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71화 〉9. 연화(緣火) (6) (71/86)



〈 71화 〉9. 연화(緣火) (6)

크세닉스의 개최로부터 3일 전. 유독 혼란스러웠던 그 날은, 한 통의 편지와 함께 시작되었다.

아버지로부터의 편지였다. 율릿 가의 문양이 새겨진 봉랍을 붙여놓은, 단정하고 정갈한 편지봉투. 안부편지가 평소에 비해 조금 빨리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며 편지를 뜯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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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44년 11월 14일. 사랑하는  위즈에게.


황제폐하의 급보를 통해 크세닉스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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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기가 싫어졌다.


단 두 줄을 읽은 것 뿐이건만, 그 아래로 시선을 내리기가 두려워졌다. 잠옷을 갈아입던 루아는 그런 나를 발견하곤 내 어깨 너머로 고개를 내밀었다.

"편지?"
"네. 아버지께서 보내주신 건데요······."
"아버지······."

루아가 편지를 잠시 내려다보았다. 무언가를 회상하는 듯  표정을 짓다, 이내 고개를 젓고, 다시 나를 바라본다.

"읽지 않는거야?"
"으음, 그게요."

볼을 긁적이며 말꼬리를 흐렸다. 편지를 다시 편지봉투에 집어넣은 다음 우체통에 봉인해버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편지가 슬퍼할거야."


편지를 바라보며 루아가 중얼거렸다. 나는 떨떠름한 표정으로 편지를 내려다보다, 이내 한숨을 내쉬었다.
다시 편지를 읽어내려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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묻고 싶은 말은 정말 많지만, 서면이 부족하니 줄이도록 하고, 네게 몇 가지 당부할것이 있어 편지를 보낸다.

네가 이번에 초청받은 에이트 가의 크세닉스는 정치적으로 굉장히 중요한 의미를 지닌단다. 리베른의 공작가가 황녀 전하를 대접한다는 건 극히 이례적인 일이야. 리베른에게 있어서도 크나큰 모험일 테고, 바른에 있어서도 크나큰 위험이 따르는 일이지. 리베른에서 먼저 관계 개선을 위해 손을 내민건지, 아니면 의중을 파악하기 위한 시험인건지는 아직  수 없지만. 위즈 너에겐 아직 어려운 이야기일 테지······ 하여간, 이번 크세닉스는 두 제국의 장래를 결정지을 단초가 될 것이라는 사실 정도는 알아두었으면 좋겠구나.


그런 자리이니 만큼, 부디 몸가짐을 단정히 하거라. 주된 시선은 황녀전하께서 감당하실 테지만, 네게도 분명 수많은 시선이 쏠릴테니.활달한 네게 이런 말은어울리지 않음을 알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탁하마. 이번 크세닉스에서 얌전히 지내거라. 하비셜 내에는 여러 가문이 있고, 개중엔 리베른과의 관계개선을 원하지 않는 강경파도 다수 존재하지.  공작가를 필두로 삼는 그들은 이번 크세닉스를 탐탁지 않게 여길 것이 분명해. 이 아비는 위즈 네가 그들에게 미움을 사지는 않을까 걱정이란다. 그러니 부디 얌전히 행동해 다른 이들의 눈길을 끄는 일이 없도록 해라.

마지막으로, 황녀 전하를 곁에서 잘 보필하거라. 당차신 분으로 알고 있으나, 이번 자리를 홀로 견디시는 것은 아무래도 무리가 따르는 일일 게야. 위즈 네가 황녀전하의 힘이 되어드렸으면 한다. 천성이 활발하니 만큼, 이 아비는 위즈네가 제 역할을 잘 해낼 수 있으리라 믿는다.

몸조심하거라. 하비셜에서 네가 세 번이나 습격받았다는 소식을 들은 이후로 매일매일 가슴을 졸이며 하루를 보내고 있다. 네가 하비셜에 남아있는  무척이나 원하니만큼 집으로 돌아오라는 말은 하지 않겠지만······.


현인의가호가 네게 함께하길 바란다. 사랑스러운 딸에게, 못난 아비가.


추신.

황제폐하께서 보내신 급보에 네 이름이 적혀 있는걸 확인했을 때에는 정말 하늘이 무너지는 줄 알았단다. 만일 다음에도 이런 일이 생긴다면 미리 편지를 보내주길 바란다. 네 아비는 심장이 좋지 않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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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심장 약한거 유전이었구나.





편지의 내용을 골똘히 생각하고 있다보니, 어느새 오전 수업이 끝나 있었다. 마침 물어볼 것도 있고 해서, 같이 수업을 들은 메디아에게 말을 건넸다.


"메디아. 밥 같이 먹을래요?"


공책에 무언가를 적고 있던메디아는 잠시 놀란듯 나를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조금 생각하더니 쓴웃음을 지었다.

"기쁘지만······ 둘 만의 시간을 보낼 수는 없을 것 같네요."
"네?"
"바깥이 소란스러워요. 나가볼까요?"

메디아가 필기구를 정리하며 영문 모를 소리를 했다. 밥을 같이 못 먹는다는 건 아닌 것 같은데, 둘 만의 시간을 보낼 수는 없을거라니? 세렌이나 루아, 하스타랑 같이 밥을 먹자는 건가? 그렇다면 환영이지만.

고개를 갸웃거리며 메디아를 따라 강의실의 문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나는, 강의실의 출구를 막고 있는 인파를 발견했다.


같이 수업을 듣던 사람들이 강의실을 나가지 않고 출구 근처에서 서성이고 있었다. 바깥에 무슨 일이라도 난 건지, 나가려는 생각이 없어보였다. 바깥을 살펴보려 했지만, 키가 작아서 실패했고······.

"실례합니다, 여러분. 비켜주시겠어요?"

웅성거리고 있는 무리를 향해 메디아가 말했다. 그러자 출구를 막고 있던 무리가 서서히 갈라지며 길을 텄다. 나는 그제서야 강의실 바깥의 모습을 확인할  있었다.


강의실 바깥에는 세 사람이 서 있었다.

조금 멋적은 표정으로 나와 메디아를 바라보는 세렌과, 그녀의 양 옆에서 마치 호위하듯 자리를 지키는 한 쌍의 남녀.

"로이아 언니······?"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위즈 후배님."


세렌의 오른 쪽에 서 있던 로이아가 미소와 함께 드레스자락을 살짝 들어올리며 인사했다. 굉장히 정석적인 인사라, 나도 얼떨결에 로브자락을 살짝 걷어 예를 갖췄다.


로이아는 새하얀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가슴팍에 에이트 가의 상징인 사자모양의 펜던트를 건 그녀의 모습은 스스로가 공작가의 영애임을 증명하고 있었다. 대련용 무구를 입어왔던 로이아의 이미지와는 색다른 모습이어서 조금 위화감이 들었지만, 위화감을 감안하더라도 굉장히 아름다웠다.

로이아와 인사를 마치자, 이번에는 세렌의 왼쪽에 서 있던 소년이 나와 메디아에게 한 차례 고개를 숙였다. 나도 다시 한번 인사하며 그를 힐끗 살폈다.


로이아와 언뜻 닮았으나, 한층 차가운 눈빛을 지닌 소년이었다. 인간의 가치를 재단하기 위해 회빛 눈을 빛내며, 푸른 머리카락을 단정히 빗어넘긴 모습은 그야말로 전형적인 대귀족의 품격을 내보인다.


짐작가는 사람이 있다. 로이아의 남동생이자 에이트 가의 차기 후계자. 백합황녀에서도 간간히 얼굴을 비추었던 남자.


"크세닉스의  번째 주빈께 인사드립니다. 이번 크세닉스의 주관을 맡은 데네스 루드 에이트입니다."

데네스 에이트다.


"정중한 인사 감사합니다. 저는 위즈 율릿이에요."

로브를 치맛자락 들듯 들어올리며고개를 숙였다. 영지에 있을 때 앨리스가 가르쳐 준 정식 인사였다. 하비셜에서는 쓸 일이 없을 줄 알았는데,저렇게 격식있는 인사를 받아보니, 나도 그만한 격식을 차려야 할 것 같았다.

"오랜만이군요. 마주대하는 건 입학식 이후로 처음이지요, 데네스 에이트."

메디아가 미소지으며 데네스에게 고개를 마주숙였다. 데네스도 메디아를 따라 다시 한 번 목례했다.


왠지모르게 등줄기가 오싹해졌다. 분명 미소짓고 있는데다 말투도 조곤조곤했고, 말의 내용도 이상할 것이 없었다. 하지만 분위기가 너무나도 냉랭했다. 두 사람 사이에서 눈보라가 몰아치는 듯  기분이었다.


"영웅의 핏줄을 이으신 리베른의 수호자, 메디아 황녀전하의 존안을 뵙습니다."


데네스가 한쪽 무릎을 꿇고 인사했다. 인삿말의 내용부터 팔다리의 각도까지, 예를 갖춘 인사의 교본이라고 해도 무방할 정도로 절도있었다.
하지만 그 모습을 본 메디아는 미간을 좁혔다. 나 역시 당황스러운 눈빛으로 데네스를 바라보았다. 특수과라서 잘 모르는 걸까. 메디아는 황녀전하라는 호칭을 굉장히 싫어하는데······.


"황녀전하라니, 오래도록 듣지 못한 호칭이네요. 입학식 때의 제 연설은 벌써 잊은건가요?"
"잊었습니다."

아무런 거리낌 없이 데네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메디아는 더더욱 얼굴을 구기면서도 애써 평정을 유지했다.


"일찍부터 영재라 불리던 당신의 총명도 쇠한 모양이군요."
"전하의 실언을 기억하는 것은 쓸모없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뭐라구요?"
"신하된 자로서, 주군의 실언을 기억해야 할 의미가 없으니."
"하비셜의 기치를 의미없다 매도하는 건가요?"
"카마라 대제와 엘리시아 황비께서 함께 세우신 귀족정의 본질을 일깨워드렸을 뿐입니다."
"성군이 세운 법이라  지라도 시간의 흐름에는 버틸  없지요. 오래되어 무너져가는 성벽에 몸을 기댈 셈인가요?"
"주인이 관심을 끊은 성이라 할지라도, 성지기는 성의 관리를 계속해야 하는 법입니다."

살벌하다.
뭔 이야긴지 잘 알아듣지는 못하겠지만, 분위기가 너무나도 살벌했다.

굳은 미소만을 내보이는 메디아와, 여전히 한 쪽 무릎을 꿇으며 예를 갖추고 있는 데네스. 특히 데네스에게서 흘러나오는냉기는 너무나도 차가워서, 흠칫 하고 몸을 떨 정도였다.

그 메디아를 상대로 전혀 밀리지 않는 언변이었다. 무릎을 꿇고 있으면서도 자신의 주관을 굽히지 않는 모습은 그의 신념을 너무나도 확실하게 보여주었다. 개그캐릭터로서의 분량이  많았던 백합황녀의 이미지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았다.

어쩔줄 몰라하며 두 사람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메디아의 말을 거들어야 하나 싶다가도, 괜히 나섰다가 말 한마디 못하고 압살당할 것 같기도 해서 섣불리 나설 수가 없었다. 웃으면서 무마해보려고 해도, 분위기가 너무 살벌해서, 까딱 잘못했다간 웃음이 아니라 울음이 나올 것 같았다.

"두 사람 모두, 이제 그만 하지 않겠나?"

그런 살얼음같은 침묵을 세렌의 조용한 목소리가깨뜨렸다. 세렌은 나와 로이아를 바라보더니 말했다.

"가치관에 대한 이야기는 나중으로 미루는게 어떻겠나. 지금의 목적은 가치관의 옳고 그름을 논하는 것이 아닌, 크세닉스의 성공적인 개최에 있으니."


세렌이 침착하고 합리적인 제안을 꺼냈다. 데네스는 그런 세렌에게 한 차례 고개를 숙인  일어서며 말했다.


"추태를 보여드렸습니다, 세리나 바른 황녀전하."
"······저도 아직 멀었군요."


메디아 역시 세렌의 말을 수긍하며 시선을 내리깔았다. 살짝 분한  같은 표정이었다.

"메디아, 괜찮아요?"
"······미안해요. 성숙하지 못한 모습을 보이고 말았어요."


메디아는 풀이 죽은 듯 왼쪽 팔을 힘없이 감쌌다. 으, 분위기가 좋지 않아.


"저기, 세렌, 로이아 언니. 메디아. 데네스······ 님?"
"에이트로 불러주십시오, 율릿 양."
"에, 에이트 군."

서늘한 목소리였다. 나는 얼떨떨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호칭을 바꿨다. 그리고는 모두에게 말했다.

"제가 자세한 걸 알지는 못하지만, 크세닉스도 결국 축제잖아요?"
"그렇지. 고대의 크세닉스도 마을의 인원 모두가 참여하는 축제의 형태로 진행되었으니."


세렌이 웃으며 나를 거들어줬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축제는 웃으면서 해야 된다고 생각해요. 그러니까, 서로 감정 상하고 하는 일은 없었으면 좋겠는데······ 안 될까요?"

메디아와 데네스를 번갈아 바라보면서 물었다. 메디아는 미묘한 표정을 지으며 나를 바라보다, 이내 희미한 미소와 함께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웃는게 제일이겠죠. 인상을 쓰며 축사를 읽을 수는 없을테니."
"그렇죠? 축제는 즐겨야 하잖아요!"

메디아의 반응에 자신감을 얻은 내가 환하게 웃자, 메디아는 내 머리카락을  차례 쓸어내렸다. 그리고 앞을 걸어가고 있는 데네스를 향해 말했다.


"위즈가 틀린 말을 하진 않은 것 같네요, 데네스 에이트."
"······고려해보겠습니다."


끄덕.

여전히 서늘하고 무뚝뚝한 반응이었다.
그래도, 긴장했던 것 보다는유한 반응이라,  시름 놓은 기분이었다.

"조촐한 식사가 준비되어 있습니다. 식사와 함께 크세닉스의 일정을 설명드릴테니, 부디 함께해 주셨으면 합니다."

상황을살피던 로이아가 안심한 듯 우리를 안내했다.

······후우. 그래도 밥은 기분 좋게 먹을 수 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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