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68화 〉9. 연화(緣火) (3) (68/86)



〈 68화 〉9. 연화(緣火) (3)

팔다리를 흐느적거리며 하플라바를 나섰다.

새하얗게 표백된 빨랫감이 된 기분이었다. 머릿속이 백지상태였다. 분명 세렌이 보여주었던 펄스레이트는 입학식 때 만큼이나 대단했던 것 같은데,  내용이 도통 기억 나지를 않았다.

원인은 세렌에게 있다. 그래, 세렌 때문이었다.

살짝 풀린 눈으로 세렌을 바라보았다. 아직도 세렌에게 안겼을 때의 감촉이 생생하게 떠오른다. 아니, 사실 나는 그 감촉에 대한 생각으로 머리속이 가득 차 있었다. 매끄럽고 곧은 팔. 부드러운 허벅지. 무엇보다도,  끝이 아릴 정도로 달콤했던 향기까지.


어떻게 사람이 그렇게까지 자비없을 수가 있을까 싶었다. 조금만 더 세렌의 품에 안겨있었다간 그대로 액체가 되어 녹아버렸을 것이다.


······잠깐만. 생각해보니까 그런 죽음도 나쁘진 않겠는데?


그런 생각을 하던 나는 이내 고개를 저어 잡념을 떨쳐 버렸다. 백합이 꽃피는 것을 두 눈에 담기 위해서라도, 지금 내가 죽어서는 안 됐다. 그래, 백합의 수호자란 사명을 가지고 이 땅에 왔으니, 그 결말은 보고 가야지 않겠어?

"점심 시간에 가까워졌어. 슬슬 식당으로 가지 않겠나?"

아직도 어질어질한 머리를 가다듬기 위해서 엉뚱한 생각을 반복하던 나에게 세렌이 물었다. 그러고 보면 어느새 해가 중천에  있었다. 강렬한 체험을 겪었던 탓인지 아직 배가 고프지는 않았지만, 틀림없는 점심시간이었다.

"네!"

고개를 끄덕이며 세렌에게 다가갔다. 그리고선 함께 식당을 향해 걸어가기 시작했다


그래. 뭐가 됐든 일단 밥이라도 먹자. 식사는 언제나 옳으니까.



세렌과 함께하는 산책은 굉장히 편안했다.

물론,세렌과 함께 있다는 것은 그 자체만으로도 피톤치드가 가득한 숲 속을 거니는 것 마냥 기분이 좋아지는 일이었지만, 그것 말고도 다른 이유가 있었다.

나는 또래에 비해 키가 작다. 따라서 보폭도 굉장히 좁다. 세렌처럼 키가 큰 사람과 보폭을 비교할 경우, 거의 두  가까이 차이가 날 지경이다.

그런 내가 세렌과 나란히 걸을 수 있는 것은 모두 그녀의 배려 덕분이었다. 내 보폭에 맞추어 느긋하게 옆을 거니는 세렌. 그 배려 가득한 발걸음 덕에 세렌과의 산책은 언제나 즐거웠다.

즐거움을 만끽하다보니 어느새 기숙사 식당에 도착했다. 오늘의 메뉴는 어떤 걸까, 하는 생각을하며 식당 입구에 눈을 돌린 시점.

확연히 눈에 띄는 사람을 발견했다.


마법과임을 나타내어 주는 초록색 로브 사이에 있어, 더욱 눈에 띄는 붉은색 로브.


누군가를 찾고 있는  처럼 조금 초조한 기색을 보이며, 이곳 저곳을 둘러보는 회색 눈동자.

단정하게 정돈되어 있는 푸른 머리카락.

"······로이아 언니?"
"아, 후배님들."

무예과 3학년, 로이아 에이트였다.

"마법과에는 무슨 일이에요?"
"그게, 사실."

로이아가 조금 쑥쓰러운 듯 시선을 아래로 내리깔았다. 그러고 보면 로이아의 손에는 큰 바구니 하나가 들려 있었다. 저게 뭔가 싶어서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을 때였다.


"후배님들과 의논하고 싶은 일이 있어 찾아왔습니다."
"저희랑요?"
"네. 혹시 괜찮으시다면 잠시 시간을 내주시겠습니까?"


로이아가 살짝 고개를 숙이며 물었다. 그러자 세렌은 조금 난처한 기색을 보였다.


"아직 저와 위즈는 점심 식사를 마치지 않았습니다. 괜찮으시다면 식사 후까지 조금만 기다려주실 수 있으십니까, 로이아 선배님?"
"그······."


세렌의 말에 로이아가 말을 흐렸다. 그리고는 조금 뜸을 들이더니, 우리에게 바구니를 들이밀었다.


"혹시 괜찮으시다면, 식사는 이것으로 대신하지 않으시겠습니까······?"
"이건······."
"리네스트의 펠단네스에서 주문해온 음식입니다. 어떤 음식을 선호하실지 알지 못해, 넉넉히 다섯 종류의 음식을 가져왔습니다."
"페, 펠단네스요?!"

깜짝 놀라 로이아를 바라보았다. 그러자 로이아 역시 흠칫 놀라며 어색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펠단네스.

들어본 적이 있었다. 리네스트에서 가장오래된 식당이자, 가장 고급스러운 음식점.  한달 용돈을 모조리 쏟아부어야 겨우 한 끼를 먹을  있을 정도로 높은 가격대가 형성되어있는 최고급식당이었다.

갑작스럽게 배가 아우성을 치기 시작했다.


"직접 가져오신 겁니까?"
"그. 위즈 후배님이 리네스트에 가지 못한다는 말을 들었기에. 조금이라도 위안이 되었으면 해서 가져온 겁니다. 입에 맞으실지는 잘 모르겠습니다만."
"세, 세렌."


바구니를 뚫어져라 쳐다보며 세렌을 불렀다.

"그래, 위즈."
"로, 로이아 선배님께서, 성의를 보여주셨는데, 무시해서는 안 되겠죠······?"
"물론, 그렇지."
"아, 아까 파티룸으로 다시 돌아갈까요? 아직 대여시간 남았죠? 어때요? 괜찮아요?"
"위즈. 그대의 눈동자, 조금 풀려있는 것 같은데······?"
"대답해 주실래요?"
"그, 그래. 물론이지."

세렌이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반색하며 로이아의 손을 잡았다. 겸사겸사 바구니의 손잡이도 함께 잡았다.

"세렌도 괜찮다고 하네요, 로이아 언니!"
"그, 그렇습니까."
"자, 자. 빨리 가죠! 네? 음식이 식기라도 하면 안되잖아요?"
"보온 마법이 걸려있는지라, 그런 신경은 쓰지 않아도─"
"어쨌든요!"

로이아와 바구니를 잡아 끌며 왔던 길을 되돌아갔다. 신속하고 정확하게,행여나 음식에 이상이 생길새라 조심하면서.



그렇게 해서 다시 돌아온 파티룸. 붙여놓았던 소파를 띄어, 개의 자리를 만들었다. 세렌은 파티룸의 관리자분께 부탁을 드려서  방에 있던 식탁을 가져왔고, 나와 로이아는  식탁 위에 음식을 세팅했다.

"내, 냄새가······."


꿀꺽.
나도 모르게 입맛을 다셨다.

다섯 개의 접시에 담긴 각양각색의 음식들은 어느것 하나 빠짐없이 다채로운 향을 내고 있었다. 부드럽고 깊은 향을 자랑하는 파스타, 격자무늬가 선명하게 드러나있는 스테이크, 얇게 저며진 채 새콤한 소스에 잠겨있는 생선살, 붉은 소스와 해물이 어우러진 볶음밥, 아기자기하게 플레이팅 된 빵과 과일, 느릿하게 일렁이는 버섯 스프까지.


솔직히 말하자면, 눈 앞에 펼쳐져있는 음식들의 이름은 잘 알지 못한다. 음식에 들어간 재료 또한 알 턱이 없었다. 이런 음식은  한번도 먹어본 적이 없으니,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한 가지는 확신할  있었다.


 앞의 음식이, 내가 먹었던 그 어떤 음식보다도 맛있을거라는 확신을 말이다.

"어떤 음식을 드시겠습니까? 마음껏고르셔도 됩니다."
"어, 꼬,  골라야 하나요?"
"세리나 후배님께서 괜찮으시다면, 여러 음식을 접시에 조금씩 덜어드셔도문제 없습니다. 여분의 접시가 있으니."
"와아아, 감사합니다!"

로이아가 바구니에서 접시를 꺼내 나와 세렌에게 건네주었다.


세상에.
 무슨 철저하다 못해 아름답기까지  준비성이란 말인가.

좋아, 그렇다면,이제 남은 건, 맛있게 먹는 것 뿐이다...!

파스타를 먼저 먹을까? 시작이니까 새콤한 걸로 입맛을 돋구는게 좋을지도 몰라. 스프를 먼저 먹어볼까? 빵을 찍어먹으면 맛있을 것 같아 보이는데······.


먼저 먹을 음식을 결정해야 했다. 이토록 신중했던 적이 몇 번이나 있을까. 으음, 잘 모르겠다.

좋아, 결정했어. 일단스프먼저 먹자······ 응?


스프를 조금 덜기 위해 팔을 뻗으려고 하는데, 별안간 세렌이 내 접시를 빼앗아갔다.

"세, 세렌?"

당황스러움을 감추지 못하고 세렌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세렌은 내게 시선조차 주지 않고 묵묵히 접시에 음식을 담기 시작했다.
혹시 먹는 순서를 양보하라고 하는 건가? 아니면, 다섯 종류의 음식을 모두 독차지하려는 걸까?

······만약의 일이지만, 정말 세렌이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다면 피눈물을 흘리며 음식을 양보할 생각이 있었다. 그래, 세렌도 맛있는 음식에 대한 욕심이 있겠지. 키도 크니까 나보다 먹는 양도 많을 테고······.

하지만 나는 세렌을 믿었다. 세렌이 내게서 음식을 뺏어갈 리가 없다는 신뢰를 가지고 있었다.


설마. 아니죠, 세렌?


애처로운 눈빛을 보내며 애타는 심정으로 세렌을 바라보자, 세렌이 물끄러미 나를 바라보더니 어쩔 수 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웃음인지 한숨인지 모를 소리를 내었다. 그리고는 내게 음식이 담긴 접시를 내밀었다.

"자, 그대의 몫이야."
"······네?"
"왜 그리 나라라도 잃은 표정을 짓고 있는건지. 가끔씩이지만 그대의 속내를 알 수 없을 때가 있어."
"저,절 위해 음식을 담아준 거에요?"
"그래. 멀리 있는 음식에는 그대의 손이  닿지 않을 테니까말야."

세렌의 말대로였다. 볶음밥이 담겨있는 접시는 내가 소파에서 일어나 손을 뻗어야 겨우 닿을까 말까 한 거리에 있었다.


살짝 멍한 표정으로 세렌이 건넨 접시를 바라보았다. 음식들이 종류별로 조금씩 담겨있었다. 가운데의작은 컵에 담긴 스프를 중심으로 원을 그리는 가지각색의 음식들. 가지런히 정리되어있는 그 모습은 예술작품처럼 아름다웠다.


"어서 들어. 리네스트에 가지 못하는 그대를 위해 로이아 선배님이 준비하신 음식이니까."
"머, 먼저 먹어도 돼요?"
"물론이지. 그렇지 않습니까, 로이아 선배님?"
"당연합니다. 여러분을 위해 준비한 음식이니까요."


세렌의 물음에 로이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나마 세렌을 의심한 내가 너무나도 바보같아졌다.


"세렌, 미안해요."
"응?"

세렌이 나를 바라보며 의문부호를 얼굴에 띄웠다. 나는 세렌이 먹기 좋게 덜은 스테이크 한 조각을 포크로 찌른 뒤, 세렌의 입에 가져다대었다.


"드세요."
"아하하, 그럴 필요 없다. 로스트 하놀라는 아직많이 남아있으니."
"세렌보다 먼저 먹을 수는 없어요. 자, 아앙."


포크를 내밀며 세렌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세렌의 눈에 당황이 어리기 시작헀다.

"위즈. 아, 아앙이라니?"
"세렌이 이걸 먹기 전 까지는 저도 안 먹을거에요."
"어째서·····?"
"제 양심이 아파서 그래요."
"로이아 선배님도 보고 계신다. 이제 그만 하는게······!"
"아앙."

지긋이 세렌을 바라보며 포크를 내밀었다.  고집이 담긴 몸짓이었다.

세렌을 의심한 내가, 세렌보다 먼저 음식을 입에 댈 수는 없다는, 그런 치기어린 고집.

세렌은 당황한 듯 눈동자를 떨었다. 로이아를 힐끗 보고, 내가 내민 포크를 힐끗 보고. 몇 번을 반복하던 세렌은 이내 포기한 듯 한숨을 내쉬었다.

"······이번만이야."


살짝 웅얼거리는 목소리로 말한 뒤, 세렌이 입을 살짝 열어 스테이크를 집어넣었다.
그리고, 상기된 볼을 움직여 스테이크를 천천히 씹었다.


꿀꺽.

세렌의 달아오른 목덜미가 조금 움직였다. 부드러운 목넘김이 눈에 보였다.


"이제 됐겠지, 위즈."
"네! 저도 잘 먹겠습니다!"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선 나도 포크로 스테이크를 찍어 입에 넣었다.

세상에, 이렇게 사르르 녹는 고기가 있다니······!

"후우······ 선배님도 어서 드십시오. 추태를 부려서 죄송합니다······."
"아닙니다. 보기 좋은 우정이네요."


로이아가 미소지으며 고개를 작게 저었다. 그런 로이아의 반응에 세렌은 더더욱 뺨을 홍조로 물들이며 고개를 숙였다.

"우와아, 엄청 맛있어요!"
"입에 맞으시는 것 같아 다행입니다. 보람이 있었습니다."
"고마워요, 로이아 언니!"
"언제 들어도  언니라는 호칭은 도통 익숙해지지 않는군요."

로이아가 겸연쩍은 미소를 지으며 파스타를 입에 넣었다.  모습을 보니, 나도 파스타가 먹고싶어져서, 세렌이 담아준 파스타를 포크에 감아 입 안에 넣었다.


맛있다. 깊고 풍부한 풍미를 가지면서도 전혀 느끼하지 않았다. 혀를 휘감는 부드러움과, 그 후의 감촉에서 느껴지는 진한 맛. 세 끼를 먹어도 느글거리지 않을 것 같았다.

"······위즈."
"우물, 네?"

파스타를 음미하고 있는데, 가만히고개를 숙이고 있던 세렌이 별안간 나를 불렀다.

"오랜만에, 그대를 안아들고 기숙사로 돌아가야겠구나."
"네?!"


그리고, 형벌을 예고했다.
대, 대체 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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