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7화 〉5. 어쩌면 메인빌런 보다도 더 흉악할 (3)
노을이 어스름히 비치는 저녁, 리네스트 외곽에 위치한 작은 식당. 치킨의 향을 물씬 풍기는 음식이 눈 앞에 있었다.
바삭한 튀김옷 위를 촉촉하게 감싸는 붉고 걸쭉한 소스는 얼핏 양념치킨의 그것을 연상시킨다. 한아름은 되어보이는 거대한 접시 위에 놓여있는 튀김은 한 조각이 내 손바닥보다도 커서, 채 세 조각도 먹지 못할 것 같았다.
세렌이 한 조각을 집게로 들어 내 앞접시에 가져다 놓았다. 그리고 나이프를 들어 뼈와 살 사이를 능숙하게 갈랐다.
넓적한 뼈 위를 덮던 하얀 살결이 세렌의 나이프를 따라 부드럽게 갈라져나왔다. 바삭해보이는 튀김옷 아래에 드러난 속살은기름지면서도 촉촉해, 닭가슴살과 비슷한 비주얼임에도 전혀 퍽퍽해보일 것 같지 않았다.
"여기가 맛집이거든. 조금 후미진 곳에 있긴 하지만 맛은 보증할 수 있어."
"추천 감사드립니다. 자, 위즈. 들어보도록 해."
"······아?"
"정말, 그대는 정신을 어디에 놓고 다니는건지."
멍하니 가게에 앉아있던 내가 퍼뜩 정신을 차리자, 세렌이 쓴웃음을 지으며 접시를 내밀었다. 튀김조각이 먹기 좋은 크기로 잘라져 있었다.
"고, 고마워요, 세렌."
"오늘따라 그대의 상태가 조금 이상해. 열이 있는 것 같지는 않지만······ 혹시라도 불편한 것이 있으면 말하도록 해."
"그건 아니에요. 그게, 그냥······."
내 앞에서 미소를 짓고 있는 샤오리드를 힐끔 바라보았다. 식당 조명에 비치는 샤오리드의 황녹색 눈이 은은하게 빛났다.
나는 그의 시선을 피했다. 피할 수 밖에 없었다. 내 양심이 속삭이는 소리 때문이었다. 일어나지도 않은 일로 사람을 미워하려 들다니, 루아 때의 다짐을 잊기라도 한 거냐며 속삭이는 마음의 소리가 너무나도 아프게 내 양심을 찔렀다.
차라리 그가 나쁜 사람이었으면 했다. 고압적이고 탐욕스러운 일차원적인 사람으로 나타나, 마음 놓고 싫어할 수 있었으면 했다.
하지만 그는 악당이 아니었다. 백합황녀에서도 단 몇 줄 밖에 서술되지 않았던 그는 사실 착한 사람이었다. 아무리 틱틱대도 짜증 한 번 없이 받아주며, 승부의 결과에 깨끗이 승복하고, 심지어 처음 보는 후배를 위해 밥까지 사주는, 그런 착해빠진 사람이었던 것이다.
······그런 사람을 싫어할 수 있을 리가 없다. 두 말 할 것도 없이 좋은 사람이었다. 세렌의정략결혼상대만 아니었다면 말이지.
심란한 표정으로 고민을 하고 있는데, 로이아가 샤오리드에게 말했다.
"선배님. 저는 왜 데리고 오신 겁니까."
"이후 약속은 없지 않았어, 로이아?"
"그렇다고 해도 하필 바른의 황녀전하와 동석하는 자리에 초대하시다니요······. 저를 제외하면 모두 바리쉬가 아닙니까. 리베리쉬인 저로서는 조금 가시방석에 앉은 기분마저 듭니다."
"여기서는 바리쉬니 리베리쉬니 따지지 말자구. 다 내 귀여운 후배들인걸?"
"윽······ 징그럽습니다. 조금 떨어져 주세요."
"너무해, 로이아. 나 조금 상처받았을 지도 모르겠는데."
"대련장에서의 보복이라 생각해주시죠."
"아, 혹시 삐진거야?"
"삐지지 않았습니다!"
구석에서 음료수를 홀짝이던 로이아가 음료수잔을 식탁에 내려놓으며 인상을 찌푸렸다. 하지만 샤오리드는 그런 로이아를 즐거운 듯 바라보며 미소짓고 있었다.
사이 좋은 선후배 관계였다.
그래. 몇 년 동안이나 이어진, 그런 느낌.
"두 분께서 어떤 관계인지 여쭈어 봐도 되겠습니까?"
세렌 역시 나와 비슷한 감상을 느낀 것 같았다. 세렌이 입을 냅킨으로 한 차례 닦으며 묻자, 샤오리드가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반문했다.
"글쎄. 어떤 관계 같아?"
"······선배님. 괜히 이상한 소리를······."
"왜, 재밌어보이잖아."
샤오리드가 고개를 으쓱했다. 그러자 세렌은 잠시 고민하다, 살짝 우물쭈물해 하며 말했다.
"······혹시, 연인 관계라던가······."
"아닙니다?!"
탁자를 치고 일어서며 로이아가 비명에 가까운 부정을 내뱉자, 좁은 가게 안에 로이아의 목소리가 울려퍼졌다. 로이아는 따가운시선을 받고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푹 숙였다. 그리고는 원망스러운 눈빛으로 샤오리드를 바라보았다.
"어, 어째서 제가 이런 능글맞은 남자와 여, 연인이라는 겁니까······. 모욕입니다. 모욕이에요. 아무리 바른의 황녀전하라고 해도 묵과할 수가 없습니다······!"
"아하하, 그렇게 싫어할 것 까지는 없잖아. 황녀님도 장난으로 말했을걸. 그렇지, 황녀님?"
샤오리드가 웃으며 세렌에게 말을 넘겼다. 그러자 당황한 얼굴로 사과를 준비하던 세렌은 잠시동안 멈칫 한 후 고개를 끄덕였다.
"무, 물론 농담이었습니다. 기분 상해 하셨다면 죄송합니다."
"······그, 그렇, 그렇습니까. 농담이셨습니까. 농담, 농담. 그러시다면야, 알겠습니다······."
뻣뻣하게 고개를 끄덕이고 있는 로이아의 얼굴은 새빨갛게 달아오른 상태였다. 샤오리드는 그런 로이아를 귀엽게 바라보고 있었다.
뭐라고 할까. 이거.
두 사람, 생각보다 잘 어울리는데······?
번뜩 하고 촉이 왔다. 그러고 보면 두 사람은 꽤나 많은 부분이 어울렸다. 짙은 붉은색 긴 장발을 가진 샤오리드와 옅은 푸른색 숏컷을 하고 있는 로이아. 부드러운 성격을 가진 샤오리드와 딱딱한 성격을 지닌 로이아.
나는 로이아를 조금 떠보기로 했다.
"로이아 선배. 샤오리드 선배랑 언제부터 알고 지냈어요?"
"저 말입니까?"
"네."
한껏 열이 나는 얼굴을 식히던 로이아가 갑작스러운 질문에 깜짝 놀라 나를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잠시 머뭇머뭇거리다 입을 열었다.
"······1학년 때 동급생과의 마찰을 중재해 주신게 첫 만남이었습니다."
"어라, 내가 그랬어?"
"기억 안나시는 겁니까?!"
로이아가 깜짝 놀라 샤오리드에게 물었다. 하지만 샤오리드는 진심으로 미안하다는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미안. 그 때는 내가 워낙 누님께 치이고 살아서 잘 기억나는게 없네."
"······그런, 가요······."
로이아가 눈에 띄게 의기소침해져 눈을 내리깔았다.
오호라.
"소중한 기억이었어요?"
"소, 소중하지 않았습니다. 단지 철 없었던 제 옛날 이야기일 뿐이고, 샤오리드 선배님이 잊어버리셨다고 해도, 딱히, 상관은 없, 습니다······."
더더욱 의기소침해진 모습이었다. 세렌마저도 그 모습을 바라보곤 내게 무슨 일이 있는게 아닐까 하며 귓속말을 전해 올 정도였다.
이걸로 확실해졌다.
로이아는 샤오리드에게 꽤나 호감이 있는 상태다. 샤오리드도 로이아를 싫어하지는 않는 눈치였다.
그 모습을 바라보며 머릿속이 퍼즐을 꿰어 맞춘 듯 명확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그래. 샤오리드와 척을 져야하는 이유가 미래에 일어날 세렌과의 정략결혼 때문이라면, 샤오리드에게 다른 짝을 만들어주면 된다.
샤오리드도 호감이 있는 상대. 그리고 무엇보다, 샤오리드에게 호감을 가지고 있는 상대.
세렌과의 정략결혼이 이루어지기 전에 먼저 로이아와의 커플을 성사시키면 된다. 그렇게 된다면 나는 샤오리드를 이유 없이 싫어하지 않아도 되고, 짝사랑을 하고 있는(것으로 추정되는 중인) 로이아도 행복해지고, 아무튼 모두가 행복한 해피엔딩을 이룩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샤오리드 선배."
머릿속으로 계산을 마친 나는 샤오리드를 불렀다. 로이아에게 농담을 던지던 샤오리드는 나를 바라보며 고개를 으쓱 했고,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그에게 고개를 푹 숙였다.
"응?"
"아까는 틱틱대서 죄송했어요. 저와 친하게 지내주세요!"
"갑자기 무슨 일이야, 율릿 양?"
샤오리드가 진심으로 놀란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다시 한 번 고개를 숙였다.
"위즈라고 부르셔도 돼요! 그리고 아까는 정말 잘못했어요, 다시 한 번 사과드릴게요!"
"조금 별난 아이네······. 그렇게 사과는 하지 않아도 되는데. 그것보다 기쁘네. 응, 나도 잘 부탁해, 위즈 양."
샤오리드가 기쁜 듯 미소를 지으며 손을 내밀었다. 나는 그 손을 잡아 위 아래로 살짝 흔들었다.
"······무슨 꿍꿍이라도 있는 겁니까, 후배님."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로이아가 의심스러운 목소리로 내게 말했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없어요!"
"혹시라도 샤오리드 선배님을 이용하려고 하신다면······."
"로이아 선배님 허락 없이는절대로 그러지 않을게요!"
미소지으며 로이아에게 말했다. 그러자 로이아가 당황한 듯 말까지 더듬기 시작했다.
"제, 제 허락 말입니까······? 아니, 저는 샤오리드 선배님과 그런 관계가 아닙니다!"
"그런가요? 그래도 허락은 맡을게요!"
"아니, 저, 그게······!"
로이아가 당황한 듯 눈을 크게 떴다. 나는 그런 로이아에게 손을 내밀었다.
"마법과 1학년 위즈 율릿이에요. 잘 부탁드려요!"
"저, 저는, 무예과 3학년, 로이아 루드 에이트라고 합니다. 자, 잘 부탁드립니다, 율릿 가의 영애분."
"위즈라고 부르셔도 돼요, 로이아 언니!"
"어, 언니?!"
"상당히 붙임성이 좋은 아이였구나. 몰랐어······."
샤오리드가 나를 바라보며 감탄 섞인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나는 그를 돌아보며 환하게 미소지었다.
"그대의 기분이 조금 누그러진 것 같아 다행이야. 무슨 일이 있었나 하고 걱정했어."
식당에서 나오는 도중, 세렌이 내 귀에 고개를 숙여 속삭였다. 나는 그런 세렌에게 눈읏음을 지으며 작게 대답했다.
"세렌, 두사람 어울리지 않아요?"
"응? 뭐, 그렇다는 느낌은 든다만······."
"그쵸? 그렇죠? 두 사람이 이어지면 모두가 행복해질 것 같죠?!"
"그, 그런가······?"
"그럴 거에요, 분명히."
세렌에게 다짐하듯 고개를 끄덕이며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얼굴을 붉히며 당황해하는 로이아와, 그런 로이아를 부드러운 눈으로 챙겨주는 샤오리드.
분명 좋은 한 쌍이 될 것이다.
불편한 마음이 눈 녹듯 사라졌다. 정략결혼의 존재 자체를 없앨 수 있게 된 것이다.
마음이 날아갈 것 처럼 가벼워졌다.
"쥔장. 방향제 새로 달았나?"
"그대론데요?"
"맞나? 와 처음 맡아보는 꽃향기가 요맨치로 풀풀 풍기노?"
"저기 문 밖으로 나가고 있는 학생 뒤 좀 봐요."
"······하이고, 즈기가 다 꽃이가?"
"좋은 향이네요."
"마 글킨 하네."
가게 안에서 떠드는 소리가 어렴풋이 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