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69화 〉9. 연화(緣火) (4) (69/86)



〈 69화 〉9. 연화(緣火) (4)

"맛있었어요!"


얌전히 앞접시를 내려놓았다. 만족스러웠다. 너무 만족스러운 나머지, 혀가 흐늘흐늘 녹아버릴 것 만 같았다.

기숙사 밥도 맛은 나쁘지 않았지만, 로이아가 사다  음식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수준의 차원이 달랐던 것이다. 이 정도는 되어야 그렇게 비쌀 수 있겠구나 하는생각이 절로 들었다. 텅텅 비어있는 식기가 그 맛을 증명헀다.


"입에 맞으셨다면 다행입니다."


로이아가 미소지으며 비어있는 식기를 바구니에 담았다. 나는 포크와 나이프를 모아 정리했고, 세렌은 방에 비치되어있는 마정석을 사용해 방 안의 공기를 환기시켰다.


얼추 정리가 끝나자, 로이아가 바구니에서 찻주전자와 찻잔을 꺼냈다. 그리고는 정갈한 자세로 차를 따라내어 우리에게 건네주었다.

"감사합니다."
"뜨거우니 조심하시길."


홀짝.


부드럽고 은은한 향이 코와 혀를 감쌌다. 음식이 가득 들어차 있는 뱃속이 따뜻하고 편안해졌다.


"······저기, 그럼. 본론을 이야기 해도 괜찮겠습니까?"

이름 모를 차의 맛을 즐기며 헤실헤실 웃고 있는데, 로이아가 찻잔을 내려놓고는 우리에게 말했다.. 본론이라니, 갑자기 그게 무슨 말인가 싶어 세렌을 바라보았지만, 세렌은 이미 짐작한 듯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역시 할 이야기가 있으셨군요."
"눈치 채셨습니까."

로이아가머쓱해하며 얼굴을 조금 붉혔다. 그러자 세렌은 잔잔한 미소를 지었다.


"괜찮습니다. 기탄없이 이야기 해 주십시오."
"할 이야기가 있으셨던 거예요?"
"사실, 그렇습니다."


로이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살짝 우물쭈물하며 입을 여는 로이아. 대체 무슨 일이길래 저렇게 송구스러운 표정을 짓는건가 싶어, 의아해하며 로이아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지난 번, 여러분과 언약을 맺었던 것, 기억 나십니까?"
"언약이라 함은······."


세렌이 기억을 더듬어가며 말을 흐렸다. 나도 딱히 기억나는 건 없어 고개를 저었다. 그러자 로이아가 살짝 당황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그, 제가 가문의 이름을 걸고 대접해드리겠다 한 약속 말입니다."
"아······ 밥 사달라고 했던 거 말씀하시는 거예요?"

내 물음에 로이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세렌은 기억을 떠올린  고개를끄덕이더니,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살짝 숙여 인사했다. 나도 세렌을 따라감사인사를 전했다.

"그 일이라면 기억하고 있습니다. 무리한 부탁을 잊지 않고 들어주신 것, 감사드립니다."
"대접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인사를 마친 후 로이아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로이아는 살짝 당혹스러운 표정으로 우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무슨 말씀을 하시는 겁니까?"
"네?"
"예?"

······엥?

뭐지.


뭔가, 미묘하게 핀트가 맞지 않는  같은, 그런 느낌이 불현듯 들었다.

"저기, 로이아 언니. 7월 말에 했던 약속 말씀하시는 거죠?"
"그렇습니다."
"밥 사달라는 약속이었구요?"
"분명히 그랬죠."
"오늘 밥 사주신게 그 약속을 지켜주시려던 거 아니었어요?"

 물음에 로이아가 잠시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는 이내 화들짝 놀라며 고개를 저었다.


"무, 무슨 소리를 하시는 겁니까! 겨우 이런 요깃거리 정도로 약속을 지킬 수 있을 리가 없지 않습니까!"
"요깃거리라뇨, 엄청 맛있었는데······?"
"대접이란 무릇 예법과 절차에 따라야 합니다. 가문의 이름을 걸고 대접을 하겠다 약속했다 하면, 영지 없는 남작가라 할 지라도 네 번의 절차를 갖춘 식사를 준비하는 법인데, 하물며 공작가의 이름을 건 대접이 고작해야 이런 요깃거리로 끝난다는 것은 그야말로 가문의 이름에 먹칠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얼굴을 붉히며 자신의 뜻을 설파하는 로이아. 대접이란게 원래 그런거였나 싶어 세렌을 바라보았지만, 당황하기는 세렌도 마찬가지인 것 같았다.


"그, 그러실 필요까지 있으십니까······?"
"있습니다!"

로이아는 단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세렌도  이상의 할 말을 찾지 못한 채 입을 다물고 말았다.


"······흥분해서 죄송합니다. 하여간, 저는 여러분을 대접하기 위해 어머니께 한 가지 부탁을 드렸습니다. 저희 가문에 종사중인 총주방장을 하비셜에 모시려 했지요. 그래서 어머니께 서신을 보냈습니다만······ 그게, 어쩌다보니 아버지의 귀에도 들어간 모양입니다."
"로이아 언니의 아버지요?"
"세르페우드 에이트 화에른 공작 말씀이십니까."
"네.
······아실지 모르겠습니다만, 저희 아버지께서는 예를 따지시는 것에 굉장히 엄격하신 분입니다.사적인 일 하나에도 규칙과 전통, 예절을 따르시는 분이죠."


로이아가 진절머리 난다는 한 숨을 내쉬었다. 그리고는 우리의 손을 모아잡았다.


"그래서, 큰일이 벌어지고 말았습니다."
"네?"
"그게. 크세닉스를 여시겠다며, 어제 아버지께 서신이 도착했습니다."
"크, 크세닉스라면······!"

세렌이 화들짝 놀라 로이아를 바라보았다. 로이아는 침통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제 불찰이에요. 여러분들의 어깨를무겁게 해드리고 말았으니."
"······취소는 불가합니까?"
"이미 크세닉스의 준비를 위한 인력이 하비셜로 모이기 시작했습니다. 아버지는   결심하신 일은 절대로 물리지 않으시니, 아마 내일 부터 하비셜 전역에 홍보가 들어갈 겁니다······."

세렌과 로이아가 어깨를 축 늘어뜨리며 한숨을 내쉬었다.


뭔가 소외된 느낌이다. 나만 모르는 이야기로 침울해하면 위로도 못해주는데.

"저기, 세렌. 크세닉스가 뭐에요?"
"옛부터 내려온 접대 풍습이야. ······바른에서는 거의 사장된 전통이지만."
"파티 같은 건가요?"
"굳이 따지자면, 파티의 범주에 들어가긴 할 겁니다."

내 물음에 로이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다시 물었다.

"파티면 좋은거 아니에요?"
"······크세닉스는, 인간의 시대가 열리기이전부터 내려온 관습이지."


세렌이 기억을 더듬어가며 설명을 시작했다.


"인간의 시대 이전에는 마을간의 교류가 굉장히 힘들었다고 역사 시간에 배웠었지?"
"네."
"그런데도 마을간의 교류가 이뤄질수 있었던 것은, 여러 마을을 왕래하며 소식을 전한 여행자들이있었기 때문이야."
"여행자······요?"
"그래. 여행자, 라이터, 홈벌트─ 그들을 지칭하는 말에는 지역별로 여러가지가 있지만,  에른 지역에서 그들은 '크세나'라고 불리었어."

세렌이 목이라도 타는지 차가 들어있던 잔을 순식간에 비웠다. 그리고는 다시금 찻잔에 차를 따르며 말을 이었다.


"크세나는 각 마을을 돌아다니며 정보를 전달했지. 크세나가 전파하고 다닌 정보는 워낙 유용했기 때문에, 각 마을은 점차 크세나의 접객을 신경쓰기 시작했어. 크세나들이가진 정보를 조금이라도 더 알아내기 위해서 말이야."
"뇌물 같은건가요?"
"그래. 그렇게 점차 풍성해지던 접대의 규모는,마을 간의 경쟁의식이 생겨나면서 어마어마하게 거대해졌어. 접대 규모에 대한 경쟁이 가속화되고, 호화스러운 접대를 즐기기 시작한 크세나들은 일부러 각 마을을 비교해가며 바람을 넣었지."


다시금 세렌이 찻잔을 비웠다. 김이 모락모락나는 차를 단번에 들이킨 세렌. 엄청 뜨거울텐데 어떻게 저걸  번에 마시는 건지.

"결국 크세나를 접대하는 일은 마침내 마을의 명예가 걸려있는 중대사로 발전했어. 그렇게 발전해 온 풍습을 일컫는 말이 바로 크세닉스야."
"······옛날 사람들, 생각보다 유치하네요?"
"사실 크세닉스에는 마을간의 이해관계가 복잡하게 얽혀있지만, 더 깊게 파고 들면 끝이 없으니 유래에 대해선  정도로 설명을 끝내도록 하지."

세렌이 쓰게 웃었다.

"크세닉스의 관습은 인간의 시대가 열린 이후에도 유지되었어. 물론 의미는 조금 바뀌었지. 마을의 명예를  접객에서 가문의 명예를 건 접객으로 말야."
"아······."

그제서야 크세닉스가 무엇인지 조금 알아차릴 수 있었다. 그러니까, 대충 가문의 명예를 건 연회 정도로 생각하면 되는건가?


"끄응······ 난감하게 되었어. 설마 크세닉스가 열릴 줄은 꿈에도 생각치 못했으니."
"왜요? 파티는 클 수록 좋은거잖아요?"
"그렇게 단순한 일이었다면 상황이 나았겠지만······"

세렌이 조금 초조한 기색으로 말을 흐렸다. 로이아 역시 세렌의 말에 동의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버지께서는 진심이십니다. 크세닉스의 주관자로 데네스를 세우셨어요."
"······에이트 가의후계자로군요."
"검은 달의 계절인지라, 영지를 떠날 수 없다는 점을 굉장히 통탄스러워 하시더군요."
"규모는 대략 어느정도로 예상하고 계십니까?"
"본가의 요리사 50인과 각지에서 초빙된 요리사 200인, 크세닉스의 진행을 돕기 위해 300인의 사용인이 고용되어 있습니다. 크세닉스의 경비를 위해 용병단 하나도 고용해 놓으셨다고 하구요."
"······하비셜의 학생 전원이 참석할 수 있는 규모겠군요."
"하비셜 본관의 대강당을 크세닉스의 개최장소로 정하셨다고 합니다. 이미 대여를 위한 기부금까지 지불하셨다고 하니, 이젠 돌이킬 수 없어요······."
"어떻게 일을 그리 빠르게 진행하신 겁니까······."
"소름돋을 정도로 철두철미하신 분이니까요, 아버지께선."


 사람이 동시에 한숨을 내쉬었다.나는 세상에서 아득히 멀어지려는 정신을 애써 붙잡으며 로이아에게 물었다.

"그, 그 정도로 큰 파티가, 상식적으로 가능해요?"
"아버지의 진행력이라면, 가능합니다."
"대련을 잠시 해 드린 것 뿐인데, 어떻게 일이 이 정도까지 커지는지······."
"소크타리에스 가의 사태로부터 촉발된 양 국의 불온한 관계를 개선하고자 하는 아버지의 의지도 있겠지요. 리베른의 공작가가 바른의 황녀전하를 대접한다는 사실은 여러모로 큰 파장이 일 테니까요."
"······생각할 것이 많아지는군요."

세렌이 손으로 머리를 짚으며 눈을 감았다. 로이아는 그런 세렌을 미안한 눈으로 바라보다, 나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죄송합니다, 위즈 후배님."
"네, 네?"
"두 분은 이번 크세닉스의주빈─ 즉, 중심이 되시는 분들입니다. 아마 모든 사람의 시선이 내리꽂히겠지요.
······큰 짐을 지워드리고 말았습니다. 이 빚은 언젠가 반드시 갚겠습니다."

로이아가 고개를 숙였다. 하지만 나는 왜인지 등골이 송연해져, 필사적으로 고개를저으며 말했다.


"이, 일단.그런 말씀은 이제 하지 말아주세요. 로이아 언니가 어떻게 빚을 갚을  무서워지려고 하거든요?"
"······죄송합니다."


다시  번 로이아가 사과했다.
그리고는 말했다.

"개최 시기는 다음주 휴일입니다. 3일 전에 데네스와 함께 여러분을 찾아갈 테니, 부디 기다려주시길."


이게 대체 무슨 일인지.


맙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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