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4화 〉9. 연화(緣火) (9)
크세닉스의 개최를 알리는 우렁찬 관현악단이 울려퍼짐과 동시에, 사방에서 사람들이 물밀듯이 몰리기 시작했다.
나선형으로 들어와, 가장 앞 자리부터 착석하는 사람들. 1학년부터 6학년까지 다양했고, 그 중에는 교수님들의 모습도 보였다.
바로 그때, 하비셜의 창에서 다섯 개의 푸른 물결이 들이쳤다. 입장하는 학생들에게 물보라를 끼얹는 듯 한 모습이었으나, 학생들의 옷이 젖지 않은 것으로 보아 환상마법인 것 같았다.
물보라는 이내 모든 창문에서 몰려들어왔다. 푸르고 투명한 파도가 넘실대며 회장을 감쌌다.
아름다웠다. 맑고 투명한 바다에 잠수한 것 처럼, 물그림자가 일렁였다. 푸른 색 위주로 장식된 에이트가의 연회와 어우러져 굉장한 조화를 이루는 환상마법이었다. 곳곳에서 탄성이 터져나왔다.
물보라가 잠잠해지자, 환상마법이 서서히 옅어졌다. 대기중에 남은 물방울이, 빛을 산란시켜 수십가지 빛깔의 무지개를 수놓았다.
"준비 다 됐어?"
"아, 꺄아악?!"
환상적인 광경을 넋놓고 바라보고 있는데, 별안간 등 뒤에서 말소리와 함께 내 양쪽 어깨를 붙잡는 손길이 느껴졌다. 새된 비명소리를 지르며 뒤를 쳐다보니, 그 곳에 물방울이 모인 시하의 인영이 나타나 있었다.
"흐흥······ 이제 슬슬 적응 할때 되지 않았어, 위즈 학생?"
싱글싱글 웃으며 하얀 머리카락을 뒤로 넘기는 시하의 모습. 심박수가 두 배 가까이 올라갔음을 느끼며, 볼멘소리를 내었다.
"으으, 잔뜩 긴장해있는데 그러지 말아주세요! 심장에 안 좋아요······!"
"지금도 긴장하고 있어?"
"당연······ 어, 어라?"
당연하죠, 라고 대답하려던 나는 순간 말을 멈췄다. 덜덜 떨리던 손이 어느새 진정되 있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원래 한 번 놀라면 긴장은 저절로 풀리게 되어 있거든. 이제 괜찮지?"
시하가 고개를 으쓱였다. 신기함에 눈을 크게 뜨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그렇네요?"
"그래그래. 크세닉스는 처음이지?"
"네."
"준비는 잘 했어?"
"자신없어요······."
"아하하, 그렇겠지. 리베른의 크세닉스는 굉장히 까다로운 절차를 지녔으니까."
익살스러운 미소를 짓던 시하가 다시 한 번 내 어깨에 손을 얹었다. 그리고 조금 진지한 얼굴을 지었다. 시하가 이런 표정도 지을 수 있구나 싶을 정도였다.
"그래도 말이야, 위즈 학생. 한 가지 부탁하고 싶은게 있어."
"······부탁이요?"
고개를 갸웃거리며 반문했다. 그러자 시하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조금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위즈 학생이 웃어줬으면 좋겠어. 세 번의 습격을 모두 경험한 위즈 학생이 미소를 지어준다면, 학생들 간에 만연한 불안도 많이 사라질 테니까.
······세 번이나 위즈 학생을 위험에 노출시킨 사람으로서 할 말은 없지만. 부탁, 들어줄 수 있을까?"
갑작스러운 부탁이었고, 조금 무거운 부탁이었다. 주빈 역을 잘 해낼지도 자신이 없는 이 시점에서 미소를 유지하라는 건 굉장히 힘든 일이었다.
그래도, 나는 활짝 웃어보였다. 그리고 고개를 끄덕였다.
"열심히 해볼게요!"
"그래. 으구구, 귀여워라. 나중에 학과장실로 찾아와, 과자라도 좀 줄게. 과자 좋아한다며?"
"어, 어떻게 아셨어요?!"
"제니가 그러더라. 면담 도중에 과자를 두 통이나 비웠다며?"
"아······!"
얼굴에 열이몰렸다. 나는 뭐라고 항변하려고 입을 우물거렸지만, 시하는 내 머리를 한 번 쓰다듬은 뒤 손을 살짝 흔들며 데네스 쪽으로 발걸음을 옮겨버려서, 내가 항변할 기회조차 주지 않았다.
크세닉스의 진행은 크게 다섯 개의 절차로 구분된다.
주빈과 개최자를 소개하며, 축사로 마무리짓는 개회식.
리베른의 유명한 가수가 온다고 하는 축하공연.
대체 얼마나 화려한 음식이 나올지 궁금한, 만찬.
누구나 참여할 수 있는 무도회.
그리고, 폐회식까지.
6000명이라는 대인원이 착석을 마친 지금, 크세닉스는 이제 개회식을 앞두고 있다. 나는 두근거리는 심정으로 단상 아래에 숨겨져 있는 공간에서 바깥을 살짝 내다보았다.
"많구나. 정말 전교생이 거의 다 온 모양이야."
"그러게요······. 잘 할 수 있을까요?"
"그대와 함께라면 물론 가능하다."
"으으, 장난하지 말구요, 세렌."
"내 진심을 장난으로 치부하려 드는건가?"
내가 투정을 부리자, 갑자기 세렌이 얼굴을 굳히고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순간 깜짝 놀라 숨을 헉, 하고 들이켰다. 이런 반응이 돌아올 줄 예상하지 못해서, 어버버하며 혀가 꼬였다.
"그, 그건, 그러니까요······."
내가 할 말을 찾지 못하고 당황하자, 무거운 표정으로 나를 내려다보던 세렌이 별안간 풉,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그리고는 내 머리카락을 쓰다듬으며 밝게 웃었다.
"아하하, 장난은 이런 걸 말하는거다, 위즈. 그대도 이제 구분할 수 있겠지?"
"······저 놀린 거예요?!"
"그럼. 내가 어찌 그대를 미소 없이 대할 수 있겠나?"
"짖궂어요, 세렌······!"
내가 세렌을 흘겨보며, 세렌의 팔을 쳤다. 세게 치면 내 손만 아플게 뻔했기 때문에, 항의를 전달할 수 있을 정도의 세기로 토닥였다. 세렌은 간지럽기라도 한지 웃음을 참지 못하며, 무릎을 구부려 나와 시선을 맞추었다.
"걱정하지 말라는 의미였다. 그대와 함께라면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나의 말은, 가식도 장난도 들어있지 않은 진심이라는 이야기야."
"······세렌은 잘 해내겠지만, 저는 조금 불안하네요. 이런 거 처음이고."
"처음이라면 누구나 실수를 하지. 나도 열 살 때엔 예법을다하지 못하는 어설픈 아이였으니."
"세렌은 처음부터 잘 할 것 같았어요."
조금 의외여서 눈을 크게 떴다. 백합황녀에서의 그녀는 완벽 그 자체였으니까. 지금까지 보아왔던 세렌도 누군가를 가르치는 것만 제한다면 완벽에 걸맞는 사람이었기에, 그런 세렌이 실수를 한다는 것은 상상하기가 조금 힘든 일이었다.
세렌은 은은한 미소를 얼굴에 띄웠다.
"후후, 나도 많은 실수를 경험했어. 어마마마께 혼날 때도 많았지. 하지만 위즈. 나는 실수를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 이유가 무엇인지 알고 있나?"
"모르겠어요."
"실수를 딛고 성장할 나를 상상하기 때문이야."
세렌이 기억을 짚어가듯 말했다.
"어마마마께 혼나고 돌아온 뒤엔, 언제나 아바마마께서 나를 위로해주셨어. 그리곤 이런 말을 해 주셨지. 더 멋있는 모습으로 변할 내일의 자신을 생각하라고 말야."
"······세렌은 언제나 멋있었을텐데."
"하하, 그럴리가. 나는 어렸을 적에 눈물을 달고 살았어. 아바마마와 어마마마가 토벌을 위해 출정하신 밤, 혼자가 된 방 안에서 울고. 검을 잡다 손목이 꺾여서 울고. 마수를 상대하다 발을 헛디뎌서 울고. 참 많이 울었지."
"울만 한 상황 아니에요?"
"평범한 아이였다면 그랬을지도 모르지. 하지만 나는 황녀였으니까. 일반인들과는 조금 범주가 달라."
"그치만, 똑같은 사람인데······."
"으······. 그대에게 말하고 싶었던 건 그 쪽이 아니건만······."
내가 볼을 긁적이자, 세렌이 당황한듯 한 숨을 내쉬었다. 그리고는 고개를 살짝 흔들었다.
"어쨌든! 설명에 재능이 없는 나이기에, 본론만 말하지. 위즈, 그대는 실수를 두려워 할 필요가 없다. 실수한다 해도, 그것을 토대로 스스로를발전시켜나가면 될 뿐이야."
"······정말 그럴까요?"
"물론이지. 그게 인간이라는 존재니까."
세렌이 밝은 웃음과 함께 자신있게 고개를 끄덕였다.
조금 기운이 나는 것 같아, 세렌의 미소에 화답하듯 웃으며 말했다.
"같이 잘 해봐요, 세렌!"
"그래. 그 미소를 기다렸다!"
세렌이 내 머리를 살짝 쓰다듬었다. 치장해놓은 머리스타일을 해치지 않는 가벼운 움직임이었다. 뭔가 머리를 쓰다듬어지는 강아지가 된 느낌이었지만, 기분이 워낙 좋아서 그래도 상관없지 않나 싶었다.
그런데, 멀리서 축사를 연습하던 메디아가 우리 쪽을 보더니 내 쪽으로 다가왔다.
"위즈. 저도 격려해줄 수 있을까요?"
"격려요?"
"그대도 힘내도록 해. 첫 순서지?"
메디아에게 세렌이 손을 내밀며 말했다. 그러자 메디아는 조금 실망한 듯한 표정으로 씁쓸히 중얼거렸다.
"······당신의 격려를 원한게 아닌데······."
움찔.
메디아에게 내밀고 있던 세렌의 손이 한 차례 경련했다.
"조금 신경쓰이는 발언이로군, 메디아 리베른······?"
"······으읏, 실언이었습니다."
세렌이 인상을 찌푸리자, 메디아는 잠시 당황한 듯 눈동자를 떨더니 세렌에게 사과했다.
그러면서도 자꾸만 내 쪽을 바라보는 메디아. 무언가를 바라고 있는 고양이같은 모습이었다.
"메, 메디아도 힘내요! 파이팅!"
"─!"
메디아의 붉은 눈에 이채가 감돌았다. 그러더니, 가슴에 손을 얹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위즈가 주빈인 연회이니만큼 최선을 다할게요!"
배시시 웃는 메디아. 그녀의 뒤로, 수천명이 연회의 시작을 기다리고 있었다.
─일순간, 검은 안개가 단상을 휘감기 전까지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