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65화 〉8. 그럼에도 하비셜은 돌아간다 (5) (65/86)



〈 65화 〉8. 그럼에도 하비셜은 돌아간다 (5)

억울하다.

억울해서, 눈물이 찔끔 나올 지경이다.

"그, 그래도. 내가 그대의 곁에 머물고 있지 않은가. 표정 풀도록 해, 그대에게 그런 우중충한 표정은 어울리지 않아."
"으으······."
"······우, 우는 건가?"


메디아가 어쩔줄을 몰라하며 나를 바라본다. 하지만 나는 작금의 상황을 도저히 견딜 수가 없었다. 불합리한 처사에 당장이라도 반기를 들고 싶었다.

"세렌."

세렌의 옷자락을 쥐고 고개를 들었다. 올려다  세렌의 얼굴은 여느 때와 다름없이 아름다웠다.
나는 세렌의 품에 안겼다. 그리고 세렌의 품에 얼굴을 묻었다.
옷자락을 쥐고 있는 손이 조금씩 떨렸다.

"······상심은 크겠지만. 괜찮다. 그대의 상황도 곧 호전 될 테니까."


세렌의 두 팔이 등을 따스히 감싸온다. 내가 의지해 오는 것을 두 말 없이받아주고 있다.


따뜻하다. 차가운 현실으로부터 나를 감싸주는 안락한 도피처같았다.


나는 소리를 죽인  흐느끼듯 말했다.

"저도 리네스트에 가고 싶어요······."
"그건 안 된다."

조금은 메몰찬 대답. 세렌은 나를 안쓰럽게 내려다보면서도, 안 되는건 안 되는 거라고 단호하게 선을 그었다.
으앙, 세렌마저······!


청월환야의 의식 이후 한 달 조금 넘는 시간이 지났다.

이제는 제법 쌀쌀해진 날씨를 견디기 위해, 교복과 로브는 길고 두꺼워졌다. 뭐라고 했더라, 물양의 털실로 옷이라고 하던가? 로브에 달린 하비셜의 문양에 마력을 불어넣는 것 만으로도 두께와 길이가 달라지는 기능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오오, 실생활 마법. 신기해서  번이나 두께를 늘였다 줄였다 하다 마력이 동나버려 하루 종일 골골댄 적도 있었다.

마수가 창궐하는 검은 달의 계절이라고는 하지만, 하비셜은 굉장히 평화로웠다. 습격은 일어나지 않았고, 수업 또한 수월히 진행되어 대부분의 수업이 이상의 진도를 나갔다.


물론 나의 성적도 원활하게 오르고 있었다. 저번 시험에서 269등을 달성했다는 사실이 고무적이었다. 이대로만 간다면 250등 안쪽을 노리는 것도 꿈 만은 아니다. 어디 보자. 첫 번째 시험에서 298등, 네 번째 시험에서 269등. 대충 계산해보면, 시험을 한 번 칠 때 마다 성적이 10계단씩 오른 셈이다.


1년에 보는 시험은 총 10회. 단순하게 계산한다면, 1학년 말에는 200위 안쪽으로 성적을 올릴 수 있고, 3학년 쯤 되면 상위 10% 안에 안착할  있을 것이다.
······너무 단순하게 계산했나? 하여튼.

경직되어 있던 하비셜의 분위기도 청월환야의 의식을 전후로 크게 바뀌어 있었다. 불안에 떨던 학생들의 얼굴에 다시금 잔잔한 화색이 감돌았고, 교수들도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수업을 계속  나갔다. 입학 직후의, 꿈과 희망이 넘치던 하비셜로 돌아간 것 같았다.

하비셜의 분위기가 바뀐 데에는 오늘부터 시작된 리네스트의 개방 또한  지분을 차지했다. 비록 12시 이전에 돌아와야 한다는 제약이 생기긴 했지만, 리네스트가 개방되는  만으로도 우중충하던 학생들 간의 분위기는 삽시간에 반전되었다.

리네스트의 곳곳에 용병이 배치되었다고 하던가. 방비도 강화하고, 상인들에게도 유사시에 대비한 지침이 내려졌다고 하니, 학생들도 안심하고 리네스트를 이용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기숙사 앞에 서 있다 보면, 삼삼오오 마차를 타고 돌아오며 양 손에 한가득 먹을 거리를 들고 오는 학생들을 마주치곤한다. 세렌과 함께 우두커니 서 있는 나를 측은한 시선으로 바라보며,1학년들은 이따금 내게 과자를 건네기도 한다.


······부러움과 억울함이 공존하는 오묘한 기분이었다. 이 복잡한 심경을 대체 뭐라고 설명해야 할까. 물론 건네받은 과자는 맛있게 먹었지만, 리네스트에서 직접 과자를 골라 먹는 행복에는 비할 바는 아니었다.

"억울하다니까요. 저는 그냥 휘말린 피해자일 뿐인데······."
"어쩔  없는 일이야. 그대의 안전을 위해서니까."

세렌이 쓰게 웃으며 손수건으로  볼을 닦아주었다. 우으으, 하고 신음소리를 내며 울상을 지었다.

사실 세렌의 말이 틀린 것은 아니었다. 리네스트 접근 제한은 내 안전을 위한 조치였으니까.


세 가지사건─ 마차 탈취, 마법과 습격, 로페르 테러.


그 전대미문의 사건을 모두 겪은 유일한 사람이 바로 나였던 것이다.


운명의 장난이라고 밖에 할 수 없는 일이었다. 나는 어쩌다보니 사건에 휘말려버렸을 뿐인데, 교수님들은 사건의 배후가 나를 노리고 있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분명 그렇게 생각하는게 합리적이긴 한데······. 흑막의 목적이 황녀님들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는 나로서는, 그야말로 복장이 터질 노릇이었다.

그렇다고 근거도 없이 황녀님들을 노리고 벌인 사건이라고 말할 수도 없었다. 이건 어디까지나 백합황녀에서 얻은 지식이었으니까. 아무리 교수님들께 황녀님이 위험하다고어필을 해 봤자 아무런 의미가 없었던 것이다. 다른 사람을 걱정해준다고 쓰다듬이나 받을 뿐이었다.
으으, 그런  아닌데.


하여간, 내 불우한 처지는 이런 상황으로 인해 야기된 것이었다. 모두가 리네스트에 다녀오는 것을 기숙사에서 하염없이 바라볼 수 밖에 없는, 망부석같은 처지.


그나마 세렌이 내 옆을 지켜주어서 버틸 수 있었다. 만약 세렌마저도 없었다면 기숙사의 담을 넘어서라도 리네스트로 가려 했을 것이다.

"곧 모두가 돌아올거야. 그러니 조금만 참도록 해, 위즈."
"네에······."


고개를 끄덕이며 기숙사의 입구를 바라보았다. 기숙사의 보초를 서고 있던 용병 두 명이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다. 하긴, 벌서  시간 동안이나 기숙사 앞 벤치에 앉아 있었으니 눈길을 끌 만도 하지.

그들을 향해 고개를 살짝 숙였다. 그러자 용병들은 화들짝 놀라 자세를 고치고는 다시 앞으로 시선을 향했다. 뭐라고 할까, 수업시간에 졸던 것을 들킨 학생같은 모습이었다.  쪽을 바라보며 멍하니 서있었던 걸까. 하긴, 보초 서는 것도 여간 힘든 일은 아니지.

"잠깐 다녀올게요."
"응?"

나는 벤치에서 일어나 로브를 여미고 용병에게 총총 걸어갔다.손에 쥐어진 비닐봉지에는 아직 김이 나고 있는 찐빵이 들어있었다. 속에 달콤한 초록색 앙금이 들어있는 찐빵. 나를 안쓰럽게 여긴 에리스가 손에 들려준 간식이었다.

"드실래요?"
"······어?"
"이거. 아직 따뜻해요?"

봉지에서 찐빵 두개를꺼내 용병들에게 들이밀었다. 그러자 용병들은 난처한 듯 서로를 바라보았다.

"학생에게 받을 순 없는데······."
"저 혼자  먹어요. 날씨도 추워서 금방 식어버릴  같구. 식기 전에 먹는게 좋잖아요?"
"으음······."

용병들이 떨떠름한 침음을 내다, 이내 한숨을 내쉬고는 투구를벗었다. 그리고는 내가 내민 찐빵을 받았다.

"고맙게 먹으마."
"너도 어서 들어가렴. 아까부터 계속 벤치에 앉아 있었잖니?"
"저는 괜찮아요. 기다리는 사람이 있거든요······ 맛있게 드세요!"
"아, 알겠다."

꾸벅 인사한 후 다시 벤치로 돌아왔다. 세렌이 미소를 지으며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다녀왔어요, 세렌!"
"후후, 그래. 어서 오도록 해."

세렌의 옆에 다시 앉았다. 발목까지 내려오는 로브를 모포처럼 감싸고 세렌의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아침마다 서리가 내리는 날씨였지만, 이러고 있으면 기숙사 안에 있는 것 처럼 따뜻했다.


이대로 자도 될 것 같은 느낌이다.
두 시간 동안이나 바깥에 있어서 그런지, 조금, 졸, 렸─

"······도착한 모양이군."
"도착했어요?!"


벌떡.

감기려던 눈을 치켜뜨며 몸을 바로 세웠다. 세렌은 그런 나를 보고 잔잔히 웃으며 기숙사의 문 앞을 가리켰다.

세 명의 사람이 마차에서 내리고 있다. 루아, 메디아, 하스타. 그립고, 또 애타게 기다렸던 사람들이었다.

각기 커다란 봉투를하나 씩 들고, 나에게 다가오는 모습.


그 모습이 그렇게 사랑스러울 수가 없어, 나는 벤치를 박차고 일어나 그들을 향해 뛰어갔다.

"위즈─!"
"루아아아아!!!"

와락.


환하게 웃으며 손을 흔드는 루아에게 달려가 안겼다. 루아는 잠시 휘청였지만, 이내 미소지으며 내 손에 봉투를 들려주었다.

"모두 위즈 거야. 위즈를 위해  왔어."
"고마워요, 루아. 부탁 들어줘서 정말 고마워요······!"

눈물이나올 뻔 한 걸 겨우 참고 말했다. 그러자 하스타가 킥킥 웃었다.

"그렇게 고마워 할 필요 없거든. 어차피 네 돈이고, 수고비도 확실히 챙겼으니까.
"어머. 우리 몰래 자기 돈을 예산에 보탠 사람이 누구였죠?"
"아, 그런 말을 왜 해요, 낯 간지럽게."
"솔직하지 못하네요."
"우와,  말을 메디아한테 들으니까 좀 많이 충격인데요."
"······무슨 의미예요?"

메디아가 살짝 인상을 찌푸리자, 하스타가 힉, 하고 깜짝 놀라며 메디아에게서 멀찍이 떨어졌다. 그와 함께 뒤에서 세렌이 다가와, 그들이 가지고 있던 봉투를 한 손에 들어 메었다.

"말 그대로의 의미겠지, 메디아 리베른. 총명한 그대라면  수 있지 않나?"
"저는 영양가 없는 질문을 하지않아요. 당신은 하스타의 말이 무슨 의미인지 알고 있는 건가요?"
"물론, 알다마다."
"으으······! 위즈. 당신도요?"
"······아하하."
"저, 저는 언제나 정직하다고 자부하며 살아왔는데······!"


메디아가 얼굴을 붉히며 항변했다.  모습이 귀여워서 웃음이 터져나왔다.
······메디아. 그런 의미가 아닐걸요?


"자, 자. 과자 파티해요, 모두!"
"어라, 괜찮겠어?  과자잖아."
"후후, 하스타는 뭘 모르네요. 과자는 원래 같이 먹으면 더 맛있어진다구요?"
"······후. 뭐, 주인 맘대로 하세요."

하스타가 한 숨을 내쉬더니 고개를 으쓱했다. 세렌은 내 몸의 반절정도 부피인 과자봉지를 무리 없이 들어올리며 말했다.


"그렇다면 파티룸을 잡도록 하지. 리네스트가 개방되었으니 파티룸의 자리도 널널할거야."
"네!"

고개를 끄덕이며 세렌의 뒤를 따랐다.

그래, 리네스트에 가지 않으면 뭐 어때. 이렇게 즐겁게 놀 수 있으면 그만 아니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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