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8화 〉4. 루아 소크타리에스 (6)
하비셜 본관, 기록의 도서관 5층 열람실 19호.
학생들 간의 소모임에 이용가능한 열람실에 내가 온 이유는, 물론 다음 역사시간까지 제출해야 할 레포트를 작성하기 위해서였다.
"삼현인의 행적을 말하기 위해서는 먼저 그 근본부터 설명해야겠지. 그래, 그렇다면 내 위대한 선조인 세오 리베른의 이야기로 막을 여는게 좋겠어. 세오 리베른은 에른에서 태어난 사람인데─ 아니, 그 전에 인간의 시대가 열리기 전의 에른, 그러니까 에르가 산 남부에 대해 설명해야 겠군. 에르가 산의 남부는 아주 비옥한 땅이었지. 지금처럼 마기가 일렁이는 위험한 곳이 아니었어."
나는 멍 하니 세렌을 올려다보았다.
세렌의 모습이 흐릿해진 것 같아, 눈을 한 번 비볐다.
"에른의이야기를하다보면그곳의시작을빼놓을수없지그리고라이하빗의이야기도말이야그대는이런옛날이야기를조금좋아하지않는모양이지만그래도관심을가지다보면분명히좋아하게될거야나도아바마마에게처음옛이야기를듣고서야눈을반짝이게되었으니까그때가언제였냐면내가검을잡은지1년정도가지난때였는데그밤만큼아름다운날도없었어붉은달을마주한채아바마마께듣는선조의이야기는내가슴을요동치게만들었지"
정신이 아득해진다.
"그이후도많은이야기를아바마마에게들었지만첫날만큼의감동은느껴지지않더군하여간내가그대에게무슨말을하고싶냐하면결국세오리베른의이야기는그대가분명히좋아할거라는거야그러니이제다시본론으로돌아가에른의이야기를하도록하자그곳에서태어난세오리베른은말수가적은온화한소년이었다고하는데생각해보면그때부터이미현인의기운을품고있었을지도모르겠군아바마마께서해주신현인의이야기에서는─"
"······그만하시죠, 세리나 바른."
멍하니 있던 나를 깨운 것은 다름아닌 메디아의 핀잔이었다.
"응? 무슨 일인가. 아직 이야기는 시작조차 하지 않았는데?"
"아직도 시작을 하지 못했으니 문제인 거에요."
메디아가 손으로 이마를 짚으며 한 숨을 내쉬었다. 그런 메디아를 바라보며 미간을 좁히던 세렌은, 나를 향해 시선을 보냈다. 자신의 이야기를 조금 더 듣고싶지 않냐고 물어보는 것 같은 시선이었다.
······아무 말 없이 세렌의 시선을 피했다.
"위, 위즈······?"
"당신의 설명에는 잡설이 길어요. 이야기를 전개하는 방식도 중구난방이고, 무엇보다 설명에서 중요하게 여겨야 할 것이 무엇인지에 대한 갈피조차 잡지 못하고 있습니다. 보세요. 위즈도 당신의 설명을 거북해 하고 있잖아요?"
"그, 그럴리가. 위즈, 정말인가······?"
세렌이 설마하는 눈치로 나를 바라보았다.
다시 한 번 고개를 돌릴 수 밖에 없었다.
죄송해요, 세렌.
목소리를 듣는 것 만으로도 영광이어야 할 텐데.
말씀의 내용이 제가 알던 언어와 다른 것같아서, 이해하지를 못하겠어요······.
"제 말이 틀리지 않은 것 같군요, 세리나 바른."
메디아가 내 어깨에 양 손을 기대며 세렌에게 말했다. 그러자 세렌이 분하다는 표정을 짓더니, 몇번 주저하다가 결국 고개를 떨구며 메디아에게 스틱을 넘겼다. 작은 나무지팡이의 끝에 마법이 새겨진 마정석이 달려있어, 허공에 필기를 할 수 있도록 만들어놓은 마도구였다.
"잘 생각했어요."
"······어디 한 번 그대의 설명을 들어보도록 하지."
세렌이 두고보자는 듯 메디아에게 말했다. 메디아는 그런 세렌에게 한 차례 미소를 지어보인 후 내 앞에 섰다.
"잘 듣도록 해요, 위즈. 가장 먼저 간단한 요약정리를 해 드릴 테니까요."
메디아가 허공에 선을 세 개 그었다. 두 개의 선은 가까이에 있었고, 다른 하나의 선은 조금 멀리 떨어져 있었다. 가까이에 있던 두 개의 선은 이윽고 합쳐져 하나의 선이 되었고, 멀리있던 선도 합쳐진 선에 가세하여 결국 끝에 가서는 세 개의 선이 하나가 되었다.
"인물 중심으로 삼현인의 행적을 설명드릴게요. 가까이에 있는 두 선은 각각 세오 리베른과 라이하빗 케런트고, 조금 떨어져 있는 이 선은 아이시아입니다."
"네, 네."
"세오 리베른은 에르가 산 남부의 옛 마을 에른에, 라이하빗 케런트는 하늘호수의 남부, 현재 하비셜의 위치에 있던 옛 마을천지에 각각 살고 있었습니다."
"네, 네."
"지금에야 마차로 몇 시간 달려 도착할 수 있는 거리이지만, 옛날에는 마을과 마을 사이에 7석 이상의 대마수가 발견되는 것도 빈번한 일이어서 교류가 잦지를못했죠. 삼현인의 시작은 교류가 뜸했던 두 마을에 벌어진 사건으로부터 시작됩니다."
"네, 네."
"그래요. 하늘호수의 주인이었던 고토룡 옥스로건이 부계력에 잠식되어 날뛰기 시작한 겁니다. 천지의 사람들은 그런 고토룡의 횡포를 견디지 못하고 지원을 요청했고, 그 요청을 받아들인 에른에서 천지로 파견된 이가 바로 세오 리베른이에요."
"오······."
"어때요, 위즈. 지금까지는 이해 하섰나요?"
"네, 이해한 것 같아요······."
메디아의 물음에 홀린 듯 고개를 끄덕였다. 내 옆에서 팔짱을 낀 채 불만스러운 눈빛으로 메디아를 바라보던 세렌이 화들짝 놀라 나를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분한 듯 침음을 내며 주먹을 불끈 쥐었다.
세렌에겐 미안한 말이었지만, 가르치는 스킬에 있어서 세렌과 메디아에겐 너무나도 큰 차이가 있었다.
"잘 했어요, 위즈."
메디아가 붉은 눈에 칭찬을 담으며 내 머리카락을 가볍게 쓰다듬었다. 그리고는 세렌을 잠시 바라보다,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스틱을 가볍게 휘둘렀다. 가까이에 있던 두 선이 합쳐지는 부분에 동그라미가 나타났다.
"그렇다면, 옥스로건에 대항하는 두 현인에게 어떤 일이 있었는지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죠······."
그래, 이런 설명을 듣는다면 충분히 레포트를 작성할 수 있겠어.
"······손 아파요, 메디아아······."
"글씨 쓰는게 정말 느리네요, 위즈는······."
"글씨체도······ 아, 아니. 나는 귀엽다고 생각해. 그대의 글씨체가 네 살 때의 내 글씨체를 보는 것 같아서 하는 말이 절대로 아니야."
세렌의 말이 비수처럼 날아와 심장에 꽂혔다. 그런가. 내 글씨체는 세렌의 네 살때 글씨체와 맞먹는 건가.
확실히 세렌의 말대로 내가 써 놓은 레포트의 글씨체는 괴랄하기 짝이 없었다. 글자마다 제각각인 크기와 한 줄을 쓸 때마다 점점 아래로 내려가는 행간, 곳곳에 묻어있는 번진 잉크자국까지.
대학교에 이런 레포트를 제출했다간 C를 맞아도 할 말이 없을 그런 퀄리티였다.
솔직히 내게도 변명할 거리는 있었다. 내가 지금 사용하고 있는 문자는 불과 일주일만에 속성으로 배운 '기하문자' 인 것이다.
솔직히, 기하문자는 일주일 동안 속성으로 배워도 충분할 만큼 익히기 쉬운 문자였다. 만일 이 세계의 문자가 표의문자나, 아랍문자와 비슷한 형태였다면 꼼짝없이 문맹에서 벗어나지 못했겠지만, 다행히 기하문자는 한글만큼이나 쉬웠다.
하지만 손에 문자가 익었냐를 묻는다면, 그것은 완전히 별개의문제였다. 처음 써 보는 글자여서 한글자 한글자 생각하면서 필기해야 했고, 그마저도 자꾸 삐뚤어져 버렸던 것이다.
더군다나 내 손목의 상태도 문제였다. 겨우 레포트 세 장 째이건만, 내 백합줄기마냥 연약한 손목은 더 이상은 일을 할 수 없다며 파업을 선언한 상태였다. 손목은 시큰거렸고, 펜대를 받치던 중지의 마지막 마디는 깊게 패인 채 붉게 물들어 있었다.
"······돌아오는 역사 시간은 내일 모레. 시간은 넉넉하니 지금은 하지 않아도 괜찮다, 위즈. 조금 쉬도록 해."
"그래도 오늘 저녁에는 끝내놓는게 좋을 거에요. 사람은 언제나 대비를 해야 하니까요."
찌릿.
두 황녀님이 미간을 좁히며 서로를 바라보았다.
또 싸우는 건가 싶어, 두 사람의 사이에 끼어들려는 시점.
"아, 여기있다······."
기운이 잔뜩 빠진 하스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하스타?"
"그대의 수업은 일찍 끝나지 않았나보군······ 얼굴에서 피곤함이 묻어나오고 있어."
"맞아요, 몇 번이나 졸아버렸다니까요."
하스타가 고개를 내저으며 세렌의 말에 수긍했다. 그리고는 나를 바라보았다.
"데려다달래서 데려왔어."
"네?"
하스타가 자신의 등 뒤를 가리키자, 나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음표를 띄웠다. 하지만 하스타는 지친 듯 나의 물음에도 불구하고 고개를 젓더니, 기지개를 피며 말했다.
"부탁 들어줬으니까, 꼭 나중에 맛있는거사 줘······. 위즈도, 루아도. 두명 다 나한테 사야 해."
흐아암.
하스타가 하품을 내쉬며 뒤돌아섰다.
그리고 그 뒤에서, 푸른 인영이 나타나 나에게로 달려들었다.
"뭣······?!"
"위즈, 위즈!"
풍성한 파란색 머리카락이 얼굴을 부드럽게 감쌌다. 덕분에 시야가 가려져 눈 앞이 제대로 보이지 않았지만, 나를 덮친 사람이 누구인지는 바로 맞출 수 있었다.
"루, 루아······?! 이게 대체 무슨─ 읍, 으읍!"
"계속 보고싶었어. 다시 만나서 정말로 기뻐, 위즈!"
루아가 내 목에 팔을 건 채 나를 올려다보았다. 푸르른 머리카락 사이로 그녀의 하얀 눈동자가 엿보였다.
"······당신은."
"그대는 누구지?"
그리고 두 명의 황녀님은 그런 루아를 미묘한 눈빛으로 바라보며 얼굴을 굳히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