다 하더라도, 이 종이에 적혀있던 형식적인 문장과는 차원이 다른 진심을 지니고 있었으니까요.]

듣는 이를 현혹하는 것 같은 요염한 목소리였다.

세렌의 목소리가 대운동장을 부드럽게 감싸는 것 같았다면, 메디아의 목소리는 대운동장을 빨아들이고 있는 것 같았다. 대운동장에 모인 신입생의 모든 시선을 남김없이 빨아들이고 있는 마성의 목소리.


그 목소리의 힘은 지위에 의해 생겨난 것도, 마법에 의해 만들어진 것도 아니었다. 메디아 자신이 순수하게 타고난 카리스마일 뿐이었다.

[그녀의 부탁에 거부감을 느끼는분이 분명히 남아있을거라고 생각합니다. 특히 리베른의 귀족가······ 그래요. 앞 줄에서 인상을 구기고 있는 데네스 루드 에이트, 당신처럼 말이에요.]

일순간 술렁임이 잠시 일었다. 그러자 메디아는 작은 웃음소리를 내더니, 이어서 입을 열었다.


[리베른을 지켜온 공작가의 명예를 더럽힐 수는 없다구요? 어머. 그렇다면 저는 27대동안 내려온 리베른 황가의 명예를 더럽히고 있는 걸까요?]


날이  있는 말이었다. 잠시 대답을 기다리던 메디아는, 대화를 나누던 상대가 꿀 먹은 벙어리가 되자,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그래요. 하지만 이 곳에서는 가문의 위신을 걱정할 필요가 없답니다, 데네스. 곳에서 당신이 벌일 행보의 결과는 온전히 당신의 몫이거든요. 왜냐하면, 이 곳에서 당신은 단지 오만방자한 신입생일 뿐이지, 에이트 대공의 직계로 대접받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저 역시 마찬가지구요. 메디아는 자신의 가슴의 손을 얹었다. 그리곤 자신에게 시선을 휘어잡힌  단 한 번도 눈을 떼지 못하고 있는 대운동장의 신입생들에게 말했다.


[대접받지 못하는 이유는 간단합니다. 이 곳은 리베른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의 가문은 리베른에서 작위를 받았지, 하비셜에서 작위를 받은 게 아니니까요.
그렇다면 하비셜은 누구의 땅일까요? 리베른의 땅도 아니고, 바른의 땅도 아닌 이곳은 대체 누구를 위한 땅일까요?]


침묵이 감돌았다. 메디아 역시 대답을 바라고 한 질문은 아니었다는  자연스럽게 말을 이어나갔다.


[바로, 배우고자 하는 이를 위한 땅입니다.]


몇몇 신입생이 감탄을 내뱉었다. 세렌 역시 메디아의 뒤에서 고개를 살짝 끄덕여 힘을 실어주었다.

[그래요. 하비셜은 배우고자 하는 이를 위한 장소입니다. 여러분도, 저도, 마찬가지로 배움을 위해  곳에 발걸음을 옮겼습니다.
모두다 같은 처지인 겁니다. 배움에 신분의 차이가 필요할까요? 아니요. 태생으로부터 정해지는 신분의 차이는 이 곳에서 존재할 이유가 없습니다. 단지 가르치는 자와 가르침받는  간의 차이가 있을 뿐이죠.]

메디아가 작게 숨을 들이쉬었다. 숨소리가 귀 바로 옆에서 들리는 같아, 나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켰다.


[그렇기에, 여러분들과 같은 신분을 가진 신입생, 메디아 벨라루스 리베른이 여러분께 부탁을 하나 드리고자 합니다.]


메디아는 잠시 눈을 감았다. 그리고, 붉은 눈을 아지러이 피는 꽃처럼 내보인 후, 그 부탁을 입에 담았다.

[하비셜에서의 생활을, 저와, 모두와 같이행복하게 보내주세요.]

나는 여우에게 홀린 나무꾼마냥 고개를 끄덕였다. 다른 신입생들 역시 감히 저항할 생각조차 하지못한  메디아의 말에 수긍을  수 밖에 없었다. 거부 반응은 신입생들 중  누구에게서도 보이지 않았다.

짝짝짝.

이번에는 세렌이가장 먼저 박수를 치기 시작했다. 메디아에게 홀린  멍하니 단상을 바라보고 있던 신입생들도 퍼뜩 정신을 차리고는 박수를 치기 시작했다.

우레와 같은 박수소리가 대운동장을 울렸다.


황가가 내보인 모범사례로 후대에 전해져, 언젠가 입학하게 될 황가의 핏줄이 소감문에 골머리를 싸매게 만든 전설적인 시간이, 지금 막을 내렸다.
한참동안이나 박수는 그칠 생각이 없어 보였다.


[친애하는 여러분, 저는 부족한 몸으로 환영 연설을 하게 된 마법과의 교수,  로블랑 입니다······.]

메디아와 세렌이 자리로 돌아오자, 뒷쪽에 앉아있던 모든 이들의 시선이 그리로 쏠렸다. 하비셜의 교수가 낭독하고 있는 환영 연설은 그닥 귀에 들어오지도 않는 모양이었다. 하긴, 그렇게나 카리스마 넘치는 발표를 들었던 학생들이 저런 상투적인 연설에 귀를 기울일까 싶긴 했다.

사실 연설의 내용이 그리 나쁜 건 아니었다. 학생들을 염려하고, 나아가 하비셜에서의 생활을 축복하는 내용이 담겨있는, 오히려 멋지다면 멋진 연설이었다.
하지만 그 전에 단상에 섰던 이들이 너무나도 이목을 끌어가버린 탓에, 교수님의 연설은 상대적으로 지루해보였다. 그것도 꽤나 많이.
상대가 나빴어.

고개를 저으며 교수님께 애도의 시선을 보냈다. 그와 동시에 발표를 마친 메디아가 나의 옆자리에 앉았다.


"수고하셨어요, 메디아!"
"고마워요, 위즈."


메디아가 싱긋 웃으면서 내 인사에 답했다. 그리고 그 뒤를 따라 온 세렌은 멍한 표정을 짓다, 문득 메디아의 자리를 보고 미간을 좁혔다.


"······메디아 리베른. 그 자리는 분명 내가 앉았던 자리였을텐데."
"하비셜의 마법의자에 주인이 있던가요?"
"비, 비겁하다. 정론을 내세우다니······!"

세렌이 분한 표정을 지으며 메디아의 옆에 앉았다. 그리고 한숨을 푸욱 내쉬며 내 쪽을 힐끔 바라보았다.
어미새를 잃은 새끼 참새의 눈빛이 느껴졌다.

저런 눈빛을 받았는데 움직이지 않을 수가 없었다.


"메디아. 자리 바꿀까요?"
"······그 정도라면, 양보하도록 할까요."
"그, 그런가!"


세렌의 표정이  밝아졌다. 보는 내가 다 행복할 정도였다.
다만. 왠지 모르게 내 오른쪽에 앉아있던 하스타가 쩌적 하고 굳어버렸지만.
별  없겠지. 나는 고개를 으쓱 하며 메디아와 자리를 바꿔 한 칸 왼쪽으로 몸을 옮겼다.


자리를 옮기자, 세렌이 나의 귀에얼굴을 가까이 대었다. 그리고 속삭였다.

"······혹시, 이상했나?"
"뭐가요?"
"내 소감 발표말이다."
"하나도 안 이상했어요. 오히려 멋있었다구요, 세렌!"
"그렇지만······ 리베른의 황녀는  소감을 서툴다고 표현했다."


아.
그러고 보면 그런 부분이 있었던가.

내가 살짝 놀라서 세렌을 바라보자, 세렌은 울상을 짓고 있었다.


"말 재주가 없어서 아바마마와 어마마마의 도움을 받아 작성한 소감문이었는데······ 솔직히 그마저도 제대로 읽지 못했다."

세렌이 고백하듯 말했다. 나는 세렌이 떨렸던 건가 싶어 '긴장이라도 하셨던 거에요?' 라고 물었지만, 세렌은 고개를 저었다.

"그럼 왜 제대로 못 읽으셨어요?"
"······소감문을 읽다 보니, 하비셜에서의 생활이 기대가 되어서 가슴이 조금 벅차올랐다. 그래서 소감문을 제대로 읽지 못했어······. 으, 기껏 두 분이 나를 위해 바쁜 와중에도 펜을들어주셨는데, 나는 그마저도 제대로 읽어내지 못했다······. 메디아 리베른에 비하면 형편없는 소감이었어."

그렇구나.
이거 참. 우리 황녀님 순수하기도 하셔라.

"······왜 그대는 지금 꽃을 피우는 거지?"
"아하하, 그러게요."
"그대마저 날 놀리는건가······."
"그건 제 목숨에 맹세코 절대로 아닙니다!"
"모, 목숨까지 걸 필요는 없다!"

사실 목숨보다  한것도  수 있는걸요, 세렌.
헤실헤실 웃으며, 나는 황녀님의 어쩔 줄 몰라하는 모습을 바라보며 하얀 꽃을 피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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