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80화 〉9. 연화(緣火) (15) (80/86)



〈 80화 〉9. 연화(緣火) (15)

유선형의 물결을 그리는 황금빛 몸체가 아홉 개의 현을 붙잡아두고 있다.


청아한 느낌의 소리를 리드미컬하게 연주하는 발현악기. 그 반주 위를 덮는 주선율은 하모니카같은 음색을 내보이며 잔잔하고 부드러운 분위기를 자아낸다.

칭얼대는 아이를 다독이는 어머니의 목소리처럼 온화한 음악이다.
몸이 나른해진다. 자꾸만 감기려는 눈을 억지로 뜬다. 식사 도중에 잠들 수는 없었으니까. 하지만 몸은 이미 녹초가 되어한계를 맞이하려 하고 있었다.

앙.

과하지도 부족하지도 않은 양념이 베어들어간 고깃조각을 한 입 베어물었다. 야들야들한 살에서 육즙이 터져나오며, 양념과 함께 혀에 녹아든다.

피곤한 와중에도 감탄이 절로 나오는 맛이었다. 내가 지금까지 먹었던 음식들 중 가장 맛있었다. 점수로 따지자면 10점 만점에 11점이라고 할까. 달콤하면서도 짭짤한 양념이 혀를 적시고, 그 위를 고기의 감칠맛이 덮으며, 마지막으로 고기 위를 꾸미고 있던 견과류들이 독특한 식감의 악센트를 선사한다.


"맛있네요······."
"감사합니다."

데네스가 대답하며 냅킨으로 입을 닦았다. 무뚝뚝한 말투다. 하지만, 내 감탄어린 중얼거림에 굳이 대답을 해준 것 만으로도 그의 태도가 이전에 비해 굉장히 부드러워졌음을  수 있었다.


크세닉스의 진행에 도움을 주었기 때문일까. 물론 그것이 가장 큰 이유이겠지만, 대강당의 분위기가 놀라울 정도로 평화로웠던 것도 그의태도가 부드러워진 이유  하나일 것이다.


누구 하나 얼굴에 근심을 두지 않은 채, 즐거워하며 에이트 가의 연회를 즐긴다. 테이블에 장식된 채 우렁차게 포효하는 작은 청사자의 환상과, 그것을 손가락으로 건드리며 장난 치는 사람들. 주스가 든 와인잔을 살짝 부딪혀 건배하며, 어른들의 흉내를 내는 사람들. 식사를 잠시 멈추고 눈을 감은 채 대강당의 활기를 느끼는 사람들. 행복한 표정을 지으며 음식을 입에 가져가는 사람들.


사람들의 모습은 가지각색이었으나, 한 가지 공통적인 것은, 그들이 이 크세닉스를 진심으로 즐기고 있었다는 점이었다.

가슴이 뛰었다. 뭐라고 할까, 내 노력이 보상받은 느낌이라고나 할까. 그들이 짓는 미소를 볼 때마다 괜시리 가슴이 포근해지는 기분이었다.


"그대가 지켜낸 광경이야."

헤실헤실 웃고 있는데, 세렌이 내 머리카락을 쓰다듬으며 나와같은 곳을 바라보았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모두 힘낸 거잖아요?"
"후후, 그런가."

세렌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잠시 무언가를 생각하더니, 이내 내 귀에 입을 가져다대었다.


"그대의 첫 파트너가 되고 싶다."
"······파트너요?"

갑작스러운 말에 반문하며 세렌을 바라보았다. 세렌이 나에게 고개를 끄덕이며 물었다.


"허락해주겠나, 위즈?"

조명을 받아 눈부시게 빛나는 피부와, 깊이를 알 수 없는 푸른 빛이 투명하게 비치는 아름다운 눈동자. 나에게로 물음을 던지는 매력적인 입술.


세렌의 말이 무슨 의미를 담고있는지는   없었다. 하지만, 내가 감히 그녀의 부탁을 거절할 수 있을리가 없지 않은가.


나는 홀린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세렌이 볼을 살짝 붉히며 환하게 미소를 지었다.

"그래. 그대에게 누가 되지 않도록, 열심히 노력하겠어."
"네? 노력이라뇨?"
"기대하도록 해. 어젯 밤, 메디아 리베른에게 자존심을 굽히면서까지 열심히 연습했으니까."
"불안한데요."

순간 움찔 하고 몸을 떨었다. 하지만 세렌은 뭐가 그리 기쁜지, 연신 웃음을 짓고 있었다.
살짝 짖궂기도  웃음.

뭔가 등줄기에 오한이 찾아오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가장 높은 단상을 둘러싸는  번째 단상─ 그러니까, 귀빈석.


다섯 학과의 학과장과 에이트 가의 관련자들로 구성된 자리였다. 그리고  곳에는 메디아와 샤오리드의 자리 또한 마련되어 있었다.

마운무의 처리가 끝난 후, 옷을 갖춰입고 오겠다며 숙소로 돌아간 유클리드의 자리를 비워놓은 채, 크세닉스를 지켜낸  명의 주역이 한 자리에 모였다. 시하, 메디아, 샤오리드.


그곳에선 조금은 미묘한 기류가 흐르고 있었다. 크세닉스를 지켜냈다는 기쁨을 자축하며 화기애애한 분위기를 유지하고 있는 단상 위와 다른, 조금 불편한 분위기였던 것이다.

그런 분위기를 깨고, 샤오리드가 가장 먼저 입을 열었다.

"왜 여기만 이런 분위기일까."


난감한듯 웃으며 붉은 머리카락을 배배꼬는 샤오리드. 그런 모습에 어이없어하며, 메디아가 말했다.

"지금 스스로가 어떤 행동을 내보였는지에 대한 자각이 없으신건가요, 선배님?"
"로이아를 구했을 뿐인걸."
"메디아 학생이 그걸 묻는게 아니잖아~"


시하가 음식을 우물거리며 고개를 으쓱였다. 자신을 매서운 눈으로 추궁하는 메디아와, 그런 메디아에게 암암리에 동조하는 시하. 샤오리드는 자신이 마치 사냥꾼에게 쫒기는 토끼가 되어버린 것 같았다.

지이잉.


두 사람이 샤오리드를 꿰뚫듯 응시했다. 샤오리드는 어떻게든 두 쌍의 시선을 버텨보려 했으나, 결국 그것이 불가능하다는  깨닫고 한숨을 내쉬었다,


"후우······. 그래. 궁금한 점이 있다면 최대한 말해줄게."

결국 샤오리드는 항복선언을 입에 담았다. 그러자 메디아가 기다렸다는  다소곳이 포크를 내린 후 질문했다.

"실례지만, 확인하고 싶은 것이 있어요. 마지막에 보여주신 날개는 정말 붉은 용의 날개였나요?"
"봐서 알잖아?"
"환상마법일 수도 있으니까요."
"아하하,  긴박한 와중에 환상마법을  시간이 어디있겠어."
"그건 그렇겠죠."


메디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책상을 두어  두드린 후 말했다.

"바른의 사정은 대략적으로 알고 있습니다. 소크타리에스 가의 사건 이후로 강경파의 룽 가문과 온건파의 사할 가문이 대립하고 있다고 하더군요. 지금도 그런 상황인가요?"
"······솔직히, 사할 가문도 방계는 우리 쪽에 가담했을걸. 본가가 공격받고 있다고 하던가······. 뭐, 아직 스트라다 공작이 건재하니 사할 가도 힘을 잃고 있지는 않지만."
"그런가요. 바른은 강경파의 입김이 더 세겠군요."
"사실 우리 쪽은 강경파니 온건파니 하는 가문들보다, 그냥 사태를 지켜보자는 입장을 가진 가문이  많아. 소크타리에스 가 사태로 바른이 피해를 본 건 거의 없으니까."

메디아의 얼굴이 일순간 어두워졌다. 샤오리드는 한숨을 내쉬었다.

"결국 리베른이 원하는건 두 가지겠지? 소크타리에스의 마지막 후예와 아티팩트 '판데로스'."
"······신 가문은, 그래요."
"한 가지 물어볼게, 황녀님. 이 건, 황녀님의 생각은 어때?"
"개인적인 의견을 묻는 겁니까, 아니면 황실의 후계자로서의 입장을 묻는 겁니까?"
"당연히 전자지. 나도 룽 가의 입장을 대변하는 사람은 아니니까 말야."
"저도, 최근까지는 그렇게 생각했습니다만."


메디아가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는 잠시 고뇌하더니, 어렵사리 입을 떼었다.

"판데로스를 돌려받는다면, 소크타리에스 가에 대한 처우는, 생각을 해 보아야 할 문제인 것 같더군요."
"그래······ 온건파인 네가 그렇게 고민을 하는 정도이니, 강경파가 소크타리에스 가에 얼마나 큰 증오심을 가지고 있을 지는 두말 안해도 알겠네."

샤오리드가 씁쓸한 듯 입맛을 다셨다. 메디아 역시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리베른 전체에 만연해 있는 소크타리에스 가에 대한 증오심은 절대로 가벼운 것이 아니었다. 리베른에 있는 대다수의 귀족가는 소크타리에스의 마지막 생존자에 대한 처벌을 요구하고 있었다.

이성이 사라진 채, 분노만으로 만들어낸 광기어린 증오였으나, 그 자신도 몇개월  까지 그런 감정에 사로잡혀있었기에, 메디아는 그들을 제대로 비판하지 못했다.


반대로, 룽 가를 비롯한 바른의 강경파 또한 그 나름대로가 지니고 있는 이유가 있었다. 당사자조차 아닌 소크타리에스의 마지막 생존자를 넘겨주어서는 안된다는 동정여론, 현자의 아티팩트를 돌려주는 것은  바른의 정통성을 훼손하는 것이라는 주장. 두 가지의 논리로 인해, 바른의 강경파 또한 그 목소리를 날로 높여가고 있었다.

한 쪽의 입장이 잘못된것이 아니었다.하지만, 그들이 서로의 입장을 키워나간다면, 그것은 결국 서로 마주쳐 전쟁이라는 파국을 일으키고  것이다.

"선배님."

잠시 여러 예측을 생각하던 메디아는,이내 그 생각을 머릿속에서 지워버리고 샤오리드를 불렀다. 샤오리드가 고개를 끄덕이자, 메디아는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양 제국의 상황을 그렇게나 잘 파악하고 계시니만큼, 스스로가 어떤 행동을 하셨는 지는 잘 아실거라 믿습니다."
"으응······."


당했나.
샤오리드가 한숨을 내쉬며 머리를 긁적였다. 메디아는 미소를 유지해가며 말을 이어나갔다.

"룽 가에서 후계자를 정하는 방식은 단순하다고 들었습니다. '용화'의 정도를 기준으로 삼는다더군요."
"그렇지."
"현재 룽 가의 후계자로 내정되어 있는 리리양 룽은, 용의 꼬리만을 가지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정확히는 꼬리와 배 쪽의 비늘이야."
"어쨌든요. 그것보단 당신의 날개가 더 뛰어날 테죠?"
"아마 그럴거야. 제대로 된 수치는 측정해봐야 알겠지만."
"그렇다면 결국, 룽 가의 후계자가 선배님으로 바뀐다는 이야기가 아닙니까?"

샤오리드가 말을 멈추고 메디아를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잠시 자신의 머리카락을 배배 꼬다, 이내 한숨을  쉬고는 허리를 숙인 채 테이블에 고개를 박았다.


"그래애······. 후계자가 되어버릴거야. 호적 파이는 걸 기대하고 있었는데, 이건 완전히 반대가 되어버렸잖아······."

과장스러운 목소리였다. 아무리 그가 호리호리한 체격이라고는 해도, 180cm를 훌쩍 넘기는 장신의 사내가 칭얼대는 모습은 굉장히 꼴사나워보였다.

"······보기 흉합니다, 선배님."
"너무하네?! 나는 미래에 대한 걱정때문에 이러고 있는데!"
"그런다고 뾰족한 수가 떠오르는 건 아니지 않습니까."
"매정해라."
"매정해서 죄송합니다, 샤오리드 룽."
"선배님도 빼버리네······. 알았어, 장난 그만 할게."

메디아가 차가운 목소리로 자신의 이름을 담자, 샤오리드는 그제서야 한숨을 내쉬며 울상을 멈추었다. 메디아는 그런 그에게말했다.

"강경파의 수장인 룽 가문의 후계자가 에이트 가의 크세닉스를 도왔다. 이 말, 바른에서 어떻게 받아들여질 것 같습니까?"
"큰일 나겠지. 일단 우리 가문이 실각할 수도 있고?"
"바른의 안에서 내분이 일어날지도모릅니다."
"리베른 입장에서는 괜찮은 일 아닌가?"
"제 아버지를 비롯한 온건파의 입장에서는 그닥 좋은 일이 아닙니다만."
"그런가."

샤오리드가 으음, 하고 침음을 내었다. 그리고, 이내 고개를 으쓱였다.


"뭐, 아버지께서 나보고 뒷처리를 하라 하실 수도 있겠네."
"뒷처리라면······?"
"이대로 본국에 소환되는거지. 강경파 가문에 순회를 다니고, 아버지가 원하는 강경파의 유력 가문과 정략결혼을 진행하고. 그렇게 되지 않을까?"
"······큰일이잖아요."
"뭐, 정략결혼 자체는 어느정도 예샹하고 있던 거니까. 아버지께선 나를 세리나 황녀님께 보내려고 했던 것 같지만······ 내가 후계자가 되어버렸으니 이젠 우리 가문으로 들어올 상대를 고르시겠지."
"타인의 일 처럼 말하는군요, 선배님은."
"그런가?"


샤오리드가 다시 한 번 고개를 으쓱하며 웃었다.
조금, 텅 비어있는 듯 해서, 메디아는 그의 눈에 순간적인 오싹함을 느꼈다.



어떻게든 얼버무린 뒤, 나는 시하 교수님에게 농담을 섞어 말했다.


"교수님께선 궁금하신 것 없으세요? 계속 아무 말도 없으신데."
"흐응."

시하 교수님이  차례 와인으로 입을 적신  오른 손으로 턱을 괴었다. 그리고는 내게 보랏빛 시선을 보냈다. 조금은 어둡고, 조금은 날카로운 예기가 느껴진다.


잠시 나를 바라보던 시하 교수님이 물었다.

"그래서. 괜찮아?"
"정략혼이야, 뭐. 그 사람이 저를 좋아해줄지는 잘 모르겠지만, 누구든 제가 열심히 맞춰가면 어떻게든될 테니까요."
"으응. 그거 말고."

시하가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는 왼 손으로 나를 가리키며 말했다.


"그렇게 계속 거짓말 뒤에 숨어있어도 괜찮냐고."
"······네?"

얼이 빠져, 순간 대답하지 못했다.
이상한 질문이었다.  한번도 들어보지 못한 말이었다.

"하더도 아직 멀었네. 아직 여든 밖에 안되어서 그런가? 이런 애를 그냥 내버려두다니."
"무슨 말씀이신지 여쭤봐도 될까요, 시하 교수님."


조금 딱딱해진 말투를 스스로 자각하면서도, 물었다. 물음을 던질 수 밖에 없었다. 그녀가 뱉은말의 의미를 알아야 했다.
내가 계속해서 시하를 바라보자, 그녀가 입을 열었다.


"샤오리드 학생."
"예."
"위바티아라는 나무, 들어봤어?."
"······."


나는 고개를 저었다. 그러자 시하 교수님은 손을 까딱여 내게 작은 마법을 보여주었다.


새싹이 돋아나, 점차 나무로 성장해가며, 다른 나무와 엮여, 거대한 가지의 지붕을 만드는 나무숲.


"위바티아는 자라면서 서로에게 가지를 내뻗어. 그리고 단단히 엮여, 거대한 숲을 만들어내지."

거센 폭풍이 위바티아 숲에 들이닥쳤다. 하지만, 서로 단단히 엮인 위바티아 숲은, 그렇게나 거센 폭풍을 함께 견뎌내고 있었다.


"하늘 호수 서쪽에서 자라는 위바티아는, 하늘 호수의 폭풍을 견뎌내기 위해 이렇게 자라났어. 서로를 엮어주는 단단한 가지 덕에, 아무리 거센 강풍이라도 위바티아를 날려보내지 못하게 되거든."


내가 멍하니 바라보자, 시하교수님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며 위바티아 숲의 환상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적은 가지를 가지고 있는 위바티아 나무 한 그루가 폭풍 속으로 뿌리채 뽑혀 날아갔다.

"하지만 충분히 가지를 엮지 못한 위바티아는 폭풍 속으로 사라져버려."
"무슨 의미인가요."
"사람도 똑같다고 생각하거든."

시하 교수님이 씨익 웃으며 환상을 지웠다. 그리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옆으로 다가왔다.
뭔가, 내가 까발려질 것 같아서, 본능적으로 몸을 피했으나, 시하 교수님은 그런 내 어깨를 붙잡으며 말했다.


"다른 나무와 엮이고 싶다면, 가짜 가지를 뻗어서는 안 돼."
"가짜 가지라뇨······."


고개를 저으며 입술을 깨물었다. 하지만 시하는 내 머리카락을  차례 쓰다듬으며 말했다.

"샤오리드 학생은 영특하니, 내 말이 무슨 뜻인지는 충분히 이해하고 있을걸."
"······."

알고 있다.


당연히 알고 있다.

내가 쓰고 있는 가면을 벗으라는 조언이다.

하지만 나는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씁쓸히 웃었다. 이미 얼굴가죽과 하나가 되어버린 가면을 어떻게 벗을 수 있단 말인가. 그러자 시하교수님은 나를 안쓰러운 눈으로 바라보더니, 자리로 돌아가서는 씨익 웃었다.


"뭐, 당장 변할 수는 없는 거니까."
"그렇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내게, 시하가 말했다.


"그래도 말이야, 샤오리드 학생."
"네?"
"만약에. 정말로 도망치고 싶거나, 세상 일을 전부 잊어버리고 싶을 때가 오면 말이지.  때는 하비셜로 오도록 해."
"······지금도 하비셜에 있잖아요?"


 말 만큼은 무슨 소리인지 알 수가 없어 반문했다. 나도모르게, 조금 빈정대는  한 감정이 실리고 말았다. 하지만 그럼에도 시하는 웃음을 잃지 않았다.


"으응. 나중에. 아무도 너를 지지해주지 않는다고 생각할 때 말이야. 그 때 하비셜로 오면, 하비셜이 너를 지탱할 가지가 되어줄게. 내가, 하더가, 우리 교수진이, 모두가."
"······."

순간, 뭔가, 까득, 하고 금이 가는 소리가 들렸다.


"나도 그랬거든. 도망칠 곳이 없어서, 외로워서, 의지할 사람들이 없어서 하비셜로 왔지. 물론 모든 교수가 도망치듯 하비셜로 온 건 아니야. 하지만 적어도 나는 그랬어."
"······그렇습니까."
"그래. 그러니까 숨고 싶으면 와. 여기는 바른도, 리베른도 침범할 수 없는 라이하빗 님의 도서관이니까."

다시 한 번 금이 갔다.


아직 벗겨낼 수 있을 정도는 아니다.
하지만,
그 틈새에서, 작은 물방울이 떨어진 것 같은, 그런 느낌이 들었다.


"감사합니다, 시하 교수님."

 물방울이, 현실에서도 떨어질 것 만 같아서, 한 마디로밖에 내 마음을 표현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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