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31화 〉4. 루아 소크타리에스 (9) (31/86)



〈 31화 〉4. 루아 소크타리에스 (9)

오전 수업이 모두 종료되었다.


황급히 빠져나가는 1학년들 사이에서, 나는 옴짝달싹 못한 채 메디아의눈치를 보고 있었다.
도저히 자리에서 일어날 분위기가 아니었다. 저렇게 화난 상태인메디아는 백합황녀 속에서도 몇  보지 못했기에, 어떻게든 화를 풀어주고 싶다는 마음이 컸다.

하지만 방법을 모르겠다.
어쩌지.
그냥  딱 감고 말을 걸까······?

그렇게 생각하던 때였다.

"위즈."

메디아가  이름을 부르자, 나는 잠시 멍하니 메디아를 바라보았다. 메디아는 여전히 시선을 정면에 고정시킨 채 내 쪽은 전혀 바라보지 않고 있었다. 메디아가 내 이름을 불렀다는 것이 믿어지지가 않을 정도로 무표정해서, 순간 내가 환청을 들었나 하고 착각에 빠질 정도였다.


"위즈."
"네, 네!"

메디아가 두 번이나 이름을 부르고서야,나는 그게 현실임을 깨닫고 경직된 자세로 대답했다.


그런 나를 메디아가 돌아보았다. 하얀 얼굴 위에서루비처럼 빛나고 있는 붉은 눈과 시선이 마주쳤다.

"궁금한게 있어요, 위즈."
"뭐, 뭐든지 물어봐요, 메디아······!"

꿀꺽.
나는 침을 한 차례 삼키고 메디아를 바라보았다. 어떤 질문이 나오더라도 성심성의껏 답할 생각이었다. 무엇이든 숨김없이 털어놓은 후에 루아에 대한 메디아의 생각을 듣고 싶었다. 그래야 할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왜 가만히 있나요?"
"······네?"

하지만 메디아의 질문은 너무나도 뜬금없는 것이었다. 영문 모를 질문에 나는 당황해 반문했고, 메디아는 그런 나를 빤히 쳐다보다 한숨을 내쉬었다.


"어째서, 오늘 저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냐는 거에요."
"말이요?"
"······제게 할 말이 많았을 텐데요."


메디아가 별안간눈을 아래로 내리깔며 중얼거렸다.  모습에 머릿속이 일순간 새하얗게 물들었다.

뭐지. 사과를 했어야 했나? 어제에 대한 변명? 그것도 아니라면 루아에 대한 이야기를 꺼냈어야 했나?

모르겠다. 메디아가 어떤 말을 바라는 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사과부터 하고 봐야겠다.


"미, 미안해요, 메디아."

내가 고개를 숙이자, 메디아가 나를 놀란 듯 바라보았다. 그리고 이내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어째서 당신이사과하는 건가요?"

큰일이다.
이게 아닌가?

등줄기에 식은땀이 주륵 흘렀다. 메디아가 대체 뭘 원하는지 짐작조차 가지 않았다.
내가 어버버 하며 꺼낼 말을 찾지 못하자, 메디아가 다시금 눈을 아래로 내리깔았다. 그리고 쥐어짜는 듯 한 목소리로, 무언가를 중얼거렸다.


"······내야 했어요."
"네?"

내가 반문하자, 메디아가 이를 앙다물고 나를 원망스러운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붉은 눈동자가 흔들렸고, 그녀의 무릎 위에 놓여있던 주먹은 옷자락을 꼬옥 쥐고 있었다.
몇 번이나 메디아가 입을 열기를 주저한 끝에, 다시 한 번 입을 열었다.

"당신은, 제게 화를 내야 했어요."


전혀 이해할 수 없는 말이었다.

"······뭐라구요?"
"어제는, 음······ 제가 조금 흥분해서. 그러니까, 저기······."

메디아가 답지않게 횡설수설거렸다. 그래서인지 한층 더 이해하기 힘들었다.

내가? 메디아에게 화를? 왜?


"아무리 리베른의 배신자라지만, 위즈의 친구이기도 하고, 직접적인 죄인이 아니기도 한데, 그게."


메디아가 볼을 새빨갛게 물들이며 자꾸만 주위를 곁눈질하며 내 시선을 피했다.


백합황녀에서 메디아가 이런 적이 있었나? ······아, 있었네. 그래, 기억났다. 세렌과 메디아가 친해지는 에피소드에서, 그 자존심 강한 메디아가 스스로의 약한부분을 세렌에게 드러내는 장면과 비슷한 느낌이었다.


하지만 지금 그럴 때인가? 뭐지?


"메, 메디아. 횡설수설 하지 말아줘요, 이해를  하겠어요."
"하지만, 저는, 그러니까······."
"메디아가 그러면 저도 혼란스러워 지거든요······?"


메디아의 어깨를 붙잡고 시선을 맞추자, 당황한 메디아의 눈동자가 일순간 커졌다. 그리고는 속눈썹을 짙게 내리깐  나의 시선을 피했다.
작은목소리로 메디아가 중얼거렸다.

"······미안해요, 위즈."


메디아의 목소리는 너무나도 작았다.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다면 분명히 놓쳤을 것이다. 하지만 메디아의 진심이 담긴 한 마디는 나에게 전해져왔고, 그래서 나는 그녀의 떨리는 목소리를 비로소 이해하게 되었다.


메디아가 사과를 입에 담았음을, 그제서야 깨달았던 것이다.

"그게 무슨 소리에요, 메디아?"

나는 표정을 풀고 메디아에게 물었다. 그러자 메디아는 마치 선생님에게 혼나고 있는 학생처럼, 나를 힐끔힐끔 바라보며 말했다.

"당신에게 상처를 줬어요."
"상처요?"
"미안해요. 소크타리에스의 이름을 들었을 때, 가슴이 터져버릴 것 만 같아서, 화를 참지 못했어요."

메디아가 이를 으득 갈면서도 고개를 숙였다. 나는 그 모습에 묘한 위화감을 느꼈다.

그러고 보면, 원작에서도 메디아는 유독 루아에게 굉장한 적개심을 품고 있었다. 다만 나는 메디아의 적개심이 단순히 리베른의 황녀로서 생겼기 때문이라고 단정지었었는데, 꼭 그것만은 아닌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래서 나는 메디아에게 물었다.

"메디아. 메디아가 소크타리에스 가를 싫어하는 특별한 이유가 있어요?"
"······소크타리에스는 리베른의 배신자니까요."
"그것 만은 아닌 것 같아요, 메디아. 혹시 다른 이유가 있는게 아닌가요?"

메디아가 나를 바라보았다. 슬픈 빛이 감도는 붉은 눈동자에 옅은 보랏빛이 아른거렸다.

"긴 이야기가  거에요."
"점심시간은 길어요, 메디아."
"그 정도로는   수도 있어요."
"그러면 오후 수업 끝나고 이어서 들을게요. 시간이  걸린다면 내일도, 그 다음날도. 메디아가 하고 싶은 말이 떨어질 때 까지 들을게요."
"······그런가요."

메디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깊이숨을 들이쉬곤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저에게는 선생님이 한 분 있었습니다.
하유 신이라는 이름을 가진 분이었죠."

과거를 회상하는 메디아의 눈빛은 꺼져가는 불길처럼 아련했다.



"어릴 적에 어머니를 여읜 저에게 있어, 하유는 양어머니와 같은 존재였습니다.

저는 그녀에게서 많은 것을 배웠어요. 하늘과 별의 이야기. 사람들의 이야기. 그들의 사랑 이야기까지.


어릴 때 저의 세계는 곧 하유가 들려준 세계였고, 제가 받은 사랑은 모두 하유에게서 나온 것이었어요."


메디아가 가슴에 손을 모으고 눈을 감았다. 마치 기도하는 듯한 그녀의 모습은 이제 없는 사람을 그리워하는 것 같아 괜히 마음이 아파졌다.


"그래서였을까요. 제가 아홉살 때, 하유가 황궁을 떠난다는 소식을 듣게 된 저는 굉장히 서러워했답니다.


그래서 저는 하유의 곁에서 울기도 하고, 하유의 소매를 붙잡고 떼를 쓰기도 했어요. 그 때의 저는 어떻게든 하유를 붙잡고 싶었거든요. 황실의 인장을 몰래 사용해서 억지에 가까운 명령을 내린 적도 있었고, 그래서 아바마마에게 굉장히 큰 호통을 듣기까지 했답니다.


······어렸던거죠. 하유에겐 하유의 인생이 있었을텐데."

메디아가 씁쓸하게 고개를 저었다.


"결국 하유는 떠났어요. 그 날, 저는 하유에게 심한 말을 했답니다. 다시는 안 볼 거라고, 하유따위는 필요 없다고, 그렇게 말했어요.
그게 제 인생에서 하유를 본 마지막 날이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한 채로."

메디아가 입술을 깨물었다. 하얀 이에 짓눌린 부드러운 입술에서 핏방울이 주륵 흘러내렸다.

"메디아!"
"······괜찮아요. 진정했어요."

메디아가 입가에 손을 한 차례 가져다대었다. 입가에  상처가 말끔해졌다.


하지만 그녀는 아파하고 있었다.
입술이 아픈 것이 아닐 것이다.

"그래요. 아이시아 령으로 떠난 하유는 셸라 소크타리에스의배신 때문에 칠석의 마수에게 찢겨 죽었습니다. 시신을 짜맞춰 장례를 치뤄야 할 정도로요."

메디아가 떨리는 목소리로 자신의 상처를 드러내었다.
그녀의 상처는 아물어있지 않았다. 오히려 선명했다.


"그래서에요. 위즈. 저는 셸라 소크타리에스를 용서할 수가 없어요. 제가 하유에게 사과할 기회를 앗아가 버렸어요. 제 가장 소중한 사람을, 저의 세상이었던 사람을,  순간에 앗아가버린 사람이에요."

메디아가 꼭  주먹을 부르르 떨었다.


"하지만, 메디아. 그건 루아의 잘못이······."
"알아요. 알고 있어요, 위즈. 그 아이에게는 죄가 없다는 것 정도는 알아요. 어젯 밤에 세리나 바른이 지겹도록 이야기했으니까, 그 정도는 머리가 이해하고 있어요."

메디아는  손을 잡았다. 떨림이 그대로 전해져왔다. 슬픔, 비탄, 분노. 부정적인 감정이 얽히고 설켜, 풀리지 않을 것  같은 매듭을 만들고 있었다.


"하지만, 위즈. 마음이 아파요. 소크타리에스라는 이름을 듣는 것 만으로도 아프고, 떨리고, 저를 슬픈 눈으로 바라보았던 하유의 마지막 모습이 눈에 아른거려서, 도저히 냉정을 유지할 수가 없어요. 머리로는 그녀에게 죄가 없다는  알고 있는데,마음이 그걸 받아들이지 못해요.


이해받길 바라지 않아요. 하지만 위즈,  아이를 보는 건, 제게 있어 너무나도 아픈 일이에요.
이런 저를 용서해주세요. 위즈. 저는 그 아이를 마주하고 싶지조차 않아요······."

메디아가 진심을 부딪쳐왔다.
그 무거운 진심에,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다만 메디아의 손을 놓치지 않는  밖에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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