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6화 〉5. 어쩌면 메인빌런 보다도 더 흉악할 (2)
"······."
팔짱을 낀 채 옆을 홀깃 바라보았다.
그 곳에는 한 남자가 칼을 갈고 있다. 가벼운 경장을 착용한 채 들뜬 기색이 역력한 남자. 길고 붉은 머리카락을 귀 너머로 정리하고 있는 모습은 그 자체만으로도 품위를 발했다.
남자의 주위에는 사람들이 몰려있다. 무리의 구성원은 주로 5학년이지만, 이따금 4학년과 3학년으로 보이는 사람들도 섞여있다. 하나같이 남자에게 호의를 가진 모습이다.
샤오리드 룽.
바른의 명문가로서의 출생과 그 자체로 선연한 기품있는 외모, 심지어 인망까지 넘쳐나는 남자.
······그래서 더욱 마음에 들지 않았다. 과연 바른 제국 안에서 저 남자보다 더 좋은 신랑감을 찾을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슥, 슥. 검은 도신이 날카로운 빛을 발하자, 샤오리드는 숫돌을 가지런히 정리한 후 자신의 검집에 흑도를 꽂아넣었다. 그리고 일어서서 내게 다가왔다.
"후우. 네가 보기엔 어떤 것 같아?"
"······말 걸지 마요."
"이거 참, 혹시 우리 전에 만난 사이었어? 내가 무슨 잘못이라도 했었던가?"
샤오리드가 멋적은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지만, 나는 여전히 팔짱을 낀 채 고개를 돌렸다. 주변의 기색이 조금 흉흉해졌다.
"음······ 아무리 생각해봐도 너처럼 귀여운 애는 본 적이 없는 것 같은데."
"어린애 좋아해요?"
"응. 누나가 너무 왈가닥이어서, 여자든 남자든 동생 한 명 정도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거든."
샤오리드가 천진난만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뜻 아닌데.
반박하기가 애매해 질 정도로 산뜻한 미소를 짓고 있어서 말꼬리를 잡기가 애매했다. 뭐 이리 대책없이 성격 좋은 남자가 다 있나 싶었다.
"율릿 가라고 했었지······ 으음, 바른 남부였던가. 그 쪽 영지를 지나가 본 적이 있던 것 같기도 하고, 애매하네."
남자가 기억을 더듬더니, 나를 힐끗 바라보며 쓴웃음을 지었다.
"뭔지는 몰라도 진짜 내가 잘못을 하긴 한 것 같네. 기억에 없어서 미안."
그리고는 대뜸 사과를 했다.
"······갑자기왜 사과를 해요?"
"그렇지만, 네 표정이 꼭 원수를 보는 것 같았거든. 누님을 바라보던 내 표정이랑 겹쳐보여서 사과를 안 할 수가 없더라."
"딱히 그 쪽이 잘못한 건 없는데······."
"그래? 그럼 다행이고······ 어라, 이유 없이 미움받는다고 생각하니까 좀 슬퍼지는걸."
샤오리드가 표정을 찡그렸다. 곁눈질을 하던 나는 대체 뭐 하는 사람인가 싶어 경악한 얼굴로 샤오리드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아, 이제서야 제대로 봐 주네. 다행이야."
샤오리드가 은은한 미소를 지었다.
비꼬는 건가 싶었지만, 표정에 담겨있는 진심을 보아하니 그것도 아닌 모양이다. 어떻게 사람이 저렇게 착할 수가 있나 싶어, 나도 모르게 질문이 튀어나왔다.
"사람이 왜 그렇게 착해요?"
"유들유들하다는 이야기는 많이 듣는데······ 뭐, 착하다고 할 정도까진 아니야."
"제가 지금 돈 빌려달라고 하면 줄 거에요?"
"어디보자······ 지금 있는 돈이 324바른화밖에 없네. 필요하다면 빌려줄 수 있지."
324바른화.
내가 한달에 받는 용돈이 100바른화이니, 대충 세 달 치 용돈이다.
아무리 공작가 아들이라지만. 아무리 우리 아버지가 다른 귀족가에 비해 검소한 생활을 강조하신다지만.
오늘 처음 본 사람에게 선뜻 빌려줄 만 한 금액은 절대 아니었다.
"······호구에요?"
"내 별명 어떻게 알았어? 신입생이 알 정도로 유명했던가?!"
내가 믿기지 않는다는 얼굴로 묻자,샤오리드가 오히려 눈을 크게 뜨며 반문했다.
저렇게 경악한 표정을 지어버리면 오히려 내 쪽에서 할 말이 없어지는데······.
적대감을 유지하기가 힘들어졌다. 차라리 악당이었으면 대놓고 미워해도 마음이 편했을 텐데, 하필 착한 사람이어서.
그래도 정신 차려야 했다. 저 사람은 미래에 세렌과 정략결혼하게되는 남자. 나에게 악몽을 선사한 에필로그의 원흉.
아직도 그 에필로그만 생각하면 몸이 덜덜 떨리고 숨이 콱 막히곤 한다.
어떻게 해서든지 그 결말만큼은 막야야 했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기필코.
"······황녀님께서 조금 늦어지신다는데."
"응? 무슨 일 있대?"
샤오리드가 묻자, 세렌을 데려갔던 무예과의 여자 상급생이 어깨를 으쓱하며 대답했다.
"중갑을 착용하고 싶으시대서."
"중갑을? 대련인데 그냥 경장이 낫지 않나······?"
"중갑이 더 멋있다나······ 모르겠어, 아무튼 시간이 좀 걸릴 것 같아."
샤오리드가 그렇구나,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주변을 바라보다 지나가던 3학년을 발견하고는 목소리를 높여 그녀를 불렀다.
"오, 로이아!"
"······무슨 일인가요, 샤오리드 선배."
잘 못 걸렸다는 듯 인상을 찌푸리고 있는 소녀였다. 푸른 머리카락을 짧게 친 소녀는 대련이라도 마치고 온 건지 완전무장을 하고 있는 상태였다.
로이아. 어디선가 들어본 이름인데.
내가 고개를 갸우뚱거리고 있는데, 샤오리드가 로이아에게로 다가가 물었다.
"마침 잘됐다. 대련 한 번 하지 않을래?"
"······무슨 일입니까. 제가 대련신청을 해도 번번히 도망다니기만 하던 사람이?"
"시간도 남겠다, 몸 좀 풀고 싶거든."
"저는 몸 풀이정도 밖에 되지 않는다는 겁니까······?"
로이아가 눈썹을 꿈틀거렸다. 샤오리드는 그건 아니라며 고개를 저었지만, 로이아는 오히려 그것이 더 짜증난다는 눈치를 팍팍 내며 샤오리드에게 말했다.
"생각을 고쳐드리도록 하지요. 이번에야말로 이길겁니다, 샤오리드 선배님."
"고마워, 대련해준다는 거지?"
"준비는 마치셨겠죠."
"물론."
샤오리드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로이아가 대련장으로 들어가 검을 빼들었다.
"단회전, 생사결 대련 어떻습니까."
"생사결이라, 강하게 나오네."
샤오리드가 쓰게 웃으며 대련장에 따라들어갔다. 그리고 대련장의 양 모서리에 비치되어있는 단상에서 구슬 하나를 꺼냈다.
보라색 구슬이었다. 반대편에 있던 로이아 역시 보라색 구슬을 꺼내들었고, 두 사람은 동시에 구슬을 앞으로 내밀며 외쳤다.
"현인의 눈 아래에 부끄럽지 않을 승부를."
"생사결. 이는 소중한 것을 지킬 힘을 얻고자 벌이는 싸움이니."
"단회전. 이 결투로, 많은 것을 깨우치라는 현인의 가르침을 받드노라!"
보랏빛 구슬에서 짙푸른 마력이 흘러나왔다.
깜짝 놀라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쪽빛마냥 푸른 마력은 안개처럼 두 사람을 감싸더니, 마치 코팅이라도 하듯 그들을 얇게 감쌌다.
그와 함께 대련장을 투명한 격벽이 차단했다. 하나 둘 대련장으로 모여들어 구경을 하기 시작했다.
"각오하십시오, 선배님. 손속은 없을테니."
"그동안도 봐 준적은 없었잖아?"
"크으─ 이번에는, 다릅니다!!"
로이아가 칼을 빼들어 샤오리드에게 달려들었다. 그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던 샤오리드는, 로이아가 대련장의 중간 즈음에 도달하자 검을 쥐었다.
그리고 미소를 표정에서 지웠다.
"흐읏─!"
로이아가 칼을 횡으로 베었다. 샤오리드는 검을 세워 그 공격을 면으로 막아내었다. 챙, 하고 면과 선이 충돌하며 파열음을 내었다.
"이번에는, 이길 겁니다······!"
"집중해야지, 로이아."
나긋한 목소리였으나, 표정만큼은 너무나도 엄한 모습이었다. 로이아는 그의 목소리에 신음소리를 내며 팔에 힘을 주었다. 천천히 샤오리드가 세웠던 검이 밀려나기 시작했다.
그렇게 로이아의 검이 샤오리드의 목을 향하기 직전. 샤오리드는 칼자루를 들어올려 검을 90도로 뒤집었다. 그러자 샤오리드의 검날을 밀어내는데에 온 힘을 가하고 있던 로이아의 칼 궤적이 틀어지며 허공을 갈랐다.
그런 로이아의 틈을 샤오리드는 놓치지 않았다. 뒤집었던 검을 치켜들어 샤오리드의 목에 검을 내리친 것이다.
"큭······!"
로이아가 반사적으로 몸을 틀었다. 그 덕에 샤오리드의 검은 로이아의 목 대신 어깨를 내리쳤고, 내리친 부분에 푸른 색 희미한 스파크가 튀었다.
"아직도 너무 힘이 들어가 있는걸."
로이아가 거리를 벌리고 분한 듯 헐떡이자, 샤오리드가 자세를 바로잡으며 말했다. 그리고 검을 오른쪽 어깨로 치켜들어, 그대로 로이아의 왼 쪽 어깻죽지에 찔러넣었다.
"이번엔 내 쪽에서 간다, 후배."
"읏?!"
로이아는 황급히 대각선으로 몸을 피하며 검을 휘둘렀다. 하지만 샤오리드는 그럴 줄 알았다는듯 검을 거두었다. 그리고 손잡이로 로이아의 가슴팍을 때렸다. 로이아에게서 다시 한 번 푸른 스파크가 튀었다.
"봐주지 않아. 뒤에 있을 중요한 승부를 위해서 감을 잡아야 하니까."
샤오리드의 공격에 튕겨져나간 로이아가 침음성을 흘렸다. 그리고선 다시 검을 잡아, 샤오리드에게 돌진했다.
살벌하게 엄습해오는 로이아의 검을, 샤오리드는 검의 면과 면이 맞닿도록 세워 쳐내었다. 그리고 로이아의 목을 노려 검을 찔렀다.
파란 색을 발하며, 로이아의 몸에서 마력이 크게 방출되었다.
로이아를 감싸 보호하고 있던 보호막이 깨져버린 것이다.
"······제길."
"너무 감정이 실려있잖아. 그러다간 재능이 썩겠는걸."
로이아가 입술을 깨물었다. 그리곤 말했다.
"······패배를, 인정합니다."
"즐거운 승부였어, 로이아."
그와 함께 대련장을 차단하던 격벽이 해제되었다.
대련이 끝난 것 같았다.
"이번에도 샤오리드가 이겼다!"
"역시 검술 하면 바른이지."
"두 살이나 어린 애 이겨놓고 좋댄다."
"3학년이라고 해도 그 로이아잖아. 샤오리드 말고 로이아한테 이길 수 있는 5학년이 있긴 해? 6학년에도 거의 없을텐데."
"누나쪽 룽이 졸업하니까 이번에는 남동생 쪽 룽이 씹어먹고 다니네······ 쳇. 두고 봐, 샤오리드가 졸업하면 그 다음은 로이아의 시대일 테니까."
"에이, 그 다음은 이번에 입학한 우리 황녀님 차례지."
"······그 쪽 황녀님은 주 학과가 마법과라며?"
"그건 뭐 그렇긴 하지만."
대련장을 둘러싸며 경기를 구경하던 학생들이 환호성을 보냈다. 샤오리드에겐 감탄을, 로이아에겐 격려를 보내고 있었다.
명승부라고 칭찬하는 분위기였다.
세 번 정도 칭칭대고 끝났던 것 같은데. 저 사람들은 혹시 나와 다른 걸 본 건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역시 나는 이런 쪽이랑은 잘 맞지 않는 것 같았다.
뒤에서 소란이 일어난 것은 바로 그 때였다.
"오셨다!"
"오, 뭐야. 저 사람이 너희 황녀님이냐?"
"말투가 불손하구나, 친구야. 대련 함 뜰래?"
"샤오리드랑 황녀님간의 대결 놓치면 네가 물어낼래?"
"아니, 그건 아니지."
웅성거림과 함께 인파가 양 쪽으로 갈라졌다. 그 길의 끝에는 중갑을 입은 여기사가 저벅저벅 걸어오고 있었다.
아름다운 머리보호구 뒤로 길게 뻗은 금발 머리카락과 보호구의 아래에서 찬란하게 빛나는 아이스블루 색 눈동자. 절그럭거리는 소리를 내며 몸을 유선형으로 덮는 은빛 갑옷에는 바른의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제 고집때문에 늦고 말았습니다, 선배님."
"오히려 몸을 풀 시간이 있어서 좋았는걸. 혹시 몸 풀 시간 필요해?"
"괜찮습니다."
"그럼 바로 시작하자."
세렌이 대련장으로 올라갔다.
"그러고 보니, 보호옥 쓰는 법은 알아?"
"괜찮습니다."
"······정말로? 보호옥을 쓰지 않으면 위험할 수도 있을텐데."
"반대로 묻겠습니다, 선배님. 저를 상대하시면서 생사결 보호옥 하나로 충분하시겠습니까?"
세렌이 샤오리드에게 물었다. 그러자 샤오리드의 미소가 살짝굳었다.
구경하고 있던 학생들이 술렁였다. 한 가지 놀라운 점은, 그들이 세렌의 말을 도발이 아닌 진심어린 걱정으로 받아들였다는 점이었다.
"······아니. 누님도 보호옥은 하나만 쓰셨지. 두 개를 쓰면 의미가 없어져, 괜찮아."
누군가가 걱정하며 세렌의 말에 동의했지만, 샤오리드는 쓰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보랏빛 구슬을 내밀었다. 그리고 말했다.
"현인의 눈 아래에 부끄럽지 않을 승부를.
생사결. 이는 소중한 것을 지킬 힘을 얻고자 벌이는 싸움이니.
단회전. 이 결투로, 많은것을 깨우치라는 현인의 가르침을 받드노라."
두 명이 동시에 외쳤던 아까의 힘찬 선언과는 다른 분위기였다. 홀로 선언하며 진지한 눈빛으로 구슬을 내밀고 있는 샤오리드에게선 비장함마저 느낄 수 있었다.
그때 옆에서 인기척이 났다. 대련을 마치고 내려온 로이아가 내 옆에서 대련장을 지켜보고 있었던 것이다. 대련장을 뚫어져라 바라보는 그녀의 눈빛에는 선망과, 부러움과, 조금의 질투가 감돌고 있었다.
"한 수 배우겠어, 황녀님."
"선배님에게 도움이 될 수 있기를."
세렌이 검을 꺼내어 쥐었다.
"간다!"
샤오리드가 검을 잡고 세렌에게로 달려들었다. 눈으로 쫒기조치 힘든 스피드였다. 로이아와 대련을 할 때와는 격이 다른 움직임이었다.
허나.
일순간, 세렌의 모습이 사라졌고.
그 뒤로, 파란 마력이 깨져 온 몸으로 방출되고 있는 샤오리드의 모습이 보였다.
"······말도, 안돼······."
로이아가 중얼거렸다. 나는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조차 모른 채 세렌을 깜빡깜빡 바라볼 수 밖에 없었다.
"조금은 멋있게 보였으면 한다만······ 어떤가, 위즈."
보호막이 깨진 채 허탈한 웃음을 짓고있는 샤오리드를 뒤로 한 세렌은 나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자랑스러운 양 어깨를 펴며 내게 말했다. 푸른 눈으로 내리꽃는 부드러운 시선이 내 심장을 직각으로 꿰뚫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어.
그러니까.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는 모르겠지만.
"멋있었어요, 세렌······!"
"그래. 그 말을 듣고 싶었다!"
세렌이 활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 황녀님 최고······!
"꺅, 갑자기 이게 뭐야? ······꽃?!"
옆에서 새된 비명이 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