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78화 〉9. 연화(緣火) (13) (78/86)



〈 78화 〉9. 연화(緣火) (13)

샤오리드는 팔뚝 안쪽을 쓰다듬었다.
 위에서도 그의딱딱한 비늘이 만져진다. 서늘하고 차가워, 꼭 도신을 만지는 것 같았다.


샤오리드는 자신의 비늘을 만지고 있을 때면, 검을 잡고 있을 때 만큼이나 마음이 편안해짐을 느끼곤 했다. 아버지의 일을, 누나의 일을, 가문의 일을 모두 잊어버릴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검을 잡고있을 때에만 샤오리드라는 개인으로서 존재할  있었다. 아무리 벗어나려고 발버둥을  보아도, 그는 룽 가의 일원이었을 뿐,  이상의 존재가 될 수는 없었으니까.

지금 그가 사회를 맡은 것도  발버둥의 일부였다. 가문의 의지에 반하는 독자행동.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그의 발버둥은 흐지부지 묻혀버릴 것이다. 결국 의미없는 행위가 되버릴 것이다.


이전에도 그랬고, 지금도, 앞으로도 그럴 테지.


샤오리드는 다시금 팔뚝의 비늘을 매만졌다.


다시금, 편안해짐을 느꼈다.

그리고, 손을 떼고 나면, 그 비늘이 룽 가의 낙인이라는 것을 되새긴다.

악순환의 반복이었다.

그러나, 그에게는 지금 위안을 얻을 다른 방법이 존재하지 않았다.


메디아의 축사가 끝나자, 제 5파가 몰려오기 시작했다. 이전보다 등급이 한 단계 내려간 마수의해일. 끝없이 몰려올 것 만 같은  모습에 일말의 두려움도 느끼지 않는다고 하면 거짓이겠으나, 그렇다고 해서 샤오리드의 얼굴에 어떤 감정이 드러나는 것은 아니었다.


미소.여유로우면서도 예의바른 몸짓.


그를 영원히 지켜줄 가면이다.


그것은, 마수의 파도 따위에 벗겨질 정도로 약하지 않다.

스스로도 벗을 수 없었다. 이미 그의 얼굴과 하나가 되어, 떼어낼 수 조차 없었던 것이다.


죽을 때 까지도 벗지 못하겠지.


샤오리드는 가면에 그려진 미소를 지었다.


누구도 그의 표정이 가면이라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할 것이다.


그의 아버지도. 누나도. 교수들도.
그가 가장 친애해 마지않는, 푸른 머리카락을 지닌 후배마저도.

[메디아 양의 아름다운 축사에 박수를 보내주시기 바랍니다.]

샤오리드의 부드러운 목소리에, 박수소리가 대강당을 울린다.



세렌이 자꾸만 걱정스러워 하는 기색을 드러낸다.

"세렌, 그러다 들키겠어요. 표정관리좀 해요."


미소를 유지하며 세렌에게 속삭인다. 하지만 세렌은 여전히 얼굴을 굳힌  자꾸만 내  쪽을 살펴보고 있다. 나는 세렌의 시선을 피해 팔을 조금 뒤로 옮겼다.

"······최소한 처치라도 해야하지 않겠나. 조용히 시하 교수님께 알린다면, 어떻게든 응급처치 정도는······."
"이걸 알리려다가 들켜버리면 어떡해요? 괜찮아요. 살짝 베인 정도니까."

고개를 살짝 저었다. 그리고, 팔을 감싸고 있던 손을 잠시 떼어, 군중들에게 보이지 않을 각도의 식탁보에 가벼이 닦아내었다.


피가 묻어나온다.


짙은 마기 때문에, 보호막 안에서 1석급 마수가 생겨났던 것이다. 보호막의 보호작용으로 순식간에 소멸했지만, 1석급 마수는  짧은 사이에 내 팔에 조그마한 상처를 남겼다.

행여나 분홍빛 엷은 드레스에 피가 묻을까 조심하며, 다시금 손으로 상처를 감쌌다.

에잇, 에잇. 겉피부가 살짝 긁힌 정도의 상처인데도, 도통 아물 생각을 하지 않는다. 이럴 때는 이 연약한 몸이 정말 밉다. 조금 더 강한 몸이였다면 상처도 나지 않았을 텐데.

"······이 자리에 있는 게 메디아 리베른이었다면, 회복해줄 수 있었겠지."

세렌이 중얼거렸다. 나는 그게 무슨 소리냐고 물어보고 싶었지만, 이내 입을 다물고 세렌의 건너편을 바라보았다. 샤오리드가 주최자석에 앉아있던 로이아와 데네스의 소개를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단상의 가장 위에 시선이 집중되었다. 메디아가 쏘아올렸던 불꽃이 흩어져, 단상의 가장 위를 열 두갈래로 비추었다. 그 덕에 단상 주위에 자욱했던 마기가 물러갔다. 단상 주위가 다른 곳보다 돋보였다.


"데네스 에이트입니다.  자리에 모든 이의 영광이 함께하길."
"로이아 에이트입니다. 편안하게 즐겨주시길 바랍니다."

한 쌍의 남매가 손을 잡은채 예를 갖춰 고개를 숙인다. 교범에 실려도  법한 정갈한 인사.
그 다음은, 우리의 차례다.


[소개합니다. 크세닉스의  주빈. 에틸리어 바른 황제폐하와 스트라다 사할 공작전하의 영애, 세리나 사할 바른 양과, 게롤드 로드메이트 율릿 백작 각하와 베르디아 플라우 백작부인의 영애, 위즈 플라우 율릿 양입니다.]


조금 거창한 인사가 끝나자, 세렌과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최대한 핏자국을 닦아내어, 상처 주위의 피부는 조금 불그스름할 뿐 그다지 눈에 띄지 않았다. 이제는 상처에서 더 이상 피가 샘솟지 않기를 바랄 뿐이었다.

"세리나 바른입니다."


먼저 세렌이 입을 열었다. 나는 세렌을 바라보았다. 눈이 부실정도로 찬란하게 빛나는 금발이, 마치 태양빛처럼 그녀의 주위를 수놓는다.

"영광스러운 자리의 주빈이라는 영예를 안겨주신 두 분께 감사인사를 전합니다."


세렌이 로이아와 데네스 쪽을 향해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선, 나를 바라보더니, 갑자기 짖궂은 표정을 지었다.

······뭔가 불길한데.

"또한."

세렌이 내 허리를 손으로 휘감았다, 그리고는, 힘들어하는 기색 하나 없이, 나를 들어올렸다. 지상에서 갑작스럽게 멀어져, 눈이 핑글핑글 돌았다.

"이 자리를 함께 해준 저의 가장 소중한 친우, 위즈 율릿에게, 친애의 마음을 전합니다."

어느덧 세렌보다도 눈높이가 높아졌다. 세렌을 위에서 내려본다는 것은 꽤나 색다른 경험이었으나, 지금은  경험에 만족할 때가 아니었다. 얼굴이 새빨개진 채로 세렌에게 속삭였다.

"세렌! 갑자기 이게, 무, 무슨······!"

세렌에게 항의를 하려는데, 별안간 단상 아래에서 엄청난 환호소리가 울려퍼졌다. 아니 대체 이게 무슨 일인가 싶어, 황망한 표정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꽃이 피어나고 있었다.
순백색의 하얀 꽃.
백합이었다.

금방이라도 터져버릴 것 처럼 새빨개진 내 얼굴을 가리는 무수한 백합.


메디아의 불 덕에 마기에 오염되지 않고, 세렌이 들어올린덕에 모두에게 보여진, 뭉게구름마냥새하얀 꽃무리의 향연.


사람들이 열광하는 이유가 그것 때문이라는 것을 깨달은 나는, 세렌을 반쯤 원망스러운 눈으로 바라보았다.


"말이라도 조금 해주면 어디가 덧나요······?"
"미리 언질을 주었다면, 이리 많은 백합은 피지 않았을 텐데?"
"그건, 그렇지만······."

조금 울먹이며 세렌을 바라보았다. 왜 그렇게 나에 대한  잘 알고있냐고 항의하고 싶어졌다.

"자, 스스로를 소개할 시간이다, 위즈."

그런 나에게 세렌이 마정석을 건넸다. 나는 잠시 멍하니 마정석을 바라보다, 모든 이의 시선이 내게로 집중되어 있음을 깨닫고는 깜짝 놀라 마정석을 들었다. 그리고 꼬일대로 꼬여버린 혀를 억지로 움직이며 입을 열었다.
 순간 일이 잘못되었음을 직감했지만, 이미 뱉어버린 목소리는 다시 주워담을 수 없었다.

"위, 위즈 율리씹니다······!"

아.
망했다.


단상 아래에서 웃음이 터져나온다. 나는 자리에 앉으며 백합을 모아 얼굴을 가렸다.

몰라. 내 잘못 아니야. 세렌 잘못이야. 나는 잘못 없어.

내 머리에 백합을 장식해주는 세렌의 손길이 느껴졌다.


세상에, 이렇게 얄미울 수가 없다.



훌륭하다.


박수를 치며, 음울하게 웃는다.


스스로가 자아내는 음울함에 조금의 놀라움을 느꼈다. 틀어박힌 지가 1년도 되지 않았건만, 벌써부터 이렇게 쳐져있어서야 후진들을  면목이 서지 않는다. 자신의 뒤를 이은 후진들이, 단상의 뒷편에서 저렇게 빛나고 있지 않은가.

수준높은 마법이 마운무를 꿰뚫고 마수들을 섬멸해나간다. 아마 유클리드의 작품일 것이다. 마수의 출현시기를 맞춰 섬멸해나가는 그의 마법은 군더더기 하나 없이 깔끔하다. 한 번의 파도에 100여 체의 마수가 출몰함에도, 놓치는 것 하나 없이 우선순위를 조절해가며 처리하는 그 모습은 감탄마저 나올 지경이다.

강당을 뒤덮은 결계또한 훌륭하다. 미리 알지 못했다면, 결계 안에 마운무가 있다는 사실을 전혀 알아차릴 수 없었을 것이었다. 마기를 단  조각도 내보내지 않으며, 그 자신의 존재한다는 사실조차 숨겨버리는, 터무니없는 수준의 결계. 스스로도  분이나 유지할 수 있을까 싶은 결계를 벌써 한 시간 가까이 유지하고 있는 후진에게, 도저히 감탄을 하지 않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렇기에 미소짓는다. 그것은 후진에게 보내는 자랑스러운 격려이며, 또한 현인에게 보내는 비웃음이다.


네 번의 습격과, 여섯 번의 불발된 습격.


점점 윤곽이 잡혀간다. 가설이 맞아 떨어진다. 예상했던 결과가 그대로 맞아 떨어질 때 마다, 온 몸에 소름이 우수수 돋는다. 수 많은 마법이론을 세우고,  수 없는 마법을 만들어냈음에도,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감각이 온 몸을 지배한다.

그것은 연구자로서의 쾌감이다. 의문을 알아낸 자에게 주어지는, 지식욕에 대한 보상이다.


증명이 머지 않았다.


현인이 힘을 잃어간다는─ 누구도 생각하지 못할. 아니, 가능성의 검토조차 거부할, 그런 가설에 대한 증명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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