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7화 〉6. 시험, 그리고 또 다른 시험 (6)
잘못 잤나.
찌뿌둥한 아침이었다. 돌바닥에 대충 로브를 깔고 자서 그런걸까. 울퉁불퉁한 돌멩이는 그래도 다 골라내고 누웠다 싶었는데, 아침에 일어나보니 온 몸이 구석구석 쑤셨다.
"루아, 일어나봐요. 루아?"
"으응······."
루아가 눈을 감은 채 표정을 찡그렸다. 학교 가기 싫다고 투정부리는 아이같았다.
"루아도 참, 늦게 일어나면 안돼요······ 하암."
"너도 늦게 일어난 편이거든?"
루아를 흔들어 깨웠다. 우응, 하고 내 옆구리로 파고들려 하는 루아를 한 번 밀어낸 뒤, 눈을 비비며 하스타에게 인사를 건넸다.
"하스타. 안녕히 주무셨어요~"
"아니, 뒷목 아파."
내 옆에서 하스타가 엄살피우듯 목을 움츠렸다. 잠자리가 사나웠던 모양이다. 뭐, 하긴. 동굴바닥에서 두꺼운 천 하나 없이 잤으니 그럴 만도 하지.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하스타에게 스르륵 다가가 그녀의 양 어깨를 잡았다.
움찔, 하고 몸을 떨며 하스타가 나를 바라보았다.
"자, 잠깐. 위즈? 나 거기 엄청 뭉친 곳인데?"
"그래보여요."
싱그러운 웃음과 함께 고개를 끄덕이며 손아귀에 힘을 주었다.
"아, 꺄악?!"
주물럭 주물럭.
"에잇, 에잇."
"아, 진짜 아픈데, 악, 아악?!"
주물럭 주물럭.
"어제의 복수에요, 하스타아."
"아, 아, 나 진짜 아프다?!"
하스타의 비명소리덕에 비몽사몽하던 정신이 말끔해졌다.
좋아, 상쾌한 아침이다!
"······심장에 안좋다니까요?"
동굴 벽에 등을 기댄 채 땀을 삐질 흘리며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하스타와 에리스는 나를 향해 다가오며 흉악한 미소를 지어냈다.
"루아한테 애교 부리라고 안할거니까 이리 와 봐. 응?"
"저는요, 만약 탈락하더라도 최소한 비튜르츠의 공격으로 탈락하고 싶거든요? 심장마비로 탈락한다던가, 그런 어이없는 탈락은 싫어요······!"
"걱정 마, 율릿 양. 비즈 양의 말 대로라면 어제같은 일이 벌어지지는 않을거야."
에리스가 안심시키려는 듯 조곤조곤한말투로 나를 달랬다. 하지만 나는 어제의 기억 때문에 쉽사리 그녀들을 신용하지 못했다.
"안되겠다, 에리스. 우리가 가자."
"알겠어요, 비즈 양."
하스타가 나를 향해 성큼성큼 다가왔다. 에리스는 하스타의 뒤를 따르며 무언가를 중얼거렸다.
"무, 무슨 꿍꿍이에요, 하스타? 아침의 복수를 하려는 거예요?!"
"진짜 괜찮다니까."
하스타가 내 양 어깨를 탁 내리쳤다. 찰싹, 하는 소리와 함께 약한 충격이 몸전체에 울렸다. 아프지는 않았다. 뭐라고 할까, 정신이 확 깨는 듯 한 느낌이었다고 할까.
"율릿 양. 바른이 좋아,리베른이 좋아?"
"네?"
"말 해봐."
"어······ 일단 바른이죠? 우리나라니까요."
"알았어. 연결, 세리나 사할 바른!"
"······뭐라구요?"
에리스가 갑자기 세렌의 이름을 입에 담았다. 그러자 에리스의 가슴 높이에 통신구슬이 떠올랐다. 검은색의 거대한 화면이 구슬 위에 펼쳐졌다.
[연결 중입니다. 연결 중입니다.]
시하의 목소리였다. 나는 깜짝 놀라 하스타를 바라보았다.
"이, 이게 무슨 소리에요?"
"보면 알아."
[연결 중입니다. 연결 중 입띠다─ 아야, 혀 씹었어!]
······직접 말하고 있는거였어?
[연결이 완료되었습니다······ 으, 유클리드! 나 혀씨버써! 얼음─!]
[······뭐하는 겁니까, 학과장.]
시하의 목소리가 점차 줄어들었다. 그리고 검은색 화면에 노이즈가 끼더니, 다른 목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저, 정말 연결되는 겁니까?]
노이즈가 점점 선명해지며 화사한 금빛 머리카락이 화면에 나풀거리기 시작했다.
아침 햇살을 받은 천연의 금실이 태양빛을 받아 반짝였다. 치장할 여유가 없을 아침임에도 잡티 하나 없는 피부와, 보는 사람을 절로 미소짓게 만드는 아름다운 얼굴.
"세렌!!"
[······위즈?! 그대인가?!]
[뭐라구요? 위즈가있어요?!]
세렌과 메디아의 목소리였다.
나는 눈을 빛내며 화면 앞으로 달려갔다. 너무나도 반가운 얼굴들이 화면에 비쳤기 때문이었다.
"와, 세렌, 메디아!"
[아하하, 머리가 엉망이군. 좋은 아침이야, 위즈.]
[화, 화면 치우세요, 세리나 바른! 아직 몸단장을 하지 못했는데······!]
메디아가 화면 밖으로 휙 나가며 잠깐 소란이 일었다. 적잖이 당황스러운 목소리였다. 하루 정도를 못 만났을 뿐인데도 괜히 그리워져 가슴이 벅차올랐다.
"그 쪽은 괜찮아요? 어제 잠깐 봤을 때 비튜르츠가 한두마리가 아니던데······."
[아, 네스트 돌파 건인가. 오늘 외곽을 돌파할 생각이야. 비튜르츠들을 베어 넘기는 것에도 어느정도 익숙해졌으니, 오늘의 전투는 한결 더 수월하겠지.]
[얕보지 마세요. 네스트의 외곽을 지키는 비튜르츠는 일반 비튜르츠에 비해 몇 배는 강력한 정예병이니까요······.
그건 그렇고. 후후, 위즈. 잘 지냈나요? 메디아예요.]
화면 너머에 모습을 드러낸 메디아가 미소지었다. 나는 손을 방방 흔들며 메디아에게도 인사했다.
"메디아!"
[그쪽도 시련을 받고 있는 것 같더군요. 어떤 시험인가요?]
"비튜르츠 한 마리를 토벌하라는 거였어요······."
메디아와 세렌을 중심으로 원을 그리는 비튜르츠의 사체를 본 나는 침을 꿀꺽 삼켰다. 몇 마리를 해치웠는지, 도저히 셀 수가 없었다.
그녀들의 강함을 도무지 가늠할 수가 없었다. 우리는 한 마리에 300명이 쩔쩔매고 있는데······.
[어머, 그런가요. 비튜르츠를······.]
우리의 시련을 들은 메디아가 잠시 고민에 빠졌다. 그러자 세렌이 검을 뽑아 하늘로 치켜들며 미소지었다.
[집중해서 일점에 힘을 가하면 비튜르츠의 갑각도 부서지기 마련이지. 그대에게 영웅의 가호가 있기를, 위즈!]
[그렇게 말하면 위즈에게 퍽이나 도움이 되겠군요.]
[뭐, 뭐라고?!]
세렌이 갑작스러운 메디아의 핀잔에 인상을 찌푸렸다. 그리고는 나를 향해 메디아가 시비를 건다고 항의하는 시선을 보냈다.
······조용히 세렌의 시선을 피했다.
[위즈?!]
세렌에겐 미안한 말이었지만, 메디아가 설명해주는게 조금 더 나을 것 같았다. 집중해서 일점에 힘을 가하라니······ 우리가 그걸 어떻게 해요, 세렌.
[잘 들어요, 위즈. 비튜르츠의 약점은 단단한 갑각 사이의 연결부위예요. 그 부분에는 비튜르츠의 신경이 집중되어 있으니, 허리 부분의 연결부위에 타격을 입힐 수만 있다면 최소한 기동력은 봉쇄할 수 있을겁니다.]
"어렵네요······."
끄응. 머리를 긁적이며 한숨을 내쉬었다. 갑각의 사이를 공격할 만 한 수단이라고 해봐야 총 한자루가 전부였다. 여기서 사격을 배운 사람이 있을 리가 없으니, 정확도는 기대할 수 없을 정도였고.
[······나, 나도 그 정도는 설명할 수 있었어.]
[할 수 있으면서도 하지 않은게 더 나쁘다는사실은 알고 있나요, 세리나 바른?]
[끄응······.]
세렌이 할말을 잃은 채 분한 표정으로 입을 다물었다. 나는 쓴웃음을 지었다.
"알려주셔서 고마워요, 메디아. 세렌도 격려해준거잖아요? 열심히 할게요!"
[······그대가 기운을 차릴 수 있다면, 그것으로됐다!]
세렌이 밝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 이제 통신구슬의 효력이 다한 모양이네요. 위즈, 몸 조심해요?]
[그대라면 시련은 쉽게 통과할 수 있을거다. 힘내도록 해, 위즈!]
화면에 노이즈가 끼기 시작했다. 나는 그들에게 손을 흔들었다.
"시련 끝나고 봐요!"
[그래, 그 때는 내가 한 턱 쏘도록 하지─]
뚝.
화면이 어두워졌다.
[통신이 종료되었습니다. 구슬이 사라집니다☆]
시하의 목소리와 함께 구슬이 폭 하고 사라졌다. 말 끝에 별이 반짝이는 걸 보아하니 엄청 기분이 좋은 것 같은 모양이었다.
······재밌으신가.
그것보다 학과장이시면서 할 일도 없으신건가.
"그래도 반가웠어요······ 어라. 하스타, 에리스. 제 뒤에서 뭐하세요?"
"꽃 따고 있는데?"
내 뒤에서 꾸물거리고 있는 하스타와 에리스를 돌아보았다.
어느새 백합이 산처럼 쌓여 있었다.
세상에.
백합으로 이정표를 만들기. 내가 속으로 붙인 작전명, 헨젤과 그레텔.
결론부터 말하자면, 작전은 대성공이었다.
"동굴이 좁네."
"그러게요······"
와글와글.
열 세명이 나름 조용하게 사용하던 동굴이 100명 넘는 인원으로 빽빽하게 들어찼다.
[생존자는 132명. 남은 시간은 27시간.익일 아침 9시까지 정각 알림을 종료한다.
하루 남았다, 1학년. 분발하도록.]
유클리드의 알림을 기하여 2일차 아홉시가 되었다. 과연 발을 뻗고 잘 공간이 나올까 싶은 동굴. 루아가 혼란스러워 하길래 하스타와 함께 바깥쪽에서 한가로이 앉아있는데, 저 멀리에 유독 홀로 떨어져 있는 소녀가 보였다.
"······어라. 저 애, 혹시 배스 양 아니에요?"
"그러네. 맨 앞에 있었으면서 용케 버텼구나."
하스타가 고개를 끄덕였다.
케리엘 배스. 마법과를 이끌고 비튜르츠에게 돌격했다가 세 자릿수의 피해를 만들어낸 장본인.
사실 그녀의 탓으로만 몰아가는 건 조금 가혹할지도 몰랐다. 하지만 결과가 워낙 참혹했어야지.
씁쓸하게 고개를저으면서도 자꾸만 눈이 갔다. 아무도 없는 동굴의 구석에서 고개를 무릎에 파묻은 채 웅크리고 있는 모습이 여간 안쓰러운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하스타. 말 안걸어요?"
"내가?"
"룸메이트잖아요."
"그닥 친하지도 않아. 기초마법시간에야 옆자리지만, 그 외에는 같이 다니지도 않고."
"······으음, 그런가요."
팔짱을 끼고 케리엘을 바라보았다. 아까의 기운찼던 모습은 전혀 찾아볼 수가 없었다.
"가게?"
"어라, 어떻게 알았어요?"
"얼굴에 쓰여있거든. 신경쓰인다고."
"으······ 다녀올게요, 하스타. 루아."
하스타가 등을 툭 쳤다. 잘 해보라는 의미로 받아들이고, 작게 미소를 지었다.
"다친 곳은 없어요?"
움찔.
내가 말을 걸자, 케리엘은 고양이를 만난 쥐처럼 온 몸을 들썩이더니 그대로 얼어붙었다. 여전히 얼굴을 무릎에 파묻고 있었다.
"다행이에요. 앞 쪽에 있는 사람들은 다 탈락한 줄 알았는데."
케리엘이 다시 한 번 몸을 떨었다. 그리고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울고 있었다.
"······괘, 괜찮아요?"
당황한 내가 케리엘의 앞에 쪼그려앉자, 그녀는 다시 무릎에 고개를 파묻었다. 그리고는 몸을 들썩였다.
소리죽여 울고 있었던 것이다. 내가울린건가, 혹시 잘못한게 있었나 싶어 내 말을 되짚어 봤지만,딱히 걸리는게 없어서 더 난감했다.
"무슨 일 있어요, 배스 양?"
"······아무 일 없어."
젖은 채 잔뜩 갈라져있는 케리엘의 목소리는 전혀 괜찮아보이지 않았다. 나는 케리엘의 옆에 앉았다.
"그러지 말고 이야기해봐요. 네?"
"배스 가는, 훌쩍, 남에게 도움은 받지않아."
케리엘은 그 말을 끝으로 고개를 저으며 한층 깊게 얼굴을 파묻었다. 더 이상 이야기하고 싶지 않다는 기색이 역력했다.
······뭔가, 뭔가. 배스 가라고 하니까 뭔가 좀 떠오를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고.
괜히 신경쓰이는 일이 늘어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