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5화 〉4. 루아 소크타리에스 (3)
'사람은 커 봐야 아는 법이지.'
그 말은 어머니가 줄곧 입에 달고 사셨던 말이었다. 물론 어머니는 그 말 뒤에 항상 '네가 이렇게 클 줄 알았으면 진작에 다리 밑에 버리고 왔을걸?' 이라는 사족을 붙이곤 했지만, 어쨌든 꽤나 기억에 남는 교훈이었다.
루아를 보면서 문득 그 말이 떠오른 것은 그리 이상한 일이 아닐 것이다. 루아가 백합황녀에서 빌런으로 등장한 시기는 3학년 후반부. 지금으로부터 약 3년 정도 후의 일이었다.
그렇다면, 루아는 결국 빌런으로 각성하게 될까? 이렇게 순수하고 귀여운 아이가, 사람들 사이를 이간질시켜 싸움붙이고, 세렌과 메디아의 마음에 커다란 상처를 남기는, 그런 아이로 자라고 마는 걸까?
아니, 그건 모를 일이지. 백합황녀에서 일어났던 사건이 꼭 일어나리라는 법은 없으니까.
루아를 바라보았다. 순수한 백색 눈동자에서 호의를 담은 눈빛이 전해져왔다. 작고 가녀린 손은 백색 별을 소중히 쥐고 있었고, 푸른 머리카락은 별의 빛을 받아 화사하게 빛나고 있었다.
백합황녀에서의 루아는 결국 하비셜에서 퇴학당하고 만다. 그리고 비참한 신세로 전락하여 백합황녀에서 자취를 감춘다.
소설로 그 장면을 보았을 때는 통쾌한 기분이 들었었다. 세렌과 메디아의 적이었던 그녀가 몰락하는 것은 독자로서 상당히 기쁜 일이었으니까.
하지만, 빌런 역할을 맡아 백합황녀에 등장했던 캐릭터로서의 루아가 아닌, 순수한 미소를 짓고있는 루아 소크타리에스라는 소녀를 직접 마주한 나는, 더 이상 그 장면에서 통쾌함을 느낄 수 없었다.
통쾌함의 빈자리를 안타까움이 대신 채웠다. 이렇게나 순수한 소녀가 어째서 그런 차갑고 악독한 사람이 되었던 걸까. 어떤 일이 있었기에, 저런 미소를 짓던 아이가, '비릿한 웃음'밖에 지을 수 없는 사람이 되고 만 걸까.
나는 루아가 그렇게 되지 않았으면 했다. 만난지 하루밖에 되지 않은 사이였지만, 그렇게 생각했다.
오지랖일지도 모른다. 백합황녀의 전개에 어떤 악영향을 끼칠지도 알 수 없다.
하지만 나는 어느새 그녀의 결말이 행복하기를 바라고 있었다.
이 세계는, 내가 사랑해 마지않는 백합황녀의 세계였고─
루아는 그 세계 안에서 저렇게나 아름다운 미소를 짓고 있었으니까.
내가 사랑하는 세상에 행복한 사람이 늘어나길 바라는 것이, 그리 나쁜 소망은 아닐것이다.
나는 결심을 굳혔다. 그리고 루아에게 말했다.
"저도 위즈라고 불러줘요, 루아."
"······응, 기뻐, 위즈."
루아의 눈높이까지 올라간 별이 작은 별가루를 흩뿌리며 사라졌다.
그 뒤의 루아는 뺨에 희미한 홍조를 띄우며 싱그럽게 웃음짓고 있었다.
나의 결심이 헛되이지 않았다고 말해주는 것 같은, 그런 아름다운 미소였다.
······뭐 하여간, 그건 그거고.
"방금 그게 환상마법인가요?"
"응."
루아가 고개를 끄덕이며 곰인형을 품에 안았다. 푹신푹신해보여서 나도 안아보고 싶었다. 나중에 한 번 빌려달라고 해볼까.
아니, 이럴 때가 아니지. 젠장.
"쉬워요?"
"할 줄 아는 마법은 이거 뿐인걸."
루아가 곰인형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으음······ 뭐라도 물어봐야겠다.
"저는 환상마법을 써 본 적이 없어요. 루아, 환상마법은 어떻게 쓰는 거에요?"
"노래처럼 하면 돼."
"······네?"
"상상하고, 바라고, 마음을 담아."
루아가 눈을 감았다. 그리고 곰인형 위에 팔을 걸은 채 손을 다시 동그랗게 펼쳤다.
빛이 새어나오며 작은 별이 다시 모습을 드러내었다.
······뭐지. 저거 어떻게 하는거지.
"그렇지?"
"쉬운 것 처럼 말하셔도······."
뺨을 긁적이며 별을 살펴보았다. 따뜻한 빛을 내뿜는 별은 루아의 손 위에서 둥둥 떠 있었다. 나는 손가락을 가져다 대어보았다.
허공을 만지는 기분이었다. 역시 실체가 없는 환상마법이었다.
"상상력······ 염원력. 그리고 마력."
펼쳐져있는 교과서의 환영을 힐끗 살피며 마법의 삼요소를 입에 담았다. 백합황녀에서는 자세히 다루지 않은 개념이었다. 하긴, 메디아는 첫 입학부터 왠만한 교수 뺨치는 마법실력을 가지고 있는 괴물이었고, 세렌은 애초에 마법에 재능이 없었으니, 마법의 기초를 서술할 이유가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더욱 막막했다. 상상력이랑 염원력이라니. 마법을 쓰는데 그런 게 왜 필수요소로 들어가는지를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마법진이라던가, 써클이라던가. 내게 익숙한 개념은 이 곳에서는 통용되지 않는 모양이었다.
마력은 그래도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었다. 백합을 피워낼 때 마다 심장쪽에서 따뜻한 기운이 조금씩 빠져나가는 것을 여러번 느끼곤 했으니까. 루아가 말한 '마음을 담아'라는 것도, 결국 가슴에서 흘러나오는 이 마력을 담으라는 이야기일 것이었다.
하지만 상상력과 염원력만큼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상상하고 바라면 이루어진다? 뭐 우주의 기운이 굽어 살피기라도 하는건가?
"같이 해보자."
인상을 쓰며 별을 바라보고 있는데, 별안간 루아가 나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얼떨결에 루아의 손에 이끌린 나는 양 손을 접시처럼 모았다.
"또렷한 상상을 가지렴."
루아가 한 소절 노래를 불렀다. 그리고 나를 향해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마치 해보라는 듯 한 눈빛을 보냈다.
또렷한 상상. 또렷한 상상이라.
어, 음. 그러니까.
······백합?
하얀 꽃을 머릿속에 떠올리자, 마음속에서 따뜻한 마력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그렇게 빠져나온 마력은 내 몸을 한바퀴 감돈 후 손 위에 모여들었다. 하지만 아직 느낌만 있을 뿐이었고, 눈으로그 형상이 보이지는 않았다.
"간절한 마음으로, 소원을 바라렴."
다시 한 번 루아가 노래를 불렀다. 나는 노래의 가사대로 눈을 감은 채 꽃을 바랐다. 정확히는 백합황녀의 세계가 행복하게 유지되어, 새하얀 백합을 피워내기를 바랬다.
"네 마음을 채워넣으렴."
루아가 노래를 끝냈다. 그와 함께 나는 마음 속에 맴돌고 있던 마력을 손 위로 흘려보냈다.
그리고 눈을 뜨자, 나는 내 손 위에 새햐안 빛을 비추는 백합 한송이가 피어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정말 예뻐, 위즈."
루아가 백합을 바라보며 미소지었다. 나는 그런 루아와 손 안의 백합을 몇 번이나 번갈아 바라보았다.
마법이었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발동되는 마법이 아닌, 내가 원해서 만들어진 마법이었다.
이유모를 짜릿함이 등줄기를 훑고 지나갔다. 비록 가장 쉬운 환상마법이라고는 하나, 내 의지로 발현한 마법이었다. 잘 실감이 들지 않던 마법이라는 개념이 한 순간에 코 앞까지 다가와서, 순간 온 몸에 전율이 일었다.
평생, 어쩌면 다음 인생에도 잊지 못할······ 그런멋진 체험이었다.
"환상마법은 소모하는 마력이 가장 작습니다. 현실에 영향을 미치는 정도도 적구요. 그래서 저는 환상마법이 가장 쉬운 마법으로 평가받는다고 생각합니다."
"잘 했어요, 플롯 양."
토의가 끝나고 발표시간이 되었다. 학생들이 각기 다른 생각을 발표하고 있었다. 유고슬레인은 그들의 발표에 고개를 끄덕이기도, 때로는 감탄하기도 하며 종이에 무언가를 적어나갔다.
"위즈 양. 소크타리에스 양. 여러분의 생각은 어떤가요?"
이윽고 나와 루아의 차례가 되었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환상마법이 가장 간단한 마법인 이유는, 머리 속의 상상을 그대로 만들어내는 마법이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조금 더 구체적으로 설명할 수 있나요?"
"사람의 상상은 불완전해요. 마법의 삼요소는 상상력, 염원력, 그리고 마력. 상상력이 불완전하면 마법 역시 불완전해지죠. 하지만 환상마법은 상상을 그대로 나타내주니까, 현실하고 비슷하지 않더라도 성공할 수 있는거에요! 그래서 쉬운거구요."
"좋아요, 훌륭하네요!"
유고슬레인이 미소를 띄며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뿌듯한 마음으로 자리에 앉았다. 내가 생각해도 훌륭한 발표였다.
······사실 루아가 설명해 준 게 대부분이라, 내 생각은 거의 들어가있지 않았지만.
나는 루아를 돌아보았다. 루아는 계속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멋진 발표였다고 생각해."
"루아가 설명해준 걸발표한것 뿐이에요?"
"으응. 나였다면 잘 못 했을거야."
루아가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는 시선을 앞으로 돌리더니, 살짝 고개를 떨구었다.
그와 함께 순간적으로 뒷덜미가 싸늘해졌다. 느껴 본 적이 있는 시선 때문이었다.
그래. 허름한 차림으로 대운동장에 도착했을 때 느꼈던 감정들. 세렌의 손을 잡고서야 겨우 버텨낼 수 있었던, 무거운 중압감.
혐오와 경멸이 뒤섞인 악의적인 시선이었다.
온 몸에 소름이 돋았다. 내가 무슨 잘못을 한 게 있나 싶어 식은땀마저 흘렀다. 하지만 자세히 살펴보니, 그 시선들은 나를 향해있지 않았다.나를 목표로 하고 있지 않었다.
시선의 목적지는 다름아닌 루아였다.
적의를 담은 시선이 루아를 향하고 있었다.
어째서?
나는 당황한 나머지 주위를 둘러보았다. 발표를 한 사람은 나다. 방아쇠 역할을 한 것이 나의 발표였다면 적의는 나를 향해야 정상이었다.
그렇다면 발표가 문제가 아니다. 대체 뭐가 문제지? 발표를 하기 직전 뭔가 벌어진 일이 있었나?
생각해보자. 유고슬레인이 우리에게로 시선을 옮기고, 우리의 이름을 부른 다음에─
그 순간, 나는 한 소녀의 속삭임을 귀에 담을 수 있었다.
'배신자의 딸.'
속삭이는 듯 한 그녀의 목소리는 유난히 또렷하게 내 귀로 흘러들어왔다.
설명을 이어나가던 유고슬레인은 그 목소리를 듣지 못한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루아는 곰 인형을 꼭 껴안은 채 눈을 떨구고 있었다.
곰 인형을 껴안고 있는 루아의 팔이 조금 떨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