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1화 〉5. 어쩌면 메인빌런 보다도 더 흉악할 (7)
"근래 들어 어째서인지 모르게 그대가 나보다 더 무예과를 좋아하는 것 같은 느낌이 들어."
"기분 탓이에요, 세렌!"
조금 떨떠름한 표정을 짓고 있는 세렌을 이끌고, 나는 무예과로 향했다.
오늘 아침, 루아의 품에서 깨어난 나는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고민하고 있을 필요가 없다는 사실을 말이다.
나는 머리가 좋은 편이 아니다. 안타깝지만 사실이었다. 애초부터 나는 머리 쓰는 일과는 인연이 별로 없었으니까. 잔머리를 굴려 해결하려고 한 사건이눈덩이처럼 불어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렇다면 나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어영부영 앉아서 고민만 하는 것이 나의 한계인가?
아니, 그렇지 않다. 사람의 한계는 고작 그 정도가 아니다.
어머니와 이런 대화를 나눈 적이 있다. 성적문제로 아버지와 싸우고 방 안에 틀어박혀있던 나에게 말해주셨던, 어머니 나름의 지혜가 담긴 대화였다.
─아들. 머리 좋은 사람들을 꼭 부러워 할 필요는 없어.
─나 놀려?
─엄마가 좀 푼수 같아도 그렇게 눈치 없는 사람은 아니다. 금쪽같은 아들내미를 왜 놀리겠어?
─그럼 뭔데.
나의 투정부리는 듯 한 말투에 으이그, 하고 타박하면서도, 어머니는 말씀하셨다.
─머리 좋은 사람들은 걱정이 많아.
─걱정?
─그래. 그 사람들은 세상을 보는 눈이 좀 넓거든. 우리는 길 하나 찾는 것도 벅찬데, 그 사람들은 미래로 향하는 길을 수십 개는 알고 있어.
─좋은 거잖아.
─유을아. 그게 꼭 좋은 건 아니다?
─왜?
─선택을 잘 못하거든.
어머니는 쓰게 웃으셨다. 그러더니 작게 웃으며 속삭였다.
─너희 아빠가 딱 그래. 대학교 때만 해도 꿈이 넘쳤던 이가 지금은 평범한 회사원이나 하고 있잖니. 어떤 길을 걸을지 우물쭈물하다가 결국 아무 길도 못 가버렸거든.
─하고 싶은 말이 뭔데.
나는 어린 마음에 괜히 틱틱대었다. 그러자 어머니가 말씀하셨다.
─그거에 비하면 유을이는 바보여도 착실하게 갈 길은 가잖아?
─아빠가 가지 말라고 하는데, 뭐.
─엄마는 응원해.
어머니의 그 한 마디에, 나는 턱 하고 가슴이 막혔었다.
─유을아. 머리가 나쁘면 몸이 고생한다는 말이 있다?
끄덕.
내가 말문이 막힌 채 고개를 주억거리자, 어머니는 말을 이었다.
─그런데말야. 나는 그게 꼭 바보를 욕하는 말 같지는 않거든.
─왜?
─아까도 말했지? 머리가 좋은 사람들은 선택을 잘 못한다고.
─응.
─그니까 그 사람들은 몸이 편한 게 아닐까?
눈살을 찌푸리며 어머니를 쳐다봤었다. 그게 무슨 말장난이냐고 따져묻고 싶었다.
하지만 어머니는 진심이었다. 진심으로 그런 말을 내게 하고 있었다.
─엄마는 그렇게 생각한다? 머리가 나쁘면 길을 발견하지도 못하고, 심지어 길이 아닌 곳으로 가서 다치고 오기도 하지만, 움직이지 않고고민만 하는 똑똑한 사람들에 비해선 낫다고 말이야.
─뭐야, 그게.
─머리 좋은 사람들 입장에서야 잘 이해가 안 가겠지. 고민 좀 하고 움직이면 고생할 일도 없을 텐데, 하고 비웃기도 할 거고.
그런데 유을아. 나 같은 사람을 비웃던 그들이 결국 움직이지 못한다면, 결국 그들의 비웃음은 합리화가 아니었을까?
진심이었다.
조금만 생각해봐도 모순이 수두룩하게 보이는 말이었지만, 왠지 모르게 빠져들었다.
어머니의 인생이 녹아있었기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그저 나와 어머니가 비슷한 사람임을 깨달아서였을까.
나는 어느새 어머니의 말에 빠져들어 버렸다.
─예전에야 고생 깨나 했지만, 뒤돌아 서보니 그렇게 느껴졌거든. 유을아, 너는 엄마가 행복해보이니, 아빠가 행복해보이니?
어머니의 말에 나는 두 분의 모습을 떠올렸었다. 항상 무뚝뚝하고 근심에 절어계셨던 아버지와, 언제나 웃음을 잃지 않고 있던 어머니의 모습.
─엄마요.
답은 정해져 있었다. 그러자 어머니는 기쁜 듯 씨익 웃더니 말씀하셨다.
─그렇지? 나도 그렇게 생각해. 그래서 이런 말을 하는 거야. 바보가 비록 몸은 좀 고생하더라도, 우유부단하게 고민만 하는 천재보단 낫다고.
─······응.
나는 고개를끄덕였다. 어머니가 내 수긍을 보고 만족스러운 듯 미소 지었다.
─결론은 뭐다? 유을이네 엄마가 아빠보다 나은 사람이다.
─왜 결론이 그렇게 나와.
─맞잖아?
어머니가 내 등을 한 대 찰싹 때렸다. 나는 울상을 지으며어머니를 노려봤다. 어머니의 손바닥이 가격한 등 쪽이 뜨거웠다.
그 뜨거운 기분이, 기분 좋게 온 몸을 덥히는 듯 한, 그런 기분이었다─
뭐······ 대충 그런 일이 있었던 것이다.
갑자기 엄마 보고 싶네.
하여간, 결론은 그거다.
앉아서 고민만 하는 천재가 되기보단, 움직이면서 구르는 바보가 되자는 것이다!
내 목표는 샤오리드 룽과 로이아 에이트 간의 커플 성립. 작전명은 로미오&줄리엣, 해결해야할 문제는 리베른과바른 양 제국간의 갈등 해결.
두 제국의 사이를 원만하게 한다는 것은 엄청나게 어려운 문제였다. 그렇지만 언젠가는 내가 해결해야 할 문제이기도 했다. 왜냐하면, 세렌과 메디아의 백합커플이 맺어지기 위해서는 필연적으로 두 제국간의 불화가 해소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어차피 해야 하는 일. 지금부터 시작한다고 해도 결코 늦지 않으리라.
"로이아 언니!"
"─또 오셨습니까, 후배님······."
그를 위한 첫 번째 미션. 로이아와 친해지는 것.
나는 그것을 위해 무예과의 대련장에 발을 들였다.
"후배님들께서도 할 일이 있지 않으십니까?"
미려한 턱선을 타고 흘러내리는 땀을 수건으로 닦으며 로이아가 말했다. 고된 훈련을 하고 있던 건지 숨소리가 굉장히 거칠었다.
"저는 괜찮습니다. 다만 위즈가 걱정인데······."
"저도 괜찮아요!"
걱정스럽게 나를 바라봐주는 세렌을 애써 떨쳐내었다. 그리곤 로이아에게 말했다.
"수련하는거에요?"
"다가올 월말평가에 대비해 검을 연마하고 있었습니다.
······저, 혹시. 실례가 되지 않는다는 전제하에 부탁드리는 겁니다만."
로이아가 멈칫하고 세렌을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살짝 얼굴을 붉혔다.
"검을 가르쳐주실 수 있겠습니까, 후배님."
갑작스러운 요청에 세렌은 놀란 듯 눈을 크게 떴다. 3학년이 1학년에게 가르침을 요청한 것에 대한 놀라움이었다.
"물론입니다, 로이아 선배님. 어떤 부분의 지도를 원하십니까?"
이윽고 세렌이 예의를 갖춰 로이아의 요청을 받아들였다. 그러자 로이아가 살짝 얼굴을 붉히며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는 자신이 들고 있던 검을 세렌에게 보여주었다.
"이번 시험의 주제는 검을 이용해 거대한 적을 물리치는 것입니다. 사용할 수 있는 검의 종류는 자유인데······ 혹시 주제에 맞는 검의 종류를 추천해주실 수 있겠습니까?"
"검기를 사용하면 다양한 상황에도 맞설 수 있습니다."
"······아직 수련이 부족해 검기를 끌어내지는 못합니다."
"아······ 무례를."
세렌이 멋쩍은 듯 주위를 둘러보았다. 분위기가 조금 어색해졌다.
그렇구나. 사막에서 보여줬던 세렌의 검기, 아무나 쓸 수 있는 게 아니었구나.
세렌 대단해.
나 혼자서 멋대로 고개를 끄덕거리고 있는 와중에, 세렌이 검 하나를 발견해 꺼내들었다. 세렌의 어깨까지 오는 거대한 검이었다. 세렌은 검을 몇 번 휘둘러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제 경험에 비추어 본다면 이 정도가 괜찮지 않을까 합니다만······."
"투핸더······ 저도 그 생각을 하지 않은 건 아닙니다만."
로이아가 시선을 피하고 우물거렸다. 세렌은 검을 가볍게 휘두르면서도 로이아를 의문스러운 눈으로 바라보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로이아는 다시 입을 열었다.
"······휘두르다보면 자세가 망가져 다음 자세를 취하기 어렵습니다. 무게를 견디기가 어려워서······."
"아."
세렌이 그럴 수도 있겠다는 눈빛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뭐지, 내가 잘 못 본건가. 세렌은 저 칼을 가볍게 휘두르던 것 같은데.
"속도전에는 자신이 있으십니까?"
"속도전이라면, 그래도 조금은 자신있습니다."
조금 자신감을 잃은 눈치의 로이아가 고개를 힘없이 끄덕였다. 그러자 세렌이 레이피어를 꺼내 로이아에게 건네주며 말했다.
"그렇다면 레이피어로 연습해 보는 것도 나쁘지 않습니다. 속도전과 장기전을 접목시킨다면 틀림없이 훌륭한 결과가 나오겠지요."
"······생각해본 적 없었습니다!"
로이아가 눈을 반짝이며 세렌을 바라보았다. 세렌은 그런 로이아에게 생긋 웃으며 말했다.
"거대한 괴물이 상대이니만큼, 저는 투핸더로 공격범위를 늘이기로 하지요. 저와 레이피어로 몇 번 대련해보시겠습니까, 로이아 선배님?"
"부탁드립니다, 후배님."
이글이글.
로이아의눈이 불타올랐다.
검을 잡은 자의 기백이라고 해야 할까. 투지라고 해야 할까.
아무튼 내가 참견할일은 아니었다.
두 사람이 마실 물이라도 떠 와야겠다.
해가 저물 때가 되어서야 대련은 끝이 났다. 온 몸이 땀범벅이 된 채 주저앉은 로이아가 벌컥벌컥 물을 마셨다.
"물 감사합니다, 위즈 후배님."
"뭘요. 두 분 다 수고하셨어요!"
"좋은 대련이었습니다. 그대로 연습하신다면 좋은성적을 내실 수 있을거에요."
"네······."
로이아가 자신이 사용했던 레이피어를 내려다보며 은은한 미소를 지었다. 그러다가 문득 고개를 번쩍 들더니 우리를 바라보았다.
"그러고 보니 보답을해드려야겠군요. 원하시는 게 있으십니까?"
번쩍.
로이아가 묻자, 나는 눈을 크게 떴다. 기회였다. 로이아와 친해질 수 있는 절호의찬스.
"보답이라니, 당치도 않습─"
"밥 사주세요!"
"위, 위즈?"
세렌의 말을 끊고 로이아에게 말했다. 세렌은 그런 나를 바라보며 고개를 갸웃거렸지만, 나는 세렌에게 한쪽 눈을 찡긋 감고는 로이아에게 말을 이었다.
"세렌도 좋아 할 거예요!"
"그렇습니까?"
"······아뇨, 저는······."
"세렌?"
"······네. 간단한 식사라도 같이 해주신다면 기쁠 것 같습니다, 로이아 선배님······."
내가 눈치를 주자,세렌이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로이아는 무언가 사명감에 불타오른 눈으로 우리를 바라보았다.
"그렇군요. 에이트 가의 명예를 걸고 대접하도록 하겠습니다. 평가가 끝나면 연락드리겠습니다, 후배님들."
"네!"
잘 알지도 못하는 검술을 끝까지 관람하며 응원한 보람이 있었다. 좋아, 이걸 밑거름으로 로이아와 친해지겠어······!
기숙사로 돌아가는 길. 하늘이 푸르스름해지기 시작하는 와중에 세렌이 입을 열었다.
"그대는 가끔 곤란한 행동을 하곤 해."
살짝 핀잔 섞인 말이었다. 사실 그럴 만도 했다. 오늘의 일은 어찌 보면 로이아와 친해지기 위해 세렌을 이용했다고 볼 수도 있었으니까.
"민폐였나요? 죄송해요······."
세렌을 위해 언젠가 뭐라도 해줘야겠다고 생각하며 고개를 숙였다. 그러자 세렌이 한탄하듯 중얼거렸다.
"으. 그대를 말리지 못한 내 잘못이기도 하지만······."
"다음에는 안 그럴게요, 세렌!"
세렌의 허리에 안겨들었다. 부드러운 머리카락이 얼굴을 간지럽혔다.
"······그래. 그렇다면 됐어."
세렌이 미소 지으며 나를 번쩍 안아들었다. 내 체구가 작아서 그런지, 나는 자연스럽게 공주님안기처럼 들어 올려졌다.
"아, 꺄아악?!"
"대신, 그대에게 벌을 주겠어. 기숙사에는 이렇게 돌아가도록 하지."
"세렌?! 부, 부끄러운데요?!"
"그게 벌이야. 그대는 나를 부끄럽게 했으니까."
"잘못했어요, 세렌! 내, 내려주세요!!"
"싫다."
세렌이 짓궂은 표정으로 나에게 눈짓했다.
아니, 저기, 그게. 굳이 따지자면 기쁘긴 한데. 기쁘기로 치면 하늘로 날아갈 것 같긴 한데, 세렌······!
나는 버둥거리다 이내 머리카락으로 눈을 가렸다.
주위의 시선이 너무나도 따가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