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화 〉3. 입학 (7)
백합황녀의 전개가 완전히 틀어졌다.
예상치도 못한 일에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애초에 내 머리가 그렇게 좋은 편은 아니었지만, 지금은 실타래가 꼬인 재봉틀처럼 도통 굴러가지를 않았다.
좀 움직여 봐라, 이 쓸모없는 머리야.
고개를 도리도리 흔들어도 보고 뒤통수를 손바닥으로 몇 대 후려쳐 보기도 했지만, 여전히 머릿속은 복잡한 실타래처럼 엉켜있었다.
으, 이거 진짜 장식 아닌가.
"······위즈, 괜찮아?"
한심함이 도를 넘은 지능때문에 한숨을 내쉬고 있는데, 하스타가 옆에서 네 소매를 살짝 끌어당겼다. 동그란 갈색 눈이 걱정을 담은 채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괜찮아요. 아니, 괜찮지 않은가? 그러니까, 저는 그럭저럭 나쁘지 않은데 상황이 괜찮지를 못하다고 할까, 그게 그러니까요."
"안 괜찮아 보이는데······ 열은 없고."
하스타가 이마에 손을 가져다대었다. 따뜻한 손길에 엉켜있던 실타래가 조금 녹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천천히 머리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어라, 이거 좋네요?"
"응?"
"하스타. 이마에 손 대는거 계속해주실 수 있나요?"
"뭐, 그 정도야······."
하스타가 고개를 살며시 끄덕이면서도 알쏭달쏭한 표정을 지었다. 나로서는 다행인 일이었다. 하스타의 손길 덕분에 머리회전이 조금 나아졌기 때문이었다.
자, 이제 생각을 해보자.
나는 눈을 지긋이 감은 채 생각에 빠졌다. 백합황녀의 기억을 머릿속에서 찬찬히 끄집어내어, 지금의 상황과 비교를 시작했다.
지금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은, 두 황녀님의 학과가 바뀌었다는 것이다.
메디아는 특수과&마법과에서 마법과&공학과로.
세렌은 특수과&무예과에서 마법과&무예과로.
지금은 일단 어째서 이런 일이 일어났는지를 알아보아야 한다. 그리고 그러기 위해서는 분과식 이전에 어떤 일이 달라졌는지를 알아야 한다.
정리해보자.
일단, 세렌이 나와 친구가 되었고.
그 때문에 결계의 밖으로 잠깐동안 이탈했었고.
메디아가 나를 구해줬고.
세렌의 계획에 메디아가 찬동해서, 두 명 전부 신분을 감췄고.
두 명 다 멋진 연설을 했다.
그 정도가 다였다.
······초반부를 송두리채 뒤엎어버렸네.
"으으."
"머리아파? 교수님께 말씀드려볼까?"
"그게 아니에요······. 그냥, 머릿속이 조금 복잡해져서."
하스타가 납득하지 못하겠다는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내 이마에 대고있는 손을 떼지는 않았지만, 눈을 연신 힐끔거리며 내 안색을 살피고 있었다.
나는 고민에 빠졌다. 내가 저질러놓은 일이 한 두가지가 아니라서 황녀님들의 학과가 변한 이유를 도저히 특정할 수가 없었다. 아니, 그리고 솔직히, 메디아는 그렇다 치더라도 세렌의 학과는도무지 이해가 되지를 않았다.
세렌은 상당히 특별한 사람이었다. 백합황녀에서의 세렌은 영웅의 현신이라고 불릴 정도로 압도적인 전투센스를 가지고 있었으나, 마법에 관한 재능은 전무하다 싶을 정도로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런 그녀가 마법과에 온 것이다. 나는 아무리 머리를 굴려봐도 그 이유를 알아낼 수가 없었다.
그 때, 분과식을 마친 두 황녀가 라이하빗에게 예를 갖춰 인사했다. 그리고 나에게로 한 치의 망설임 없이 다가오기 시작했다.
"······오, 오신다."
하스타가 침을 꿀꺽 삼켰다. 나 역시 전전긍긍한 상태로 그녀들을 지켜보았다.
백합황녀의 전개가 바뀌는 것은 사실 언젠가 일어나야 할 일이었다. 백합황녀의 엔딩을 바꾸고 싶어하는 나로서는 반드시 일으켜야 했던 일이기도 했다.
하지만 적어도 마음의 준비는 하게 해줬어야지.
이렇게 브레이크 하나 없이 다이렉트로 전개를 바꿔버리면 책에 빙의한 메리트가 아예 사라져 버리잖아.
대체 이 전개를 좋아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를 판단할 수가 없었다. 이렇게 전개를 바꿔놓았으니 정략결혼 엔딩에서 멀어졌을거라고 행복회로를 돌려야 할지,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전개될 깜깜한 미래에 대한 절망회로를 돌려야 할지.
양 관자놀이에손을 댄 채 그런 고민을 하며 눈을 감고 있을 때였다.
"같은 과가 됐네요, 위즈."
"아, 메디아······?"
"앞으로 잘 부탁해요."
메디아가, 먹이를 사냥하는 뱀처럼 내 손을 옭아매었다.
그리고 너무나도 맑은 미소를 지으며, 나에게 수줍은 부탁을건네었다.
"네, 네."
머릿속이 하얗게 물들며,지금까지 했던 고민이 부질없어지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뭐가 어찌 됐든 아무래도 좋은 듯한, 그런 느낌.
그래. 원작과 어긋나는게 별 대수냐. 메디아와 세렌을 눈 앞에서 볼 수 있다는 것 만으로도 충분한데.
원작에 대한 생각은 이제 그만두자. 원작과 전개가 바뀐다고 해서 눈 앞의 메디아가 다른 사람으로 변해버리는 건 아니잖아?
생각을 정리한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다시 메디아를 바라보았다.
슬슬 놓을 때가 되지 않았나 싶었지만, 메디아는 도통 손을 떼려 하지 않았다. 무언가를 기다리는 눈치였다. 살짝 초조해보이는 것 같기도 했다.
"메디아?"
"조금만, 이러고 있고 싶어요."
메디아가 살짝 다급히 말했다. 내 손을 붙잡는 힘이 조금 강해졌다.
따뜻하고, 부드러웠다.
솔직히 기분 좋았다. 손을 놓으려고 한 것도 별 이유는 없었다. 그저 옆에서 멍하니 나를 바라보는 하스타의 시선이 조금 부끄러웠던 것 뿐이었다.
바로 그 때, 메디아가 긴장시켜놓았던 표정을 한 순간에 풀었다. 그리고 미소를 지으며 내 뒤로 손을 뻗어, 소중히 내 앞으로 가져왔다.
메디아의 새하얀 손 위에는 백합이 놓여 있었다. 또 내 뒤에서 백합이 피고 있는 모양이었다. 여섯 개의새하얀 꽃잎이 모여 이루고 있는 새하얀 백합.
메디아는 그런 백합을 양 손으로 소중히 감쌌다.
"······어?"
메디아가 손에 품은 백합의 색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가장자리가 붉게 물들더니, 이내 새하얗던 꽃잎이검붉은 색으로 뒤덮였다.
그리고, 이내 실체를 가진 브로치가 되어, 메디아의 손 안에서 그 빛을 발했다.
아름다웠다.
흰 백합만을 바라보던 나에게 그 색은 너무나도 강렬하게 다가왔다. 순수를 상징하는 흰 백합이 검붉게 물든 모습은 위험하면서도 매혹적인 마력을 뿜어내는 것 같았다.
얼핏 메디아의 모습이 연상되기도하는 아름다운 브로치. 흑요석과 루비를 적절히 섞은 듯한, 아름다운 보석으로 치장되어있는 검붉은 백합.
그 브로치에 시선을 빼앗긴 나에게 메디아가 손을 내밀었다.
"선물이에요."
"저, 저한테요?!"
내가 놀라 묻자, 메디아는 고개를 끄덕이며 브로치를 쥐고 있는 손을 살짝 들어올렸다. 어서 받아달라는 것 같은 몸짓이었다.
"왼쪽 가슴에 장식해주시면 기쁠거에요."
내가 브로치를 얼떨결에 받자, 메디아가 양 손을 가슴 앞에 모으고 미소지었다. 그녀의 붉은 눈이 기쁨을 안은채 나를 바라보았다.
못 버티겠다.
그런 시선은 반칙이었다.
겨우 브로치 하나를 다는 것 정도에 저런 시선이라니, 너무나도 내게 이득인 교환이었다.
나는 브로치를 뒤집었다. 그리고 옷자락에 매달기 위한 바늘을 세웠다.
바늘을 상의의 왼쪽 위에 찔러넣으려 할 때였다.
"······잠깐 기다려라, 위즈!"
메디아에 비해 조금 늦게 자리에 도착한 세렌이 다급히 나를 막았다. 그리고는 살짝 인상을 찌푸리고 있는 메디아에게 말했다.
"메디아, 리베른."
"무슨 일인가요, 세리나 바른?"
"브로치를 왼쪽 가슴에 다는 행위. 다른 이들은 모르더라도, 나는 알고 있어."
"뜻이라니요. 저는 잘 모르겠는걸요?"
메디아가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세렌은 메디아를 믿지 않는 눈치였다.
"무, 무슨 일이에요 세렌?"
"적어도 왼쪽 가슴에 브로치를 달아서는 안 된다, 위즈. 왼쪽 가슴에 단 브로치는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나타내니까."
"그런거에요?"
"그래. 먼 옛날 카마라 리베른이 약혼자에게 선물한 브로치에서 비롯된 풍습이다. 바른에서는 유명하지 않은 풍습이니, 그대는 모를 수 있어.
······리베리쉬인 그대라면 모를 리는 없겠지. 안 그런가, 메디아 리베른?"
내가 당황해 묻자, 세렌이 고개를 끄덕이며 날카로운 눈빛으로 메디아를 바라보았다. 그러자 메디아는 고개를 저었다.
"어머. 그랬었나요? 저는 몰랐었네요. 그저 제가 준 브로치를 위즈가 달아주었으면 하는 바램 뿐이었으니까요."
"설마 그걸 믿으라는 건가, 메디아 리베른."
"물론이에요. 위즈를 만나기 전 까지 저에게는 단 한 명의 친구도 없었지요. 물론, 그런 풍습을 제게 전해줄 친구도 없었답니다."
메디아가 고개를 숙였다. 세렌 역시 이 이상 추궁할 생각은 없는지 말을 멈췄다. 단지 의심스러운 시선을 메디아에게 보내며 미간을 좁혔을 뿐이었다.
문득, 세렌의 시선이 닿지 않는 사각에서 메디아가 아쉬운 듯 혀를 차고 있는 것같은 모습이 어렴풋이 보였다.
······음, 이 브로치는 주머니에 넣어놔야겠다. 왼쪽 가슴엔 달지 않더라도, 메디아가 준 선물이니까 소중히 여겨야지.
"그대는 이런 상황에서도 꽃을 피우는가······."
"네? 또 나왔어요?!"
"메디아 리베른의 선물이 그리도 기뻤던 모양이야. 으으, 나에게도 마법의 재능이 있었다면 그런 선물을 줄 수 있었을텐데."
세렌이 고개를 떨구고 분한 듯 주먹을 쥐었다.
아, 귀엽다. 당장이라도 안아주고 싶은 욕구가 물씬 솟아나는, 치명적인 귀여움이다.
그런 모습을 보여주신 것 만으로도 충분한 선물이에요, 세렌.
"위즈, 꽃 향기가 너무 진해······."
하스타가 어지러워하고 있었다.
젠장. 이 놈의 백합.
에잇, 에잇.
손으로 흩어보려 했지만 소용 없었다. 치워낸 그 자리를 새로운 백합이 채울 뿐이었다.
이젠 그냥 체념하고 적응하는게 빠를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