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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5화 〉5. 어쩌면 메인빌런 보다도 더 흉악할 (1) (35/86)



〈 35화 〉5. 어쩌면 메인빌런 보다도 더 흉악할 (1)

"위즈, 혹시 오후시간에 선약이 있는가?"
"세렌?"

오후수업이 없는 날. 점심을 먹고 뭘 할까 고민에 빠져있는 나에게 세렌이 말을 걸었다. 살짝 얼굴을 붉힌  우물쭈물하고 있는 세렌의 모습이 오늘따라 유난히 귀여웠다.

"만일 오후에 선약이 없다면, 혹시 그대의 시간을 나에게 조금 빌려줄  있겠나······?"

조금 부끄러워 하면서 놀러가자는 말을 돌려말하고 있는 세렌.


조금 갑작스럽긴 했지만,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아니, 솔직히 선약이 있었다고 해도 가고 싶을 정도였다.

"당연하죠!"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세렌의 얼굴이 환해졌다. 나는 그런 세렌에게 덧붙였다.

"그리고 다음부터는 그냥 놀러가자고 말씀해주셔도 돼요."
"하지만, 아바마마께서 친구에게 동행을 권유할 때는 이리 말하는게 좋다고 하셨는데······."

세렌이 아리송한 표정을 지었다. 그 모습에 쿡 하고 웃음이 터져나왔다.

"아하하,짖궂은 분이셨나봐요."
"으, 으음. 설마 아바마마께서 나에게 농을 건네셨던 건가······."

분하다는 표정으로 세렌이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떨구었다.


세렌이 나를 데리고 간 곳은 대운동장의 남동쪽에 위치해 있는 대련장이었다.

하비셜의 강의실은 보통 배움의 나무에 위치해 있지만, 무예과만큼은 조금 사정이 다르다. 다른 과에 비해서 이론 강습의 비중이 적은 무예과는 주로 실전적인 수업을 듣게 되는데, 그러다보니 대운동장 남서부의 훈련구역에 대부분의 강의실이 위치해 있는 것이었다.

내가 온 일반적인 대련장 외에도 이 훈련구역 안에는 사격장과 승마장, 모의전투 훈련장까지 있다고 한다. 마법과도 실습이 필요할 때는 이 곳을 쓴다고 하니, 언젠가는 가 볼  있겠지.


하여간, 세렌이 나를  곳으로 데려온 이유는 간단했다. 부 학과가 무예과로 지정되어있는 세렌은 하루라도 빨리 견학을 가보고 싶어했다. 하지만 혼자서 얼굴을 비추기에는  껄끄러운 부분이 생길 것 같다며 같이 가 줄 동행자를 원했던 것이다.


"세, 세렌?"
"위즈, 저 곳을 봐!"


세렌이 환한 미소를 지으며 대련장의 입구 위 쪽을 가리켰다. 그 곳에는 내 키 만큼이나 커다란 창날을 가진 장창이 걸려 있었다. 언뜻 눈으로 봐도 10m는 넘어보일  같아, 휘두르기는 커녕 인간이 들어올릴 수는 있을까 하는 의문이 들 정도로 거대했다.


"옥스라기아!  영롱한 모습을 봐, 위즈! 먼 옛날 라이하빗 케런트가 다루었던 그 창이다! 그걸 실제로 볼 수 있다니!"

파란색 스카프로 길게 묶은 세렌의 포니테일이 좌우로 파닥였다. 장난감 백화점에 처음 온 어린아이같은 모습이었다. 별이라도 심어놓은 마냥 빛나는 눈동자는 하도 천진해 보여서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그것 뿐 만이 아니야. 지휘검 셰페리아와 언검 베를로트를 재현해놓은 레플리카도 있어. 저건 천왕부 아즈다카?! 세상에······!"

뭐지, 외계어인가.
볼을 긁적이며 세렌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세렌은 대련장의 입구에 전시되어있는 모형 장비들에게서 눈을 뗄 생각이 없어보였다.
그 때, 뒤에서 조금 쾌활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잘 아는구나? 마법과 신입생같은데."


나는 뒤를 돌아봐 목소리의 주인을 바라보았다. 붉은색 가디건과 어울리는 적발을 길게 내린 남자였다. 가디건에 새겨져 있는 무늬로 보아, 아무래도 무예과 5학년인 것 같았다.

"그렇습니다!"

세렌이흥분에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남자는 호오, 하고 의외라는 듯 세렌에게 물었다.

"그렇게 여기가 좋아?"
"당연합니다. 먼 옛날의 이야기가 담겨있는 무구들을 재현해 놓은 공간이라니,  얼마나 멋진 모습입니까!"
"이거, 라이하빗 교수님께서 네 학과를 잘 못 정해주신  같은데."


남자가 세렌을 바라보며 귀엽다는 듯 미소지었다. 그러자 세렌은 멈칫 하더니  쪽을 슬슬 바라보며 대답을 피했다.
그러던 세렌은 문득 얼굴에 물음표를 띄웠다.


"무슨 일 있는건가,위즈? 그닥 기분이 좋지 않아보여. 혹시 몸상태가 좋지 않은 건가?"
"그건 아니구요."

자꾸만 좁아지려고 하는 미간을 억지로 펴며 고개를 저었다.
딱히 몸 어디가 아프다거나 한  아니었다. 다만  상황이 굉장히 마음에 들지 않았던 것이다.


세렌은 메디아와 맺어져야 하는 몸. 저런 능글거리고 뺀질뺀질한 외간남자가 끼어들 공간 따윈 없어야 한다. 뭐, 세렌은 미래의 황제가  사람이니 공적인 일로 남자를 만나는 건 어쩔 수 없겠지만, 적어도 사적으로 친한 남자만큼은 없었으면 했다. 잘못하다간 정략결혼 엔딩이라는 파국이 찾아와 버릴 테니까······.


불안한 얼굴로 남자를 바라보았다. 서글서글한 인상과 상당히 큰 키가 어우러져, 꽤나 인기가 많을 상이었다.

뭔가 불안감이 엄습해오는 가운데, 남자가 세렌에게 손을 내밀었다.

"나는 샤오리드 아슬라 룽, 무예과 5학년이야. 만나서 반갑다, 마법과 신입생들."

남자가 웃으며 자기소개를 했다.

그리고, 나는 일순간 얼어붙어 남자를 확장된 동공으로 바라보았다.


"······룽 공작가?"
"그래. 뭐, 둘째라 계승권은 없지만서도."

남자가 고개를 으쓱하며 티없이 맑은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나는  미소에 등줄기에 소름이 확 돋으며 심장이 벌렁벌렁 뛰었다. 조그마한 내 심장의 박동수가 두 배 정도는 빨라진 것 같았다.

샤오리드 룽.
바른의 유서깊은 명문가, 룽 가문의 차남.


 가문에는 먼 옛날에 있었던 붉은 용의 피가 전해진다고 하며, 그 피를 이은 자들은 어딘가에 용의 형상이 드러난다고 전해진다.

"······붉은 용의 흔적을 보고싶은 눈치구나."

내가 뜨끔해 고개를 번쩍 들자, 샤오리드는 작게 웃으며 팔뚝을 걷었다. 흘러내리는 로브 안쪽에 붉은 비늘이 돋아나 있었다.

"내게 나타난 붉은 용의 흔적은 이 정도 뿐이야. 별거 없어. 누님 쪽이 오히려 꼬리가 길게 뻗어있어 눈에 확 띄는데."


샤오리드는 보여줄게 없어 미안하다는듯 쓴웃음을 지었다. 하지만 나는 그것으로 충분했다. 설마하던 것을 확신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백합황녀에서 나온 샤오리드라는 이름을, 나는 똑똑히 기억하고 있다. 등장은 비록 단 한 번 뿐이었으나, 너무나도 강렬하고 쓰라리게  속에 각인된 그 이름.


에필로그에 나온, 세렌의 정략결혼 상대가 바로 샤오리드 룽이었다.

"정중한 인사 감사합니다. 저는 세리ㄴ─"


샤오리드에게 손을 내밀고 있던 세렌을 확 잡아 끌었다. 그리고 세렌의 옆으로 찰싹 달라붙어 팔 한쪽을 잡아 안았다.


"위, 위즈? 이게 대체 무슨······."
"가요. 세렌."


그리고, 당황하고 있는 세렌을 있는 힘껏 잡아 끌었다.

"하지만, 아직 인사를 하지 못했어."
"됐으니까, 빨리 가요!"

"급한 일이 있는거야?"
"친한 척 하지 마요!"


안간힘을 다해 세렌을 잡아 끌던 나는 샤오리드를 향해 으르렁대며 눈을 매섭게 떴다.

절대로, 절대로, 절대로.
세렌과 가깝게 두지 않아. 무슨 일이 있어도, 내 눈에 흙이 들어가도, 아니, 내가 암매장을 당하더라도 가깝게 두지 않겠어······!

"위즈! 무례한 짓이다. 그대가 어째서 그러는 지는  모르겠지만, 실례이니 사과하는게 옳아."

세렌이 나를 타일렀다. 내 마음이라고는 하나도 모르는 세렌이 야속하기 짝이없었으나, 어쩔수 없었다.


"그냥 가요, 세렌─!"
"적어도 통성명은 끝내야 예의다, 위즈."

위즈는 바둥거리는 나를 한 손으로 제지한 뒤, 샤오리드에게 살짝 고개를 숙였다.

"제 친우의 무례를 용서하십시오. 저는 세리나 바른, 마법과에 적을 두고 있는 1학년 생입니다. 저의 부 학과인 무예과를 여기있는 친우, 위즈 율릿과 함께 견학중이었습니다."
"세리나, 바른······?"

자기소개 하지 말라니까요, 세렌······!
내 속이 타들어가는 것도 모르는 세렌은 샤오리드의 반문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샤오리드는 방긋 웃으며 세렌에게 다가갔다.


"그런가, 누님에게 한방 먹였다던 그 열 살 짜리 황녀님이 벌써 하비셜에 입학한 거구나!"


그리고는 더 없이 상쾌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누님이라 하심은."
"기억에 없을 수도 있어. 누님은 너를 32강에 만나서 패배하셨거든. 그것도   합만에 말야."

샤오리드는 고개를 끄덕이며 즐거운 듯이 중얼거렸다.


"열 살짜리 소녀에게 지고 돌아온 누님의 표정은 가관이었어. 아무리 영웅의 핏줄이라곤 해도, 열 살짜리가 성인을 그렇게 손쉽게 이겨버리는게 말이 되냐면서 길길이 날뛰었거든.
아, 그 때가 내 인생에서 제일 빛나던 때였는데······."
"그, 그러셨습니까."

샤오리드가 자신의 과거를 두서없이 풀자, 세렌이 수긍하며 멋적은 표정을 지었다. 그리운 과거를 회상하던 샤오리드는 이윽고 세렌에게 물었다.


"한 번, 대련해 봐도 될까?"
"······대련 말씀이십니까?"
"그래.. 비록 이기지는 못하겠지만, 너에게 조금이라도 버틸 수만 있다면 열 살 짜리에게 초살당했던 누님을 평생동안 놀려먹을 수도 있을 것 같거든."

전의에 불타고 있었다. 어떻게든 자신의 누나를 한 번이라도 이겨먹겠다는 남동생의 의지가느껴지고 있었다.


더더욱 마음에 들지 않았다. 나를 못 잡아먹어서 안달이었던 여동생의 눈을 보는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세렌, 받아주지 말아요. 그냥가요─"
"아니, 대련하겠다."
"세렌?!"
"정말? 좋아, 당장 대련장 잡아야겠다. 친구들이 좀 구경하러 올 수도 있는데, 괜찮아? 비공개 대련장으로 잡을까?"
"아니요. 폐가 안 된다면, 공개 대련으로 부탁드립니다."
"그래주면 고맙지. 알았어, 그렇게 할게."


만류하는 나를 세렌이 바라보았다. 그리고 작은 미소를 지으며,

"그대에게 멋진 모습을 보여줄  있는 기회야. 놓치지 않아."


라고, 잘 들리지 않는 말을 중얼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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