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6화 〉9. 연화(緣火) (1)
때로, 인연은 찰나의 스치움에도 불을 피워낸다 합니다.
마음을 태우며 사랑을 빛내는 이어짐의 붉은 꽃.
아아, 그래요. 당신과 나의 연화는, 이다지도 아름다운 색이었습니다.
하비셜의 하늘은 언제나 파랗다.
사막의 끝자락에 위치해있는 하비셜의 하늘에는 구름 한 점 조차 발을 들이지 않는다. 하늘 호수의 폭풍우가 이따금 결계 위로 물방울을 뿌려 무지개를 만들어낼 뿐, 비구름 하나 없이 맑은 하늘은 잡티 하나 없이 깨끗하다.
언제나와 같은 모습이다. 어제이든, 오늘이든, 내일이든. 불변의 하늘은 저 우뚝 선 하비셜의 본관 만큼이나 정적이다.
하지만 하늘은 끊임없이변화한다. 보이지 않는 순환이 매일마다 새로움을 채운다. 어제 내뱉은 공기는 오늘 하늘로 올라가 푸름을 이루며, 오늘 푸름을 이뤄낸 공기는 내일 내려와 신선함을 대지에 흩트린다.
흐르는 것이다. 굽이굽이치며, 단절된 곳 하나 없이 세상을 흘러다니는 것이다.
저 하늘에 배를 띄운다면 어디든 갈 수 있겠지.
그래. 구체적으로 말하면 리네스트 같은 곳에─
"하늘에 마음을 빼앗긴 모양이야."
"어, 세렌······?"
멍하니 올려다보던 하늘을 세렌의 얼굴이 가렸다.
햇빛을 등졌음에도 그녀의 피부는 눈부시도록 새하얗다. 아이스 블루 색 눈동자는 언제나처럼 사랑스럽게 빛나고, 부드러운 금발 머리카락은 마치 커튼처럼 내려와 뺨을간질인다.
두근, 하고 심장이 한 차례 경직되더니, 이내 온 몸에 피를 격렬히 공급하기 시작했다. 나른하던 몸이 점차활력을 되찾아갔다.
"혹시 그대의 사색을 방해한건가?"
세렌이 물었다. 나를 바라보는 눈동자에 장난기가 담겨 있었다. 호선을 그리는 입술이 열리며 달콤한 향을 풍겼다.
얼굴에 열이 오르는 것을 느끼며, 나는 고개를 저었다.
"아, 아니에요. 그것보다 세렌, 여기엔 무슨 일이에요?"
읏차.
선베드에서 몸을 일으키며 세렌에게 물었다. 멍한 머리를 한 차례 흔들어 각성시킨 다음, 헝클어진 머리카락을 대충 가다듬었다. 그러자 세렌이 싱긋 미소지으며 대답했다.
"휴일을 같이 보내고자 그대를 찾아왔지. 어떤가? 적어도 지루하지는 않을텐데."
5일을 주기로 돌아오는 휴일 아침. 나는 기숙사 부지에 마련되어 있는 투명 온실의 선베드에서 여유로움을 만끽하던 중이었다.
사실 그것 외에는 할 일이 없었다. 루아는 휴일만 되면 점심식사 전 까지는 이불 밖에 나올 생각조차 하지 않았고, 메디아는 교수님들이 주최하는 학술회에 다녀오겠다며 아침 일찍 기숙사를 나간 상태였다. 하스타는 다른 친구들이랑 리네스트에 놀러 간다고 했고.
같이 놀 사람도 없고, 그렇다고 리네스트에도 갈 수 없는 가여운 신세인 나였기에, 온실 속에서 하늘을 바라보며 시간을 때우는 것 외엔 할 일이 없었던 것이다.
······사실 메디아가 내준 숙제가 있긴 했지만, 그건 저녁으로 미뤄두었다. 공부를 아침부터 하면 즐거운 휴일이 칙칙해져 버리니까.
하여간. 그런 나로서는 세렌의 제안이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었다.
"당연히 좋죠!"
"그래. 그대를 열심히 에스코트 하도록 하지!"
미소짓는 세렌의 손을 잡으며 선베드에서 내려왔다.
햇빛을 오래 쐬고 있어서 그런지, 평소보다 따뜻한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쌀쌀한 바람에 로브자락을 여몄다.
완연한 겨울이었다. 이슬 대신 서리가 맺히고,지붕자락에 고드름이 자라는 차가운 날씨. 기분좋은 따뜻함을 유지하고 있던 온실에서 나와서 그런지더더욱 추웠다.
"어디로 갈 거에요?"
"글쎄. 그대와 함께라면 어디든 좋겠지."
세렌이 짐짓 미소를 지으며 말을 돌렸다. 듣기에 나쁜 말은 결코 아니었으나, 그건 그거고 궁금한 건 궁금한 거였다.
"안 알려줄거에요?"
"도착했을 때의 즐거움으로 남겨두도록 하지."
"아, 치사해!"
"기다림의 끝에서 얻는 것이 더 가치있을 때도 있는 법이지."
멋진 말로내 반발을 일축하는 세렌. 목적지를 알려주지 않으려고 작정한 그녀는. 내 변변찮은 말재간으로 뚫어낼 수 있는 상대가 결코 아니었다.
그렇다면 유추하는 것 밖에는 방법이 없었다. 나는 세렌이 가는 방향을 살폈다.
일단 리네스트는 못 가고. 휴일이니만큼 하비셜 본관으로 갈 일도 없을 거다. 만일 도서관이 목적지라면······ 음, 세렌과 함께라면 나쁘진 않겠지만, 휴일에까지 도서관에서 공부한다는 건 좀 그렇잖아.
그렇다면 내가 갈 수 있는 곳의 선택지는 굉장히 줄어든다. 기숙사 부지 내부와 배움의 나무 정도일까.
나 진짜 갈 수 있는 곳이 별로 없구나.
씁쓸함을 느끼며 추론을 계속해나갔다. 배움의 나무로 가기 위해서는 마차를 타야 한다. 하지만 세렌의 발걸음은 마차가대기하고 있는 곳으로 향하는 것 같지 않았다. 그렇다면 기숙사 부지 안쪽에 있는 시설이 목적지라는 말이 된다.
기숙사 부지 안쪽에는 크게 다섯 가지의 시설이 있다. 내가 시간을 보내고 있던 온실과 욕탕, 수영장을 겸하는 건물과, 크고 작은 파티룸이 모여있는 파티용 건물. 공부하기 위한 독서실과 산책하기 위해 마련되어있는 산책로, 그리고 리네스트에 비하면 구멍가게 수준인 작은 매점.
설마 나를 공부시키려고 독서실로 데려가는 건 아닐테고, 매점은 뭐 생필품을 사는 게 아니면 갈 필요가 없을테니 제외. 방금 막 온실에서 나왔으니 수영장도 제외한다고 하면, 선택지는 산책로와 파티룸, 두 개로 줄어든다.
와, 뭐지? 나 오늘 좀 머리 잘 돌아가는 것 같은데?
스스로의 추론에 절로 감탄이 나왔다. 나, 생각보다 머리 좋은 거 아니야?
······그건 아닌가. 아무튼.
산책이 목적이었다면 굳이 행선지를 감추려 하지 않을 테니, 결국 남는 행선지는 파티룸 뿐이다.
좋아, 답이 나왔다!
"후후, 세렌. 저는 세렌이 어디로 가는지 알고 있죠."
"응?"
"세렌은 지금 파티 룸에 가려는 거예요!"
"그건 그렇지."
세렌이 시원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가슴을 가득 채우는 고양감에 절로 신이 났다.
"어때요, 제 추리 실력이? 후후, 맞춰서 깜짝 놀랐죠!"
"······음. 그렇다면 말이지."
내가 가슴을 내밀며 한껏 도취감에 빠져 있는데, 세렌이 내게 미소지었다. 그리고는 하나의 물음을 던졌다.
"그렇다면, 위즈. 그대는 내가 왜 그대를 파티룸에 데려가려는지 알고 있나?"
"······네?"
"그대의 우월한 추리실력이라면 충분히 알 수 있을테지. 내가 그대를파티룸에 데려가서 무엇을 할지 말이야."
"그, 그건요."
"어떤가?"
세렌의 질문에 머리가 핑글핑글 돌아가기 시작했다.
목적? 목적이라니.
"노, 놀려고 데려가는 거겠죠?"
"그건 너무 추상적이지 않은가. 조금 더 구체적으로 추리해보도록 해."
"어, 실내에서 놀기 위해서요?"
"정확도는 아까와 별반 다르지 않은걸."
세렌이 미소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당황한 나는 어, 어, 하며 얼빠진 목소리를 내었다.
머리가 점점 과열되어 갔다. 전혀 예상치 못한 추가질문 때문인지 두뇌에 과부하가 걸린 모양이었다.
쌀쌀한 날씨가 무색하게, 점점 머리에 열이 몰렸다.
"으으, 그게, 그러니까, 세렌이 저를 파티룸에 데려가서, 뭘 하려고 하냐면······."
"단 둘이서일까? 아니면 누군가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까. 만일 단 둘이서 지내기 위함이라면, 누구도 안을 들여다보지 못하는 방에서 그대와 내가 무엇을 하며 시간을 보낼까?"
세렌이 재미있어하는 표정으로 말을 나열했다. 그럴 수록 내 머리는 더더욱 혼란스러워질 뿐이었다.
"그, 그게요. 어, 저기······."
"만일 누군가 있다면, 어떤 사람이 그대와 나를 기다리고 있을까? 그대가 아는 사람일까? 아니면 나의 지인일 뿐일까. 동급생일까, 상급생일까? 그것도 아니라면 교수님일까? 성별은 뭘까?"
"그, 그러니까, 한 명이, 아니 두 명이 기다리고 있는데, 그게 사실 교수님이었던 학생이고, 남자이면서 여자인 사람들이라, 그게, 어······."
시야가 핑글핑글 돌았다. 세렌이 나열한 말들이 문자가 되어 이곳저곳을 돌아다녔다. 점점 머리가어지러워졌다.
"세렌, 어지러워요······."
마침내 혼란스러운 머리를 진정시키지 못하고 항복하는 시늉을 하자, 세렌이 내 머리카락을 쓰다듬으며 싱긋 웃었다. 추위때문인지 세렌의 손은 조금 차가워서, 과열되었던 두뇌의 온도가 순식간에 내려가는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후후, 장난이 조금 과했군. 그대가 자신만만히 추리하는것이 귀여워서, 무심코 장난을 저지르고 말았어."
"으앙, 세렌 짖궂어······!"
울상을 지으며 항의했다.
"아하하, 그래, 사과하지. 미안하다, 위즈."
그러자 세렌이 너털웃음을 지으며 내게 사과했다. 하지만 나는 볼멘소리를 내었다.
"하지만, 나중에 또 할 것 같은 표정인걸요?"
"재발 방지의 약속은 하지 않았으니 말이야."
"세렌!"
장난스럽게 대꾸하는 세렌이 그렇게 얄미울 수가 없었던 것이다. 내 볼멘소리에 세렌이 장난스럽게 손가락을 들어올렸다.
"후후. 하지만 말야, 그대도 내심 싫어하지는 않는 것 같단 말이지?"
무슨 말을 하는 거냐는 시선을 보내자, 세렌이 내 뒤로 손을 뻗었다.
그리고는 백합 한 송이를 검지와 엄지로 잡아 내게 들이밀었다.
"그, 그건······!"
"이렇게 아름다운 꽃을 그대가 피우고 있는데, 어찌 내가 한 번으로 만족할 수 있을까."
백합 향을 맡으며 눈짓하는 세렌에게, 대꾸 하나 하지 못한 채 눈을 내리 깔고 말았다.
저건 대체 왜 지금 나오는거야.
아니, 물론, 세렌과 길을 걷는다는 것 자체는 기쁜 일이 맞지만.
맞긴 하지만······!
어디 숨을 곳 없나.
세렌에게서 도망치고 싶다는 기분이 든 건 오늘이 처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