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64화 〉8. 그럼에도 하비셜은 돌아간다 (4) (64/86)



〈 64화 〉8. 그럼에도 하비셜은 돌아간다 (4)

한 해의 마지막 달빛 아래, 라이하빗이 천천히 양 손을 들었다.


하얗고 나풀대는 소복을 입은 라이하빗이 밤하늘 아래에서 빛났다. 구천을 떠도는 귀신같기도, 하늘에서 내려온 신령같기도 한 모습이었다.

라이하빗은 치렁이는 소매자락을 들어올린다. 순백의 소복만큼이나 새햐안 그의 손이 드러난다. 양 옆으로 곧게 뻗은 손 위에 어느 순간 두 자루의 검이 나타났다. 길고 가는 두 자루의 검은 일절의 치장 없이 단촐한 모양새였다.


비록 화려하지는 않았으나, 단정한 멋이 있었다. 검이 지닌 본연의 미를 담아내었기 때문일까, 온갖 장식으로 치장된 의례용 검보다도 더욱 아름답게 느껴졌다.

라이하빗은 양 손에 검을 한 자루씩 쥐었다. 칼날에 서릿빛이 비친다. 선명하다. 마치 지상에 또 하나의 달이 떠오른 것 처럼, 하늘에서 내려와 도신을 거친 달빛이 호숫가를 감쌌다.

라이하빗이 하늘로 두 개의 검극을 뻗었다. 그와 함께 학과장들이 스태프를  번 흔들어 딸랑 하고 방울 소리를 내었다.


세 개의 봉화에서 불길이 천천히 솟아오르기 시작했다.


"첫째 달은 하얀 달이니라."

라이하빗의 부드러운 목소리가 하늘에 닿았다. 그와 함께 하얀빛을 발하던 불길이 첫 번째 봉화에서 솟아올라 타오르는 백색 화구를 허공에 그렸다.
하얀 달을 형상화한 불길이었다.

"이는 탄생의 빛이라. 시작의 고동이라. 희망을 전하는 등불이라."


라이하빗이 두 자루의 검을 교차시켰다. 그리고는 하얀 월광을 하늘로 올려보냈다.
이제는 완연해진 어둠 속에서 백광이 하늘길을 열었다. 대지에서 별까지 걸어올라갈 수 있을 것 만 같았다.


눈부시게 빛나던 불길이 점차 사그라들었다. 라이하빗이 교차시켰던 검을 내렸다. 백월이 허공에서 천천히 흩어지더니, 이내 봉화의 불길로 되돌아갔다.

하얀 불길이 완전히 사라지자, 라이하빗은 오른 손을 앞으로 뻗어 검을 내밀었다. 그리고는 천천히 자신의 가슴팍으로 당겼다. 칼날에 비치는 녹색 눈은 흔들림 없이 곧았다.

칼을   손이  뒤에 놓였다. 사락, 하고 라이하빗의 긴 머리카락을 스치는 칼날은 날카로웠으나 무엇 하나 베지 않았다.

"둘째 달은 붉은 달이니라."

딸랑.

라이하빗의 말과 함께 방울이 울렸다. 라이하빗은 앞뒤에 세워두었던 칼날을 양 옆으로 뉘였다. 그와 함께 붉은 빛을 발하던 두 번째 봉화에서 불길이 하늘 높이 치솟았다.


솟아오른 불길은 이전처럼 거대한 화구를 만들어내었다. 붉은 화구였다. 붉은 달을 형상화시킨 아름다운 불길.

"이는 존재의 빛이라. 생명의 약동이라. 성장을 이끄는 횃불이라."

홍월(紅月)의 빛이 사방에 비쳤다. 붉은 월광은 은하수처럼 하늘을 이어 원형의 성도를 그렸다. 별과 별이 선연한 화광으로 묶이며 하나의 띠를 이뤘다.

어느덧, 붉게 타오르던 화염이  기세를 줄였다. 라이하빗이 땅으로 검을 내렸다. 타오르던 홍월이 천천히 스러지더니 이내 봉화의 불길로 되돌아갔다.


하늘에서 화기가 완전히 자취를 감추었다. 라이하빗은 마지막으로 검을 역수로 쥔 채 팔을 수평으로 뻗었다. 제단 아래로 칼날이 향했다.

라이하빗은 천천히 팔을 내렸다. 역수로  한 쌍의 칼날이 라이하빗의 다리 옆에서 만나 교차되었다. 교차되어있는 칼날에서 푸른 빛이 일렁였다.

"셋째 달은 푸른 달이니라."

세 번째 방울 소리가 울렸다. 마지막 봉화에서 푸른 불길이 안개처럼 피어올랐다. 청염은 하늘의 푸른 달과 마주치며 부드러이 빛나더니, 이윽고 전과 마찬가지로 푸른 달 모양을 형상화시켰다. 수면에 잠긴 달을 건져내어 하늘로 띄운  같은 모습이었다.

"이는 안식의 빛이라. 결료의 맥동이라. 종극을 고하는 촛불이라."


아늑하게 닿는푸른 빛이 땅을 감쌌다. 눈부시지도, 어둡지도 않은 은은한 청광. 제단에서 우리를 향해 내뻗는 빛은, 제단 위에 있는 라이하빗과 우리 사이를 연결하는 다리 같았다.

딸랑, 딸랑.

그 때, 학과장들이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한 걸음에 방울  번. 일정한 리듬을 가지고 제단을 천천히 돌기 시작했다.


방울소리의 속도에 맞춰, 라이하빗이 제단의 가장 높은 곳에서 검무를 추기 시작했다. 쌍검을 내지르며, 옷자락을 휘날리며, 머리카락을 흩트렸다. 검이 가르는 궤적에 달빛의 잔영이 남았고, 대기가 갈라진 균열에 마력이 들어찼다.

세 개의 봉화에서 불길이 치솟았다. 백색, 청색, 적색. 눈을 어지럽히며 하늘에 삼색의 기둥이 뻗어올랐다.

그제서야 라이하빗과 학과장이 하얀 옷을 입은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세 개의 기둥에서 뻗어나온 빛이 시시각각 조합을 달리해가며  옷을 물들였던 것이다. 하얀 옷이 시시각각 색을 입으며 화려함을 뽐내갔다.

점점 방울소리가 격렬해졌다. 라이하빗의 검도 점차 그 속도를 더해가, 검의 궤도를 따라 잔상이 남을 정도였다.

그리고, 고조되어가던 방울소리가, 한계에 다다를 무렵.

거세게 타오르던 봉화가 꺼졌다. 학과장과 라이하빗은 움직임을 멈췄다.


그리고, 하늘에서 빛나던 푸른 달마저, 갑작스럽게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빛이 사라진 호숫가는 적막했다. 1학년들은 너나 할  없이 침을 삼키며 제단을 바라보았다. 조명 하나 없는 제단에는 그 무엇도 보이지 않았다.

"삼월이 쇠한 후엔 검은 달이 찾아오노니."


그런 제단에서 라이하빗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목숨을 삼키는 이들의 시간이라. 생을 좀먹고 사를 흩뿌리는 마의 창궐이라."

서늘했다. 무엇도 보이지 않는 호숫가에서 파도 부서지는 소리만이 귀를 어지럽혔고, 라이하빗이 하는 말 또한 섬뜩하기 그지 없었다.


"그러하나."

일순간, 제단에서 두 개의 빛이 하늘로 치솟았다.


라이하빗의 검에서 일렁이는 빛이다.  끝을 알  없을 정도로 길게 뻗은 그의 검기다. 검게 물든 하늘을 밝게 물들이는 두 줄기의 희망이다.


"검은 달의 끝에는 하얀 달이 찾아오리니."


백색 검기가 하늘을 가득 메웠다. 달이 모습을 감춘 하늘이었지만, 달이 떠있는 것 처럼 밝았다.

"이는 곧, 끝의 뒤에는 시작이 있음이니라."

봉화에 다시 불길이 일렁였다.


일렁이는 불길은 제단을 부드러이 감쌌다. 아랫 단의 학과장을 감쌌고, 윗 단의 라이하빗을 감쌌다.

영롱한 색을 비추는 제단.

달이 없더라도, 우리를 영원히 비추어 줄 것만 같은, 아름다운 제단이었다.


의식이 끝나고도 나는 한참동안이나 제단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내가 현실을 보는건가 꿈을 꾸는건가 싶었다. 아니, 꿈이라고 해도 저런 광경은 상상조차 할 수 없었을거다.


"검은 달의 계절이네요."

메디아가 하늘을 올려다보며 중얼거리듯 말했다. 세렌 역시고개를 끄덕였다.

"올 해도 무사히 넘기길 바라야지."
"······걱정하지는 않아요. 본국엔 아바마마가 계시니까요."


메디아가 동쪽의 머나먼 하늘을 바라보며 대답했다. 세렌은 그런가, 하고 대꾸하더니 나를 바라보았다.


"그대의 양친께서도 부디 무사히 검은 달을 보내시길."
"······아, 고마워요, 세렌."
"다른 이들도 마찬가지야.  다른 피해 없이 무사히 검은 달을 보낼 수 있길 기원하지."

세렌이 우리  만 아니라, 주변에 있는 마법과의 학생들을 돌아보며 말했다. 모두들 하나같이 고개를 끄덕이며 제각기 복잡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검은 달의 계절. 10월부터 14월까지, 하늘의 달이 빛을 잃는 계절을 말한다. 대충 이전 세계의 겨울 정도로 생각하면 되지만, 검은 달의 계절이 무서운 이유는 다른 곳에 있다.

본래 마수는 마기가 깃든 지역에서만 출몰한다. 신록의 사막과 아이시아의 숲이 대표적인 예시이며,  외에도 페르그 대초원 남부, 파르나 해안가 등등에서도 이따금 마수가 출몰하곤 한다는 모양이다.


하지만 검은 달의 계절에는 특정 지역에서만 마수가 나타나지 않는다. 마기를 전혀 찾아볼 수 없는 지역에서도 마수가 출몰하며, 그렇기에 언제 어느 때 마수의 공격을 받을 지 예상할  없는 무서운 시기가 바로 검은 달의 계절이다.

그래서 각지의 귀족들은 자신의 영지를 지키기 위해 휘하의 병사를 이끌어 마수의 습격에 대비한다. 양 제국의 황제 역시 휘하의 기사단을 진두지휘하며 마수의 퇴치를 돕는다.

청월환야의 의식을 벌이는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검은 달을 무사히 넘길  있길 기원하며 무서움에 떠는 사람들의 사기를 북돋는 의식. 양 제국에서도 황제의 출정 직전 청월환야의 의식을 벌인다고 하니만큼, 그야말로  대륙을 아우르는 의식인 것이다.


"하늘에 등을 띄우고 싶은 학생은 여기로 오세요!"
"호수에 등을 띄우고 싶은 학생은 여기로!"
"기숙사로 돌아갈 사람들은 마차쪽에 줄을 서!"


의식이 끝나자, 교수들이 학생을 세 갈래로 모으기 시작했다. 무사를 기원하는 등을 만드는 것 같았다.

"등이라······ 오랜만이군. 열 살 이후에는 의식의 뒷처리를 진행하느라 띄울 기회가 없었으니 말이야."
"추억이 생각나네요."


 황녀님이 추억에 젖은 눈으로 등불을 바라보았다. 루아 역시  옷자락을 끌며 말했다. 눈을 반짝이며 나를 보채고 있었다.


"위즈, 위즈. 등 띄우고 싶어!"

나는 하스타를 바라보았다. 하스타는 잠시 나를 바라보다 피식 웃으며 어깨를 으쓱거렸다.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하라는 것 같았다.

그렇다면 나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답은 당연히 한 가지로 정해져 있다.


"등, 띄우러 가요!"
"물론이다!"
"응!"
"좋아요."
"그래그래."


모두와 함께 등을 만들었다.

파란색, 빨간색, 하얀색.


제각기 다른 빛을 비추는 등 안에 바램을 적어 넣었다. 그리고 하늘과 호수에 띄웠다.

모두와 함께 즐거운 생활을 보낼 수 있게 해주세요.

어느 곳도 피해를 입지 않고 무사히 검은 달의 계절을 보내게 해주세요.


황녀님들이 백합을 피울  있게 해주세요.

리네스트가 다시 문을 열게 해주세요.

······어째 뒤로 갈 수록 사심이 담겨 있는 것 같았지만.
 어때. 소원은 많이 빌수록 좋은거 아니겠어?

하늘로 띄워보낸 등이 마치 은하수처럼 빛을 내며 올라갔다. 호수에 띄운 등은 흩어지며 별자리를 호수면에 만들어내었다.


작은 축제에  것 같았다.





케리엘은 위즈를 무서워했다.

정확히는,위즈에게서 연상되는 악몽을 무서워했다.

습격사건 이후, 케리엘은 하루도 빠짐없이 악몽을꾸었다. 마수에게 습격받는 악몽. 매일 밤마다 케리엘은 마수를 마주해야 했다.

선득한 이빨. 날카로운 발톱. 당장이라도 찢겨나갈 것 만 같은 공포가 케리엘을 얽매었다.


하지만, 악몽에도 끝은 있었다.

어느 순간 홀연히 나타나, 케리엘의 앞을 지켜 서며, 날카로운 눈빛으로 마수를 도륙내는 소녀─ 위즈 율릿.


케리엘은 그 등을 바라보며 악몽에서 깨어난다.
매일같이, 식은땀을 흘리면서도, 그 뒷모습을 잊지 못한 채 아침을 맞이한다.


그렇게 일주일을 보내고, 한 달이 지나, 마침내 지금에까지 이르렀다. 아침마다 위즈를 생각하며 하루하루를 보내온 것이다.


그래서일까. 케리엘은 언제부터인지 위즈를 자신의 용사님으로 여기게 되었다.


하지만꿈 속의 위즈와 현실의 위즈는 달랐다. 같은 건 모습뿐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냉철하고 날카로운 눈매를 가졌던 꿈 속의 위즈와는 다르게, 현실의 위즈는 너무나도 착했다. 꿈 속에서 마수를 무참히 도륙해내던 사람이라고는 도저히 생각할 수가 없었다.


물론 현실의 위즈가 나쁘다는 것은 절대로 아니었다. 아니었지만.


날카로운 눈매를 지닌 위즈를 다시  번 만나고 싶다고, 케리엘은 조용히 소망했다.

'제 용사님을 다시 만나게 해주세요.'


남몰래 하늘로 띄워보낸 등에 자신의 바램을 담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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