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3화 〉4. 루아 소크타리에스 (1)
푸른 머리카락을 가진 소녀가 그 방에 홀로 있었다.
이제는 완연하게 솟아오른 푸른 달빛 아래에, 그녀는 짙은 속눈썹을 내리깔며 나를 바라보았다.
날개뼈를 덮는 풍성한 머리카락이 연기처럼 피어나 있는 그녀의 모습은 옛날 이야기에 나올 법 한 공주님을 보는 것 같았다. 인형처럼 귀여운 얼굴도, 작고 가녀린 손도, 그 품에 안고 있는 동그란 곰 얼굴 인형도, 무엇 하나 어색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어울려 그 자체 만으로 하나의 동화를 형성해 내는 소녀였다.
그런 소녀를, 나는 우두커니 선 채로 바라볼 수 밖에 없었다. 내 쪽을 그윽히 바라보는 그녀의 신비한 표정이 나를 움직이지 못하게 얽매었기 때문이었다.
언뜻, 몽상에 빠진 표정.
그러면서도, 나에게서 눈을 떼려 하지 않는 아름다운 시선.
그녀의 새하얀 눈동자는 꿈을 꾸는 것 처럼 멍했다. 하지만 시선은 언제나 나에게 향해 있었다. 나와 그녀의 눈이 마주쳤다. 아니, 마주쳤다는 표현은 사실 부적절할지도 모른다. 나는 그녀의 눈동자를 바라보고 있었지만, 그녀는 나의 눈동자가 아닌, 더 깊은 무언가를 바라보고 있었으니까.
"당신은 어떤 사람이야?"
한참동안이나 소녀를 멍하니 바라보던 나는 소녀가 말을 걸고 나서야 퍼뜩 정신을 차렸다. 그리고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그 소녀는 환상도 귀신도 아니었다.
다만, 한발앞서 기숙사로 돌아가 있던 나의 룸메이트일 뿐 이었다.
하비셜의 생활구역, '리네스트'는 하비셜 서부에 위치해 있었다. 기숙사의 뒤편에서 시작되어, 체육관과 공원, 상점, 자습실, 심지어 수영장까지 구비되어 있는 리네스트는 페렐른을 뛰어넘는 어마어마한 크기를 자랑했다.
만 명을 훌쩍 넘기는 인원을 수용하는 시설인 만큼, 리네스트의 규모는 여느 도시 못지 않았다. 게다가 500여년이라는 세월동안 증축에 증축을 거듭한 도시의 구조는 굉장히 복잡해서, 리네스트 미로라고 이름 붙여도 될 정도였다.
······그래서 나는 길을 잃었다.
"세렌······ 메디아······ 하스타······."
힘없이 그리운 사람들의 이름을 되뇌어 보았지만, 시끌벅적한 사람들 사이에서 내 목소리는 마차에 깔린 새싹마냥 힘없이 바스라질 뿐이었다. 게다가 내 작은 키 때문에 주변 상황이 잘 파악되는 상태도 아니었다.
혼자 화장실에 갈 수 있다고 호언장담하는게 아니었다. 그냥 다 같이 가자는 하스타의 말을 따랐어야 했다. 괜히 오기에 젖어 혼자 화장실에 가겠다고 선언한 과거의 내가 원망스러워졌다.
솔직히 내 입장에서도 할 말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니었다. 화장실에서 돌아오는 길에 갑작스러운 퍼레이드행렬이 시작된 것이다. 공학과의 제작동아리라고 했던가. 아무튼 나는 그 퍼레이드 행렬에 등이 떠밀려 어디인지 모를 곳에 내동댕이쳐졌고, 그렇게 벌써 30분이 지났다.
해는 이미 지고, 푸른 달이 떠오른 상태였다. 비록 리네스트 곳곳에 켜져 있는 수많은 조명 덕에 어둡지는 않았지만 가을날씨라서 그런지 꽤나 쌀쌀했다.
내가 알고 있는 정보라면, 마법과 3동 411호라는, 내 기숙사의 번호 뿐이었다. 어떻게든 주변에 있는 사람들에게 말을 붙여보려고 시도하기도 했지만, 왁자지껄한 인파의 소음에 묻혀버리기 일쑤여서, 내 목소리는 누구에게도 닿지 않았다.
내 몸이 조금이라도 컸으면 그나마 나았을텐데.
한숨을 내쉬며 터덜터덜 인파 사이를 걸었다. 아무도 없는 상가 사이의 골목길도 걸어가고, 고함이 오고가는 운동장도 지나치고, 마침내 상가에까지 진입하게 되었다.
뭐라고 할까, 대학가의 먹자골목이 생각나는 풍경이었다. 천막으로 대충 가려진 상가의 안에서는 맛있는 냄새가 나고 있었고, 늦은 저녁임에도 곳곳에서 이야기꽃이 피어나고 있었다.
나는 멍하니 그 광경을 둘러보았다. 여기 학생들이 다니는 아카데미 아닌가, 하고 잠시 의문을 품어보았지만, 생각해보면 열 다섯살에 입학해서 6학년까지 다니는 하비셜의 특성상 이런 곳이 있을 만도 했다.
"대체 왜! 벌써 내가 졸업반이냐고오······."
그런데, 웅성거리는 사람들의 틈 사이에서 어디선가 들어 본 목소리가 불현듯 들려왔다. 나는 홀린 듯 그 목소리의 진원지를 찾아갔고─
얼굴을 붉히며 푸념하는, 익숙한 얼굴을 발견할 수 있었다.
붉은 단발 머리카락과 허공에 둥둥 떠다니는 외안경을 가진 여성.
"프레데리카 선생님!"
하비셜로 오기 전에 나를 가르쳤던 사람.
바로 프레데리카였다.
"······뭐야······ 어, 위즈?"
술냄새가 물씬 풍기는 프레데리카가 풀린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그러자 프레데리카의 맞은편에 앉아있던 여성이 나에게로 시선을 보내기 시작했다.
"어머, 귀여워라. 프렛, 아는 아이야?"
"어, 으응······. 내가 교습가서 만났던 아이인데. 왜 연회거리에 있지······?"
"그럼 신입생이네? 와아, 요즘 애들은 이렇게 귀엽나?"
굉장히 호의적인 반응이었다. 나는 갑작스러운 호의때문에 살짝 당황한 채로 프레데리카의 소매를 잡아당겼다. 프레데리카는 나의 손길에 힘없이 끌려가다가 몸의 균형이 살짝 흐트러지자 몸을 휘청거렸다. 그리고 이내 정신을 번쩍 차렸다.
"유, 율릿 양?! 여긴 어떻게 왔어요?!"
"그게, 길을 잃어서요······."
하하.
나는 뒷머리를 긁적이며 난처한 웃음을 지었다. 그러자 프레데리카가 멍하니 나를 바라보다, 테이블에 앉아있던 다른 사람들에게 말했다.
"율릿 양······. 미안, 미안해요. 나 너무 마셨나 봐. 에리, 네가 율릿 양 좀 봐 줘. 나 화장실 좀 다녀올게······."
"그래, 잘 갔다 와~"
프레데리카의 친구로 보이는 여성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선 나에게로 시선을 옮기더니, 얼굴을 가까이 들이대며 물었다.
"병아리 아가씨, 혹시 길 잃은거야?"
"네······. 혹시 마법과 3동이 어딘지 아세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여성은 눈을 크게 뜨더니 내 손을 잡으며 방실방실 웃기 시작했다.
"어머, 마법과 3동? 우리 병아리, 마법과였어?"
"네······."
"어머어머, 얘, 나도 마법과야! 마법과 6학년, 엘리제 바하!"
엘리제가 내 손을 위 아래로 크게 흔들었다. 그러고 보면 엘리제도 프레데리카 만큼은 아니어도 꽤나 취한 것 같았다.
"그래, 프렛이 교습갔던 아이라고?"
"네, 네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프렛이라, 아무래도 프레데리카의 애칭인 모양이었다.
"프렛은 좋겠다~ 나는 귀염성이라곤 하나도 없는 꼬맹이였는데. 이렇게 귀여운 아이를 교습하느라 얼마나 재밌었을까~"
"에헤헤······."
나는 불과 며칠 전의 기억을 떠올리며 쓰게 웃었다. 앨리스의 주입식 교육을 받아서 반쯤 정신이 나가있었지. 그런 나에게 어떻게든 교육을 시켜주었던 프레데리카가 새삼스레 대단하게 느껴졌다.
뭐, 그건 그거고.
"그런데요, 혹시 마법과 3동은······."
"아, 걱정 마. 어차피 프렛도 너무 마셔서 슬슬 돌아가야 했을 참이니까. 마차 잡아서 프렛 돌려보내는 김에 병아리도 언니랑 같이 돌아가자? 내 기숙사는 병아리 기숙사 바로 옆 건물이니까."
오.
좋은 사람이다.
"어머, 신입생이 벌써 마법도 쓸 줄 알아? 예쁘네~"
엘리제가 헤실헤실 웃으며 백합을 들어올렸다. 그리고 자신의 귀에살짝 꽂은 뒤 나에게 자랑하듯 고개를 돌려보았다.
"어때, 예뻐?"
"네, 네······."
뭐라고 할까.
내가 대학교에 처음 들어갔을 때 만났던 인싸선배랑 비슷한 느낌을 주는 사람이었다.
"으으······ 너어, 율릿 양한테 이상한 짓 하면 안된다아?"
"괜찮아 괜찮아, 이렇게 귀여운 병아리에게 뭘 하겠어?"
공학과 기숙사 앞. 엘리제가 손을 내저으며 마차에서 내리는 프레데리카를 배웅했다. 프레데리카는 그런 엘리제를 못미더운 눈으로 바라보다, 발걸음을 한 번 휘청인 후 헛구역질을 했다.
"욱······ 으, 나 들어간다아."
"그래그래, 내일 심화마석학때 보자?"
"수업듣기 싫다······."
프레데리카가 절레절레 고개를 내저으며 뒤돌아섰다. 그리고 잠시 멈칫 하다, 고개를 끼릭 돌리며 나에게 말했다.
"율릿 양도, 잘 들어가요······."
"네, 네!"
그런 몸상태로 굳이 인사해주실 필요는 없는데!
"프렛도참. 주량도 작은 애가 뭐 저리 술을 좋아하는지."
엘리제가 프레데리카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킬킬 웃었다. 그러더니 나를 바라본 후, 갑자기 머리를 쓰다듬기 시작했다.
"병아리~ 귀여운 병아리. 첫 후배가 생길때만 해도 그렇게 가슴이 두근거렸는데, 5년 후배가 들어와버렸네~"
기쁜 듯 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씁쓸함이 묻어나오는 말이었다. 나는 내 머리카락을 가볍게 쓰다듬는 손길에 몸을 맡기다, 문득 궁금한 점이 들어 엘리제에게 물었다.
"프레데리카 선생님은 공학과였어요?"
"응, 저래봬도 공학과에서는 수석이다~?"
"그, 그랬구나······."
어쩐지. 머리는 장식으로 달고다니는 나도 프레데리카의 설명만 들어보면 이해가 쏙쏙 되더라.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엘리제가 웃으며 기억을 회상하듯 눈을 감았다.
"응. 프렛은 수석 자리를 항상 놓친적이 없거든. 3학년때 처음 만났을 때만 해도 엄청 고지식하고 깐깐한 애였는데······ 뭐, 내가 사람만들었지."
큭큭 웃는 엘리제에게선 프레데리카를 향한 친애가 느껴졌다. 굉장히 친한 사이구나, 하고 생각하던 나는 문득 궁금증이 생겼다.
"프레데리카 선생님은 공학과였다면서요? 같은 수업을 들을 수가 있어요?"
"아, 3학년부터는 세부학과를 선택하는데, 마법과와 공학과 두 곳의 학생이 선택할 수 있는 세부학과가 있어. 마법공학과라고 하는데, 나랑 프렛이 그걸 같이 들었거든."
"오······."
마법공학이라.
뭔가 멋있어 보이는 이름이다.
"하여간, 그 때부터 친해졌지~ 아, 도착했다. 같이 내릴까?"
"옆 건물이라고 하지 않았어요, 엘리제 언니?"
"괜찮아~ 우리 귀여운 병아리 바래다주는 것 정도는 일도 아니거든."
엘리제가 웃으며 나를 떠밀었다. 나는 얼떨결에 마차에서 내리게 되었고, 엘리제는 마차삯을 지불한 후 나를 뒤따라 마차에서 내렸다.
그리고, 나는, 건물의 앞에서 나를 기다리던 한 소녀를 만나게 되었다.
"······메, 메디아?"
"위즈!"
메디아가 나를 발견하더니 나를 와락 안았다. 그리고는 다행이라는 듯 떨리는 한 숨을 내쉬었다.
"다행이에요······ 잃어버린 줄 알았어. 어디 갔었던 거에요? 반응을 찾아봐도 주변에 보이지를 않던데······."
"그게, 길을 잃어버려서 연회거리까지 간 것 같아요. 미안해요, 메디아. 기다렸어요?"
"그래요, 기다렸어요. 한참동안이나 모습이 보이질 않아서, 이곳 저곳 찾아보기도 하고······."
메디아가 나를 바라보다, 문득 생각이 났다는 듯 주머니에서 구슬 하나를 꺼냈다.
"오, 통신구슬."
"······그러고 보면, 당신은 누구시죠?"
통신구슬을 매만지던 메디아가 엘리제를 향해 질문을 던졌다. 낯선 사람에 대한 경계와, 나와 동행했다는 것에 대한 조금의 신뢰가 섞여있는 시선이었다. 엘리제는 그런 메디아에게 손을 흔들었다.
"엘리제 바하. 병아리가 길을 잃은 것 같길래 바래다주는 길인데. 너도 신입생이야?"
"······마법과 1학년, 메디아 리베른입니다. 위즈를 바래다주셔서 진심으로 감사드려요."
메디아가 자세를 고친 뒤 치맛자락을 들어올리며 인사했다.엘리제는 그 인사를 받고 잠시 멈칫 하다, 이내 너털웃음을 지으며 메디아의 어깨를 툭툭 쳤다.
"그래? 리베른 사람이라는거지? 여기서는 그런 거 잘 안따져~"
"아니요, 제 이름이─"
"뭐, 친구가 기다리고 있었으면 됐지. 위즈, 다음에 보자? 다음에 보면 꼭 인사해줘야해~?"
메디아의 정정에도 불구하고, 엘리제는 손을 흔들며 나에게 인사했다. 나도 손을 빙빙 흔들며 엘리제에게 인사했고, 그런 나를 본 엘리제는 낄낄거리며 말했다.
"꽃나무가 따로 없구만, 우리 병아리. 다음에는 꽃병아리라고 해야겠어······."
"꽃병아리······."
메디아가 나를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그리고 살짝 미소를 짓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혹시 꽃병아리라는 별명이 마음에든건가.
에이, 설마. 아니겠지.
고개를 흔들며 잡생각을 떨쳤다. 멀리에서 세렌과 하스타가 뛰어오는 것이 보였다.
날 찾고 있었던 걸까.
우와, 이거 너무 감동인데.
"······위즈. 다음에 또 미아가 되면, 꽃을 잔뜩 피워내도록 해요."
"네?"
"눈에 엄청 잘 띄네요."
그런 나를 메디아가 쓰다듬었다.
그리고 다시, 기숙사 방.
나는 하얀 눈을 가진 소녀에게 이름을 말했다.
"위즈 율릿이에요. 앞으로 잘 부탁드려요!"
"그렇구나······. 나는 루아 소크타리에스. 잘 부탁해, 따뜻한 사람."
그리고, 그녀가 나에게 말한 이름을 듣고,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루아 소크타리에스.
나는 그 이름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왜냐하면, 그 이름은 백합황녀에서 나온 첫 메인 빌런의 이름이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