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50화 〉6. 시험, 그리고 또 다른 시험 (9) (50/86)



〈 50화 〉6. 시험, 그리고 또 다른 시험 (9)

꿈을 꾸었다.

어두운 방이었다. 나는 침대에서 소설을 읽고 있었다.

안락하고 편안한 자취방. 현관문을 방패삼아, 각박한 현실에게서 숨을 수 있는 유일한 보금자리.


베개를 껴안고 엎드린 채, 액정을 문지르며 활자를 하나하나 읽어나갔다. 한글. 익숙한 문자다.

······익숙한 문자여야 했는데.

위화감이 일었다. 소설을 매끄럽게 읽을 수가 없었다.


한글을 해석해야 했다. 어떤게 주어고, 어떤게 서술어고, 어떤게 목적어인지 구분하며 읽어야 했다. 마치 초보자가 영문을 해석하듯, 단어 하나하나의 의미를 생각해야 했다.

머리가 아팠다. 스마트폰을 침대에 집어던지고 천장을 바라보았다.


어두웠다. 엉켜버린 머리 속 같았다.


소설을 읽다보면 그려지던 세계가 도무지 그려지지를 않았다.


어째서?

대체 왜 한글에 위화감이 드는거야?


"─어우, 여기 있네."

어두운 방에 빛이 비쳤다. 현관문이 천천히 열리며 그곳에서 빛이 들어왔다.

"침대에서 뭐해, 거긴내 자리라고."

기분나쁜 목소리였다. 처음 듣는 목소리에서  정도의 불쾌함을 느낄 수 있을 줄이야. 스스로도 깜짝 놀랄 정도로, 나는 그 목소리의 주인에게 적의를 품고 있었다.
현관문을 열어젖힌 여자는 방으로 거침없이 발을 들였다. 어째서 저렇게 멋대로 들어오는거지? 이 방은 나만이 들어올 수 있는, 나만의 보금자리인데─


"나가 봐. 네가 있을 곳은 여기가 아니잖아?"
"······당신, 누구에요?"
"그러게. 내가 누굴까."

여자가 쓰게 웃으며 머리카락을 꼬았다. 나와 같은 분홍색 머리카락이었다.


그러고 보면 여자는 나와 굉장히 비슷한 외모를 지니고 있었다. 다만 차이점은, 조금 더 나보다 성숙한 몸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일까.


170cm에 근접할 정도로  키. 요염하게 뻗어나가는 속눈썹과  아래의 하늘색 눈. 얇고 매끄러운 목선과 아래에서 선명한 유선형을 그리는 봉긋한 가슴, 그리고 길고 곧게 뻗은 다리.

목소리 만큼이나 마음에 들지 않는 모습이었다.


"것보다 내려오라니까. 도와줄까?"
"뭐, 아, 꺄아악?!"


여자가 나를 번쩍 들어올렸다. 나는 깜짝 놀라 여자의 팔을 붙잡았다.

"이거 놔요! 내려줘요!!"
"그러게 말오 할  진작 내려왔어야지."
"당신, 대체 뭐하는 사람인데 이래요?!"
"날 알려고 하는 것도, 나랑 엮이는 것도 좋을 일 하나 없다~ 나는 그 세계에 필요 없는 존재거든."
"······세계에필요가 없어요?"
"당연하지. 내 신념이다."


여자가 나를 들어올린 채 성큼성큼 걸어갔다. 몸이 자꾸만 흔들려, 어지러웠다.


"난 여기서 나갈 생각 없어. 설령 네가 죽더라도 말야."


여자가 나를 현관문 바로 앞에 내려놓았다. 환한 빛 때문에 눈이 부셔 뜨기조차 힘들었다.

"그러니까 임마.잘 살라고. 응? 황녀님들 정략결혼은 목숨을 걸어서라도 무조건 방해하고. 뭔 말인지 알지?"
"진짜 뭐하는 사람이에요, 당신······?"
"네가 그걸 알면의미가 없어지니까 말 안할거야. 훠이 훠이, 빨리 사라져, 위즈 율릿."

여자가 등을 살짝 밀었다.
현관문 밖으로 한 걸음을 내딛었다.

새하얗고, 따뜻하고, 부드럽고.

그리운 향기가 나는 곳으로.




"······결계가 닫혔습니다."
"스스로 수복되는 결계라니······ 허어, 교수 인생 20년 평생 이런 결계는 처음 보는데."

천천히 눈을 떴다.

낮선 천장이었다. 자취방도 기숙사도 아닌 고동색 나무천장. 호리등불이 걸려있는 천장에 이따금 그림자가 흔들렸다.


"일어나셨나요, 율릿 학생."
"······유고슬레인 교수님?"
"정신도 문제 없는 모양이구만. 이봐,율릿 양. 다른 불편한 곳은 없나?"
"코발트 교수님까지······."

침대의  옆에는 두 분의 교수님이 계셨다.


순간 등골이 송연해졌다.


"히, 히익?!"
"무슨 일인가요, 율릿 학생!"
"버, 벌써 보충수업이에요?! 하지, 하지만, 보충수업은 시험 일주일 후부터 시작하신다고······!"
"얼씨구, 숨 넘어가겠네."
"코발트 교수님은 보충수업같은 거 하신다는 말씀 안 하셨잖아요!! 가, 갑자기  이러세요! 아, 설마 이거 악몽인가?! 악몽인거죠? 그렇다고  좀 해주실래요, 교수님들?!"


사색이 된 채 이불을 쥐고 덜덜 떨었다. 그러자 교수님들은 나를 멍하니 바라보더니, 이내 어이없음과 안도가 교차하는 미소를 지었다.

뭐지? 보충수업의 연장을 암시하는 것인가?

안되겠다.당장 탈출이라도 해야겠어─

"보충수업은 하지 않아요. 그럴 겨를이 없거든요."
"······네?"

방을 둘러보며 탈출구를 찾고 있던 나에게 유고슬레인이 말했다. 나는 유고슬레인의 말에 잠시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이내 다시 물었다.


"보충 수업을······ 안 하신다구요?"
"그래요. 원래는 할 계획이었지만······ 하비셜 사상 초유의 사건이 일어나버리는 바람에."
"정말로요?"
"그래요. 율릿 학생에게 거짓말을 할 리가 없잖아요?"

유고슬레인이 미소지었다. 그리고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코발트에게 말했다.


"학과장님께 보고하러 가겠습니다. 율릿 학생의 옆을 지켜주세요, 코발트. 아직 부작용이 남아있을지도 모르고, 혹시 모를 습격이 발생할 수도 있으니."
"그래, 다녀와. 학과장님 지금 화가 단단히 나신 것 같으니까 조심하고."
"······분노 하실 만 한 일입니다. 저도 마찬가지구요, 코발트."
"그래."

코발트가 팔짱을 끼며 고개를 끄덕이자, 유고슬레인이 가볍게 목례한후 방에서 사라졌다. 나는 그런 유고슬레인을 바라보다 코발트에게 물었다.

"무슨 일이에요?"
"······이런. 당사자가 기억을 못하는 건가."

코발트가 한숨을 내쉬었다. 살짝 고민하는 눈치였다.

"교수님?"
"······일단 사건의당사자니까 알아두긴 해야겠지. 율릿 양, 어디까지 기억하고 있나?"
"기억이요?"
"어. 비튜르츠를 물리친  기억 나?"
"어······ 비튜르츠가 배스 양의 불마법에 쓰러지고, 뭔가 검은 파동이 흘러나와서, 큰 개가 나오고······."

 이후로 기억나는 건 없었다.


내가 고개를 젓자, 코발트가 침음을 내었다. 그리고는 말했다.

"역시 결계 안의 사람이었구만."
"결계요?"
"······미안, 흘려들어. 신경쓸거 없다."


내가 살짝 인상을 찌푸리며 고개를 갸웃거렸지만, 코발트는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는 내게 말했다.

"사건은 비튜르츠가 쓰러진 직후 벌어졌지.
비튜르츠의 체내에 마정석이 감춰져 있던거야. 초고난도의 마법이 담긴 마정석이 네 개나 발견되었어. 기척을 지우는 마법이 담겨 있는 마정석 하나, 마법을 해제하는 마법이 담겨있는 마정석 하나, 결계를 펼치는 마정석 하나, 그리고 포탈을 여는 마법이 담겨있는 마정석 하나."

코발트가 한숨을 내쉬었다.

"하나같이 어마어마한 마법들이지.특히 기척 은닉의 마법은 수준이 너무 높았어. 유클리드 부학과장 정도는 되야 해석할까 말까 한 초고난이도의 마법이었으니까. 마법이 담겨있던 마정석도 7석 이상의 마수에게서만 나오는 것이었고······ 뭐,  정도는 되니까 현인의 결계가 뚫린 거겠지만."

코발트가 허공을 가리키자, 찻잔 두 개와 작은 찻주전자 하나가 생겨났다.은은하고 달콤한 향이 났다.

조르륵.

코발트는 찻주전자를 기울여 찻잔에 차를 따랐다. 그리고  하나를 내게 건네었다.

"아, 감사합니다."
"그래."

홀짝.
은은하고 따뜻한 향이 몸으로 퍼져나갔다. 기분이 좋아서 절로 웃음이 나왔다.

코발트는 찻주전자를 책상에 내려놓았다. 그리고 이야기를 계속 이어나갔다.


"그렇다고 다른 마법의 수준이 떨어지는 것도 아니었지. 결계마법을 파괴하기 위해서 시하 학과장이 직접 손을 써야 했으니까. 나 정도 되는 마법사였다면 결계의 해제에만 며칠이 걸렸을지도 몰라."
"그, 그 정도에요?"
"그래. 인정하기는 싫지만."

코발트가 씁쓸한 표정으로 찻잔에 입을 가져다대었다. 까끌까끌한 수염 사이에서 이를 으득 가는 소리가 언뜻 들렸다.마법과의, 보조 교수도 아닌 정교수가 분한 표정을 짓게 만들다니, 대체 얼마나 대단한 건지 감조차 제대로 잡히지 않았다.

"아, 맞다. 다른 애들은요? 괜찮아요? 다친 사람도 있었던 것 같은데······."
"부상자는 전부다 치료한 뒤에 기숙사로 보냈지. 걱정 마, 기숙사는 유클리드 부학장을 포함한 일곱명의 교수가 지키고 있으니까."
"세렌이랑 메디아는요?"
"마찬가지로 기숙사에 있다.
마법과 1학년 뿐만이 아니야. 하비셜의 모든 학생이 기숙사로 돌아가 대기하고 있어."
"······그정도로 심각해요?"
"당연하지. 하비셜이 설립된 이후로 처음 학생이 습격을 당한 사건이니까."

코발트가 팔짱을 끼었다. 걱정과 우려가 가득 담긴 그의 눈동자에 나도 덩달아 기분이 심각해짐을 느꼈다.

"율릿 양이 심각해질 필요는 없어. 범인을 잡아낼테니까."
"······마차 탈취랑 연관이 있을까요······?"
"그건 조사해봐야겠지만 말이다."


코발트가 말을 아꼈다. 아무래도 짚이는 부분이 없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나는 눈을 감고 백합황녀의 기억을 다시 떠올렸다. 떠올려야 할 기억은······ 그래. 악역에 관한정보다.

백합황녀의 스토리는 크게 세 부분으로 나뉜다. 1학년에서 3학년까지 일어난 메디아와 세렌의 갈등, 4학년부터 5학년에 벌어진 흑막의 암약, 그리고 6학년때 벌어지는 대초원에서의 마수토벌전.

흑막에 관한 정보를 떠올려야 했다.


사실 백합황녀에서 흑막은 제대로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흑막이 잡혔다는 언급은 있었지만, 흑막의 정체는 밝혀지지 않고 맥거핀으로 남아버렸기 때문이었다.

그렇기에 나는 백합황녀의 곳곳에서 보이는 흑막의 발자취를 조합해야 했다.


평범한 교수의 실력을 뛰어넘는 강대한 마법실력.
두 황녀를 노린다는 명백한 목적성.
그리고,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잔혹성까지.


하지만 나는 이내 표정을 찡그릴 수 밖에 없었다. 백합황녀에서의 흑막은 세렌과 메디아가 4학년일 시점에 활동을 개시했다. 내가 흑막에 관한 경계를 그다지 하지 않았던 이유도 바로 그것이었다.


흑막이 활동하는 시간대가 3년이나앞당겨진 것이다.

어떻게 해야 하지.

갑작스럽게 찾아온 위협에 한숨을 내쉬었다.






푸른 월광을 일렁이는 불빛이 잡아먹었다.

마법과의 대회의실.


100여명의 교수가 앉아있는그 곳에는, 단지 펜대를 내려치는 소리만이 이따금 울려퍼질뿐이었다.

"왜 아무도 말이 없을까?"

탁.

마침내 시하가 펜대를 책상에 내치었다. 불규칙한 소음으로 유지되고 있던불쾌한 적막이비로소 깨졌다. 교수들은 숨을 삼켰다.


 쌍의 보랏빛 눈이 자신을 응시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호의는 커녕, 짜증과 불쾌함, 심지어 격앙마저도 녹아있는 눈빛이어서, 누구 하나 입을 열지 못했다.


"한시가 급하다. 보고하도록, 유고슬레인."


시하의 옆에서 유클리드가 유고슬레인에게 시선을 두었다. 시하의 격앙된 어조에 비하면 차갑고 무거웠으나, 그의 근간에는역시 시하와 같은 분노가 깔려 있었다.


사실  곳에 있는 교수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누구 하나 다를 것 없이, 크든 작든 마음 속에 분노를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들이 가르치고 보호해야  학생들이 습격받았다는 사태는 그들의 마음 속에 불을 지피기에 충분하고도 남았다.


그리고 그것은 유고슬레인 또한 마찬가지였다. 더욱이, 그가 직접 얼굴을 맞대며 가르쳤던 학생들이 습격당했다는 사실은 다른 교수들보다도 더 그를 분노케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고슬레인은 보고를 망설이고 있었다. 보고에 도출되어있는 결론이 스스로가 생각하기에도 너무나 터무니없었기 때문이었다.

"날 기다리게 할 셈이야?"

날카로운 힐난이 가슴을 찌르자, 유고슬레인은 그제서야 망설이고 있는 마음을 다잡았다. 그리고 시선을 천천히 움직여, 대회의실 중앙에 앉아있는 시하와 유클리드에게로 향했다.

100여년이라는 긴 세월동안 하비셜의 교수로서 재직해온  명의 대마법사.
또한 그들은 유고슬레인을 가르쳤던 은사이기도 했다.

두 시선과 마주하자, 유고슬레인은 침을 꿀꺽 삼켰다. 이제는 어엿한 교수가 되어 학생을 가르치고 있는 유고슬레인이었지만 그들의 앞에서는 아직도 학생인 것 같은 기분을 떨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천천히, 그리고 조심스럽게. 유고슬레인은 선생에게 훈계를 받는 제자의 심정으로 떨리는 목소리를 내었다.

"······먼저, 현장감식 팀의 결론이 틀렸을 수 있음을 분명히 인지하시고 이야기를 들어주시기 바랍니다. 저희의 짧고 부족한 식견으로 낸 결과이니 만큼, 비판의 눈초리로······."
"본론만 말해."

움찔.

시하가 질책하자, 유고슬레인은 몸을 한 번 떨었다. 그리고는 눈을 내리 깔더니, 약간 망설이는 듯 한 목소리로 말했다.


"······'하비셜 상층'과 모종의 연관이 있을 수도 있다는 결론이 나왔습니다."

스읍.


곳곳에서 한숨인지 모를 숨소리가 터져나왔다. 감식에 참여헀던 이들은 자신들의 주장에 대해 탄식했고, 감식에 참여하지 않았던 이들은 경악에 물들었다.

반응은 제각각이었으나 이유는 같았다. '하비셜 상층'이라는 단어의 무게를 누구 하나 모르는 이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상층이라고 했나."


유클리드가 굳은 얼굴로 턱을 매만졌다. 그러자 유고슬레인이 고개를 저었다.

"저, 저희의 견해가 틀렸을 수 있습니다. 의견을 모으면서도 확신하지 못했으니까요─"
"판단은 내가 해. 그런 결론을 내린 이유가 뭐야?"


시하가 말을 잘랐다. 그녀의 날카로운 보랏빛 눈에 유고슬레인은 온 몸이 관통되어버린  같은 착각마저 들었다.

"······근거는 크게 두 가지. 마정석에 설치된 마법의 수준과 마정석 그 자체입니다."
"계속 해."


시하가 팔짱을 끼었다. 그러자 유고슬레인이 허공에 두 개의 화상을 띄웠다. 연결이 끊기기 직전까지 학생들을 비추었던 화상옥의 모습과 비튜르츠의 사체에서 발견된  개의 마정석이었다.

"이건 마수 습격 당시의 상황입니다. 비튜르츠의 숨이 끊어짐과 동시에 마정석에 깃들어 있던 총  개의 마법이 연속적으로 발현되었습니다. 각각 해제, 차단, 그리고 연결의 성질을띄고 있었죠."

원형의 파동을 그려나가며 뻗는 검은 마력과 하늘 위로 솟구치는 희미한 푸른 마력, 그리고 보라색 스파크가 화상에 비쳤다.


"범인은 먼저 해제 마법을 통해 사정거리 안의 모든 마법을 해제시켰습니다. 그래서 학생들을 감싸던 보호옥과 전송옥의 효력이 사라졌죠.
그 다음은 차단. 학생들이 모여있는 공간을 바깥과 차단하는 결계를 생성하여 보호수정의 공격을 피했습니다. 마수를 자동 요격하는 현인의 보호수정이 움직이지 않았다는 것이 이를 증명하죠. 마지막으로 차단된 공간 안에 소환마법을 벌여, 4석의 마수를 불러내었습니다."


유고슬레인은 화상을 줄였다. 그리고 시하에게 말했다.

"마법의 연계 또한 훌륭하며, 마법의 수준 자체도 저희 교수진이 감당하기 힘들 정도로 매우 높습니다.이런 마법을 쓸 수 있는 자는 극히 드물죠. 대륙에서 꼽는다면 리베른 아이시아 변경공과 바른 에스파다 궁정백, 바른 파르나 변경공 정도이고, 하비셜에서도 학과장 이상······ 그러니까, 하비셜 상층에 기거하는 분들 정도만이이런 마법을 마정석에 새겨넣을 수 있을겁니다."

곳곳에서 침음이 터져나왔다. 유클리드 역시 미간을 살짝 좁히며 물었다.


"그것만이라면 조금 부족하다.  번째 근거는?"
"마정석  자체입니다."

유고슬레인이 미리띄워두었던 두 번째 화상을 확대했다. 안에서 마법진이 일렁이는 네 개의 마정석의 모습이었다.


"마정석의 감식 결과, 다른 마정석을 숨기기 위한 은닉마법이 새겨진 마정석은 8석급이며, 다른 마정석은 7석급으로 측정되었습니다."
"8석."


유클리드가 중얼거렸다. 유고슬레인은 고개를 끄덕이며 설명을 이어나갔다.


"7석급 마정석도 구하기 힘든 것은 마찬가지입니다만, 8석급 마정석은  제국의 엄격한 관리를 받는 희소한 자원입니다. 유통에도 엄중한 제한이 따르며, 그 목록 또한 철저하게 감독되고있지요.
······하지만, 이번 습격에 이용된  8석급 마정석은, 리베른에도 바른에도 기록이 남아있지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시하가 고개를 들었다. 유고슬레인은 잠시 망설이다 입을 뗐다.


"마정석의 유통이 기록되지 않는 곳이 단  군데 존재하지요."
"······그런가."


마침내 유클리드가 수긍했다. 시하 역시 인상을 찌푸렸다.

"하비셜 상층. 그 분들의 연구로 쓰이는 마정석은 베일에 감싸여 있습니다. 채취도, 사용도, 모두 직접 하시니까요."
"암시장에서 거래되었을 가능성은?"
"체드 교수가 페렐른에서 조사중입니다만, 일주일은 걸릴 겁니다."
"늦어."

시하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유클리드에게 말했다.


"상층으로 가겠어. 직접 담판짓고 올게."
"진심입니까?"
"하비셜 상층이든, 제국의 황궁이든 쳐들어가서 잡아낼거야.  학생을 건든 댓가, 똑똑히 치루게 하겠어."

시하가 로브를 걸쳤다. 흩날리는 로브자락위에 그녀의 길고 하얀 머리카락이 드리워졌다.

"양 제국에 내 이름으로 공문 보내. 불미스러운 일이 있었던 점에 대해 사과하고, 범인 색출에 협조해 달라고 해."
"그것으로 끝입니까?"
"아니, 하나 더."

유클리드의 물음에 시하가 검지 손가락을 치켜들었다. 그리곤 서늘한목소리로, 선언과도 같은 말을 내뱉었다.


"색출된 범인의 처벌은 하비셜에서 하겠다고 전해. 그게 변경공이던 궁정백이던."
"현인께서 난감해 하실겁니다."
"그럼 먼저 라이하빗 님을 찾아뵈어야겠네."


시하는  말을 남기고 대회의장에서 모습을 감추었다.
그 뒷모습을 한참동안이나 바라보던 유클리드는, 이내 회의를 해산했다.




부학과장실.

부드럽고 정중한 어조를 담은 공문의 작성을 마친 유클리드는 한숨을 내쉬었다. 부드럽게 풀어썼음에도 그 안에 들어있는 내용은 굉장히 무례한 것이어서, 어떤 반응이 되돌아올지 지금으로서는 알 수 없었다. 문제가 커지기 전에 범인을 잡아내는 수 밖에 없었다.


유클리드는 창 밖을 내다보았다. 푸른 달이 하늘의 중앙을 차지한 채 밝게 빛나고 있었다.


푸른 달빛이 내려앉은 하비셜 본관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유클리드는 방의 불을 끄고 그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부학과장의 자리를 맡게 된 이후로 일은 두 배 가까이 늘어, 철야가 예삿일이 될 정도로 고달파졌지만, 그럼에도 유클리드는 부학과장의 자리를 꽤나 마음에 들어했다. 다른 이유는 없었다. 그저 부학과장실에서 바라본하비셜의 풍경이 꽤나 멋스러웠기 때문이었다.


유클리드는 하비셜 본관의 상층부로 시선을 옮겼다. 그가 동경했던, 그리고 지금도 목표로 삼고 있는 하비셜의 상층은 언제나처럼 불이 켜져 있었다.

학과장의 자리에 올랐거나, 놀라운업적을 성취해낸 이들이 은퇴  오로지 연구만을  있도록 마련된 장소, '하비셜 상층'. 유클리드는 자신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 그 곳을 목표로 삼았다. 그의 연구를 완성하기 위해서는 하비셜 상층에 기록되어있는  많은 연구와, 설비와, 자원이필요헀다.

그런 하비셜 상층에 이미 발을 들인 선배들을 유클리드가 선망하는  그리 이상한 일이 아닐 것이다.


문득 유클리드는 마음한 구석이 불편함을 느꼈다.

존경하던 하비셜 상층이 학생 습격 사건의 흑막으로 지목받았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만에 하나, 교수들의 감식 결과가 사실이라고 한다면, 유클리드는 학생들을 지키기 위해 그들에게 칼을 겨눠야 했으니까.

유클리드는 복잡한 마음을 품고 한참동안이나 하비셜을 바라보았다.

하비셜의 회빛 외벽이 그날따라 음울하게 다가왔다.
유클리드 그 자신의 표정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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