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2화 〉7. 공학의 전당, 로페르 공작소 (1)
유고슬레인의 강의를 한 귀로 흘리며 노트에 펜을 끄적였다.
열심히 수업을 진행하고 있는 유고슬레인에겐 미안한 일이었지만, 내가 노트에 적고있는 필기의 내용은 사실 수업에 관한 것이 아니었다. 다름아닌 흑막에 관한 정보였다.
'페이크 최종보스. 작중 6학년 시점에 교수진의 수사와 황녀님들의 활약을 통해 검거. 직접적으로 이름이 나오지는 않음. 엄청 센 마법사. 진 최종보스인 10석의 마수를 페르그 대초원에 소환해내어 전 대륙에 막대한 피해를 입힘.'
"오늘은 비전 심볼에 대한 수업을 진행하겠습니다."
'그와 연결고리를 가지고 있는 정보원의 이름도 백합 황녀에서는 공개되지 않음. 백합황녀에서 언급된 정보원은 총 세 곳. 무예과에 소속되어있는 백작가 이상의 가문 하나, 특수과에 소속되어있는 후작가 이상의 가문 하나, 그리고 공학과의 교수 중 한 명.'
머리를 잔뜩 굴려 떠올린 정보는 고작 이 정도였다.
······으으, 정보가 부족하다.
"초보 마법사에게 비전 심볼은 아주 중요한 물건입니다. 가지고 있는 것 만으로도 마법의 위력을 증폭시켜줄 수 있기 때문이죠."
정보도 부족하거니와, 이 정보를 과연 믿어줄 사람이 있을지도 의문이었다. 내가 가진 정보의 근거는 백합황녀의 소설 속 내용이다. '이 세계는 사실 소설 속 세계인데, 저는 그 결말을 보고 왔어요!' 라고 말한들 그 누가 믿어주겠는가. 게다가 이 정보를 함부로 흘렸다가 최종보스가 알아차리기라도 한다면?
······상상만 해도 끔찍하다. 나는 고개를 도리도리 저어 소름돋는 생각을 떨쳐냈다.
"비전 심볼의 종류는 매우 다양합니다. 화염 마법을 예로 들어볼까요. 화염 마법을 강화시킬 수 있는 비전심볼은 매우 많습니다만, 그 중에서도 화염 마법의 대표적인 비전 심볼을 예시로 들어보겠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하는가. 발로 뛰어 증거를 모으는 수 밖에 없다. 증거를 모아서 라이하빗이나 시하에게 가져다주면 어떻게든 될 것이다. 적어도 그 두 사람은 백합황녀에서 확실한 선역으로 서술되었으니까.
"불길을 묘사한 그림. 화염을 조각해놓은 펜던트. 작은 등불과 심지어는 뜨거운 물병까지. 불을 연상시킬 수 있는 물체라면 그것이 어떤 것이든 비전 심볼로 사용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어떤 대상을 조사해야 하지? 일단 무예과에 소속되어있는 백작가 이상 가문은 너무 많아서 다 조사를 할 수 없다. 그렇다면 남은 대상은 특수과의 후작가 이상 가문이나 공학과의 교수 중 하나인데.
으음. 고민되는걸.
"그러면 질문 하나를 드리죠."
그런데 내가 특수과를 조사할 방법이 있긴 한가? 공학과는 그래도 내 부 학과이니만큼 어떻게 될 것 같긴 한데.
"초보 마법사가 전격마법을 쓰고자 합니다. 이 때 사용될 수 있는 비전 심볼은 어떤 것이 있을까요?"
좋아, 결정했어. 공학과의 교수를 조사하자. 견학하면서 슬쩍 떠보고 다니면 어떻게든 되겠지.
"율릿 학생. 대답할 수 있나요?"
그나저나, 교수님들의 평소 성격을 잘 아는 사람 한 명이 도와준다면 정말 좋을 것 같은데······.
나는 눈을 감고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누군가가 생각날 듯 말듯 했기 때문이었다.
공학과.
공학과.
분명, 내가 아는 사람중에 공학과가 있었던 것 같은데─
"율릿 학생?"
"······아, 프레데리카 선생님!"
그래. 프레데리카가 있었다. 6학년이니 교수들도 잘 알겠지.
좋았어. 한 번 견학을 부탁해보자.
"저는 유고슬레인이랍니다."
"네?"
조사의 실마리를 잡았다는 것에 기뻐하고 있는데, 별안간 내 몸에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유고슬레인의 것이었다.
뭐지?
대체 언제 내 앞으로 온 거야······?
"보충수업이 폐지되었으니 수업은 더 열심히 들어야죠, 율릿 학생."
"아, 저, 그게······!"
내가 당황해서 손을 내젓자, 유고슬레인이 나를 바라보며 싱긋 웃었다.
불길한 예감이 오싹 하고 온 몸을 관통했다.
"율릿 학생은 다음 시간까지 세 페이지 분량의 레포트를 제출하도록 하세요. 율릿 양의 사견이 두 페이지 이상 기재되어 있어야 합니다."
"예에에?!"
언제나 불길한 예감은 틀리지를 않았다.
으앙.
"동행해도 될까요?"
"네?"
"저도 공학과잖아요. 혹시 잊은건가요, 위즈?"
점심시간.
메디아, 루아와 함께 밥을 먹으며 별 생각없이 견학에 대한 이야기를 꺼냈는데, 예상치 못한 일이 벌어졌다. 메디아가 눈을 빛내며 견학을 같이 가도 되겠냐고 물어본 것이다.
그러고 보면 메디아도 공학과였지. 프레데리카의 도움을 받을 생각에 가득 차 있어서 메디아는 생각지도 못했다.
"그럼 같이 갈까요?"
"그래요. 후후, 기대되는걸요······."
메디아가 고개를 끄덕이며 미소지었다. 나도 고개를 끄덕이며 햄버그 비스무리한 고기조각을 입에 넣었다. 조각은 이내 입 안에서 부스러지며 부드럽게 혀를 감쌌다.
음, 맛있어······ 응?
요리를 음미하고 있는데, 내 로브자락이 옆으로 조금씩 잡아당겨졌다. 무슨 일인가 싶어 그 쪽으로 고개를 돌려보았다. 루아가 조심스레 내 옷자락을 쥐고 있었다.
"나도 가고 싶어."
루아가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잘 들리지 않아서, 나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되물었다.
"네?"
"나도, 부 학과는 공학과니까······."
루아는 말꼬리를 흐렸다. 메디아의 눈치를 보고 있는 것 같았다.
으음. 확실히 두 사람의 관계는 굉장히 미묘했다. 솔직히 세렌과 메디아는 좋게 바라보았을 때 악우정도로 볼 여지가 있었지만, 메디아와 루아는 그야말로 살얼음판이었다. 아직 소크타리에스 가의 일에 대한 상처가 남아있는 메디아와, 그런 메디아를 무서워하는 루아.
그래, 마침 잘 됐다. 이번 기회에 견학도 하는 겸 해서 두 사람 간의 거리를 조금이라도 좁혀보자. 메디아도 전에 비하면 루아에게 많이 누그러진 것 같으니까.
"그럼 세 명이서 다같이 가요. 괜찮을까요?"
"······뭐, 위즈가 주도하는 견학이니까요."
내가 묻자, 메디아가 조금 껄끄러워 하면서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수락해준게 참 고마웠다.
"네, 기대하고 있을게요, 메디아!"
"그래요."
좋아. 이제 남은건 프레데리카에게 찾아가 도움을 요청하는 것 뿐이다.
노을이 하비셜의 외벽을 붉게 물들이는 시간.
"프레데리카 선생님!"
"어머, 율릿 양?"
찾았다.
장장 한 시간에 걸친 여정 끝에, 마침내 하비셜 본관에서 돌아오는 프레데리카와 마주쳤다.
"안녕, 병아리~"
"안녕하세요, 엘리제 언니!"
프레데리카의 옆에는 엘리제가 같이있었다. 엘리제가 허리를 굽히며 손바닥을 내밀자, 나는 그 손바닥에 손을 마주쳐 손뼉을 쳤다.
"아, 귀여워라. 너 내 동생 안할래?"
"엘리제, 또 이상한 말 한다."
"왜애, 너도 병아리같이 귀여운 동생 있으면 좋을 거 아냐."
"동생은 지긋지긋하거든······."
프레데리카가 고개를 저었다. 프레데리카의 움직임에 맞춰 공중을 이리저리 맴도는 외안경이 언제나 눈에 띄었다.
"무슨 일이에요, 율릿 양?"
프레데리카가 나를 바라보며 물었다. 나는 프레데리카에게 물었다.
"공학과를 견학하고 싶은데요, 혹시 도와주실 수 있으세요?"
"견학이요?"
프레데리카가 살짝 놀란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제 부 학과가 공학과거든요. 한 번 견학을 하고 싶은데, 프레데리카 선생님이 도와주시면 좋을 것 같아서요."
"그래요······ 기쁘네요."
프레데리카가 배시시 웃었다. 엘리제는 그런 프레데리카의 옆구리를 푹푹 찔렀다.
"해 줘야지? 귀여운 1학년이 부탁을 하는데 설마 거절을 하겠어."
"날 뭘로 보는거야, 엘리제······."
프레데리카가 엘리제를 흘겨보았다. 그리고는 내게 미소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이죠. 언제가 좋겠어요?"
"프레데리카 선생님이 편하신 날에 해주세요."
"으음······ 그래요. 그러면 이번 달 세 번째 주 월요일 어때요?"
"두 명 더데려와도 될까요? 조용하고 얌전한 친구들인데."
"율릿 양의 친구라면 괜찮을 것 같네요."
프레데리카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 병아리 뒤에 꽃 나왔다."
"저건 여전하네요······."
"아하하, 마법 연습을 해도 잘 안 고쳐지더라구요."
볼을 긁적이며 멋적게 웃었다.
"그나저나 프렛. 병아리한테 쓰는 말투 왜 그래?"
위즈를 배웅한 프레데리카에게 엘리제가 넌지시 물었다.
"아, 그거?"
"그래. 존댓말 쓰던데. 으, 오글거려서 참기 힘들었다니까."
"오글거리다니, 너무해."
엘리제가 양 팔을 부여잡으며 떠는 시늉을 보이자, 프레데리카가 엘리제를 흘겨보았다. 그러더니 피식 웃었다.
"가정교육을 하러 가기 전에 어떻게 신입생을 가르쳐야할지 감을 못잡겠더라. 그래서 제노드라 교수님을 모델로 연습 좀 했지."
"아, 제노드라 교수님 따라한거였어?"
"응."
"그러고 보면 올해에 제노드라 교수님이 은퇴하신다는 소문이 있던데."
"하비셜 상층으로 가시려나?"
"나야 모르지."
엘리제가 어깨를 으쓱 올리며 고개를 저었다.
그녀들의 뒤로 노을이 완전히 저물어, 어스름한 밤하늘이 하늘을 뒤덮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