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2화 〉9. 연화(緣火) (7)
로이아와 데네스가 대접한 식사는, 조촐하긴 커녕 본가에서 먹었던 식사보다도 호화스러웠다.
아마 맛있었을 것이다. 그래, 그렇게나 훌륭한 비주얼을 가진 음식들이 맛있지 않았을 리가 없다.
울상을 지으며 빈 그릇을 내려다보았다. 살짝 시야가 어지러웠다. 내가 대체 이걸 언제 다먹었나 싶은, 그런 느낌이다. 분명 배는 부른데, 음식의 맛이 도통 기억나지를 않는다.
"설명은 이해하셨습니까?"
"······네에······."
"본래 식사는 여유로워야 하나, 크세닉스의 설명을 위해 식사시간의 도중을 이용했습니다. 부디 마음 상하지 않으셨으면 합니다, 위즈 후배님."
"로이아 언니는 밥도 제대로 못 먹었는데요, 뭐. 이 정도는 괜찮아요!"
아마도.
다시금 울상을 지으며 빈 그릇을 내려다보았다. 설명이 시작되기 전 까지만 해도, 이 그릇엔 내 혀를 행복하게 해주기 위해 허니브레드가준비되어 있었다. 김이 모락모락 나고, 달콤한 향이 은은하게 울려퍼지는, 딱 보기에도 최고급품으로 보이는 허니브레드가.
크세닉스 때 차려야 할 예법, 진행 과정,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기 위한 여러 대처방안까지.
한 시간동안 진행된 식사시간동안 100여가지에 달하는 수칙을 머리속에 집어넣어야 했던 것이다. 그것 뿐만이 아니라, 메디아와 데네스 간의 차가운 기류 또한 감내해야 했기에, 음식의 맛을 느끼기가 힘들었다.
그래서 지금 내가 울상을 짓고 있었던 것이다. 한 글자라도 놓칠 까봐, 그렇게나 맛있어 보이던 음식을 음미하지 못했던 나의 신세가 너무나도 슬펐다.
메디아와 냉랭한 기류를 만들어내던 데네스는 크세닉스의 준비를 위해 먼저 자리를 떴다. 설명도 끝났으니, 우리도 슬슬 자리를 떠야 할 시간이었다. 오후 수업의 시작이 얼마 남지 않았으니까.
어, 그러니까. 잔을 드는 순서가 뭐였더라······.
머릿 속을 헤집고 다니는 정보들을 애써 정리하고 있는데, 세렌이 쓴웃음을 지으며 내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쓸어내렸다.
"수고 많았다, 위즈."
"괜히 밥 한끼 사달라고 했다가······."
"후후, 값진 교훈을 얻었구나."
으으.
내 머리카락을 매만져주는 세렌의 손길에 살짝 눈을 찡그리며 신음소리를 내었다. 그녀의 손길이 아파서 그런 건 아니고, 세렌에게 일종의 투정을 부리는 것에 가까웠다.
앞에서 찻잔을 들고 있던 메디아가 그런 나를 보고 잠시 미소를 되찾았다. 냉랭한 표정을 조금 풀어, 조금은 요염하기까지 한 미소를 자아낸다. 기분이 조금 나아진 걸까. 다행이다.
"오후 수업이 끝나면 복습을 하도록 해요."
······취소. 다행이 아니었어. 절대로.
"메, 메디아? 그런 무서운 말은 장난으로라도 싫어요······? 저, 그래도 로이아 언니의 설명, 열심히 들었고······!"
"어머. 로이아 선배님의 설명이 그 정도로 명강의 였던가요?"
"네?"
"이상하네요. 제 설명은 몇 번이나 반복해야 겨우익히던 위즈가, 단 한번의 설명으로 크세닉스의 방대한 수칙을 이해하다니. 으음, 반성해야 겠네요. 제 설명은 로이아 선배님의 설명의 발 끝에도 미치지 못하나봐요."
"무, 무슨 소리십니까?!"
씨익.
메디아는 짐짓 슬퍼하는 척 하며 눈빛에 짖궂은미소를 담았다.
갑작스럽게 언급된 로이아가 당황하는 가운데, 메디아는 계속해서 내게 대답을 요구했다. 크세닉스의 규칙을 정말 모두 이해했냐는 물음에 대한 대답을 바라고 있는 눈빛이었다.
······차마, 그렇다고 대답할 수가 없었다.
"잘못했어요······."
"그래요. 저녁에 보도록 해요, 위즈."
내가 사과하자, 메디아가 연기를 끝내고 밝게 웃었다. 메디아의 풀 죽은 연기에 속아넘어가 어쩔 줄 몰라하던 로이아는 갑작스러운 메디아의 표정변화에 적응하지 못하고 얼굴에 물음표를 띄우며 혼란스러워 했다.
추욱.
어깨를 늘여뜨렸다. 갑작스럽게 사라져버린 오늘의 저녁시간 때문이었다. 모처럼 숙제도 없는 날이었으니 만큼, 침대에 누워 푹 쉬려고 했던 계획이 물거품으로 변해버리고 말았다.
"나도 그대를 돕도록 하지. 그대는 나와 크세닉스를 같이 할 파트너니까."
"히잉, 세렌······."
세렌이 그런 내 어깨를 토닥이며 위로해주었다.미안하면서도 나를 위해 시간을 내주겠다는 세렌이 그렇게 고마울 수가 없었다.
울상을 지으면서도 세렌의 팔에 엉겨붙어 칭얼댔다. 그런데 갑자기 메디아가 얼굴을 굳히더니, 조금 불만스러운 얼굴로 말했다.
"당신은 오지 않아도 됩니다, 세리나 바른."
"그게 무슨 소리지?"
퉁명스러운 메디아의목소리에, 세렌이 살짝 인상을 찌푸리며 되물었다. 그러자 메디아는 나를 잠시 바라보더니, 고개를 숙이며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방해에요."
쩍.
순간, 내 품에 안겨있던 세렌의 팔이, 돌처럼 딱딱해진 채움직임을 멈추었다.
"세,세렌?"
"······."
당황한 내가 세렌을 올려다 보았지만, 세렌은 미동조차 하지 않은채 굳어버린 상태였다. 메디아 역시 스스로 놀라며 입을 가렸다.
"······틀린 말은, 아니군······."
그리고, 이내, 한탄과도 같은 세렌의 독백이 방 안을 울렸다.
"그래. 나에게 가르치는 능력이 없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어. 위즈도 나에게서 고개를 돌릴 정도이니까······."
"세렌?! 그 때 일 마음에 담아두고 있었어요?!"
······3개월 정도 전의 일이 갑작스럽게 튀어나오자, 나는 깜짝 놀라 물었다. 그러자 세렌이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비루한 차림이든, 황녀이든. 나의 어떤 모습도 스스럼없이 받아들여주었던 그대가 처음으로 나에게서 고개를 돌렸어. 내 어찌 그 비통한 일을 잊을 수 있을까······."
"실언이었습니다, 세리나 바른. 제가 방해된다고 했던 것은, 가르침이 아니라─"
흔들리는 눈동자로 세렌에게 사과하려던 메디아가 별안간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는 하얀 볼을 화악 하고 붉히다, 이내 고개를 숙였다.
"······내가 가르침을 방해하지 않는다면, 대체 어떤 것을 방해한다는 건가?"
세렌이메디아에게 잔뜩 풀이 죽은 목소리로 물었다. 고개를 숙이고 있던 메디아는, 잠시 세렌을 바라보다, 나에게로 시선을 돌리더니, 다시 고개를 푹 숙였다. 그리고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말할 수······ 없어요."
"어째서지?"
"······."
메디아가 고개를 숙인 채 미동도 하지 않았다. 머리카락 사이로 힐끗 보이는 귀는 새빨갛게 물들어 있어, 꼭 귀마개 없이 추운 겨울을 돌아다니고 있는 사람의 것 같았다.
"······그래. 그렇게 얼버무릴 필요 없어. 그대는 사실을 말했을 뿐이니."
"사, 사실이라뇨. 그렇게 기죽을 필요 없어요! 세렌이 같이 있어주는 것 만으로도 얼마나 힘이 나는데요?!"
"무언가를 배우고자 하는 그대에게 내가 어떤 도움을 줄 수 있지?"
세렌이 슬픈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당황해서, 손가락을 꼽아가며 머리를 최대한 돌렸다.
"세렌이 있어주면요, 일단 눈이 즐겁구요. 세렌의 목소리를 듣는 것 만으로도 음악을 듣는 것 처럼 집중이 잘 되구요, 세렌에게서 나는 좋은 향기덕에머리도 맑아지구요, 어, 또, 그러니까······ 공간이 화사해져요!"
"결국 설명은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 아닌가······?"
"윽······!"
차마 거짓말을할 수 없었던 내 입이 원망스러웠다. 세렌은 이해한다는 듯 쓸쓸한 미소를 지으며, 로이아에게 말했다.
"식사대접 감사합니다. 저는 이만, 수업이 있으니, 먼저 자리를 뜨도록 하겠습니다······. 동생분께도 인사 대신 전해주십시오."
"아, 예. 수고하셨습니다, 세리나 후배님."
아직까지도 혼란스러워하는 로이아에게 인사한세렌이 자리를 떴다.
차마 그 뒤를 잡을 수가 없었다.
오늘 저녁에 산책이라도 하면서 다독여 줘야 할 것 같은, 세렌에겐 전혀 어울리지 않는 처량한 뒷모습이었다.
도덕 강의실 옆의 세면실. 양치질을 하기 위해 메디아와 함께 들어갔다.
사실,양치질이라기엔 너무나도 간단한 과정이었다. 세면실에 비치되어 있는 마정석 달린 솔을 세척기에 한 번 집어넣은 뒤, 가볍게 입을 한 차례 휘저으면 될 뿐인 일이었으니까. 솔질을 한 번 할때마다 이 사이의 잔여물이 한꺼번에 배출되는 느낌은 기묘하면서도 상쾌했다. 편하고, 상쾌하고, 효과도 발군이어서, 이제 나는 치약과 칫솔만으로는 만족할 수 없는 몸이 되어버리고 말았다.
"저기, 메디아."
"네?"
"세렌한테 사과하는게 좋지 않을까요."
"······."
메디아는 내 말에 대답하지 않고 입냄새를 없애주는 가글 비슷한 액체를 머금었다. 나는 그런 메디아에게 말했다.
"때로는 사실을 말해줘도 상처받을 수 있다구요. 세렌의 설명을 피한 저도 잘못한 건 있지만, 그걸 그렇게 대놓고 말한건 좀 아닌 것 같아서요······."
메디아가 잠시 나를 바라보다, 세면대에 가글을 뱉었다. 그리고는 한 차례 입을 헹군 뒤 작게 대답했다.
"······정말 그런 의미가 아니었어요."
"네?"
"당신을 가르치는데 방해가 되는게 아니라."
메디아가 잠시 나를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한 차례 시선을 피하더니, 들리지 않을 정도로 작게 무언가를 속삭였다.
"······둘 만 있고 싶어서."
"네?"
"아니에요."
"잘 못 들었어요, 메디아!"
"그래요. 잘 됐네요. 자, 어서 강의실로 가요."
"잘 못들었다니까요······?"
"어서요. 세리나 바른에게는 사과 할 테니까요."
내가 항변했지만, 메디아는 내 말을 무시하고 등을 떠밀었다.
"꼭 세렌에게 사과 해야 해요?"
"그녀만 챙기네요, 위즈는."
메디아가 나를 조금 흘겨보았다. 그리고는 한 차례 눈웃음을 지었다. 메디아만이 지을 수 있는 눈웃음이었다. 매력적이고, 독보적인, 아름다운 표정.
"저도 그녀 정도로 아껴줄 수 있어요?"
"······네?"
"어려운 일인가요?"
"아니, 뭐, 그거야. 네. 세렌도 메디아도 똑같이 좋아하니까······."
"그럼 됐어요."
메디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다시 한 번 웃으며 말했다.
"고마워요, 위즈."
갑작스러운 그녀의 공격에, 순간 얼굴이 새빨개져 버렸다.
메디아와 헤어졌다. 나는 강의실에 도착했다. 새빨개진 얼굴을 진정시키며, 수업이 시작되기를 기다리고 있을 때 였다.
불현듯 메디아가 어떤 말을 했는지를 듣지 못했다는 사실을 떠올려버렸다.
그런가. 갑작스러운 그 물음은, 사실 내 주의를 분산시켜 화제를 돌리기 위한 수단이었던 건가······!
역시 메디아였다. 대단했다. 화제를 돌렸다는 사실을 눈치채지 조차 못할 뻔 했다.
다음에는 휘둘리지 않을 거라고 다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