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화 〉3. 입학 (4)
관현악단의 연주가 대운동장을 휘감았다.
교가를 연주했던 관현악단은 대운동장을 둘러싼 언덕 위에 자리를 잡고 있었다. 교가를 연주할 때와 같은 인원이었다.
백합황녀에서 펄스레이트는 그다지 자세히 묘사되어있지 않았다. 백합 황녀에서 서술된 펄스레이트에 관한 정보는 단 두가지. 첫 번째는 펄스레이트가 가지는의의에 대한 설명이었고, 두 번째는 펄스레이트에 관한 세렌의 감상이었다.
그래서 나는 펄스레이트의 내용을 잘 알지 못한다. 하지만 그것을 보며 세렌이 느꼈던 감상만큼은 알고 있었다.
'내가 알던 세계가 부서지고, 그 자리를 빛과 음악과 마법이 대신했다'.
백합황녀에서 펄스레이트를 본 세렌의 감상은 그 한 줄밖에 서술되있지 않았다. 하지만 그 문장에는 세렌이 느꼈던 충격과, 아름다움과, 두근거림이 절실히 느껴졌다.
그런 광경을 눈 앞에서 볼 수 있는 것이다.
나는 생각을 그만두기로 했다. 어차피 잘 굴러가지도 않는 머리로 잡 생각을 해 봤자, 감상에 방해가 될 것 같았다.
그저, 눈 앞의 비현실적인 장관에 눈을 맡기고, 다른 생각을 하지 않기로 했다.
현이 튕기는 소리가 거칠게 요동쳤다.
퉁, 퉁, 퉁, 퉁. 퉁.
네 갈래로 갈라진 모양의 현악기는 한 음만을반복적으로 연주하며, 그 간격을 점점 좁혀나간다. 현을 튕기는 소리가 점점 빨라져갈 수록, 분위기는 고조되고, 그와 동시에 하비셜 본관에서 붉은 빛을 띄는 마차 하나가 허공을 가르며 튀어나온다.
마차는 화염이 이글거리는 지붕을 가지고 있었다. 마차의 앞에서 고삐를 맨 두 필의 말은 태양의 빛줄기를 엮여 만들어 낸 듯 한 갈기를 휘날리며 허공을 딛어 마차를 끌고 있었다.
"······붉은 용의 태양마차."
누군가가 중얼거렸다. 그의 말대로, 마차는 태양을 이끌고 달리는 것 처럼 붉은 빛을 내뿜고 있었다.
마차의 마부석에는 붉은 머리의 남자가 타고 있었다. 그의 양 어깨 너머에는 날개가 그 위용을드러내고 있었는데,펼쳐진 날개의 넓이는 마차를 전부 가려버릴 정도로 컸다.
태양마차가 신입생들의 머리 위를 달리며 불의 궤적을 남겼다. 마차바퀴의 궤적을 따라 남겨진 불씨는 신입생들에게 닿아 푸른 빛을 내며 사라졌다.
땅에 일렁이던 푸른 빛이 일순간 모든 것을 집어삼키려는 듯 거세게 빛났다. 그러더니 하늘이 짙푸른 마력으로 뒤덮였다.
검푸른 하늘에 태양마차의 붉은 빛을 집어삼키려는 창염이 일었다.
마차가 멈추고 남자가 마차 위에 올라서자, 태양마차를 두르고 있던 화염이 푸른 기운에 맞서기 시작했다. 푸른 기운에게 잠식당하려던 하늘이 노을지듯 아스러이 빛났다.
"붉은 용 셰나브의 이야기네요."
메디아가 감탄하며 짙푸른 마력의 근원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푸른 기운의 근원에는 얼어붙을 것 만 같은 차가운 눈을 가진 무언가가 자리잡고 있었다. 푸른 기운에 가려져 제대로 보이지는 않았지만, 인간의 몸에 은빛 비늘이 돋아난 듯 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은빛 비늘에 푸른 불꽃이 비쳐, 서늘한 빛을 발했다.
"푸른 악마구나. "
세렌이 감탄하며 중얼거렸다.
단순한 호칭이었지만, 수긍할 수 있었다.
푸른 불꽃을 두른 채, 은빛 비늘로 중무장한 팔을 뻗어 태양마차를 노리는 그 모습은, 충분히 악마라고 부를 만 한 모습이었다.
환영이라고 인식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푸른 악마가 내보이는 위압감은 온 몸이 저릿저릿해질 정도로 강렬했다. 수천 갈래로 뻗어나간 푸른 불꽃이 태양마차를 덮쳤을 때에는 순간 식은땀마저 흘렀다.
음악이 고조되었다. 붉은 기운과 푸른 기운은 하늘의 정가운데서 격돌해 찬란한 황혼빛의 잔불로 하늘을 수놓았다. 푸른 기운 아래에 있는 땅에서는 수없이 많은 마수의 군단이 몰려들었다. 마수의 군단은 저항하는 태양빛을 몰아내고 있었다.
결국 태양마차가 그 빛을 잃고 마수들의 한가운데에 처박히고 말았다. 그 중심으로 거대한 불꽃의 폭발이 일어났다. 불기둥의 환영이 치솟은 곳 주변의 신입생들이 비명을 질렀다. 그 주위를 마수 군단의 환영이 둘러쌌다.
그 때였다. 이때까지 날개를 펼친채 검을 세워두기만 하던 남자가 힘을 잃은 마차를 밟고 올라 거대한 날개를 펼쳐 하늘을 부유했다. 그의 날개 뒤에 붉은 고리가 생겨, 하늘을 잠식해가던 푸른 기운을 몰아내기 시작했다.
[나는 셰나브 룽. 인간을 수호하고자 용이기를 버린 자.]
일순간 음악이 멈췄다. 그리고 그 자리를 낮고 굵은 목소리가 대신 채웠다.
[푸른 눈의 악마여. 이제 결판을 내도록 하자.]
남자가 자신의 양 날개를 크게 펼치곤 한 차례 포효했다. 대운동장에서 웅성이던 모든 소리를 한 순간에 제압한 굉포였다.
그와 함께 남자의 모습이 변했다. 거대한 날개에 걸맞는 몸으로 변화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붉은 머리카락은 흩날리는 갈기가 되었고, 근육질 팔은 비늘로 뒤덮였다.
붉은 남자는 그렇게 용의 모습으로 변했다.
그리고 푸른 악마를 향해 날아올랐다.
푸른 악마는 용의 사방을 향해 침식을 위한 손아귀를 뻗어왔다. 하지만 빈번히 용의 화염에 튕겨져나가 바스라질 뿐이었다.
푸른 불을 붉은 불이 뚫어내었다.용이 지나간 자리에 보랏빛 은하수가 남겨졌다.
발톱으로 푸른 불을 찢고, 이빨로 몰려드는 마수를 물어뜯으며, 용은 악마에게로 다가갔다. 날갯짓 한 번에 바람이 휘몰아쳐 땅이 갈라졌고, 숨결 한 번에 대기가 찢어지며 굉음을 내뱉었다.
마침내 용의 발톱이 악마의 가슴에 닿았다.
악마의 비늘에 균열이 일며, 악마를 감싸던 짙은 마기가 고통에 날뛰었다.
균열이 일그러지더니 하얀 불꽃이 그들을 중심으로 피어올랐다. 하얀 불꽃의 빛은 푸른 기운도, 붉은 기운도한 순간에 뒤덮으며 결국 온 하늘을 뒤덮었다.
그리고, 눈을 멀게 할 것만 같은 강한 빛이 점멸했다.
하늘이 푸르게 되돌아왔다.
"예쁘다······."
하스타가 쉰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 감상에 도저히 동의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리고 이 심정은 자리에 위치한 모든 사람이 공감할 것이었다.
아름다웠다. 찬란했다. 지금까지 보고 느꼈던 것과 몇 차원이나 다른 광경이라, 도저히 비유할만한 것을 찾을 수가 없었다.
파란 하늘에 아직도 환영이 남아있는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잠에서 깨어났음에도 아직 꿈에 취해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런 나를 깨운 것은 사회자의 안내음성이었다.
[지금부터 하비셜 본관, 기록하는 도서관에 입장하겠습니다. 신입생 여러분은 질서정연하게 하늘계단을 올라주시기 바랍니다.]
안내음성이 끝나자, 신입생과 하비셜 본관 사이에 서 있던 단상이 연기처럼 흩어졌다. 그리고 그곳에 단상을 대신하는 반투명한 계단이 생겨났다.
하늘계단이라는 이름대로였다. 대기로 만든 유리같았다. 영혼을 빼앗길 것 같았던 광경을 목격한 신입생들은 이어지는 장관에신나 서로서로 웃음꽃을 피우며 하늘계단을 오르기 시작했다.
줄의 끝에 서 있던 우리는 가장 마지막에 하늘계단을 올랐다. 통, 통. 하늘계단을 오르는 데에는 어떤 힘도 필요하지 않았다. 계단이 등을 밀어주는 것 같은 편안함이 느껴졌다. 이런 계단이 있다면 에스컬레이터같은 건 필요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늘계단 끝에는 하비셜 본관의 정문이 서 있었다.
2층 높이로 열려있는 본관의 정문이 우리를 맞이했다. 그리고 그 안에선 거센 환성이 태풍이 불어닥친 바닷가 마냥 시끄럽게 몰아치고 있었다.
하비셜 본관의 1층부터 3층까지는 거대한 강당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3층과 2층엔 1층의 강당을 내려다볼 수 있는 수만의 좌석이 놓여 있었고, 3층까지 뚫려있는 대강당의 주위에는 빈 좌석들이 널널하게 마련되어 있었다.
[분과식을 시작합니다.]
그리고 안내음성이 나오자, 나는 움찔 몸을 떨며 앞을 바라보았다.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일전의 즐거웠던 모습들은 사라진 채, 긴장이 천 명 가까이 되는 신입생들 사이에서 스멀스멀 기어나오기 시작했다.
"분과식이라."
세렌이 내 쪽을 힐끔 보며 중얼거렸다. 하지만 나는 세렌이 어째서 그런 시선을 보내왔는지를 생각할 수 없었다. 정확히는 그럴 겨를이 없었다고 하는 편이 맞았다. 분과식에 대한 것을 떠올리는데에 급급했기 때문이었다.
분과식이라 함은 하비셜에서 다니게 될 학과를 나누는 의식이다.
하비셜에는 총 다섯 개의 거대 학과가 있다.
마법 이론과 그 응용을 배우는 마법과.
온갖 장병기를 활용한 무술과 전쟁 학문을 배우는 무예과.
식물과 동물, 그리고 대륙의 온갖 기상천외한 기후를 연구하는 자연과.
거대한 구조물부터 작은 도구까지, 인공물을 제작하는 원리와 그 방법에 대해서 배우는 공학과.
그리고, 특별한 재능을 가진 이들이 선발되는 특수과.
하비셜에 다니는 학생은 각각 주 학과 하나와 부 학과 하나를 다니게 된다.
다만, 자신이 다닐 학과는 자의가 아닌, 펄스레이트 내에서 즉석으로 행해지는 재능 판별에 의해 결정된다. 3학년에 다시 한 번 결정하게 되는 세부학과 선택은 자의로 선택할 수 있지만, 처음 결정되는 학과만큼은 자의로 선택할 수가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대체 어떤 방식으로 학생들의 재능을 판별하는가, 하고 묻는다면 이렇게 말할 수 있다.
현인과의 면담을 통해서 재능이 측정된다고.
[라이하빗 케런트 님 이십니다.]
라이하빗 케런트.
700여년 전, 영웅인 세오 리베른과 함께 대악마를 토벌했다고 알려진 세 현인중 하나이자, 하비셜 최초의 스승.
미묘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두 제국 사이에서 하비셜이 그 기능을 유지할 수 있는 가장 큰 이유인 그가, 신입생들의 앞에 모습을 드러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