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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7화 〉3. 입학 (5) (17/86)



〈 17화 〉3. 입학 (5)

신입생들이 마른 침을 삼키며 강당에 자리를 잡았다.


사방에서 환호를 보내는 선배들의 모습에 기가 죽은 것도 있지만, 강당의 한 가운데에 모습을 드러낸 남자, 라이하빗 케런트에게 시선을 빼앗겼기 때문이기도 했다.

라이하빗은 이 세계에서  제국의 황제만큼이나 강한 영향력을 가진 인물이라고 한다. 건국신화의 주요 등장인물이었다고 하던가. 나이는 700살을 넘었다고 하니, 그야말로 살아있는 역사라고 할 수 있다.

이 세계의 사람들에게는 아이돌 같은 존재이며, 백합황녀에도 간간히 얼굴을 비추었던 인물.
뭐, 나름 대단한 사람이긴 한데······ 솔직히 나는 그에게 별 관심이 없었다. 백합황녀를 읽을 때도 그랬고, 지금도 그랬다.

왜냐고?


남자잖아.

백합 소설에서 남캐에 누가 관심을 가져?

[그럼 분과식을 시작하도록 하겠습니다. 분과식은 본관애 입장한 순서대로 진행합니다. 데네스 루드 에이트, 아우슬레반 글라우스 사할!]

분과식이 시작되었다. 사실 백합황녀에서 분과식은 지나가듯 서술된 것이 전부였다. 두 황녀님의 학과와 다른 조연 몇몇의 학과를 소개할 뿐, 그 과정은 자세히 나오지 않았던 것이다.


 라이하빗이라는 남자는 어떻게 학생들의 재능을 판별하는 걸까.
 방법만큼은 내 눈으로 직접 보고 싶었다.

 앞에서 대기하고 있던 두 소년이 앞으로 걸어나갔다. 그리고 마침내 그들은 살짝 긴장한 모습으로 라이하빗의 앞에 섰고, 얼마 지나지 않아 라이하빗은 입을 열었다.

질문이라도 던지려나 싶었다. 간단한 시험을치루려나 싶기도 했고, 마법을 부리려나 하는 생각도 했다.


[데네스 루드 에이트. 특수과, 마법과.]
[아우슬레반 글라우스 사할. 특수과, 공학과.]


하지만, 라이하빗이 입에 담은 전혀 예상치 못한 말에, 나는 귀를 의심했다.

몇 초정도가 지난거지? 3초? 아니, 2초?

학과를 배정하는 데에 걸린 시간이 너무 짧았다. 영국에 있는 모 마법학교에서도  분은 걸리는 배정을, 이렇게 빨리 끝낼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그냥 스윽 한 번 훑어보고 과를 정한 수준이었다. 대화는 커녕, 재능조차 한 번 시험해보지도 않고, 저 남자는 곧바로 신입생의 학과를 정해버린 것이다


이상했다. 너무나도 이상한 일이었다. 학과를 정하는 건 고등학생에게도 힘든 일이었다. 미래와 직결되는 학과를 저렇게 쉽게 결정해버린다니, 내 머리로는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았다.

"······학과를 정하는 시간이 너무 짧아요."

나는 살짝 눈살을 찌푸리며 중얼거렸다. 그러자 메디아는 나를 보고 살짝 놀라더니,  머리카락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현인이 정해주시는 일이랍니다. 위즈는 그게 마음에 들지 않는 건가요?"

나는 입술을 부루퉁히 내민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리 현인이라고 치켜세워진 사람이라고 해도, 나에게는 백합황녀의 조연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그런 별 관심도 없는 사람이 저렇게 멋대로 사람의 학과를 정해버린다는게 마음에 들지 않았다. 라이하빗의 모습이 독선적으로 나를 다그치던 누군가와 겹쳐보였기 때문이었다.

고등학교 시절. 내가 지원할 대학교를 멋대로 정해버린 아버지.

조금 짜증나는 기억에 볼을 살짝 부풀리고 있는 가운데, 학생들의 학과가 신속하게 정해지고 있었다. 라이하빗은 거의 눈이 마주치자마자 그들의 학과를 정했고, 그에게서 학과를 배정받은 신입생들은 1층 가장자리에 마련되어있는 자리에 앉았다.

그런데  가지 신기했던 점은, 신입생들 중 누구도 라이하빗의 학과 배정에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근심어린 표정이라곤 하나도 없이, 하나같이 생글생글 웃고 있었다.

어떻게 저럴수가 있나 싶었다. 사람을 스윽 보고 판단을 내리다니, 마법이라도 정도가 있었다.


······아. 혹시 다른 사람의 상태창이 보이는 건가?

"상태창."
"삼태창? 창의 종류인가? 내가 모르는 창이 있다니······!"
"아, 아무것도 아니에요."

혹여나 하는 마음에 그 이름을 입에 담아보기도 했지만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왠지 모를 세렌의 초롱초롱한 눈빛만 받을 뿐이었다.
상태창은 아니다. 애초에 상태창일 리가 없었다. 라이하빗은  한번도 허공에 눈길을 주지 않았다. 신입생과 라이하빗이 마주한 순간은 불과 몇 초 뿐이었지만,  때마다 라이하빗의 시선은 항상 신입생들을 향해 있었던 것이다.

[제윌르 보르진 메텔로드. 무예과, 공학과.]


마침내 앞 줄에 있던 신입생들마저 학과를 배정받았다. 이제 남은 사람은 세렌과 메디아, 하스타, 그리고  뿐이었다.

우리 중 가장 먼저 학과를 배정받을 사람은 세렌이었다.

[위즈 플라우 율릿!]


"어?"

어라, 세렌이 아니라나였네.


"그런가. 황녀는 특별취급을 하겠다는건가."
"······저, 그런 특별취급은 좋아하지 않아요."
"동의한다만······ 아니, 어떻게 보면 내겐 좋은 일일수도 있겠어."


세렌이 나를 힐끔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미소를 지으며내 등을 살짝 밀었다.


"그럼, 배정이 끝난 뒤에 보도록 하자, 위즈."
"다녀오겠습니다!"


나는 손을  차례 흔들며 대강당 중앙의 라이하빗을 향해 총총총 달려나갔다.


사실  머릿속은 그닥 올바르지 않은 생각으로 가득  있었다. 솔직히 말하면, 라이하빗이 어떤 학과를 지정해주든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클레임을  생각이었다.
 내 학과를 라이하빗이 멋대로 정하느냐고 따져묻고 싶었다.


자신이 가고싶어 하는 학과를 가게 해 주면 안되냐고 말이다.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라이하빗의 앞에 섰다. 그리고 라이하빗의 대답을 기다렸다.


자, 학과를 지정할테면 해 보시지.

나는 눈을 감았다. 그리고 3초의 시간을 세었다.

3. 2. 1.


라이하빗은 입을 열지 않았다.

"······어?"


나도 모르게 얼빠진 소리를 내며 눈을 떴다. 그 곳에는 라이하빗이 온화한 미소를 지으며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학과를 정하는 데에 3초 이상을 쓰지 않았던 그가, 입을 다문 채 나를 바라보고 있었던 것이다.

그제서야 나는 라이하빗의 모습을 제대로 눈에 담을 수 있었다. 돋아나는 새싹처럼 푸르른 연둣빛 머리카락이 발목까지 내려와 있었고, 반짝이는 녹색 눈은 끝을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깊었다. 얼핏 보면 아름다운 여인처럼 보이기도 하는 얼굴은 잡티 하나 없이 맑았고, 입술은 부드럽고 완연한 호선을 그리고 있었다.


······아름다운 사람이었다.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남자를 보고 아름답다고 생각한 건 맹세코 이번이 처음이었다.


멍하니 그를 바라보고 있던 나는 문득 이상함을 느끼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시끄러웠던 대강당의 소음이 멎어있었기 때문이었다.

아니, 자세히 보니소음만 멈춰있는 것이 아니었다. 3층도, 2층도, 1층도. 먼저 배정되어 자리에 앉아있던 신입생도,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는 황녀님들도, 모조리 움직임을 멈춘 상태였다.

"이, 이게 대체 무슨······?"
"흐르던 시간을 잠시 멈춘 겁니다."


라이하빗의 목소리가적막이 감돌던 공간을 가벼이 매만지고는 사라졌다.  목소리에 나는 다시 라이하빗을 바라보았다.


"하비셜에 온 걸 환영해요, 율릿 양. 저는 하비셜의 연구자, 라이하빗 케런트라고 합니다."

살짝 고개를 숙이며, 라이하빗은 따뜻한 미소를 내게 보냈다.



나는 한참동안이나 말문이 막혀 있었다. 그가 학과를 정해주면 고개를 저을 생각만 했지, 설마 시간이 멈춰버릴 것이라고는 단 한 번도 생각을 해 본적이 없었다.

"······시간은 언제 원래대로 흘러가요?"

어렵사리 꺼낸 질문이었다. 내 질문에 라이하빗은 살짝 놀라 나를 바라보았고, 이내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

"율릿 양의 학과를 정하고 나면 다시 흘러갈 거에요."
"······학과요?"
"그럼요. 학과를 정하는 일은 신입생들에게 있어, 평생을 걸어갈 길을 안내해주는 것과 같으니까요."
"얼마나 걸릴까요?"
"그건 율릿 양의 학과가 정해진 후에야 알 수 있을 것 같군요."

그러더니 라이하빗은 허공에 다섯 개의 원을 그렸다. 마법과, 무예과, 자연과, 공학과, 특수과.


"다섯 개의 학과중 원하는 학과를 골라주세요. 학과에대해 잘 알지 못하겠다면 제게 무엇이든 물어보시구요."

라이하빗이 친절하게 말했다. 그러자 나는 라이하빗에게 따지려고 했던 불순한 마음이 눈녹듯 사라지는 것을 느꼈고, 오히려 미안해지기 시작했다.

"잘 생각해요, 율릿 양. 저는 언제까지나 율릿 양을 기다릴테니까요."


라이하빗의 얼굴은 굉장한 동안이었다. 하지만 그가 입에 담는 말은 친손녀를 귀여워하는 할아버지만큼이나 인자했다.

"······얼마나 기다려주실 거에요?"


라이하빗에게 고개를 숙인 채 물었다. 그러자 라이하빗은 별 거 아니라는 식으로 내 물음에 대답했다.


"율릿 양. 시간에 대해서는 걱정할필요 없답니다. 이번 신입생들 중에서는 학과를 정하는데 3일이 걸린 학생도 있었으니까요."
"······3, 3일이요?!"

"그래요. 그러니 마음 편안히 가져요. 아, 출출하시다면 샌드위치를 만들어 드리죠. 나름 자신있답니다."

그제서야 나는 라이하빗이 신입생들의 학과를 어떻게 그리 빨리 정했는지, 그리고 신입생들이그의 결정에 단 한번도 불만을 표시하지 않았는지에 대한 이유를 알게 되었다.


라이하빗은 시간을 멈추고 신입생과 함께 학과를 선택했던 것이다.


그것도, 무려 천여 명의 사람들을말이다.

"라이하빗 님."
"무슨 일 있나요, 위즈?"
"당신이 보기에, 저는 어떤 학과를 가야 할 것 같아요?"


나는 질문을 입에 담았다. 그러자 라이하빗은 나를 잠시 바라보더니, 작은 미소를 지으며  가지의 원을 내 앞에 끌어놓았다.


마법과와 자연과, 그리고 공학과.

특수과는 그 안에 없었다.

입맛이 썼다. 왜냐하면, 백합황녀에서 나온 황녀님들의 주 학과는 다름아닌 특수과였기 때문이었다. 혹시나 백합을 피우는 마법을 내세워 특수과에 들어갈 수 있을까 싶었지만, 역시 그것만으로는 특수과에 들어가기 힘든 모양이었다.

"······특수과는 못 가는 건가요?"
"특수과의 설립 목적을 생각하면······ 음. 율릿 양에게 추천드리고 싶지는 않네요."


라이하빗이 고개를 저었다.
그런가. 뭐, 그렇다면 어쩔 수 없지.


"마법과와 공학과. 그렇게 할게요, 라이하빗."
"그렇게 빨리 정해도 후회하지 않겠어요, 율릿 양?"
"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뭐. 황녀님들과 같은 과가 아니어도, 친하게 지낼 수는 있을 테니까.

긍정적으로 생각하기로 했다.

"하비셜에서의 생활이 누구보다 아름답기를 빕니다, 율릿 양."
"고마워요, 라이하빗 님."


[위즈 플라우 율릿. 마법과, 공학과!]

정지했던 시간이 다시 흐르기 시작하고, 라이하빗의 목소리가 대강당에서 메아리쳤다.


그래. 내  학과는 이제 마법과이고,  학과는 공학과다.


그래도 메디아의  학과는 마법과일 테니까 만날 수 있겠지. 세렌은······ 수업 끝나고 만나러 가면 될 거고.


나는 마법과의 좌석에 앉은 후, 나를 복잡한 표정으로 바라보는 세렌과 메디아를 향해 작게 손을 흔들었다. 그리고  다음 차례인 하스타에게로 시선을옮겼다.


[하스타 비즈. 마법과, 자연과!]

다행히 하스타와 같은 과가 되었다. 기쁜 표정으로 내 옆에 쪼르르 달려오는 하스타와 손뼉을 마주쳤다.

"같은 과네요, 하스타!"
"응, 같은 과네······. 잘 부탁해, 위즈."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앞을 바라보았다.


두 명의 황녀가 라이하빗의 앞에 섰다.


그리고 잠시 후.
라이하빗은 놀라움에 가득 찬 미소와 함께, 그녀들의 학과를 입에 담았다.

[세리나 사할 바른. 마법과, 무예과!]
[메디아 벨라루스 리베른. 마법과, 공학과!]


그래. 두 황녀님들은 특수과에 갔다.
아쉬운 사실이다. 그래도 받아들이기로 했다.
만날 기회야 얼마든지 있고, 정 안되면 수업을 도망가서라도 만나러 가면 되니까······.


어, 잠깐만.

뭐라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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