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27화 〉4. 루아 소크타리에스 (5) (27/86)



〈 27화 〉4. 루아 소크타리에스 (5)

점심시간이 거의 지나, 오후수업이 시작될 무렵.


"떨어지고 싶지 않아······."
"그래도 수업은 들어가아죠, 루아."
"위즈랑 있을래······."

나에게 달라붙어있는 루아를 도무지 떼어낼 수가 없었다.

루아는 이 교실. 나는  교실.
오후 수업은 루아와 다른 교실에서 들어야 했다.
그런데 루아가 도무지 떨어지려 하지를 않는다.

"······곧 수업 시작해요, 루아······."

 목에 팔을건 루아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귀여운 표정 지으면 내가 못 떼어낼 줄 알고.

이이익.


나는 루아를 밀어내었다. 더는 시간을 지체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실패했다.

잊고 있었다. 나에 비하면 루아는 평균적인 체격에 가깝다는 것을.
그리고, 힘은 체격에서 나온다는 것을.

"······혹시 위즈야?"

여전히 루아에게 붙잡힌 채 내 근력에 절망하고 있는데, 옆에서 나를 부르는 목소리가 들렸다.
익숙한목소리.
동시에, 지금 상황에서 너무나도 반갑게 여겨지는 목소리.


"하스타!"

하스타가 아이스크림을 손에 든 채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교실 앞에서 뭐해? ······그리고 그 애는 누구고."

하스타가 루아를 보며 물었다. 루아는 그런 하스타의 시선을 피해 내 뒤로 자리를 옮겼다.

"루아에요. 제 룸메이트."
"응······ 그래. 저기, 안녕?"

하스타가손을 흔들었다. 하지만 루아는 내 뒤로 몸을 숨기며, 단지 하스타를 힐끔 바라보기만 할 뿐 하스타에게 대답을 하지 않았다.


"루아. 제 친구 하스타에요."
"······위즈의 친구?"
"네······ 아, 맞다. 하스타, 그러고 보니 이 반에서 수업들었죠?"
"응. 왜?"
"루아  돌봐주실 수 있을까요?"
"어, 내가?"

하스타가 나의 갑작스러운 제안에 깜짝 놀라 반문했다. 그러자 내 뒤에 있던 루아가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위즈, 위즈의 친구가  싫어해······."
"싫어하는 거 아닐거에요. 그렇죠, 하스타?"
"싫어하다니?"


하스타가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보세요. 싫어하지 않죠?"
"그렇지만······."
"어쨌든! 하스타, 루아 좀 맡아주실  있어요?"
"응? 어, 위즈의 룸메이트라면야 괜찮긴 한데······."

루아가 살짝 놀란 듯 눈을 크게 뜨고 하스타를 바라보았다. 나는 그런 루아에게 어깨를 으쓱 폈고, 하스타는 여전히 영문을 모른 채 우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나 싫어하지 않아?"


루아가 내 뒤에서 고개를 살짝 내밀며 불안한 눈빛으로 하스타에게 물었다. 하스타는 고개를저었다.

"초면인데 싫어할 이유가 있어?"
"하지만, 나는 소크타리에스인데······."
"······미안. 나 평민이라 귀족 가문은 잘 몰라."


하스타가 난처한 듯 쓰게 웃었다. 그러자 루아는  뒤에서 몸을 천천히 내밀더니, 하스타에게 물었다.

"정말, 이야?"
"응."
"정말, 나를 싫어하지 않아?"
"이유가 없잖아."
"정말, 정말로?"
"같은 걸 자꾸 물어보면 싫어질 수도 있는데."
"합."


루아가 손으로 자신의 입을 막았다.
그리고, 이내 하스타에게 말했다.

"······나, 나는, 루아. 루아 소크타리에스. 잘 부탁해, 위즈의 친구······."
"하스타 비즈. 하스타라고 불러."
"으, 응. 나도 루아라고 불러주면 기쁠거야······."


좋아.

"그럼 하스타, 부탁할게요! 곧 종 칠 것 같아서요!"
"아, 그래. 어서 가 봐, 위즈."


하스타가 손짓하자, 나는 루아에게 손을 흔들어 인사한 뒤 복도를 총총 뛰며 달려나갔다.

"그러고 보니까  반, 조금 소란스럽던데······."


하스타의 중얼거림이 멀리서 들려와 귀에 한 차례 맴돈 후 사라졌다.


수업을 들을 반에 도착한 나는 문을 열었다.


굉장히 흉흉한 분위기였다. 도무지 들어가고 싶지 않은 분위기 속에 발을 내딛은 나는, 이상한 광경을 보게 되었다.


학생들이 중앙의  줄을 띄고 앉아 있었다. 가운데 줄을 비어놓은 채, 동과 서로 양분되어 있는 학생들의 배치.
그리고 그 자리의 중앙에는 각각 세렌과 메디아가 앉아 있었다.


"어머, 위즈. 어서와요."
"혹시라도 그대가 늦을까 했지만, 기우였던 모양이야. 어서 오도록 해, 위즈."


두 황녀님이 나를 향해 인사했다.
동서로 갈라져 있던 학생 전원이 나를 향해 시선을 보내왔다.


"그대의 자리는 맡아두었다. 자, 이 곳에 앉아."

세렌이 나를 향해 웃으며 손짓했다.
그녀가 손짓한 자리는 세렌의 옆이었다.
동시에 메디아의 옆 자리이기도 했다.


그 말인 즉슨.


내가 앉을 자리는, 학생 좌석의정중앙이며.
동시에, 텅 비어있는 중앙 세로줄의 한가운데라는 것이다.

"······그 자리에 앉으라구요······?"
"싫은가?"
"어머, 그러면 어디에 앉을 건가요? 자리를 옮기도록 하죠."


메디아의 말에, 메디아 주변의 학생들이일제히 움찔거렸다.

"그래. 그대가 원하는 자리로 옮기도록 하지."


이번에는 세렌주변의 학생들이 움찔거렸다.

······뭐라고 할까. 내가 다른 자리를 고르면 저 사람들이 내게 원망의 시선을 보낼 것 만 같았다.
중앙 자리에 앉는 것 외에 다른 선택지가 없었다.

"그냥 그 자리에 앉을게요······."


안도의 한숨이 교실을 메웠다.


"자리 배치 한 번 특이하네. 혹시 누가 시킨 대로 앉은거냐?"

이번 수업의 교수,코발트 아콰젯은 우리를 한번 스윽 훑어보더니, 중앙에 시선을 고정시키며 물었다.
정확히는 내 양 옆에 앉아있는 두 황녀님을 향한시선이었다.


침묵.


아무도 대답하지 않자, 코발트는 한 숨을 내쉬며 말했다.

"······하비셜에는 귀족과 평민 간의 차이가 없다는 것 정도는 알지?"


모두가 대답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코발트는 두 황녀님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황녀님이라고 해도 예외는 아니라는 것도 알고 있고?"
"저, 저희는 앉고 싶은 곳에 앉았을 뿐이에요!"
"맞습니다, 교수님. 이 자리배치는 단지 우연의 일치일 뿐 입니다!"


코발트의 말에 세렌과 메디아의 주변에 앉아있던 학생들이 항변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코발트는 살짝 당황한 듯 미간을 찌푸렸다.

"진심으로 하는 말이냐?"
"네!"

모두가 합심하여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코발트도 어쩔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뭐, 그렇다면야······."


의심의 눈초리를 지우지 않는 코발트의 시선이, 나를 스윽 훑고 지나갔다.
사건의 주동자를 보는  한 눈빛이었다.
······왜 나야?



"뭐, 하여튼. 필수교양수업인 역사를 여러분에게 가르치게 된 코발트 아콰젯이다. 교과서는······ 뭐, 필요 없겠지. 첫 시간이니까 대충 옛날 이야기 하듯 넘어가자."


코발트가 교과서를 휘릭 던진 후 책상에 걸터앉았다.그리고는 손바닥을 아래로 한 뒤 한 차례 휘둘렀다.
교실이 바뀜과 동시에, 세 사람의 모습을 그린 환영이 모습을 드러내었다.


"그래.  세 사람이 누군지는 알지?"
"삼현인 입니다."

메디아가 대답했다. 그러자 코발트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삼현인이지. 영웅 세오 리베른,  현자 아이시아, 그리고 대스승 라이하빗 케런트."


굉장히 익숙한 얼굴이었다. 라이하빗은 직접 보았으니 그렇다 쳐도, 앞의 두 사람 역시 너무나도 익숙한 모습이었다.

세오 리베른은 금발 머리카락에 아이스블루 색 눈동자를 가진 미청년이었다. 세렌이 남자였다면 저런 모습이었을 거라고 단언할 수 있을 정도로 세렌과 닮아있었다.

반면 아이시아의 모습은 메디아와 똑 닮아 있었다. 조금 활기찬 메디아라고나 할까.


"한 번쯤은 다들 들어 봤을 거다. 대악마 나엘을 물리치고 인간의 시대를 연 삼현인의 이야기."


학생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백합황녀에서 나왔던 삼현인에 관한 정보를 기억해내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니까 이 부분은 넘어가자. 모두  아는 내용을 굳이 설명해서  하겠어. 대신 시험에 내긴 할 거니까 참고는 해 둬라?"


코발트가 손을 움켜쥐어 환상마법을 지웠다. 그리고는 다시 손바닥을 아래로  채 차례 휘둘러 다른 환상마법을 만들어내었다.

"오늘 배울 건 이거다. 인간의 시대란 무엇인가, 라는 거."

삼현인이 하늘을 향해 각자 다른 무기를 치켜들고 있었다. 세오는 검을, 라이하빗은 창을, 아이시아는 지팡이를 각자 손에 쥔 채였다.


"인간의 시대는 대악마를 물리친 삼현인의 맹세로부터 시작되었지. 남아있는 기록에 의하면 그 맹세는  페이지에 달한다고 전해지지만, 사실 그건 단 한 줄로 요약될 수 있는 내용이었어."

코발트는 한 차례 손을 휘둘렀다. 그러자 무기를 치켜들고 있는 삼현인의 뒤로 수많은 인파의 형상이 나타났다.


"'인간이 스스로의 운명을 정할 수 있는 시대.' 삼현인의 손에 열린 인간의 시대는그런 의미를 지니고 있었지. 운명의 흐름에 몸을 맡기는 것이 아닌, 스스로의 의지로 삶을 개척해 나가는 것. 그것이 삼현인이 추구했던 경지이며, 동시에 그들이 현인으로서 존경받는이유다."


코발트가 학생들을  차례 둘러보았다. 그러더니 한숨을 내쉬었다.

"재미없냐?"


무언의 긍정이 교실을 감쌌다.

"그래, 뭐 재미 없겠지······ 마법같은 멋진 걸 오전에 배우고 온 놈들이, 이런 고리타분한 이야기를 좋아할 리가 없지······."


코발트는 혀를 차며 자신의 머리를 헝클어뜨렸다. 솔직히 나야 처음듣는 내용이라 그의 수업을 흥미롭게 들을 수 있었지만, 다른 학생들은 아닌 모양이었다.

"그것도 많이 들은 이야기에요, 교수님."
"그 부분, 넘어가셔도 될 것 같아요."
"그 이야기를 모르는 사람이 이 세상에 어디 있어요?"


학생들의 볼멘소리가 터져나왔다. 심지어 메디아와 세렌도 고개를 끄덕이며 작은 동의를 표시하고 있었다.

어, 뭐야.  이야기에 관한 걸 모르는 사람, 나 밖에 없어?

"그래, 뭐. 좋다. 대신 삼현인의 행적에 대해 다섯  분량으로 레포트 써. 그 정도는 할 수 있지? 오늘 수업은 이걸로 끝. 자습하던 기숙사 가서 쉬던 나가서 놀던 알아서 해라······ 에휴. 요즘은 애들한테 역사 가르치는것도 못해먹겠구만."


한숨을 쉬던 코발트는 이내 학생들을 향해 귀찮으니 어서 가라는 듯 손을 휘휘 내저었다. 학생들은 자신있다는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를 정리했다.
나만 빼고.


다른 학생들은 삼현인에 관해 빠삭할 지 몰라도 나는 아니었다. 내가 삼현인에 관해 아는 것은 기껏해야 다섯 줄 정도. 그마저도 백합황녀에서 간추려진 정보들 뿐이어서, 도무지 다섯 장을 쓸 수 있을  같지가 않았다.


"······저기, 세렌. 메디아."
"왜 그러지, 위즈?"
"무슨 일 있나요?"
"저좀 도와주실 수 있어요······?"
"레포트를 말하는 건가?"
"도와드릴 수야 있지만, 그게 도움이 필요한 일인가요······?"

네. 필요해요.
엄청.

나는 그녀들을 향해 고개를 격하게 끄덕여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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