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79화 〉9. 연화(緣火) (14) (79/86)



〈 79화 〉9. 연화(緣火) (14)

─제 7파. 평균 등급, 약 7석. 최대 9석.

시하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각자의 자리를 지키고 있던 이들이 순간적으로온 몸에 긴장을 불어넣는다.


─마지막이야. 9석급 마수는 내가 처리할테니, 모두  내보자.

시하의 전음이 귀를 울렸다.

하늘을 메우던 마운무가 내려온다. 마수를 잉태하던 구름이, 제 스스로 마수로 변한다.

유클리드는 그 수와 위험도를 파악했다. 5석급 이하의 마수 78기. 6석급 마수 28기. 7석급 마수 16기. 8석급 마수 8기. 그리고, 9석급 마수 1기.


이 정도의 마수들은  홀로 감당할 수 없다. 유클리드가 가진 비장의 수, '은구'를 사용한다면 길항 정도는 가능하겠지만, 그런 상황이 되어서는 안 됐다. 은구는 유클리드가 연마한 고유한 능력이기 때문이었다. 전투목적으로밖에 사용하지 않는 은구를 내보인다면, 필시 의심을 사고 말 것이다.

하지만 유클리드는 침착하게 마수들을 처치해나가기 시작했다. 9석급 마수를 시하가 처리해줄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준비는 됐나, 시하."
"팔이 얼얼한걸? 이 정도의 마력을 모아본 건 처음이거든."

시하가 시덥잖은 농을 던지며 팔을  차례 삐그덕이며 돌렸다. 그녀의 팔이 백색으로 빛난다.

그 빛은 시하가 지닌 순수한 마력의 부산물이었다. 당장이라도 눈이 멀 것만 같은 마력을 한 팔에 집중한 채, 시하는 방출의 기회만을 노리고 있었다.

시하는 메디아의 마력을 이용해 결계를 유지하며, 그 자신의 마력은 최대한 온존해두었다. 9석급 마수의 출몰을 예측하고, 그에 대비한 결과였다. 9석급 마수가 난동을 부리기 시작한다면 결계에 균열이 생겨날 수도 있었기 때문에, 단 일격으로 9석급 마수를 죽여야  필요성이 있었던 것이다.

마운무가 모두 사라졌다. 동시에 모든 마수가 그 형체를 갖추었다.


9석급 마수는 대강당의 중앙에서 천천히 그 몸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30m가 넘는 긴 몸뚱이를 뱀처럼 휘며, 천천히 단상 위의 하늘에 똬리를 튼다.
 몸체에서부터 일렁이는 검은 갈기는 흡사 여러 장의 스카프를 두른 것 같다. 마기를 흩뿌리는 갈기를 흔들며, 마수는 천천히 몸을 일으켜, 지상으로 움직이기 시작한다. 이성을 망각한다른 마수들과는 달리 그 몸짓에는 기품이 감돈다.


"······케라 리시피어."

시하는 마수의 이름을 중얼거렸다. 붉은 눈이 고고하게 단상을 향하고 있다.

 번의 일격으로 소멸시킬 수 있을지는 확실치 않았다. 그야 당연한 일이었다. 워낙 터무니없는 일인지라, 시도해  적도 없었고, 시도할 필요성도 느끼지 못했으니까. 100여년이 넘는 인생을 살아왔으나,  정도로 터무니없는 일은 들어본  조차 없었다. 9석급 마수를 한 번에 처리하라니, 의뢰가 어려운 것도 정도가 있었다. 만일 평범한 귀족 나부랭이가 돈을 던지며 의뢰한 것이었다면, 시하는 진심으로 그 귀족 나부랭이를 일격사 시킨 뒤 그의 의뢰서를 찢어발길 의향마저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런 상황이 아니었다. 사랑스러운 학생들이 자신에게 고개를 숙이며 부탁한 의뢰다. 돈 따위가 보수가 아니다. 학생들의 미소가 보수로 주어지는 의뢰다.
그깟   푼보다 훨씬 가치있는 보수.


시하는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최후의 한 방울까지 마력을 짜내어 팔에 담았다. 한계를 넘어 응축시킨 마력이 붕괴하며 빛을 거세게 내뿜기 시작했다.


"인간은, 맞닿을수록 강해져."


나직한 목소리가 울렸다. 마음을 다잡기 위한 시하만의 영창이었다. 그녀의 팔에 응축되어있던 마력이 거세게 소용돌이치기 시작했다. 그 여파만으로, 단상의 주위를 잠식해나가던 마수들의 1할이 그 형체를 잃었다.


유클리드는 마수 토벌을 잠시 중단한 후, 시하와 케라 리시피어를 연결하는 결계를 만들어내었다. 원통형의 반투명한 결계. 마법의 반동을 차단하기 위한 결계였다.
시하는 결계의 중앙에 서서 팔을 하늘로 치켜들었다. 단상의 바깥까지 흘러나가 소용돌이치는 마력의 폭풍은, 군중들의 시선을 한 번에 앗아가기 충분했다.

"엮일 수록 강해지는 것이 인간이야. 때로는 부딪혀 꺾일지라도, 서로를 지탱하는 기둥이 되어 그 아픔을 견뎌나가."


시하는 스스로의 가치관을 입 밖에 내어, 마력의 밀도를 한계까지 끌어올렸다. 순수한 마력이  자체만으로 파괴력을 지니기 시작한다. 유클리드의 결계 안쪽에서 맹렬히 솟구치며, 당장이라도 뻗어나갈  같은 마력의 덩어리.


"하지만, 누구와도 엮이지 못한 어린 가지는, 작은 바람에도 부러져 꺾이고 말지."


시하가 손을 움켜쥔다. 마력이 유클리드의 결계 안을 가득 채우며 역류해, 케라 리시피어에게 당도한다.

흰 마력이 이내 푸른 색으로 뒤덮힌다. 유클리드의 환상마법이다. 시하의 마력이 사자 형상으로 변해, 케라 리시피어의 목을 물어뜯는다.

"나의 역할은, 그런 가지들을 지탱해주는 것."


케라 리시피어가 붉은 눈을 크게 뜬다. 그리고, 목까지 갈라져있는 입을 벌려, 사자의 갈기를 흩트린다.


그러나 사자는 결코 굴하지 않는다. 케라 리시피어의 목덜미를 물고 흔들며, 푸른 화염을 불사른다.


"어린 가지와 엮여 바람을 함께 버티며, 그들의 만개를 지켜보는 것."


시하가 씨익 웃는다.

"내가 가르친 아이들의 푸른 잎사귀같은 미소. 나는 그걸 보기 위해 이 자리에 있는거야."


마수 따위가 방해하게 둘 수 없지.


한점 흐트러짐 없이, 시하가 본심을 이야기한다.
마음속에 간직하고 있던 신념을 꺼내, 마력으로 치환한다.


스스로에게 다짐하듯 말한 그녀의 마음가짐이, 새하얀 마력으로 바뀌어, 그녀의 마법을 한층 강화시킨다.

시하는 자신의 몸에 있던 모든 마력을 짜내어 마수에게로 쏘아보냈다. 그에 맞춰 유클리드도 청사자의 환상을 한계까지 강화해나간다.

리시피어의 독기에 너덜너덜해졌던 청사자의 갈기가 한층 풍성하게 피어나며, 마수의 마기를 흩트린다. 케라 리시피어는 자신의 갈기를 뻗어 청사자의 몸을 휘감으려 했지만, 케라 리시피어의 갈기는 청사자의 발톱에 찢겨나가 허공으로 사라졌다.

"───!!!"

쇳소리와 비명소리를 섞어놓은 듯 한 굉음.

거칠게 발광하던 케라 리시피어가, 점차  몸에 힘을 잃는다.

마침내, 축 늘어져, 사라져가는 케라 리시피어.


케라 리시피어가 움직임을 멈추자, 다른 마수들도 하나 둘 스러지기 시작했다. 천장을 메우던 마운무가 완전히 사라져, 천장의 화려한 조명이 드러난다. 구름에 가려졌던 태양이 드러나듯, 군중들에게 벅찬 눈부심을 선사한다.

그리고, 그 화려한 조명의 가장 높은 곳에, 푸른 청사자가, 고고히 그 위용을 드러내며 서 있었다.



드디어 끝난거구나.

로이아는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었다. 숨쉬기조차 힘들었던 짙은 마기 대신 신선한 공기를 마음껏 들이마셨다.


"아직 끝난 것이 아닙니다, 누님."
"········."

해방감을 만끽하던 로이아는, 자신의 바로 옆에서 들려온 따끔한 질책에 입을 다물었다.

귀여운 구석이라곤 하나도 없는 남동생이다. 딱히 악감정이 있지는 않았으나, 그렇다고 좋은 감정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다지 이상한 일도 아니었다. 데네스가 태어난 이후, 로이아는 줄곧 그와 비교당하며 살아야 했기 때문이었다.


검술에밖에 재능이 없는 자신과는 달리, 데네스는 모든 방면에서 뛰어났다. 검술 뿐만이 아니라, 마법, 정치력, 그리고 아버지를 닮은 엄격함까지.

도저히 따라갈 수 없는 동생의 재능을 바라보다 보면, 미묘한 감정이 생겨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남매란 원래 비교당할수록 사이가 멀어지는 법이니까.

그런 의미에서, 같은 처치인 사람이 한  있었다.

로이아는 별 생각 없이 고개를 돌렸다. 붉은 머리카락을 길게 내린 남자가 보인다.


수도 없이 부딪쳐온 그의 넓은 어깨가 유난히 눈에 띄었다.  번이고 부딪쳤던 어깨지만, 정장에 감싸여있는 모습은 의외로 신선해서, 조금 놀랍기까지 했다.


로이아의 시선을 눈치챈 듯, 샤오리드가 엷은 미소를 띄웠다. 로이아는 황급히 시선을 돌렸다.


데네스와 눈이 마주쳤다. 데네스가 뭐하냐는 듯 인상을 찌푸린다. 머쓱해진 로이아는 다시금 시선을 돌려, 허공에 눈길을 주었다.

그래. 비슷한 처지라서, 쉽게 친해질 수 있었던 거다.

샤오리드가 그런 말을 한 적이 있었다. 본인은 기억하지 못하겠지만, 로이아는 샤오리드가 했던 말을 마음 속에 품고 있었다.

'너와 나는 비슷한 것 같아. 그래서일까,  앞에서는 조금 솔직해질 수 있거든.'


표정 연기도 하지 못하는 사람이 그런 말을 하는 겁니까, 라며 무심한 척 대꾸하긴 했지만─ 그래도, 마음 한 구석에선, 분명히 기쁨이 피어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 생각을 하던 로이아는, 문득 자신의 시선이 다시금 샤오리드에게로 향했다는 사실을 깨닫고 얼굴을 붉혔다. 눈동자에 자석이라도 붙여놓은 건지, 자꾸만 샤오리드에게 시선이 가고 있었다.

로이아는 당황한 눈빛으로 샤오리드를 바라보았다. 그냥 눈이 갔을 뿐이라고─ 아니, 이것도 이상하지. 단지, 자신이 바라보았던 곳에 샤오리드가 있었을 뿐이라고 해명을 하고 싶었다.

미소를 짓던 샤오리드가 얼굴을 굳힌 건 바로 그 때였다.

로이아는 순간 등줄기가 오싹해짐을 느꼈다. 로이아는 멍하니 등 뒤를 바라보았다.


 곳에, 마수가 있었다.

찰나의 순간.
로이아는 멍하니 마수를 바라볼 수 밖에 없었다.

제대로된 판단이 되지 않았다. 설령 판단이 정상적으로 이루어졌다 해도, 그녀가 마수의 일격을 피해 없이 받아낼 수는 없을 것이다. 무기를 쥐지 않은 그녀는 또래보다 조금 강한 육체를 지닌 소녀일 뿐이었으니까.

마수가 앞발을 들어올린다. 데네스가 마기를 감지하고 급히 보호막을 쳤지만, 급조된 보호막은 마수의 공격에 힘없이 찢겨 무용지물이 되고 말았다. 시하가 쳐두었던 보호막도, 메디아의 마력고갈로 인해 사라진 상태였다.

마수의 존재를 알아차린 사람은 단  명이었다. 케라 리시피어가 쓰러지며 남긴 마기로 만들어진 잔영. 사라져가던 케라 리시피어가 최후의 발악으로 만들어낸 4석급 마수였다. 시하가 예측할 수도 없었고, 유클리드가 관측하지조차 못한─ 단시간 내에 사라질 마수의 그림자와 같은 존재.


하지만, 로이아의 목숨을 앗아가기엔, 충분한 시간이었다.

로이아는 멍하니 죽음을 되뇌었다.

죽는 건가?

지금 죽으면 어떻게 되는거지?

크세닉스는?

아버지와 어머니는?


온갖 생각이 로이아의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가족. 친구. 지인. 로이아가 아는 모든 사람들의 얼굴이 순식간에 떠올랐다 사라졌다.

그러다가, 로이아는, 샤오리드의 얼굴을 떠올렸다.


샤오리드의 얼굴만큼은 순식간에 지나가지 않았다. 오히려 로이아의 머릿속을 채워나갔다.


그리고, 하나의 물음이, 그녀의 머리속에 생겨났다.

샤오리드는, 과연, 자신이 죽으면 슬퍼해줄까.


분명 슬퍼해주겠지. 그는 착한 사람이니까.
하지만, 그 다음은?

로이아는 그 다음을 기대하고 있는 자신에게 깜짝 놀랐다. 저도 모르게 애도 이상의 것을 바라고 있던 것이다.

가슴이 아파오기 시작했다. 두근, 하고, 심장이, 마지막이  박동을 쥐어짰다.


혈액이 빠져나간 심장에, 후회만이 남았다.

조금 더 그에게 소중한 사람이 되었다면, 그 이상을 바랄 수 있지 않았을까.




"········어?"

두근, 두근.


심장이 계속해서 뛴다.

여전히 뛸 수 있음을 기뻐하며 심장이 요동친다.  고동소리를 느끼던 로이아는 멍하니 자신의 뒤를 바라보았다.

마수가 있던  곳에, 샤오리드가 있었다.

거대한 붉은날개를 펼친 채, 로이아와 데네스를 감싸는 샤오리드.

"········내 날개, 들켜버렸잖아."


그가 쓴웃음을 지었다. 로이아는 할 말을 찾지 못한 채 입술을 떨었다. 뭔가 말을 하고 싶었지만, 머릿속이 새까매진 채 도통 정리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단상 아래에서 거센 술렁임이 일었다. 샤오리드의 등 뒤에 펼쳐진 완벽한 날개 때문이었다.


룽 가의 혈계전승, 용화.


샤오리드의 용화는 별볼일 없는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 팔뚝 안쪽에 조금 돋아난 비늘이 그가 지닌 용화의 전부라고 알려져 있던 것이다.

그런 그가, 붉은 용의 날개를, 그토록 완벽한 모습으로, 푸른 사자의 아래에 펼쳐놓고 있었다.


그 모습은 곧, 샤오리드의 용화가, 용의 꼬리를 가진 그의 누이보다  완벽한 것이라는 의미를 가졌고.
또한,  가의 가문 계승권이 심하게 요동치게 될 것이라는 것을 의미했다.

"서, 선배, 님."


마침내 로이아가 입을 열었다. 데네스는 아직까지도 말문이 막힌  샤오리드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왜 그래, 로이아?"
"날개, 가."
"으음. 평생 숨기고 살려 했다구."


샤오리드가 웃었다. 허탈하면서도, 홀가분한 표정이었다. 로이아는 그의 웃음에 비로소 정신을 차리고는 경악을 담아 소리쳤다.

"우, 웃음으로 넘어가실  아닙니다!"
"하지만 말야. 지금은 크세닉스 중이잖아."
"그렇지만········!"
"그렇게 고생했는데, 내 날개때문에 흐지부지되서는 안되겠지?"
"········윽········!"


로이아가  말을 잃은 듯 얼굴을 새빨갛게 물들였다. 샤오리드는 웃으며, 데네스와 로이아의 손을 잡았다.

"자, 뭐해. 어서 연회의 시작을 알려야지, 주최자분들?"


로이아는 분한 눈으로 샤오리드를 바라보았다.

샤오리드와 맞잡은 손이, 너무나도 뜨거워서, 꼭 불길이라도 치솟은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연화.

순간, 머릿속에 떠오른 단어를 황급히 지워버리며, 로이아는 시선을 돌렸다.


자신의 얼굴에도 불길이 번져버린  같았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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