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5화 〉9. 연화(緣火) (10)
달빛이 호숫가 위에서 퍼져나가듯, 검은 안개가 대강당의 상부에서 넘실댄다.
푸른 등으로 장식되어있던 천장이 어둠에 삼켜지며 공간의 명도가 낮아진다. 태양을 잃어버린 세상처럼, 어두운 그림자가 강당의 전역에 드리운다.
그 자리에 있던 모든 이들이 이변을 알아차렸다. 알아차리는 데에 걸린 시간이 조금 차이가 났을 뿐이다.
그리고, 시하는, 그들 중 가장 빨리 이변을 알아차린 사람이었다.
"마운무······!"
천운이라고 해야할까. 시하는 주빈들과 이야기를 나누기 위해 단상의 윗부분에 있었고, 그래서 가장 먼저 이 사태에 대한 대응을 할 수 있었다.
천장을 덮은 채, 컵에서녹아내리는 색얼음처럼, 천천히 아래로 영역을 넓혀가는 검은 안개.
시하는 대강당의 윗부분을 동결시켰다. 마법적인 간섭이 불가능한 마운무의 전개를 지연시키기 위해선 그 방법이 최선이었다. 시간의 흐름을 정지시켜, 마운무에 대항하기 위한 시간을 번 것이다.
상부와 하부의 시간이 분리되어 움직이기 시작했다.
두 황녀가 위즈의 앞뒤를 감쌌다. 긴장한 얼굴로 하늘을 바라보는 두 소녀. 갑작스러운 그녀들의 행동에, 위즈는 화들짝 놀라 주위를 살폈다.
"······절대로 내게서 떨어져서는 안 된다, 위즈."
그런 위즈의 손을 잡으며, 세리나는 손을 뻗었다. 찬란한 황금빛 마력이 그녀의 손에서 검의 형태를 이뤘다.
"펄스레이트 같은 축하공연 아니에요? 왜 그렇게 안색이 창백해요, 세렌?"
위즈가 불안한 목소리로 물었다. 시하덕에 조금 풀렸던 긴장이, 다시금 위즈의 몸을 옭아매기 시작했다.
"환상같은게 아니에요. 위즈, 마기가 느껴지지 않나요? 마운무가 하비셜의 본관에 나타났어요."
"마운무요······?"
"마수를 잉태하는 안개에요. 검은 달의 계절에만 나타나는 재앙의 시작점이죠."
"마, 마수······!"
위즈의 얼굴이 새파랗게 물들었다.
세 번이나 마수와 맞닥뜨린 그녀에게 있어, 마수라는 말은 굉장히 섬뜩한 단어로 다가왔다.
"습격일까요?!"
위즈는 당장 생각나는 가능성을 입에 담았다. 하지만 메디아는 고개를 저었다.
"마운무를 인간의 힘으로 만들어냈다는 기록은 한 번도 본 적이 없어요."
"하지만······ 시기가 너무 절묘하군."
세렌이 빛나는 검을 고쳐쥐며 중얼거렸다.
불길한 예감이 그들을 엄습했다.
"데네스 학생. 미안하지만, 이 곳의 지휘권, 잠시 양도해줄 수 있을까?"
"─그게, 무슨 뜻입니까."
"크세닉스의 중단을 선언해야 해. 하늘 위에 떠 있는 마운무, 보이지?저 녀석을 처리하려면 여기에 있는 사람들을 대피시켜야 할 거 아니야. 내 정지마법도 영원한 건 아니니까."
"······그건······."
데네스가 입술을 깨물었다. 크세닉스를 준비하기 위해 모여있던 모든 이들의 시선이 일거에 데네스에게로 쏠렸다.
"······빠른 처리는, 불가합니까?"
"무리겠는걸. 평범한 마운무라면야 간단하겠지만, 이 마운무는 조금 까다로운 녀석 같거든. 느껴지는 마기가 심상치 않아. 8석급 이상의 마수도 만들어낼 수 있을 것 같으니까."
"8석, 급······."
로이아가 신음하듯중얼거렸다. 로페르를 초토화시켰던 마수도 7석급에 불과했다. 1학년도 대거 참석해있는 이 강당에 8석급 마수가 소환된다는 것은, 상상하는 것 만으로도 아찔한 광경이었다.
"──이번 크세닉스가 가지는 의미를 모르시지는 않을 겁니다."
"알아. 나에게도 편지가 왔으니까."
"크세닉스가 취소된다면, 양 제국의 강경파가 목소리를 높힐 겁니다."
"데네스 학생. 시간은 많아.화합을 위해서라면 오늘이 아니더라도 기회는 반드시 찾아와."
"누구나 당신같은 수명을 지니지는 않습니다."
"······."
시하가 인상을 찌푸렸다. 그러더니, 이내 한숨을 내쉬었다.
"그럼, 어떻게 하고 싶어?"
핵심을 관통하는 물음이었다.
데네스는 입을 다물었다. 시하는 그런 데네스에게 말을 이었다.
"내가 생각하는 최선의 방책은 학생들을 대피시킨 후에 마운무를 처리하는 거야. 하지만 그게 싫다면, 대안을 생각해 내도록 해. 내 힘이 버틸 때 까지는 기다려줄 테니까."
"······."
데네스가 침음했다.
이 진지하고 삭막한 상황에, 내가 나선다고 해결될 문제가 있을까 싶어서 가만히 있던 중이었다.
"크세닉스가 취소된다면, 양 제국의 강경파가목소리를 높힐 겁니다."
데네스의 목소리가 유난히 내 귀를 파고들었다.
강경파가 목소리를 높이게 된다.
즉, 리베른과 바른 양 제국의 관계가 다시 나빠질 거라는 이야기다.
내 입장에서는 굉장히 달갑잖은 소리였다. 일단, 샤오리드와 로이아를 이어주기가 힘들어질 뿐더러, 내 궁극적인 목표인 세렌과 메디아를 이어줄 수가 없어져버린다.
······안돼. 그런 일은, 일어나선 안 된다.
"방법이 없을까요······?"
"방법······말인가요?"
"크세닉스를 개최할 방법이요."
"─위험한 상황이야. 개최를 멈추지 않으면 안돼."
"그렇지만요. 두 제국간의 사이가, 안 좋아진다고 하던데······."
세렌을 올려다보며 물었다. 세렌은 잠시 말을 멈추더니, 메디아를 바라보았다.
"······그대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메디아 리베른."
"대안을 강구할 가치는 있다고 생각합니다. 시하 학과장께서 시간을 벌고 계시니까요.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기에는 조금 시간낭비가 아닐까요."
"확실히, 그대의 말은 옳다."
세렌이 고개를 끄덕였다. 바닥에 황금빛 검을 꽂은 세렌은, 등을 돌려 나를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작게 미소지으며 말했다.
"불안에 떨지 말고 방안을 생각해보도록 해. 그대가 대안을 생각해내지 못한다고 해도, 내가 그대를 지켜낼 터이니."
내 어깨에 손을 짚고, 살짝 무릎을 숙여 시선을 맞추는 세렌.
단정한 정장을 입은 그녀가, 그렇게 믿음직스러워 보일 수가 없었다.
긴급 회의같은 느낌으로, 단상 속의 대기실에 위치해있던 사람들이 모였다.
"내가 줄 수 있는 시간은 1시간 정도야. 시간 마법은 특기가 아니라서, 그 후에는 버틸 수 있을지 모르겠어."
나. 세렌. 메디아. 시하. 로이아. 데네스. 그리고, 샤오리드.
일곱 명이, 대기실에 비치되어있던 의자에 앉았다.
"먼저,크세닉스의 개최를 중지했을 때의 단점부터 알아볼까."
샤오리드가 말을 꺼냈다. 데네스가 그의 말에 대답했다.
"관계 개선의 기회가 사라집니다. 리베른의 경우, 이번 크세닉스에 동의를 보낸 수많은 온건파 가문에 정치적 타격이 가해지며, 신 가문을 필두로 하는 강경파 가문에 힘이 더해질겁니다. 황제폐하께서 화친 쪽에 무게를 두고 계시다곤 하나, 그런 상황이 된다면 쉽사리 의견을 개진할 수 없으실 겁니다."
메디아가 고개를 끄덕이며 설명을 덧붙였다.
"하비셜에 주재중인 강경파 가문의 대다수가 자녀들을 본국으로 돌아오게 할 겁니다. 중립지대에 보내놓은 자식이 없으니, 전쟁을 일으키기도 쉬워지겠죠. 100여년 전의 2차전쟁 역시 그러한 상황에서 발발했으니까요."
"전쟁의 전조가 될 수 있다는건가······."
전쟁.
그 무거운 단어에, 분위기가 한층 깊게 가라앉았다. 정치에 관한건 문외한인 나라도, 전쟁이 불러올 참혹한 세상을 머리 속에 그리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신 가문은 전쟁을 일으킬 명분만을 찾고 있습니다. 6년 전에 벌어진 소크타리에스 사태에서 후계자를 잃은 이후로 계속."
로이아의 말에, 메디아가 몸을 움찔 떨었다. 나는 책상 아래에서 메디아의 손을 꼭 쥐며 말했다.
"크세닉스, 진행시켜야 해요."
"동의하지 않는사람, 있어?"
샤오리드가 내 말을 받으며 좌중을 둘러보았다. 눈을 감은 채 마법을 유지하는데에 전력을 쏟아붓고 있는 시하를 제외한 모두가 고개를 저었다.
"그래. 그러면 방법을 생각해보자. 일단 상황부터 정리해볼까."
"시하 교수님께서 시간을 멈추어두곤 계시지만, 마법이 풀리는 즉시모든 이가 마기를 알아차릴겁니다. 그러면 끝이에요. 크세닉스가 개최되기 위해서는 6000여 명의 인원이 마기를 느끼지 못하게 해야 하며, 마수를 들키지 않고 토벌해야 합니다."
샤오리드의 말에, 메디아가 현재의 상황을 간단히 정리했다.
"결계를 펼쳐놓고 마수를 토벌하는 건 안 될까요?"
"토벌에 1시간 이상 걸린다는 거 알아둬. 생각보다 마기가 커."
내 제안에 시하가 눈을 감은채로 대답했다. 로이아가 고개를 저었다.
"1시간이나 걸린다면, 모든 사람이 크세닉스의 이상을 알아차릴 겁니다. 개최시기는 10분도 채 남지 않았으니까요."
"시하 교수님. 마운무를 상부로 몰아넣어 시간을 정지시킬 수는 없습니까?"
"불가능해. 아무리 나라고 해도 마운무를 붙잡아두는 데엔 한계가 있어."
"제가 돕더라도 무리일까요?"
"메디아 학생의 마력을 사용한다 해도 폐회식까지 버틸 순 없어."
"라이하빗 님께 도움을 청할 수는 없는 겁니까?"
"라이하빗 님은 안돼."
시하가 돌연 입술을 깨물며 목소리를 내리깔았다. 순간적으로 공기가 얼어붙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미안, 자꾸 안된다는 말만 하네. 하여간, 라이하빗 님의 도움을 받는건 어려울거야."
시하가 다시 눈을 감았다. 그녀의 입술에 피가 조금 맺혔다.
시하가 빠르게 입을 가렸기 때문에, 아마도 정면에 앉아있던 나 밖에 볼 수 없었을 것이다.
라이하빗에게 무슨 일이있는 걸까. 도덕시간에 본 분신은 멀쩡했던 것 같은데.
"조건은 결국 두 가지네.마수를 소탕하기 위한 시간을 버는 것과, 마운무의 존재를 들키지 않는 것."
샤오리드가 다시 정리하자, 모두는 생각에 잠겼다. 나 역시 고개를 내리깔고 생각에 빠졌다.
그러다가, 테이블에 놓여있는 식순표를 보았다.
개회식. 축하공연. 만찬. 무도회. 폐회식.
그와 동시에 펄스레이트의 광경이 떠올랐다. 펄스레이트의 이미지가 식순표와 겹치며, 무언가가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내가 생각하기에도 조금 돌아버린 것 같은 아이디어가 만들어졌다.
"······저. 그."
"무슨 일이지?"
"꼭 마수를 퇴치하는 걸 감춰야 할까요······?"
일순간 공기가 싸해졌다. 메디아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고, 세렌은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로이아는 당황했고, 샤오리드는 쓰게 웃었다. 데네스에 이르러서는, 대체 무슨 말을 하는거냐는 언짢은 시선까지 받게 되었다.
이대로 가다간 내 이미지가 돌이킬 수 없는 바보가 되어버릴 것 만 같아, 황급히 말을 이었다.
"그, 그렇게 보지 마세요! 저도 막 내뱉은 건 아니라구요."
"무슨 뜻인지 물어봐도 될까?"
샤오리드가 물었다. 나는 식순표를 내밀며 설명을 시작했다.
내가 보기에도 미친 짓이었지만, 그들도 그건 미친 짓으로 받아들여진 듯 했다.
실행 가능성이 있는, 미친 짓으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