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3화 〉9. 연화(緣火) (8)
크세닉스 개최 당일.
두근거리는 심장 탓에 워낙 잠이 오지 않았던 터라, 루아의 품에서 겨우 눈을 붙였다. 포근하기로는 비길 곳이 없다. 폭신폭신하고 부드러워서, 숙면에 제격이다. 비슷한 거라도 하나 있으면 모아둔 용돈을 전부 털어서라도 하나 장만하고 싶을 정도였다.
하여간, 상쾌한아침을 맞이한 나는 옷장 앞에서 고민에 빠졌다. 뭘 입어야 하나 싶었기 때문이었다.
1번. 분홍색을 베이스로 해서, 하늘하늘한 치마와 앞자락에 수놓은 꽃장식을 자랑하는─ 그야말로 소녀틱하기 그지 없는 드레스.
2번. 비취색 프릴이 달린 오프숄더 드레스와, 어깨를 살짝 덮는 반투명한 가디건. 치마는 허벅지의 아래쪽을 살짝 드러낼 정도로 짧다.
3번······은, 바지니까 제외해 두자. 나 같이 키 작은 사람이 소화할 수 있는 패션이 아니다. 세렌이면 또 모를까.
"루아, 왼쪽이 좋을까요, 오른쪽이 좋을까요?"
옷장에서 두 개의 드레스를 꺼내 양 손에 들었다. 그리고 아직 잠이 덜 깬듯 하품을 하고 있는 루아에게 물었다.
루아는 눈을 비벼 눈가에 고인 물기를 닦아내었다. 그리고는 내가 든 드레스를 번갈아 살피더니, 손가락을 들어올려 주저없이 1번 드레스를 선택했다.
"이게 더 나을까요?"
분홍색 드레스를 들어올려 보여주었다. 루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위즈는 귀여운게 어울려어······."
루아의 목소리는 상당히 몽롱했으나, 기묘한 확신에 차 있었다. 뭐, 내 눈보다야 타인의 눈이 훨씬 정확한 법. 좋아, 오늘은 이걸로 정했다.
"루아는 드레스 안 입나요?"
"······응."
루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다시 침대에 누웠다. 다시 잠을 청하려는 것 같은 행동이었다.
"지금 자면 크세닉스에 늦는다구요? 크세닉스는 열 한시에 시작이잖아요."
"······나는, 크세닉스 안 가."
"네?!"
깜짝 놀라 루아를 바라보았다. 그러자 루아는 이불을 머리 끝까지 덮었다. 나는 옷걸이를 내려놓고 루아의 침대 앞으로 다가갔다.
"그게 무슨 소리에요, 전교생이 즐기는 축제인데······?"
"졸려······."
"설마, 리베른의 공작가가 주최한 크세닉스여서 그런 거예요?"
"······."
대답이 없었다. 내 짐작이 맞는 것 같았다.
"안 오는 건 너무 슬프잖아요. 모두가 즐기는 축제인데."
"위즈가 크세닉스에 대한 이야기를 해 주는 것만으로도 기쁠 거야."
"하지만, 직접 보는 것 만큼 좋은 것도 없을텐데······."
"으응. 위즈가 주인공인 파티잖아. 깨고 싶지 않은걸."
이익.
루아가 거부하건 말건, 나는 루아를 가리고 있는 이불을 양 손으로 잡고 걷어올리려 했다. 하지만 꿈쩍도 하지 않았다. 루아가 어느새 이불을 돌돌 말아 단단하게 자신을 감쌌기 때문이었다. 내 힘으로는 루아의 이불을 벗겨낼 수가 없었다.
"그래도요! 1학년들과의 분위기도 많이 좋아졌는데!"
"······마법과의 1학년 만, 이잖아?"
"윽."
루아의 목소리가 내 아픈 곳을 찔렀다.
루아의 말대로였다. 마법과의 1학년들이야, 같이 수업을 들으며 사이를 원만하게 만들 수 있었지만(그럼에도 불구하고 루아를 고깝게 보는 시선은 여전히 존재했다), 선배들과 루아의 사이에는 일말의 진전조차 없었다.
루아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입힌 요리 연구회 사람들. 크세닉스의 참가자들 중, 그들만큼이나 루아에게 적대적인 사람을 찾기란 어려운 일이 아닐 것이었다.
"그래도요, 루아. 당일 날 갑자기 그런 말을 하면······."
"쿨······."
"으, 안 자잖아요."
"쿨, 쿨."
일부러 자는 소리를 내며 대화를 끝내고자 하는 루아. 몇 번이나 고치 모양의 이불을 들추려 했지만 허사였다.
"······정말, 괜찮겠어요?"
"······응."
"안 자는거 맞잖아요."
"······으응, 잠꼬대애······."
······능청스럽다고 해야할지, 어설퍼서 귀엽다고 해야할지.
한 숨을 내쉬면서, 크세닉스의 준비를 마저 했다.
방을 나오면서도 이불을 둘러 싼 루아의 모습이 눈에 밟혔다.
크세닉스.
백합황녀에서도 언급되지 않은, 미지의 풍습.
솔직히 말해서, 어렴풋한 이미지였다. 하비셜의 전교생을 너끈히 수용할 수 있는 커다란 축제. 딱 이 정도의 어렴풋한 상상만을 가지고 있을 뿐이었으니까.
그런 의미에서, 주빈 자격을 통해 한 발 먼저 하비셜 본관에 발을 들인 나는, 그 압도적인 위용 앞에서 멍하니 입을 벌릴 수 밖에 없었다.
가장 먼저, 환영 마법으로 구현해놓은 하늘 위의 청사자가 눈에 띄었다.
푸른 갈기를 태양빛처럼 펼치며, 용맹한 얼굴로 하늘 위에 우뚝 선 사자. 로페르 공작소에 나타났던 마수와 비견될 정도로 거대한 위용을 지닌 사자가, 고고한 눈빛으로 대지를 관망하고 있다.
에이트 가의 상징이 청사자라고 했던가. 공작가의 상징을 나타내는 환상마법인 만큼, 그 모습은 대단히 정교했고, 꼭 살아 숨쉬는 것 같았다.
본관으로 향하는 길에는 마법 문양이 새겨져 있는 카펫이 깔려 있었다. 마차 두 대는 넉넉히 들어갈 수 있을 것 같은 넓이였는데, 그 양 옆에서는 관현악단과 무용수가 분주히 공연 준비를 하고 있었다.
"오셨습니까, 위즈후배님.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로이아 언니!"
익숙한 환영의 목소리에 반색하며 손을 흔들었다. 로이아였다. 주름 하나 없이 깨끗한 드레스와 단아한 몸가짐. 대련장에서의 모습이 뇌리에 박혀있는 나로서는 아직도 조금 위화감이 드는 로이아의 모습이었다.
"후후, 아름답네요."
"언니도요!"
로이아가 미소지으며 나를 안쪽으로 이끌었다. 크세닉스가 본격적으로 열리는 하비셜 본관.4층 높이의 공간이 어떻게 뒤바뀌어 있을지 궁금해진 나는, 종종걸음으로 로이아의 뒤를 따랐다.
그리고, 본관 안으로 들어선 나는, 한 번도 보지 못한 광경에 다시금 입을 벌릴 수 밖에 없었다.
일단, 내가 알던 하비셜 본관 강당의 모습이 아니었다. 내가 알고 있던 강당의 모습은 별 다른 것이 아니었다. 광활한 1층과, 아래를 내려다볼 수 있도록 중앙을 뚫어놓은 2, 3, 4층의 좌석.
얼핏 콜로세움을 연상케하는 구조였건만, 지금 내가 발을 들인 곳은 전혀 그런 모습의 공간이 아니었다.
일단, 2층과 3층, 4층에 있던 좌석이 전부 사라졌다. 월드컵 경기장만한 넓이와 4층 정도의 높이를 가진 광활한 공간.
얼핏 휑해보일 수 있던 공간이었으나, 그 내부는 너무나도 화려해, 쓸쓸함이라곤 찾아볼 수 조차 없었다.
중심원을 향하는 집중선처럼 배치되어있는 긴 식탁. 그 양 옆의 수많은 의자와, 탁자마다 다채롭게 꾸며진 꽃병과 촛대들. 식탁보 하나 마저도 한땀한땀 자수가 되어있는 최고급품이었다.
그런 식탁의 중앙에는, 나선형의 구조물이 설치되어 있었다. 동서남북에 사자상이 놓여있고, 계단을 올라갈 수 있는 모양이었다. 수많은 석상과 일렁이는 마법문양, 그리고 반짝이는 치장품들로 둘러쌓인 화려한 구조물. 언뜻 위압감마저 들게 만드는 그 구조물은, 드넓은 공간의 중심에 우뚝 선 채, 오늘의 주연이 자신이라는 것을 당당히 내보였다.
구조물의 최상단에는 여섯 개의 의자로 둘러쌓인 원탁이 보인다. 이 공간의 어디서든 볼 수 있을 법한 위치였는데, 나는 그 자리를 보고 순간 오한이 일었다.
"······저, 저기. 로이아 언니."
"무슨 일 이십니까?"
"저 자리, 그냥 장식용이죠? 누가 앉거나 하진 않겠죠?"
"아시고 계시지 않습니까. 주빈과 개최자를 위해 마련된 자리입니다."
불길한 느낌은 틀리지 않는다.
저 자리에서 밥을 먹는다고? 6000명이나 되는 사람들의 시선을 한 몸에 받는 자리에서?
크세닉스라는 거, 사실 초대한 사람을 목 막혀 죽게 만드는 자리가 아닐까.
울상을 지었다. 지금이라도 발을 빼고 싶었지만, 그랬다간 크세닉스를 주최한 모든 분들께 민폐가 되니, 그럴 수도 없었다.
과연 밥이 넘어가긴 할까.
그냥, 세렌과 메디아의 얼굴만 바라보면서 밥은 먹는 척만 할까. 한 끼 정도는 그렇게 넘겨도 배부를 것 같은데······.
"로이아 언니."
"말씀하십시오."
"······죄송해요."
"예?"
"앞으로 절대 밥 사달라고 안 할게요······."
진심을 담아. 정말, 이 이상 없을 정도의 진심을 담아, 사과의 말을 전했다.
구조물의 상부에는 이미 크세닉스의 주연이 모두 모여 있었다. 한 가지 의아했던 점은, 그 곳에 샤오리드가 있었다는 점이었다.
"엥, 샤오리드 선배?"
"아하하, 어째서 내가 여기에 있냐는 눈빛이네."
"독심술 쓰세요?!"
"얼굴에 쓰여있잖아, 율릿 양."
사람 좋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으쓱이는 샤오리드. 푸른 색 위주로 치장되어있는 단상에서, 그의 붉은색 머리카락은 유난히 눈에 띄었다.
그러고 보면, 아버지의 편지에서 분명 룽 가에 대한 이야기를 본 적이 있었다. 리베른과 바른의 관계가 호전되는 것을 원하지 않는 강경파의 수장이 룽 가라고 했던가.
비록 후계자는 아니라고 해도, 룽 가의 자제가 크세닉스에 참가한다는 것은 굉장히 의아한 일이었다.
"엄청 궁금해 하네. 살짝 알려줄까?"
샤오리드가 난감한 표정을 지으면서도 내게 다가왔다. 데네스가 그런 샤오리드의 모습을 탐탁지 않게 바라보다 고개를 돌리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고개를 살짝 숙인 샤오리드가 나와 눈을 맞추며 말했다.
"가문의 명령이야. 크세닉스의 진행과 결과를 감시하라고 편지가 왔거든."
"스, 스파이?!"
"윽······ 그렇게 대놓고 지적당하니까 좀 부끄럽네."
쓴웃음을 지으며 샤오리드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한숨을 한 번 내쉰 후 말을 이었다.
"그래서, 크세닉스를 돕기로 했지. 로이아에게 부탁 좀 했거든. 아버지는 크세닉스를 훼방놓으라고는 한 마디도 하지 않으셨으니까."
"······그게 무슨 뜻이에요?"
"아버지와 누님이 꽤나 골치아파 하실거라는 이야기지. 이래봬도 룽 가의 자식이니까? 강경파 가문들이 앞다퉈서 본가의 의중을 파악하려 들 거야. 한동안 본가는 난리도 아닐걸?"
"생각보다 파장이 엄청날 것 같은데. 그래도 돼요?"
"혼 좀 나겠지? 용돈도 끊길거고. 뭐, 삐끗하면 호적이 파일 수도 있겠네."
"크, 큰일이잖아요?! 호적이 파이면 뭐 하시게요?!"
"조금씩 모아둔 돈도 있고.정 안되겠다 싶으면 어디 가서 얻어먹고 살지 뭐. 내가 인복이 나쁜 편은 아니거든~"
넉살좋게 너스레를떠는 샤오리드. 하긴, 인망이 엄청난 사람이니까 내가 걱정해봤자 의미는 없을 거다.
괜찮겠지. 뭐, 만약에 호적이 파이면, 로이아랑 사귀기도 쉬워질테고?
······잠깐만. 생각해보니까 이거 해피엔딩 아닌가?
"샤오리드 선배."
"응?"
"그냥호적 스스로 파고 룽 가문 나오시면 안 될까요?"
"아하하, 율릿 양, 나 걱정해주던 사람 맞아?"
"의외로 괜찮을 것 같아서요."
"음······."
샤오리드가 잠시 말을 끌었다. 그리고는 로이아 쪽을 힐끗 바라보더니, 오묘한 미소를 지었다.
"뭐, 후배님 말이니까. 한 번 생각해볼까?"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건지 알 수 없는 미소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