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0화 〉4. 루아 소크타리에스 (8)
"메디아 리베른은 내가 될 수 있는 한 달래보도록 하지."
"그래줄 수 있나요, 세렌······?"
"······아마 잘 안 되겠지만 말이야. 노력은 해 보겠어."
세렌이 쓴웃음을 지었다. 그리고 나를 바라보았다.
"아까도 말했지만, 나는 바른의 황녀이기에 두 사람의 관계에 참견할 수 없다. 어마마마의 입장에서도 소크타리에스 가에 대한 처우는 굉장히 곤란한 문제인 모양이라서 말이지."
안타까운 어조로 말하며, 세렌은 내 손을 잡았다.
"하지만 그대를 도울 수는 있어. 내가 힘을 보탤 일이 있다면 무엇이든 부탁해. 그렇다면 나는 그대의 부탁을 기쁘게 받아들일테니까."
"고마워요, 세렌."
"······루아라고 했던가. 그 아이를 부탁하지. 가문에 죄가 있다 하더라도 아이에겐 죄가 없으니까······."
세렌이 씁쓸하게 중얼거렸다. 내리깔은 그녀의 속눈썹이 달빛을 받아 선명히 빛났다. 나는 그런 세렌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힘내볼게요, 세렌."
"응, 나는 그대를 믿고 있다!"
세렌이 환하게 웃었다.
그 아름답고 순수한 모습에, 조금이나마 기운이 났다.
좋아. 가 보자.
나는 결심했다. 그리고, 한 번 크게 숨을 들이내쉰 뒤 기숙사의 문을 열었다.
"있어요, 루아?"
"위, 즈······."
그곳에, 루아가 곰인형을 꼭 껴안은 채, 무릎을 모아 앉고 있었다.
달빛을 받고 있는 그녀의 하얀 눈동자는 텅 비어 있었다. 그녀를 바라보는 나의 모습이 비쳐 보일 정도였다. 나를 바라보며 눈을 빛내던 루아의 모습과는 너무나도 동떨어진 모습이어서 이질적이기까지 했다.
나는 루아의 침대에 걸터앉았다. 루아가 고개를 푹 숙였다.
"위즈, 미안해."
"뭐가 미안해요?"
루아의 곁에 걸터앉아, 달빛을 바라보며 물었다. 그러자 루아는 물기에 젖은 목소리로 말했다.
"위즈의 친구를 화나게 했어······."
"으음······ 그건 루아의 잘못이 아닌 것 같던데요."
루아를 어깨너머로 바라보며 고개를 으쓱하자, 루아가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나를 바라보았다.
"모르겠어."
"루아가 소크타리에스 가문에서 태어난게 죄인가요?"
"······그렇다고 생각해."
루아가 곰인형에 얼굴을 파묻었다. 나는 루아를 향해 몸을 틀어 침대 위로 올라갔다. 그리고 벽에 기대고 있던 루아의 곁에 앉았다.
"루아. 사람은 누구나 잘못을 저지르고 산다는 말이 있어요."
"······응."
"저도 그래요. 제가 아무렇게나 한 말이 누군가에겐 상처를 입히는 말이 되었을 수도 있고, 오늘만 해도 루아의 처지를 생각하지못하고 그런 상황을 만들어버렸어요."
"그건, 위즈 잘못이 아냐."
루아가 고개를 저었다. 나는 그런 루아에게 말을 이었다.
"그렇지만요, 루아. 자신이 선택하지 않은 일 마저도 자신의 잘못으로 돌린다는 건 조금 이상하지 않아요?"
창문으로 달빛이 들어왔다. 푸른 빛을 띄고 있는 달빛이 방 안을 암청색으로 물들였다.
루아의 머리카락은 그런 달빛에 녹아들어간 듯 푸르게 빛나고 있었다. 나는 루아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조금 놀란 듯 루아는 한 차례 머리카락을 쭈뼛 세웠지만, 이내 내 손길을 저항없이 받아들였다.
"선택의 결과가 잘못됐다면 속죄하는게 맞지만······ 스스로가 선택할 수 없었던 것에 죄를 묻는 건 잘못된 거 잖아요."
푸른 달빛을 머금은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쓸어내리자, 루아의 몸이 작게 들썩이기 시작했다.
"루아는 소크타리에스가문을 스스로 선택한게 아니잖아요. 그래서 저는 루아에게 죄가 없다고 생각해요."
"하지만, 하지만······."
"그러니까 얼굴 펴요, 루아. 저는 루아만큼 예쁘게 웃는 사람을 본 적이 없어요."
그렇게 말하며 루아의 얼굴을 살짝 들어올렸다.
루아는 눈을 크게 떴다.
하얀 눈동자로 나를 바라보았다.
숨을 작게 들이쉬었다.
어깨를 한 차례 들어올렸다 천천히 내렸다.
입을 작게 벌리더니 이내 굳게 닫았다.
눈을 피했다.
입술을 자꾸만 오물거렸다.
뺨을 홍조로 물들였다.
큰 눈망울에 물방울이 맺혔다.
시선을 아래로 내리깔았다.
고개를 떨구었다.
눈을 감고 입술을 깨물었다.
양 뺨에 반짝이는 별이 지나간 궤적을 남겼다.
고개를 다시 들었다.
물기 젖은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입을 양 손으로 막았다.
눈썹을 모은 채 고개를 저었다.
소리 내는 것을 필사적으로 참았다.
별이 지나간 궤적이 계속해서 늘어갔다.
울음을 참는 어린아이의 목소리가 그녀의 손 틈 사이로 들려오자, 나는 그녀의 손목을 쥐고는 입을 막고있던 양 손을 부드럽게 떼어내었다. 그리고 내 어깨에 그녀의 두 팔을 올려놓아 안는 자세를 만들었다.
"루아. 울고 싶으면 울어요. 억울하면 하소연해요. 화내고 싶을 때는 베개를 던져도 뭐라 하지 않을게요."
"위, 즈, 히끅, 위즈으으······."
울음에 젖어 알아듣기조차 힘든 갈라진 목소리가 새어나왔다. 나는 그런 루아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들썩임이 점차 심해졌다.
"참을 필요 없어요. 우리는 친구잖아요? 마음껏 울어도 뭐라하지 않아요."
"위즈, 나, 나아아아······."
루아가내 목을 껴안고는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참고있었던 그녀의 울음이 터져나와 내 어깨를 적셨다.
"그래요. 오늘 전부 울어버리고, 내일은 웃으면서 일어나는 거에요, 루아."
달이 하늘 높이 떠올랐다.
어둡지 않은 밤.
가녀리게 떨며 울고 있는 루아를 덮어주는, 그런 아늑한 밤이었다.
"······아직 안 일어났네요······."
하품을 하며 왼쪽 손으로 눈을 비볐다. 창문에는 이제 막 떠오른 듯 한 아침해가 고개를 내밀고 있었다.
오른 팔이 조금 저렸다. 하지만 도저히 움직일 수가 없었다.
······루아가 팔 위에서 새근새근 잠들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나에게 안겨있던 루아가 울다 지쳐 잠든 탓에, 어쩌다보니 곁잠을 자게 된 것이다. 루아의 눈가는 아직도 조금 부어있었다. 저렇게 울었으니 피곤할 만도 하지 싶었다.
지금 시각은 6시 반 정도. 아직 아침을 먹기에도 이른 시간이다.
······으음. 다시 자야 하나. 잠도 잘 안 오는데.
멍하니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그러고 보면 오늘은 오전수업부터 메디아와 만나게 된다. 세렌도, 하스타도 없이, 메디아와 단 둘이 수업을 들어야 하는 것이다.
으음.
세렌이 잘 다독여 줬을까?
제발 그러기를 바라며 시간을 보냈다.
"······메, 메디아."
아침.
루아와 함께 밥을 먹으러 나왔는데, 하필이면 메디아와 마주쳤다.
하스타가 메디아의 곁에 있었다. 나를 보고 반갑게 인사하려던 하스타는 메디아의 차가운 기류를 보자 움찔 하고 몸을 떨었다.
"황녀님이랑 무슨 일 있었어······?"
"그게. 조금······."
"큰일났네. 위즈 너 오늘 황녀님이랑 같은 수업이잖아. 세리나 황녀님도 나도 다른 반인 거."
"그러게요."
"복잡하네······."
하스타가 나를 안쓰러운 눈으로 바라보았다. 그러더니 메디아에게 말했다.
"바, 밥 먹으러 갈까요, 메디아······?"
"······그러죠."
하스타가 메디아를 이끌고 자리를 피해주었다. 그리고 뒤를 돌아 살짝 주먹을 쥐며 나를 격려했다.
누나가 있다면 이런 느낌일까.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또 떨어지는 거야?"
"오후수업은 같이 듣잖아요, 루아. 조금만 참아줄래요?"
"하지만, 위즈."
"다음 수업, 메디아와 같이 들어야 해요."
"아······."
메디아를 언급하자 루아가 사색이 되어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그런 루아를 배웅하고는 내가 수업을 들을 교실로 발걸음을 옮겼다.
메디아가 그 곳에 있었다.
흉흉한 기세를 내뿜으며.
그와 격렬히 대비되는 무표정한 얼굴로, 앞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에게서 최종보스의 기백이 느껴지는 것은 절대로 기분 탓이 아니었다. 왜냐하면, 그녀 주변에 있던 사람들이 하나같이 공포에 질린 채 그녀와 절대로 시선을 마주치려 하지 않고 있었으니까.
마음의 준비를 단단히 했다고 생각했지만, 그건 내 착각이었다. 경우에따라서는 정면으로 맞부딪치겠다는 내 생각이 얼마나 짧았는지 통감하게 되었다. 절대로지금의 메디아와 정면으로 충돌해서는 안 된다. 만약 그랬다간 이 세계에서 흔적 없이 사라질 수도 있었다.
나는 메디아와 시선을 피하며 쭈뼛쭈뼛 가장 끝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메디아의 시선을 피해 고개를 돌렸다.
책상이 멀어지기 시작했다.
"······어?"
기분탓이라고 생각했지만, 기분 탓이 아니었다. 마치 시하 익스프레스 처럼, 내 의자가 하늘로 둥실 떠오르기 시작한 것이었다. 의자에서 뻗어나온 벨트까지, 시하 익스프레스와 전혀 다를 것이 없는 상태였다.
주변에 시하는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아무리 봐도 그것 이외에는 설명이 되지 않았다. 대체 이게 무슨 일인가 하며, 본능적으로 벨트를 붙잡았다.
의자가 하늘을 부유했다. 다른 학생들이 나를 신기한 듯 바라보다, 갑자기 사색이 되어 시선을 피했다. 대체 무슨 일인가 싶어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메디아의 옆 자리 의자가 둥실 떠오르고 있었다.
그리고 내가 앉은 의자는 메디아의 옆자리를 향해 날아가고 있었다.
아니, 잠깐만. 이거 설마.
"으앗?!"
쿵.
의자가 살짝 거칠게 바닥으로 내려왔다. 메디아의 옆 자리였다.
꽤나 큰 소리가 났음에도, 메디아는 나를쳐다보지조차 않았다. 그저 앞을 무표정히 바라보고 있을 뿐 이었다.
가시방석에 앉은 기분이었다. 아니, 그것 뿐 만이 아니었다. 가시돋친 공기를 마시고 있는 것 처럼 가슴이 답답했다.
언뜻, 주위에서 동정어린 시선이 느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