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0화 〉5. 어쩌면 메인빌런 보다도 더 흉악할 (6)
"위즈는 요즘 고민이 있는거야?"
기숙사, 달이 하늘의 중앙으로 기어오르는 시간.
침대에서 발을 모으고 생각에 빠져있는데, 맞은편에서책을 읽던 루아가 조심스레 물었다.
"그렇게 보였어요?"
"응. 눈썹을 모으고 있는걸."
"걱정하게 만들어 버렸네요······."
마음을 들켜버린 것 같아 얼굴을 붉힌 채 쓰게 웃었다. 표정에 그대로 드러나버린 모양이었다.
"어떤 고민이야?"
"그게, 인간관계가 참 어려워서요."
"······나 때문이야?"
루아가 살짝 얼굴을 굳히며 떨리는 목소리를 내었다. 그러자 나는 고개를 도리도리 내저었다.
"절대 아니에요, 절대로!"
"하지만······ 위즈는 요즘 나 때문에 고생하고 있잖아."
고생이라는 말에는 어폐가 있었다. 물론 리베리쉬들에게 간혹 눈총을 받은 적은 있었다. 루아와 다니면 좋지 않은 꼴을 볼 수도 있다며 으름장을 놓는 사람도 있었다.
하지만 고생이라고 말할 것 까지는 아니었다. 일단 메디아의 도움도 있었고, 세렌과 하스타의 도움을 받아 좋은 이미지를 쌓아갔으며, 결정적으로 루아가 눈총을 받을 짓을 최대한 자제해 적어도 바리쉬 사이에서는 온정의 눈길을 받는데에 성공했기 때문이었다.
리베리쉬 중에서도 조금이나마 호의적인 여론이 나오고 있으니, 성공적이라고 해도 과언은 아니었다.
"고생 아니에요. 그리고 루아의 일로 고민하는건 정말로 아니니까, 걱정하지 말아요, 루아."
"······정말?"
"네, 거짓말 아니에요."
굳어있던 루아의 얼굴이 조금 풀어졌다. 나는 그런 루아에게 미소를 지어보였다.
다행이야, 라고 안도하던 루아는 조금 고민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는 이내 책을 받치고 있던 둥근 곰 얼굴 인형을 집어들어 내게 내밀었다.
"테리 빌려줄까?"
조금 망설이면서도 인형을 내미는 루아. 나를 걱정하고 있는 것 같아 괜시리 마음이 따뜻해졌다.
"괜찮아요, 루아."
"그렇지만······."
"테리는 괜찮으니까, 대신 루아의 옆자리를 좀 빌려도 될까요?"
"······응!"
루아가 눈을 크게 뜨더니 눈꼬리를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자신의 옆자리를 작은손으로 톡톡 쳤다.
나는 루아의 침대로 올라가 벽에 등을 기대고 루아와 어깨를 맞대었다. 루아는 잠시 놀란듯 나를 쳐다보다, 이내 홍조를 띄운 채로 책에 시선을 옮겼다.
루아의 어깨를 타고 심장박동이 흘러들어왔다. 두근, 두근. 한 번 고동이 울릴 때마다 접해있는 어깨가 조금씩 따뜻해졌다.
나는 이불을 끌어올려 무릎을 덮었다. 그리고 루아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었다. 부드럽게 곡선을 그리며 흘러내리는 어깨는 따뜻하고편안해, 계속해서 그 상태에 있고싶은 마음이 절로 들었다.
복잡한 머리속이 조금 풀리었다. 사실 무예과의 두 선배들 간의 일에 대한 뾰족한 수는 생각나지 않았지만, 그래도 루아의 온기를 느끼고 있으니 마음이 조금 놓였다.
선선한 가을공기를 머금은 방 안에서 느껴지는 루아의 온기는 왠지 모르게 내 체온보다 살짝 높아서 기분좋았다. 일렁이는 램프의 불빛도, 창가로 새어들어오는 밤하늘의 푸른 빛도 어느 것 하나 거슬리지 않았다.
사락, 사락.
루아가 페이지를 넘기는 소리에 천천히 눈꺼풀이 감겼다.페이지 하나마다 눈꺼풀이 1mm정도는 내려오는 기분이었다.
자면 안 되는데. 어떻게 두 사람을 이을 수 있을지 생각해야 하는데.
그렇게 되뇌이며 잠을 쫒으려 했지만.
수마는 강했고, 끈질겼다.
루아의 어깨에 기댄 채 나는 아침까지 눈을 뜨지 못했다.
루아는 책을 덮었다.
책상 위에서 일렁이는 램프를 끄려고 손을 뻗었지만 닿지 않았다.루아는 작은 신음소리를 내며 자신의 왼쪽 어깨를 바라보았다.
분홍빛이 감도는 머리카락이 루아의 어깨 위에서 흘러내리고 있었다. 꽃향기가 배어있는 위즈의 머리카락은부드럽고 가벼웠다.
루아는 잠시 망설이다 위즈의 머리카락에 검지 손가락을 가져다 대었다. 베일을 건드린 것 같은 느낌이었다.
이상한 기분에 루아는 얼굴을 붉혔다. 새근새근 잠들어있는 위즈의 숨소리가 귀를 간질였고, 숨을 쉬며 조금씩 들썩이는 몸은 작고 부드러워 껴안고 싶을 지경이었다.
루아는 자신의 무릎 위에 올려놓았던 테리를 두 손으로 만졌다. 조금 낡았지만 부드럽고 깨끗한 곰인형, 테리. 그건 어머니가 루아에게 건네었던 마지막 선물이었다.
소중한 인형이었다. 위즈를 만나기 전 까지는 루아의 유일한 친구였고, 어머니의 사랑을 증명할 마지막 수단이었다. 루아는 자신의 가녀린 손으로 테리의 털을 훑었다.
위즈의 머리카락 만큼이나 가볍고 몽실몽실한 촉감이었다.
루아는 테리를 좋아했다. 차가운 시선을 받았을 때도, 경멸과 혐오의 시선을 한 몸에 담았을 때도 테리를 껴안고 있으면 조금이나마 기분이 나아졌다. 테리가 없었다면 그 시선을 버티지 못했을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루아는 문득 테리에게서 아쉬움을 느꼈다.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느껴본 적이 없었던 기분에루아는 스스로 깜짝 놀랐다.
테리는 달라진 점이 없었다. 부드러웠고, 안고 있으면 기분이 좋았고, 계속 안고 싶었다.
어째서 그런 기분이 생긴 걸까. 루아는 잠시 테리를 내려다보며 생각에 빠졌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답을 찾을 수 있었다.
루아는 위즈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이제는 테리만큼이나 소중한 루아의 친구였다. 루아의 과거를 알았음에도 물러서지 않고, 루아에게로 향하는 원망을 같이 견뎌주었던 둘도 없이 소중한 친구. 그리고, 루아가 하비셜에서 버틸 수 있게 된 가장 큰 원동력.
루아는 가지런히 모여있던 위즈의 손에 자신의 손가락을 조심스레 올려두었다. 매끄럽고 말랑한 위즈의 손등을 한 번 훑었다.
따뜻했다.
테리에게서는 느낄 수 없었던 온기.
다시는 느낄 수없을것이라고 생각했던 사람의 체온.
테리에게서 아쉬움을 느낀 까닭은 위즈에게서 따뜻함을 배웠기 때문이었다.
사람의 마음은 야속해.
루아는 중얼거렸다.
이내 루아는 위즈를 살며시 안았다. 작은 체구는 너무나도 가벼워서 옮기는데 그다지 힘이 들지 않았다.
루아는 위즈를 침대에 눕혔다. 그리고 램프에 박혀있는 마정석을 문질러 조명을 껐다.
루아는 어슴푸레한 달빛을 의지하며 방 안을 바라보았다. 푸른 빛이 내려앉은 기숙사의 침실은 언뜻 텅 빈 것처럼 느껴졌으나, 그 공간을 채운 작은 숨소리 하나만으로 전혀 외로워보이지 않을 수 있었다.
하얀 눈동자는 이내 곤히 자고 있는 위즈를 바라보았다. 새근새근 잠들어있는 위즈의 속눈썹이 조금씩 위아래로 움직이며 반짝였다.
고민에 빠져있던 표정은 사라지고, 그 자리를 편안한 미소가 채웠다.
루아는 위즈의 미소를 좋아했다. 가끔씩 피어나곤 하는 이름모를 하얀 꽃도 좋았고, 그 꽃에서 퍼져나오는 푹신한 향기도 좋았다.
어쩌면 위즈에게서 비롯된 모든 걸 좋아하고 있을 지도 몰라. 루아는 그렇게 생각하며 위즈의 곁에 몸을 뉘였다.
기숙사의 침대는 작지 않았으나, 두 명이서 쓰기엔 살짝 부족했다. 체구가 작은 위즈였지만, 널널하지는 않았던 것이다.
사실, 위즈의 침대가 비어있는 이상, 루아는 위즈의 침대를 사용하는것이 현명했다. 아니면 위즈를 옮기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었다. 위즈는 그다지 무겁지 않아서, 루아의 힘으로도 충분히 옮길 수 있었으니까.
하지만 루아는 위즈의 옆에 누워 그녀의 자는 모습을 바라보는 걸 택했다.
조금 불편하지만.
아침에 일어났을 때, 위즈가 조금 불편해 할 수도 있지만.
어쩌면 위즈에게 폐를 끼칠 수도 있는 행동이지만.
자신의 옆자리를 빌려주었으니 이 정도는 바란다고 해도 괜찮지 않을까.
루아는 그렇게 생각했다.
위즈를 만나기 전에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생각이었다.
루아는 죄인이었다. 리베른의 사람들에게도, 바른의 사람들에게도, 아버지에게도, 심지어 사랑하는 어머니에게도.
죄인이 무언가를 바래서는 안된다. 루아는 그렇게 생각하며 살아왔고, 앞으로도 그렇게살아갈것이라고생각하곤 했다.
그런 생각을 위즈가 바꾸어주었다.
루아가 죄인이 아니라고 단언하며, 루아를 안아주었다.
사실 루아는 아직도 가지고 있던 죄책감을 완전히 떨쳐버리지는 못했다. 그리고 떨쳐버려서는 안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다만, 언제까지고 죄인으로 살 것이라는 그런 비관적인 자조는 더 이상 하지 않을 수있었다.
루아는 잠들어있는 위즈의 뺨을 훑었다. 소중한 사람의 온기가손끝으로 전해져 와 가슴에 닿았다.
이 감각을 잃고싶지 않았다.
"좋아해, 위즈."
루아는 작게 속삭이며, 달빛에 흩어질 말을 입에 머금었다.
위즈에게 들려주기 위한 말은 아니었다. 아니, 오히려 위즈가 들었다면 부끄러워 죽어버렸을 것이라고 루아는 생각했다.
그럼에도 루아가 그 말을 꺼낸 이유는, 자신에게 확신을 주기 위해서였다.
위즈는 이제 자신에게 있어 누구보다도 소중한 존재라고.
잃고싶지 않은 사랑스러운 친구라고.
그 사실을 확신케 하는, 암시와도 같은 말이었다.
루아는 그날 위즈의 꿈을 꾸었다.
같이 수업을 듣고. 같이 산책을 하고. 같이 맛있는 것을 먹고.
평범한 일상.
그러나, 루아에게 있어서는 상상조차 용납되지 않았던,그런 하루.
위즈를 품에 안은 채 꿈을 꾸는 루아는 그 누구보다도 행복한 사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