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7화 〉9. 연화(緣火) (2)
길거리에 백합을 간간이 흩뿌리며 하플라바에 도착했다.
각 학과의 기숙사부지마다 하나씩 세워져 있는 3층짜리 건물, 하플라바. 작게는 원룸 반 정도 크기의 파티룸부터, 크게는 50명 정도의 인원도 너끈히 수용할 수 있는 대형 파티룸까지, 다양한 넓이의 파티룸을 구비하고 있는 건물이다.
하플라바를 이용하는데에 필요한 것은 담당 보조교수님의 허가 뿐이다. 이용 요금도 없고, 청소도 자동으로 이루어져, 굳이 뒤처리를 할 필요도 없다.
그야말로 학생들의 취미생활을 위한 실내공간인 것이다. 들려오는 소문에 따르면, 혼성 그룹이 하플라바를 이용하려 하는 경우에는 대여 절차가 조금 까다로워진다고 하지만, 내가 파티룸을 남자랑 갈 일은 없다고 보아도 무방했기 때문에 나와는 관련 없는 이야기였다.
만에 하나······ 세렌이나 메디아, 혹은 루아가 남자와 함께 파티룸에 가겠다고 한다면야 무슨 수를 써서라도 따라가겠지만. 설마 그럴 일이 있겠어?
"생각에 잠긴 표정이야. 아, 설마 또 추리를 해보려는건가?"
"으······ 그만 놀려요, 세렌."
"아하하, 그렇게티가 났나?"
내가 살짝 흘겨보자, 세렌이 상쾌한 미소를 지었다. 나를 놀리고 있다는 걸 숨길 생각 조차 없는 모양이었다.
절반 정도는 내가 자초한 일이라 뭐라 할 수도 없고.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한숨을 푸욱 내쉬며 고개를 떨구는 것 밖에 없었다.
하플라바의 3층, 원룸 하나 정도 크기의 파티룸. 커텐이 태양빛을 은은하게 가리는 방에는 소파 여러 대가 비치되어 있다.
세렌은 소파에 나를 앉히더니, 품 속에서 두 개의 마정석을 꺼내들었다. 반짝이는 은색 장식으로 둘러쌓인 마정석. 끝에는 고리가 달려있어, 어딘가에 걸어놓을 수 있도록 만들어져 있었다.
"그게 뭐에요?"
"내 보물 중 하나지."
싱긋 웃으며 대답하는 세렌의 뺨은 조금이지만 상기되어 있었다. 새하얀 피부가 연한 홍조로 물들었다.
자신의 보물을자랑하고 싶어하는 천진한 아이의 모습이었다. 내 표정을 연신 살피는 세렌은, 내가 어떤 반응을 보여줄 것인지에 대한 기대도 가지고 있는 것 같았다.
세렌은 두 개의 마정석을 벽에 솟아나 있는 막대기에 걸었다. 외투를 걸어두기 위해 만들어놓은 줄 알았는데, 사실 저런 방식으로 사용하기 위해 만들어진 모양이었다.
마정석의 설치를 마친 세렌이 내게로 돌아왔다. 그리고는 내 바로 옆에 기대어 앉고는 속삭이듯 말했다.
"그대는 입학식 때 눈에 담았던 펄스레이트를 기억하고 있는가?"
"당연하죠. 잊을래야 잊을 수가 없는걸요?"
격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그멋진 광경을 어떻게 잊어버릴 수 있을까. 푸른 불과 붉은 불이 섞여들어가는 환상적인 풍경이 머릿속에서 아지러지듯 떠올랐다.
내 대답에 세렌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말했다.
"그래. 도저히 뇌리에서 지우기 힘든 아름다운 광경이었지.
······하지만 말이야, 위즈. 나는 사실 펄스레이트를 그때 처음 본 것이 아니었어."
"네?"
"사실, 열 살때 펄스레이트를 본 적이 있었거든."
"여, 열 살때 입학식을 하셨었다구요?!"
"아하하, 그건 아니야. 하비셜에서 펄스레이트를 직접 본 건 아니니까."
세렌이 너털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는 추억에 잠긴듯 행복한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그대에게도 말한 적이 있지만, 나는선조의 이야기를 굉장히 좋아해. 아주 어릴 때 부터 좋아했을거야. 대악마 나엘을 평정하고 인간의 시대를 연 선조가 너무나도 멋있고 자랑스러워서, 어릴 때의 난 항상 아바마마께서 해주시는 선조의 이야기를 들으며 잠에 들곤 했지."
이야기를 하던 별안간 세렌이 작은 웃음을 터뜨렸다. 옛날의 생각을 떠올리며 즐거워하는 그녀의 모습은 또래보다도 천진하고 순수해 보였다.
"후후, 아바마마께서 굉장히 힘들어 하셨던 기억이 나. 황위에 올라 격무에 시달리고 있던 어마마마의 몫까지 대신하며 나를 돌봐주셨거든. 매일같이 옛 이야기를 해달라고 보채는 나를 달래며 진땀을 빼셨지.
그렇게 점점 지쳐가던 아바마마께서는 내 열 번째 생일 때 저 마정석을 내게 선물로 건네주셨어."
"저 마정석을요?"
"그래. 지금으로부터 5년 전, 하비셜의 입학식에서 진행된 펄스레이트의 모습이 기록된 마정석을 말이야."
세렌이 또 하나의 마정석을 품에서 꺼냈다. 벽에 걸어둔 두 개의 마정석과 같은 모양의 마정석이었다.
스르륵.
세렌이 마정석을 쓰다듬었다.
그러자, 벽에 걸려있던 두 개의 마정석이 공명하듯 요동치며, 방을 빛으로 채워가기 시작했다. 방을 감싸던 벽이 푸른 하늘로 뒤바뀌었고, 소파를 받치고 있던 방바닥은 하비셜의 대운동장으로 변화했다.
"그대와 함께 보고 싶었다. 5년 전에 하비셜에서 펼쳐진 펄스레이트─ 「시대를 여는 밤」을 말이야."
세렌이 내게 살짝 기대어오며 말했다.
뭐라고 대답하고 싶었지만─
귀를 두드리는 음울한 관현악단의 연주가 시작되어, 더 이상 말을 건넬 수가 없었다.
푸르던 하늘이 밤의 시간으로 변화했다.
하늘에 달은 보이지 않는다. 별도 모습을 감춘 채, 쓸쓸함만이 남아 어둠을 덮는다.
생동이 멈춘 땅이다. 흔한 들풀하나 뿌리내리지 못하고 말라버린 땅. 곳곳에서 어두운 기운이 흘러나오는 땅은 생명을 품기를 거부하며 천천히 죽어간다.
희미한 바람이 인다. 말라비틀어진 갈대가 조각을 흩트리며 싹트지 않을 씨앗을 뿌린다.
쿵, 쿵.
지축이 울린다. 온 몸이 떨려오는 듯 한 굉음에, 나도 모르게 세렌의 손을 꼬옥 잡으며 앞을 바라보았다. 세렌은 잠시 놀란 듯 나를 바라보았지만, 이내 목에 팔을 두르며 나를 감싸주었다.
달 없는 하늘에 한 쌍의 적안이 떠올랐다.
증오를 담은 눈동자다. 살의에 찌든 안광이 나를 꿰뚫듯 내려다본다. 인간이라는 생물을 저주하기 위해 태어난 마수가, 50m가 넘는 자신의 체구를 땅 위에 세우며 포효했다.
귀가 아플 정도의 소음이다. 하지만 나는 귀를 막을 수 없었다. 귀에 손을 올리기 조차 힘들 정도로, 나는 마수에게 압도되어 몸을 움직이지 못했다.
모든 마수의 왕. 대악마 나엘.
인간의 시대 이전, 세상을 마수로 뒤덮었다고 전해진, 인류의 가장 큰 적이다.
"세, 세렌······."
그 모습을 눈에 담은 것 만으로도 나는 등줄기가 오싹해졌다. VR이나 4D같은 이전 세계의 물건과는 한 차원이 달랐다. 바람, 빛, 소음, 진동─ 내가 느끼고 있는 모든 감각이, 이 환상을 위화감 없는 진실이라 받아들이고 있었다.
"괜찮아."
내가 몸을 떨며 무서워하자, 세렌이 내 허리를 팔로 휘감았다. 그리고는 나를 가볍게 들어올려, 자신의 무릎 위에 올려놓았다.
"세, 세렌은 무섭지 않아요?"
"흐음. 분명히 나도 처음 보았을 때에는 무서워했었지."
"지금은요?"
"그다지 무섭지 않아."
세렌이 웃으며 내 목에 양 팔을 둘렀다. 그리고는 내 뺨에 자신의 얼굴을 붙였다.
귀 바로 옆에서, 세렌이 속삭이듯 나에게 말했다.
"물론, 여러번 보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이 다음을 알기 때문이지."
"다음이라면······."
"자, 함께 보도록 하자. 시대를 여는 밤을."
세렌의 목소리가 나를 휘감았다. 부드러운 목소리가 보호막처럼 나를 감쌌다. 다가오는 공포스러운 소음을 모두 막아 주는 것 같았다. 한결 마음이 편해졌다.
올려다본 하늘에는 여전히 나엘의 붉은 눈이 박혀 있다. 검은 안개의 중앙에 박혀있는 눈이 섬뜩한 빛을 자아낸다.
그의 몸에서부터 마기가 흘러나와 발치에 고인다. 웅덩이처럼 흘러나온 그림자는 점차 그 영역을 넓혀간다.
관현악단의 연주가 불길한 음색을 더해감과 함께, 그림자로부터 수만 쌍의 붉은 눈이 일거에 모습을 드러낸다. 마치 파도처럼 땅을 휩쓰는 마수의 무리는 인류에게 절멸을 고하러 오는 사신과도 같았다.
재앙이다. 인류가 막을 수 없는, 자연재해와도 같은 존재가 온 땅에 이빨을 들이민다.
모든 것을 맹렬히 잠식해나가는 그림자의 바다.
세상을 뒤덮을 것만 같았던 죽음의 바다가 돌연 확산을 멈춘 것은, 세 가지 빛이 하늘로 솟아올랐을 때였다.
그림자가 정지했다. 나엘의 움직임도 멈추었다. 심장을 덜컥거리게 만들던 관현악단의 선율 또한 사라져, 소리라는 개념이 일순간 사라져버린 것 같았다.
세 기둥이 검은 하늘을 지탱하며 빛났다. 이름모를 관악기의 청명한 음색이, 한 줄기 귀를 간지럽히기 시작했다.
빛의 기둥은 그림자의 확산을 막았다. 아니, 그것 뿐만이 아니었다, 조금씩 나엘을 향해 나아가며, 그림자의 영역을 줄여나가기 시작했다.
세 기둥을 유지하고 있는 사람의 모습이 희미하게 엿보였다. 역사시간에 배운 세 현인이다. 찬란한 태양불을 하늘 끝에서 빛내는 세오 리베른, 붉은 여명을 대지에 흩뿌리는 아이시아, 은빛 외날개를 창공에 드리우는 라이하빗 케런트.
작은 마수들은 빛에 다가가는 것 만으로 사라지며마석만을 남긴다. 대형 마수들은 필사적으로 저항하며 기둥을 없애기 위해 달려들었지만, 이내 빛의 기둥에 휩쓸려 사라져갔다.
어두운 방에 촛불을 비추는 것 처럼, 칠흑같은 그림자가 조금씩 흩어진다. 발버둥치는 마수들도 얼마 지나지 않아 그 형체를 잃었다.
"────."
자신의 기반을 잃은 나엘이 나직한 신음을 내었다. 그것만으로 대기가 깨져나갈 것 같은 파동이 일었다. 땅이 갈라지고, 하늘이 무너져내린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빛의 기둥은 곧게 뻗어있다. 무너져내리려는 하늘을 떠받치며, 그림자의 침입을 단 한점조차 용납하지 않으며 나엘에게 다가간다.
내 위를 세오의 빛기둥이 훑고 지나갔다. 그림자로 잠식되어있던 주변의 땅이 황금빛의 따스한 안개로 가득 채워졌다.
그 때, 나를 안고있던 세렌이 속삭였다.
"따뜻하지?"
"······네."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세렌이 기뻐하며 나를 감싸안았다.
"하비셜에 입학할 때, 나는 몇가지 꿈을 꾸었지."
따뜻하고 탄탄한 팔이 목덜미에 닿았다. 잡티 하나 없어, 깨끗하고 투명하다.
세렌의 맥박이 희미하게 느껴진다. 두근, 두근. 그 맥동을 의식하기 시작하자, 주위의 풍경이 하나도 눈에 들어오지 않게 되었다.
"이건 그 중 하나야, 위즈. 가장 소중한 친구와 함께 나의 보물을 공유하고 싶다는 꿈이었지."
얼굴에 불이 붙었다. 내가 세렌의 맥동을 들을 수 있다는 것은, 세렌 역시 내 두근거리는 소리를 들을 수 있다는 것이다.
부끄러웠다. 세렌의 평안한 맥동에 비해, 내 심박은 달리기를 끝낸 운동선수마냥 빨라져 있었다. 세렌이 눈치챘다간, 부끄러워서 죽어버릴 것 같았다.
이미 우리가 앉아있는 소파의 주위는 백합이 가득 피어난 꽃밭으로 변해있었다. 세렌은 기뻐하고 있었다. 백합 꽃송이를 몇개 집어들어 내 무릎 위에 장식하듯 흩뿌렸다.
"그대가 좋아하는 것 같아 다행이야. 그대 덕에 친우와 함께 보물을 공유한다는 것이 얼마나 기쁜 일인지 알 수 있었어."
"그, 그래요······."
"홀로 감상하던 때와는 너무나도 많은게 달라. 감상을 공유할 수 있는 사람이 있고, 같은 곳을 바라보아주는 사람이 있어."
심장박동을 들키지 않기 위해 가슴에 모아놓은 손을, 세렌이 가벼이 잡았다. 깜짝 놀라 옆으로 고개를 돌리자, 세렌의 짙푸른 눈동자가 그곳에 있었다.
"무엇보다도, 이리 달콤한 향을 지닌 꽃이 피어나있으니."
세렌의 말대로였다. 숨을 들이킬 때 마다 달콤한 향이 느껴진다. 어지러울 정도로 달콤한 향기가 피어났다.
"이런 경험을 한 이상, 이제 펄스레이트를 홀로 감상하긴 어렵겠구나."
그것이 백합에서 나는 향일지.
백합에서 나는 향이 아니라면, 내 눈 앞에서 싱그러운 미소를 지어보이는 세렌의 향일지.
"그대와 함께 하지 않으면 외로움을 느낄 테니 말이야."
도저히 분간해낼 수 없는 아찔한 향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