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70화 〉9. 연화(緣火) (5) (70/86)



〈 70화 〉9. 연화(緣火) (5)

다음날 아침.

식당으로 내려가자마자, 나를 향한 시선이 수십가닥 내려꽂혔다.

평소에도 세렌이나 메디아와 함께 걷다보면 느끼곤 하는 시선이었지만, 오늘은 오로지 나에게만 집중되어 있어, 낯설고 부담스러웠다.

어깨가 무겁다. 그 무게는 시선의 무게이기도 하지만, 4일 후 진행될 크세닉스에 대한 중압감이기도 했다.

전교생이 참여할 수 있는 연회의 주빈.

몇 십명이 보고 있다는 것 만으로도 이렇게나 어깨가 무겁다. 그런데, 6000명이 넘는 수의 시선을 받아야 한다니······. 생각만 해도 정신이 아득해진다.

"위즈."
"꺄아악?!"
"어깨에 힘이 잔뜩 들어가 있네요······."

어깨를 살짝 쓰다듬는 감촉에 화들짝 놀라 비명을 지르며 뒤를 돌아보았다. 살짝 당황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는 소녀가 보였다.
메디아였다. 단아하고 붉은 눈동자를 빛내는 아름다운 사람.
 몸을 휘감았던 긴장이 조금이나마 풀리는 것 같았다.

"히잉, 메디아아······."
"크세닉스 때문인가요?"
"어떻게 알았어요?"
"아바마마께 편지가 도착했답니다. 에이트가의 크세닉스를 빛내라고 말이죠.
······뭐, 에이트 가는 조금 마음에 들지 않습니다만. 위즈가 주빈이니 만큼 저도 힘 내보도록 할게요."
"메디아도 크세닉스에 참여해요?"
"물론이에요."

메디아가 찡긋 눈을 감았다. 그리고는 내 귀에 입을 가져가, 작게 속삭였다.

"아마 저는 축사를 맡게 될 것 같아요."
"그, 그래요?"
"이번 크세닉스에 대한 황가의 지지를 알리는 자리가 되겠지요······. 후후, 리베른 내의 강경파들이 조금 놀라겠군요."
"네에······."

뭔가 어려운 말이다. 정치에 관한 말일까. 잘 모르겠다.

"어머. 위즈는 이런 이야기를 좋아하지 않나요?"
"정치 이야기는 조금 어려워서요."

고개를 저었다. 솔직함을 미덕으로 치는 나에게 있어, 온갖 중상모략이 판치는 정치는 도무지 어울릴 수가 없는 일이었다. 말을 돌려서하는 것도 어려워 하는 내가, 다른 사람의 의중을 알아차리란 불가능에 가까웠다.  참, 관심법도 아니고, 속 뜻을 어떻게 알아차려.

"언젠가는위즈도 알아야  거예요. 영지를 경영하기 위해선 필수적인 일이니······."
"꼭해야할까요? 으으."

울상을 지으며 메디아를 올려다보았다. 그러자 메디아는 잠시 고민하더니, 또 다른 답을 내주었다.

"그렇게 정치가 싫다면, 다른 가문으로 시집을 가는 것도 방법 중 하나겠지요. 영지를 경영할 때에 비하면 정치에 관여할 일이 적으니까요. 사교계에서 난무하는 권모술수를 견디는  또 다른 문제겠지만······."
"제가 시집 갈 곳이 어디있다구요?"

내 물음에 메디아가 말을 멈췄다. 나는 고개를 으쓱하며 메디아를 바라보았다. 애초에 결혼은 생각도 해 본적 없었다. 그냥 독신으로 늙어가면서 메디아와 세렌의 부부생활을 멀찍이 지켜볼 수 있다면 그것 만으로도 충분했으니까.

잠시 고민하던 메디아가, 살짝 망설이는 목소리로 내게 물었다.

"제게 올래요?"
"네?"
"제게, 시집 올래요?"

메디아의 물음에 잠시 얼이 빠져 메디아를 바라보았다. 메디아는 조금 멋적은 듯 가슴팍에 달려있는 백합 브로치를 매만지고 있었다. 나는 그런 메디아를 홀린듯 바라보다, 고개를 저었다.

"안 돼요."
"안 되는 건가요······?"

메디아가 수심에 찬 얼굴로 다시금 물었다. 나는 그런 메디아에게 고개를 끄덕이며 이유를 설명했다.

"네. 그도 그럴게, 만약 그렇게 된다면 기뻐서 죽어버릴 테니까요."
"그 정도로 기쁜 거예요······?"
"당연하죠. 심장에 무리가 올 거에요. 저는 오래 살고 싶으니까, 안 돼요."

그래. 오래 오래 살아서, 메디아와 세렌이 백년해로하는 모습을  보고 말 거다. 내 인생목표다.

"후후, 그렇군요······."

메디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새하얀 피부에 붉은 혈색이 감돌았다. 조금 수줍어 하는 것 같기도 한 모습이었다.
괜히 장난기가 솟았다.

"메디아가 원한다면, 메디아의 정부가 되는 것 정도는 괜찮을 것 같은데······."
"정부요?"
"그,그건 너무 갔나요?"

메디아가 반문하자, 나는괜히 머쓱해져 볼을 긁적였다. 메디아는 잠시 나를 바라보더니 떨떠름히 말했다.

"······뭐, 위즈라면야, 제 측근 자리에 앉힐 생각은있지만요. 갑자기 정부는 왜요?"
"네?"

상상의 범주를 뛰어넘은 대답에 살짝 멍해져 메디아를 바라보았다. 메디아는 골똘히 생각에 잠기며 중얼거리고 있었다.

"그런가요. 위즈는 의외로 권력욕이 있었군요······."

궈, 권력욕?

"자, 잠깐만요. 갑자기 그게 무슨 소리에요?!"

나와는 조금의 연관도 없을 단어가 메디아의 입에서 튀어나왔다.깜짝 놀라서 메디아에게 다급히 물었다. 그러자 메디아는 무슨 말이냐는 듯 한 표정으로 반문했다.

"제가 이끌 정부에 자리 하나를 만들어 달라는 것 아니었나요?"

순수한 눈빛.
정부의 뜻이  한가지라고 생각하는 사람의 눈빛이었다.

······순수한 눈망울을 차마 응시하지 못하고 고개를 돌려버렸다.

"······죄송합니다. 그런 뜻은 아니었구요, 농담이에요. 잊어주세요."
"위즈?"
"자, 자. 밥 먹으러 가요, 메디아!"
"집사장 자리까지는 마련할  있다구요?"
"됐으니까요!"

메디아를 이끌고 밥을 먹으러 갔다.
앞으로 메디아에겐 이상한 장난을 치지 말아야 겠다고 다짐하면서.

크세닉스에 대한 소문은 눈 깜짝할 사이에 하비셜 전역으로 퍼져나갔다.

주빈이 나와 세렌이라는 것도 알려져 있었다. 시간이 갈수록 내게 꽂히는 시선이 늘어갔다.

─크세닉스 주빈, 세리나 황녀님이랑 위즈라는데.
─그게 누군데?
─왜, 꽃나무 있잖아. 황녀님들이랑 같이 다니는.
─아, 걔?

이런 대화가 수십번이나 귀에 들어온 것이다. 난감하기 짝이 없는 일이었다.
친구들과 같이 다니는 것도 지양해야 했다. 메디아는 축사 준비를 해야 한다며 기숙사에 틀어박혔고, 하스타는 주위의 시선이 부담스럽다며 루아를 데리고 리네스트로 피신했다. 사실, 부담스럽다는 것은 핑계일 뿐이고, 여러 사람의 시선을 무서워하는 루아를 돌봐주려는 의도였겠지만.

그렇다고 세렌과 같이 다닐 수도 없었다. 세렌은 내 몇 배가 넘는 거대한 시선의 홍수 속에서 허우적거리고 있었으니까.

오늘 오후에 있었던 역사수업 때만 해도 그랬다. 수업이 시작되기 전까지 세렌에게 쏟아진 질문세례. 그것에 일일이 답해주는 세렌의 얼굴은 초췌하기 그지 없었다. 간식이라도 주고 싶었지만, 같이 다니다간 휘말려버릴 거라며, 세렌 쪽에서 나를피하기에 이르렀다.

의도는 이해하지만. 세렌 쪽에서 나를 피한다는 것은 정신적으로 크나큰 데미지였기 때문에, 마음이조금 울적해졌다.

나는 개똥벌레~ 친구가 없네에에······.

서글픈 노래를 중얼거렸다.

"위즈, 위즈.혹시 자?"

 밤중.

피곤하긴 하지만 잠은 오지 않는 애매한 시간. 루아가  놓은 은은한 조명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는데, 루아가 나를 불렀다.
루아는 책을 읽고 있었다. 자기 전에 가볍게 읽을 만  소설이었다.

"깨어 있어요. 무슨 일이에요, 루아?"
"위즈에게 들려주고싶은 구절이 있어."
"책에 나온 건가요?"
"응."

루아가 살포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침대에 누워있던 나는 몸을 일으켜, 눈을 비비며 루아를 향해 앉았다. 어차피 그닥 잠이 오는 것도 아니었으니, 루아의 이야기를 듣는다고 해서 나쁠 일은 전혀 없으리라는 생각이었다.

"들려줄래요?"
"응!"

루아가 반색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책의 앞부분을 펴, 소리내어 읽기 시작했다.


─흐린 하루가 저물어 갑니다.
회색빛 노을입니다. 색은 보이지 않습니다.

밤이 되어도 여전합니다. 단지 어두워지기만 할 뿐, 무채색의 하늘에는 별조차 떠 있지 않습니다.

길을 걷습니다. 홀로 걷는 길입니다. 외롭고 지쳐, 걸음을 멈추고 주저앉고 싶습니다.

그런 나의 앞에 불현듯 당신이 나타납니다.

등불이 되어줍니다. 지쳐 쓰러져가는 나의 손을 잡아줍니다.

손에서 인연의 불길이 따스히 일었습니다─



"어때?"

낭독을 마친 루아가 눈을 반짝이며 나를 바라보았다.

으음, 감상. 감상이라······. 새벽감성에 취해서  글 같기도 하고, 으음.

졸려서 그런건지는 모르겠지만, 딱히 와닿는 것은 없었다. 그래도 이걸 사실대로 말하면 루아가 실망할 테니, 대충 적당히 포장해야 겠다. 어디, 포장할 만 한 구절이······ 이거다.

"인연의 불길이라는 표현, 서정적이어서 좋네요!"
"응,나도 그렇게 생각해!"

핵심을 잘 짚어낸 것 같았다. 루아가 푸른 머리카락을 들썩이며 홍조를 띄웠다. 푹신푹신한 귀를 펄럭이는 푸들같다는 생각이 들어, 괜시리 웃음이 나왔다.
루아가 읽고 있던 책을 들어올렸다. 책의 표지에 장미꽃이 몇 송이 그려져 있었다.

"「세 단의 붉은 꽃」이야. 위즈도 읽으면 분명히 좋아할거야!"
"채, 책은 조금······."
"그치만, 읽으면 행복한걸?"
"······나중에 읽어볼게요."
"응!"

루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선 하품을  번 하더니, 은은한 조명을 껐다. 방 안이 어두워졌다. 나는 이불을 덮고 누웠다.

"저기, 위즈."
"네?"
"연화를 알고 있어?"
"연화······ 아, 연꽃이요?"
"으응, 그거 말구."
"잘 모르겠네요."

눈을 비비며 고개를 저었다. 슬슬 잠이 온다.

"인연의 불이라는 뜻이야."
"그런 게 있었군요······."

점점 감겨가는 시야를 느끼며 웅얼거리듯 대답했다.

"연인이 될 운명인 사람들은, 손을 마주잡는 것 만으로 따뜻한 불길이 치솟는대."
"으응······."

졸리다.
의식이 점점 멀어진다.

"······언젠가, 위즈랑 연화를 피우고 싶어."

루아의 마지막 말을 듣지 못하고, 나는 잠에 빠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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