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5화 〉6. 시험, 그리고 또 다른 시험 (4)
비튜르츠를 피해 도망쳐온 동굴은 안으로 들어갈수록 넓어지는 구조였다.
깨끗한 물이 흐르고 있었고, 입구에는 수풀이 우거져 있어 비튜르츠에게 발각당할 염려도 적었다. 게다가 몇몇 종유석이 푸른 빛을 은은히 비추고 있어서 그다지 어둡지도 않았다.
은신처로 활용하기엔제격인 장소였다. 나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이 곳에 있는 사람은 우리 세 명을 포함해서 총열 명이었다. 다른 사람들은 어디갔는지 알수 없었다. 안전한 장소에 몸을 숨겼길 비는 것 말고는 다른 방법이 없었다.
"제길."
남자애 한명이 돌을 신경질적으로 던졌다. 흐르는 물 속으로 풍덩 빠지는 소리에 루아가 깜짝 놀라 몸을 떨었다.
그리고 이어서 날카로운 목소리가 남자애를 관통했다.
"짜증 좀 부리지 마. 여기에 너만 있는 줄 아니?"
"갑자기 시비냐, 에리스?"
"화를 낼 거면 밖을 돌아다니고 있는 비튜르츠한테 하던가. 그럴 용기도 없으면서 왜 성질이야?"
"뭐, 뭐?"
에리스였다. 그리고 남자애 쪽은 아마벤즈라는 이름이었을 것이다. 벤즈 큘러였나, 큘라였나. 내가 남자이름은 잘 못 외워서······.
하여간 벤즈와 에리스가 서로를 노려보자, 동굴의 분위기가 급속도로 냉각되었다. 가뜩이나 상황이 안좋은데 싸우기까지 하면 어쩌나 싶어, 나는 두 사람 사이에 꼈다.
"싸우지 말아요, 두 사람 다 너무 예민해졌어요."
"······율릿 양이지? 알았어. 내가 너무 과했네."
에리스가 한 순간에 표정을 바꾸며 고개를 끄덕였다. 날카로웠던 시선은 어디론가 사라져버린 채 단정하고 예의바른 얼굴을 하고 있었다.
갑작스러운 분위기 변화에 적응하지 못하고 눈을 크게 뜨고 있는데, 벤즈가 눈살을 찌푸리며 에리스에게 말했다.
"가식 떨지 마라, 에리스. 너 그럴 때마다 역겨운거 알아?"
"좀 가식이라도 떨지 그래? 그렇게 교양없이 말하면 부모님이 슬퍼하시잖니."
"죽고싶어?"
"적어도 너한텐 안 죽을 자신 있어."
다시 한 번 날카로운 시선이 교차했다. 이대론 안되겠다 싶어, 나는 에리스를 끌어당겨 동굴의 반대편으로 데려왔다. 에리스는 당황한듯 나를 바라보면서도 순순히 끌려왔고, 벤즈도 더 이상 에리스와 말을 섞고 싶지는 않았던지 고개를 홱 돌렸다.
다시 조용해진 동굴의 한쪽에서 에리스에게 말을 걸었다.
"조금 진정 됐어요?"
"흥분하거나 하지 않았어."
에리스가 팔짱을 끼고 벤즈쪽을 노려보았다. 나는 쓴웃음을 지었다.
"이런 상황에서 싸우면 안되잖아요. 다 같이 힘내서 비튜르츠를 잡으러 가야죠."
"······그 괴물을 어떻게 잡으려고."
에리스가 자신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
"진짜 괴물이야. 마법도 못쓰는 우리가 잡을 수 있는게 아니라구. 그, 그런 괴물을 다시 만나느니, 차라리 5개월동안 야간수업을 듣는게─"
"안돼요, 그건!"
에리스의 손을 잡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러자 에리스가 살짝 놀란듯 나를 바라보았다.
"그렇게 싫어?"
"수업을 좋아하는 사람이 세상에 어디 있어요······."
내가 울상을 짓자 에리스는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말야. 하비셜은 공부하러 오는 곳이잖아."
"학창시절에 공부만 하는건 좀 아니라고 봐요. 놀기도 하고, 친구도 사귀고, 추억도 쌓아야죠!"
"······어차피 난 자기 전 까지 공부하는걸."
에리스가 작게 중얼거렸다.
아, 설마 공부를 즐기는 타입인건가.
"······그렇다고 해도요, 야간수업을 들으면 자습할 시간이 줄어들잖아요? 공부하고 싶은 과목을 자유롭게 공부하지 못하게 돼요!"
"그건 그렇지."
에리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에리스의 손을 꼬옥 쥐며 말했다.
"그러니까 비튜르츠를 잡아야 해요. 그리고 그러기 위해서는 한 사람이라도 더 힘을 합쳐야 하구요. 도와줄 수 있어요, 플롯 양?"
"······알았어, 율릿 양."
에리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살짝 곤란해 하고 있었지만 다행히 내 뜻을 알아준 것 같아 기분이 좋았다.
나는 이어서 벤즈에게 다가갔다.
"기분은 어때요? 괜찮아요?"
내가 묻자, 벤즈가 험악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열 다섯살이라곤 하지만 꽤나 험상궂은 얼굴이어서 조금 무서웠다.
그래도 설득은 해야지.
"너도 나 놀리러 왔냐? 에리스랑 한패야?"
"조금 이상한 말이에요. 우리 모두 같은 편이잖아요?"
"······."
내가 정론을 이야기하자 벤즈는 입을 꾹 닫았다. 나는 그런 벤즈에게 말했다. 모름지기 설득이란 기세를 타야 하는 법. 지금이 적기다.
"지금 싸워봤자 의미 없는거 알죠?"
"······뭐. 쟤가 먼저 시비걸었어."
"에리스도 비튜르츠때문에 놀라서 그런 걸거에요. 여기있는 사람 전부 다 가슴이 떨어지는줄 알았잖아요? 저도 그랬구요."
벤즈는 못마땅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인정하기는 싫어도, 그 역시 비튜르츠가 무섭긴 무서웠던 모양이었다.
"저녁시간을 지켜야죠. 그 시간에 공부하긴 싫잖아요?"
"그렇긴 하지만······."
벤즈가 말끝을 흐리며 시선을 피했다. 나는 허리를 숙여 벤즈와 눈을 맞추었다.
"그러니까 도와주세요. 그 괴물을 잡으려면 한 명이라도 더 필요하니까요."
"······잘도 오글거리는 말 하네."
"기껏 화해시키려고 왔는데 말 너무하네요?"
"알았어, 화해할게. 하면 되잖아."
벤즈가 쓰읍 하고 혀를 차며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이걸로 동굴 안에 있는사람들은 어느 정도 규합했다. 이제 아티팩트를 모으고, 흩어진 사람들도 최대한 모으면, 일말의 실마리라도 얻을 수 있을거야······!
[생존자는 167명, 남은 시간은 60시간. 식량을 배급한다.]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데 별안간 눈 앞에 큼지막한 바구니 하나가 푱 하고 나타났다.
그런가. 벌써 12시인가.
나는 바구니의 손잡이를 잡고 하스타와 루아에게 돌아갔다.
일단 밥 먹고 생각하지 뭐. 금강산도 식후경이라고 하니까.
"왜 그렇게 열심이야?"
"네?"
샌드위치를 한 입 베어무는데 하스타가 내게 물었다. 상당히 뜬금없는 물음이라 나와 루아는 하스타를 향해 얼굴에 물음표를 띄웠다.
"뭔가 엄청 열심인 것 같아서. 너 플롯 양이나 큘라 군이랑 친한 사이 아니잖아."
"그렇긴 하죠?"
"그런 관계에 있는 사람한테 거침없이 다가가서 말걸고, 화해까지 시키고. 시험에 엄청 열심인 것 같아서."
하스타가 방울토마토 비슷한 주황색 과일을 입에 넣으며 말했다. 그러자 루아 역시 고개를 끄덕였다.
"대단했어, 위즈."
"아뇨, 뭘요."
루아의 칭찬에 어깨가 절로 으쓱으쓱 올라가는 기분을 느끼며 미소지었다. 그리고는 남은 샌드위치 조각을 한 입에털어넣어 삼키곤 입을 열었다.
"열심히 하는건 당연하죠. 야간수업을 듣고 싶지는 않거든요."
"그거 때문에 그렇게 열심히 하는거야?"
"네! 전 공부가 싫어요!"
"그 열정으로 시험기간에 조금만 더 열심히 공부했더라면 중위권은 갔겠다."
"마음 아파지는 말은 하지 말아주세요, 하스타!"
우는 시늉을 하며 하스타를 바라보았다. 그러자 하스타가 킥킥 웃으며 내 볼을 잡아당겼다.
"아, 또자바당겨써여, 하슈타아─!"
"귀여운 말을 하는게 요 입이더냐~"
볼이 늘어나서 제대로 말을 할 수가 없었다.
"······나도 해보고 싶어, 하스타······."
"응, 해볼래?"
하스타가 한 쪽 손을 루아에게 넘겼다. 오른쪽 볼은 하스타가, 왼쪽 볼은 루아가 잡아당기는 모양새가 되고 말았다.
"르아까지 하지 마라여어어! 하슈타가 나쁭거 가르쳐어어!"
"여길 잡으면 당하는 사람이 안 아프게 당길수 있다? 말랑말랑하기도 하고."
"위즈, 기분좋아~"
루아가 헤실헤실 웃으며 내 볼을 조물딱거렸다. 정말 행복해보이는 표정이어서 뭐라 하기가 애매해졌다. 자꾸 마음 약해지면 안되는데······.
차마 저항하지 못한 채 내 약한 마음을 원망하며 울상을 지었다.
점심식사를 마친 나는 다른 사람들을 불러모아 이야기의 운을 띄웠다.
"유클리드 교수님이 아티팩트를 곳곳에 배치했다고 하셨어요. 일단 비튜르츠를 피해서 아티팩트를 찾아보죠!"
"비튜르츠가 어디에 있는지 파악하는 것도 중요해. 만에 하나 비튜르츠에게 뒤를 밟혀서 동굴 위치를 들키면 끝장이야."
"다른 애들과 만나면 동굴로안내해야 돼. 열 명 가지곤 비튜르츠한테 못 당할 테니까."
"그럼 역할을 먼저 나누자. 몰려다니면 비튜르츠의 눈에 띄기도 쉬울 테니까."
다행히 회의는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저녁시간의 자유라는 대의 앞에 하나되는 학생들. 음, 정말 보기 좋은 광경이다.
"벤즈랑 체트 군이 달리기가 제일 빠르니까, 비튜르츠가 어디에 있는 지 알아봐 줘. 절대로 무리하면 안돼."
"그래, 뭐."
능수능란한 의견조율로 회의를 이끌어나간 에리스가 역할을 배정하기 시작했다.
"나랑 핀 양, 막스 군은 북쪽, 율릿 양이랑 소크타리에스 양, 비즈 양은 왼쪽으로 가서 아티팩트를 찾고. 덴트 군이랑 레드필트 양은 동굴에 남아서 경계를 부탁해."
깔끔한 인원배분이었다. 우리 모두는 고개를 끄덕였고, 이내 에리스는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그럼 가자. 시간은 유클리드 교수님께서 알려주시니까, 늦어도 여섯 시 전까지는 돌아와."
좋아, 보물찾기를 하러 가보실까? 내가 이래봬도 수학여행같은 때에 보물찾기 하나는 엄청 잘했거든!
"가요, 루아, 하스타!"
"너무 방방 뛰지 마, 넘어질라."
"열심히 찾자!"
두 명을 뒤에 남겨둔 우리는 동굴을 나섰다. 수풀 사이로 눈부신 햇빛이 우리를 마중했다. 아주 멀리서 키에엑 거리는 비튜르츠의 소리가 들려왔다.
"야, 가자. 저 쪽에 있나보다."
"하 씨, 무서운데."
"쫄?"
"당연히 쫄리지······ 아 몰라. 죽지는 않겠지 뭐."
비튜르츠의 위치를 파악하기 위해 남자 2인조가 달려나갔고, 그걸 신호로 나와 에리스는 양쪽으로 갈라져 탐색을 시작했다.
"저기 뭔가 있는데?"
"상자야, 위즈!"
"셋 하면 한꺼번에 여는 거에요? 하나, 둘, 셋─!"
"······꽝이라는데."
"시하 교수님, 너무하신 거 아니에요······?"
"조심해. 여기 잘못 빠지면 뼈도 못추리게 생겼어."
"늪······ 악어 나와?"
"악어는 없는 것 같아요, 아, 신발에 진흙 묻었어······."
"그러게 조심해야지······ 아, 꺄악?!"
"하스타?!"
"으윽, 왜 이런 데에 벌레가 있어? 기분나빠······."
"통신 찬스. 원하는 사람과 1회 화상통신할 기회가 주어집니다······?"
"좋은 걸까?"
"뭐······ 일단 챙겨두자. 어딘가에 쓰이겠지."
"공격 아티팩트는 어디 없는 걸까요······."
[생존자는 152명. 남은 시간은 54시간. 분발해라, 마법과.]
유클리드가 여섯 시임을 알렸다. 해가 뉘엿뉘엿 지고 있었다.
동굴에 모인 인원은 총 열 세명.
에리스 일행이 세 명을 발견한 덕에 인원은 늘어나 있었다. 비튜르츠의 동태를 파악하러 갔던 2인조도 무사히 돌아왔고.
이 정도면 그래도 성공적이었다.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