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1화 〉9. 연화(緣火) (16)
식사를 마친 이들의 앞에 과일과 다과가 준비되었다.
그러고 보면, 연회의 다음 순서는 무도회로 예정되어 있다. 나는 문득 의구심이 들어 주위를 둘러보았다.
무도회라 함은, 보통 커플 한 쌍이 손을 잡고 춤추는 시간을 의미한다. 경쾌한 음악과 아름다운 커플댄스, 그리고 그들의 모습을 바라보며 즐거워하는 여러 사람들. 언젠가 꼭 한번 보고 싶었던 광경이었지만, 무도회가 열리기 위해선 한 가지 필수요소가 있었다.
춤을 출 공간이 부족했던 것이다. 좌석으로 꽉 차 있는 대강당, 2층의 귀빈석, 3층의 주빈석과 주최자석. 그나마 남아있는 공간은 장식품으로 들어찬 1층 단상이었으나, 그 곳은 춤을 추기 좋은 장소가 아니었다. 춤추는 모습을 아래에서 올려다보는건 여러모로 멋이 살지 않으니까. 짧은 치마를 입은 사람은 그것대로 문제고.
[식사는 즐거우셨습니까?]
그렇게 생각하던 내 귀에 샤오리드의 목소리가 들렸다. 거의 모든 이들이 식사를 마치자, 귀빈석에서 올라와 우리를 뒤에 두고 다시금 진행을 시작한 것이었다.
저학년들에게서 감탄섞인 대답이 터져나왔다. 교수들도 고개를 끄덕이며 미소를 띄었다. 샤오리드는 그 발랄한 분위기에 화답하듯 마주 웃으며 진행을 이어나갔다.
[그렇군요. 저도 굉장한 자극을 받았습니다. 내년에도 제가 하비셜에 있을 수 있다면, 꼭 한번 룽 가문의 크세닉스를 열어보고 싶다고 생각할 정도였으니까요.]
와아아!
이번에는 환호성이 대강당을 수 차례 공명하듯 퍼져나갔다. 샤오리드는 그 환호소리를 잠시 기다린 뒤, 한 차례 고개를 숙인 후 말했다.
[하지만 여러분. 크세닉스의 꽃은 식사가 아니라는 사실을 아십니까?]
쿠궁.
샤오리드의 진행 도중, 이상한 소리가 단상 아래에서 조금씩 들려왔다. 깜짝 놀란 나는 반사적으로 세렌의 옷자락을 쥐었다. 세렌 역시 진동을 감지한 듯 고개를 갸웃거리다, 로이아에게 물었다.
"로이아 선배님. 이 진동은 대체······?"
"······."
그런데, 로이아에게서 대답이 돌아오지 않았다. 생각해보니, 로이아는 식사 때 부터 말이 별로 없었다. 데네스와 비슷할 정도로 말이 없어서 굉장히 이상해 보였지만, 워낙 녹초가 되어있는 상태라 그러려니 하고 있었다.
나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로이아의 안색을 살폈다.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며 풀린 눈을 흐리멍텅하게 뜨고 있는 모습이었다. 도저히 로이아의 표정이라고는 상상할 수 조차 없어서, 깜짝 놀라 로이아를 불렀다. 식사때보다 상태가 더 나빠진 것 같았다.
"로, 로이아 언니?"
"으, 응?"
내 목소리에 그제서야 로이아가 반응한다. 금방이라도 잠에서 깬 사람처럼 잠긴 목소리로 대답하는 로이아. 확실히 이상했다. 언제나 똑부러지던 로이아 선배라고는 도저히 상상할 수 조차 없었다.
"무슨 일 있어요, 로이아 언니─"
"궁금한 점이 있으십니까."
내 말을 데네스가 잘랐다. 나를 부른 게 아니었냐는 로이아에게 인상을 쓰며, 그녀를 제지하는 데네스의 모습. 뭐라고 할까, 로이아의 행동을 부끄러워 하고있는 것 같았다.
두 사람을 만난 이후 처음으로 그들이 남매같아 보였다.
"아까의 진동에 대해 짐작가는 바가 있습니까?"
세렌이 물었다. 그러자 데네스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걱정하실 필요 없습니다. 무도회장을 만드는 작업 중이니."
"······하늘에요?"
"기다려 보십시오."
내 얼빠진 목소리에 데네스가 어이없어하며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는 앞을 향했다. 나는 물음표를 띄웠다. 세렌은 이내 무언가를 깨달은 듯 감탄을 내뱉었다.
"그런가. 단상의 안쪽이 비어있었던 이유가 그것이었어!"
"뭐 알아냈어요?"
세렌의 팔에 몸을 기댄채 물었다. 그러자 세렌이 자연스럽게 내 머리에 팔을 두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하지만 그대에게 알려주고 싶지는 않아."
"네? 왜요?"
"그대가 알지 못한 채 그 일을 경험하는 편이 더욱 재미있을 것 같으니까 말이다."
"요즘 좀 짖궂은 거 아니에요, 세렌?!"
"재미있는 반응을 보여주는 그대의 탓이지."
"저 때문인 거에요?!"
아하하하.
세렌이 나를 보고 환히 웃으며, 내 양쪽 겨드랑이를 잡아,자신의 무릎으로 나를 들어 옮겼다. 따뜻한 세렌의 온기가 등에서부터 느껴지기 시작한다.
"세렌?"
"꽉 잡도록 해. 나도 그대를 꼭 안고 있을테니까."
"네? 뭘 잡아요─ 어, 어?!"
갑자기 천장이 조금씩 멀어지기 시작했다.
정확히는, 내가 있던 단상이 점점 낮아지고 있었다. 부드럽게 내려가는 시야는, 이내 2층의 귀빈석과 나란해질정도로 내려갔다.
"메디아! 시하 교수님!"
"후후. 식사는 즐거웠나요, 위즈?"
"네!"
고개를 끄덕였다. 시하는 잔을 한 차례 건배하는 시늉을 하며 나를 바라보았다. 그러더니, 이제 막 식사를 시작한 유클리드의 팔에 자신의 팔을 감고, 순식간에 잔을 비웠다.
썩어들어가는 유클리드의 표정을 보아하니 아무래도 시하의 독단적인 행동인 것 같았다.
쿠궁.
다시금 단상이 움직였다. 이번에는 2층 단상도 함께 내려가기 시작했다. 푸른 빛으로 감싸인 단상은 이내 1층과도 합쳐져, 넓은 원통형의 구조물로 변화했다.
샤오리드는 원통형 단상의 끝으로 다가갔다. 그리곤, 단상의 끝에서 멋드러진 인사를 하며, 손을 튕겼다.
[크세닉스의 꽃, 무도회를 시작합니다.]
1층 단상을 장식하던 물품들이 사라지며, 단상이 다시금 땅바닥으로 내려앉았다. 부드럽게 내려앉은 단상은, 이내 대강당의 바닥과 하나가 되었다.
그러니까, 변화된 구조물들의 모습을 묘사하자면 이렇다. 중앙의 주빈석과 주최자석, 그들을 둘러싸는 귀빈석. 귀빈석을 둥글게 두른 넓은 공간과, 그 너머의 수많은 참석자들.
단상의 높이가 낮아져 모든 이의 눈높이가 같아졌다.
부드럽던 연주의 박자가 조금 빨라졌다. 가볍고 통통튀는 선율이 흘러나오자, 사람들의 표정이 밝아진다.
춤을 추기에 알맞은, 그야말로 무도회라는 이름에 걸맞는 음악.
어떤 춤을 볼 수 있을까. 세렌과 메디아가 함께 춤을 춘다면 그거만큼 예쁜 풍경이 없을 텐데······ 아, 이왕이면 로이아랑 샤오리드도 같이 춤 췄으면 좋겠다. 그러면 두 사람 간의 사이가 조금 가까워질 수도 있을 테고······.
사람들이 춤 추는 걸 구경할 생각에 잔뜩 신이 난 나는 세렌의 손을 잡았다. 그러자 세렌이 기다리고 있었다는듯 자리에서 일어났다.
조명이 어두워졌다.
주빈석 위의 조명을 제외하고 말이다.
"어라?"
"자, 나가도록 하자, 위즈."
"네?"
무슨 영문인지를 몰라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는데, 세렌이 내 손을 잡아 일으켰다. 얼떨떨하게 일어난 나는, 모든 사람의 시선이 내게로 집중되어 있는 것을 깨달았다.
"······어."
순간, 정신이 멍해지며, 한 가지의 가능성이 뇌리를 번뜩이며 스쳤다.
"자, 잠깐만요. 조금만 기다려봐요, 세렌."
"후후, 위즈. 모두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어."
질질질.
세렌이 나를 끌고 귀빈석을 지나쳤다. 메디아의 언짢은 시선과 시하의 넉살 좋은 웃음이 스치우듯 지나간다.
1층 단상을 가로질러, 마침내 샤오리드의 앞에 도착했다. 멀찍이 떨어져 있던 군중들이, 지금은 몇 보 앞에서 나를 기대어린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그들의 시선이 내게로 집중되어있음을 다시금 실감했다.
세렌과 내게 한 차례 시선을 맞춘 샤오리드는, 우리를 향해 짤막한 인사를 보냈다.
"주빈 여러분. 부디, 마음껏 즐겨주시길."
"저, 저 춤 못 추는데······!"
키발을 짚어 세렌의 귀에 입을 가져다 댄 뒤 항변했다. 아직 기회는 있었다. 이렇게나 많은 사람들의 앞에서 망신당하고 싶지 않았다. 춤이라곤 춰 본적도 없는 나에게 대체 뭘 시키려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힘을 빼고 내게 몸을 맡기면, 그 다음은 내 쪽에서 리드하도록 하지."
하지만, 그런 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세렌은 여전히 미소를 지었다. 나는 울상을 지으며 세렌에게 속삭였다.
"그런다고 춤이 돼요?!"
"된다."
"왜 그렇게 확신하는데요?!"
"그대와 나이기 때문이다. 합이 맞지 않을리가 없지!"
"진짜 할 말 없어지게 만드네요?!"
내 얼굴을 한 차례 불태우는 말이었다. 오글거렸지만, 세렌의 밝은 미소를 보고 있자면, 그 오글거림이 흐물흐물해지며 올바르게 펴지는 기분이라, 아무런 대꾸도 할 수가 없었다.
세렌은 샤오리드와 한 차례 마주인사한 뒤, 내 손을 잡아 이끌고 뒤를 돌아 무대로 향했다.
조명이 우리를 따라온다. 미칠 노릇이다. 손이 덜덜 떨린다.
"긴장할 필요 없어."
"어떻게 긴장을 안 해요······. 망신당하면 어떡해. 세렌도 망신당하기는 싫잖아요."
"그대와 함께라면 넘어지는 것도 좋은 경험이 되겠지."
"그런 식으로 자꾸 넘어갈래요? 으으······."
나는 울상을 지으며 세렌의 손을 마주잡았다. 세렌의 손길이 내 팔을 이끌었다.
한 발자국, 세렌이 움직였다.
그와 함께 세렌의 목소리가 흩어지듯 들렸다.
"나는 언제나 진심이었다, 위즈."
거짓을 입에 담는 데에는 소질이 없으니까.
두근.
갑작스럽게 심장이 요동쳤다.
직전까지도 거세게 뛰던 심장이었으나, 긴장 때문이었던 이전의 심장박동과는 조금 다른 느낌이 나를 감쌌다.
올려다보아야 하는, 머리 하나 정도 차이의 키.
같이 춤을 추기에는 조금 심한 차이다. 자칫 잘못하다간 위화감이 느껴질 수도 있다.
하지만 세렌의 리드는 나와 그녀의 키 차이에서부터 비롯되는 위화감을 모조리 지워버린다. 조금은 어색한 내 스텝에 맞춰주며, 박자조차 제대로 지키지 못하는 내 움직임을 자연스럽게 박자에 녹여준다.
한결 마음이 놓인다. 그것뿐 만이 아니라, 발걸음도 점차 가벼워진다. 어느새 내 발이 가야 할 위치가 보이기 시작했고, 삐그덕대던 상체도 조금은 유연해졌다.
세렌의 리드 덕이다. 세 살 짜리 아이라도 세렌과 함께라면 춤을 출 수 있을 것이다. 사교회에도 별로 나가지 않았었다는 사람이 어떻게 춤을 이렇게 잘 출 수 있는 건가 싶었다.
"틀리지 않았지?"
"네?"
내 몸이 내 몸이 아닌 것 같은 오묘한 기분과 함께 홀린듯 세렌의 리드를 따라가고 있는데, 선율 사이를 비집고 세렌의 목소리가 흘러들어왔다. 무슨 소린가 싶어 고개를 갸웃거리자, 세렌이 입꼬리를 올리며 눈매로 호선을 그렸다.
"내 말 말이야."
"그렇네요."
고개를 끄덕였다. 세렌은 고개를 끄덕이며 만족스러운 듯 밝게 웃었다.
찬란한 무도회장의 조명보다도 밝은 빛에, 눈이 멀 것만 같았다.
우리가 춤을 추는 사이, 벌써 여러 커플이 무대 위로 올라와 같이 춤을 췄다. 1학년부터 6학년까지, 춤을 추는 사람들은 나이를 가리지 않았다. 각자의 파트너와 함께 무도회장을 장식하는 한 쌍의 꽃으로 피어난다.
그 중에서도 나와 세렌은 특출나게 눈에 띄었다. 검은색 단정한 제복과 대비되는 강렬한 금발 탓도 있었으나, 우리가 춤 추는 곳의 주변을 백합이 가득 채웠기 때문이었다.
물론, 범인은 나다.
춤을 추는데 있어 꽃잎은 방해가 되었기 때문에, 우리의 주변에는 사람들이 별로 없었다.
그래서 세렌과 단 둘만 있는 것 처럼 느껴졌다.
그리고 그것을 자각한 순간, 그녀와 맞잡은 손이 조금 달아오른 듯 한 느낌을 받았다.
"세렌의 손, 뜨거워요."
"그대의 손이 이렇게나 따뜻했을 줄은······."
동시에 입을 열었다. 그리고 나선 깜짝 놀라 서로를 바라보았다.
"세렌 손이 따뜻한 거 아니에요?"
"그럴리가. 그대의 손이 이리도 따뜻한데······."
뭐지.
으음. 춤을 추고 있는 도중이라 손을 놓을 수도 없고.
"······연화?"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는데, 세렌이 중얼거리듯 입을 열었다. 잘 듣지 못한 나는 세렌에게 되물었다.
"잘 못 들었어요, 세렌. 뭐라구요?"
"으음······."
세렌이 조금 생각에 잠겼다. 그러더니, 갑작스럽게 무언가를 깨달은 듯 눈을 크게 떴다. 그리고는 내 시선을 피하기 시작했다.
"세렌?"
"으, 응?"
세렌에게서 당황의 기색이 엿보였다. 무슨 일인가 싶어 세렌의 얼굴을 들여다보려 해도, 자꾸만 고개를 돌려버린다.
"뭐라고 했는지 못 들었다니까요."
"아니야. 신경쓰지 않아도 돼."
"그러니까 더 궁금해지는데요?"
"으······."
세렌이 잘 못 걸렸다는 듯 침음을 내었다. 괜히 사람의 궁금증을 자극시키는 표정이었다.
뭐냐고 다시 한 번 물어보려고 하던 나는, 음악이 끝났음을 느꼈다. 세렌이 안도의 표정을 지음과 함께 도망치듯 주빈석으로 들어갔다. 나도 세렌의 뒤를 쫒았다.
그러다가, 메디아의 손길이, 부드럽게 나를 잡고 있음을 깨달았다.
"······메디아?"
"무슨 일이 생겼나요, 위즈?"
걱정스러운 눈빛이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세렌의 손이 뜨거워졌던 일. 세렌이 무언가를 중얼거리더니, 내 시선을 피하기 시작한 일. 세렌의 얼굴이 붉은 걸로 보아, 아무리 봐도 체온이 높은 쪽은 세렌인데, 대체 왜 저러는지 알 수가 없다는 하소연.
그런데, 내 말을 듣던 메디아의 얼굴이 점차 굳어지기 시작했다.
"······연화."
"네?"
"아니에요."
"메디아도 그러기에요?!"
"후후, 위즈. 한 곡 추시겠어요?"
조금은 경직된 표정으로, 메디아가 손을 내밀었다. 두 사람이 짜고 나를 놀리는게 아닌가 싶었던 나는, 갑작스러운 제안에 당황해 반문했다.
"저, 저 춤 못 춰요?"
"세리나 바른과도 추었잖아요? 아름다웠던 걸요."
"세렌의 리드가 좋았던 거고······."
"제 리드는 믿지 못하는 건가요?"
"그건 아니지만요······."
"후후, 그럼 됐잖아요?"
메디아가 다시금 나를 무대로 이끌었다. 그리고는 백합이 남아있는 자리에서, 나를 리드하기 시작했다.
세렌과는 또 다른 느낌이었다. 세렌이 나를 감싸안듯 유도한다면, 메디아는 나를 가르쳐주며 이끌고 있었다. 내가 따라갈 수 있을 정도를 지도하는 메디아의 리드. 세렌보다는 조금 어려웠지만, 뭔가 춤이 늘어가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어떤가요?"
"네?"
"손 말이에요."
"······부드러운데요?"
"으응······."
내 대답이 마음에 들지 않는 듯, 메디아가 미간을 좁혔다. 잠시 생각에 빠져있던 메디아는 이내 결심한 듯 나를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손에 조그마한 힘을 담았다.
"어?"
"이젠, 어때요?"
"뜨, 뜨거워요, 메디아?"
"좋아요."
메디아가 미소지었다. 하지만 나는 미소를 지을 수가 없었다. 손이 정말로 뜨거웠기 때문이었다. 마음의 준비도 없이 열탕에 몸을 담근 듯 한 뜨거움이었다.
"이, 이거, 마법 아니에요?!"
"마법이라뇨. 무슨 소리에요?"
"빛이 나는데요?!"
"후후, 오늘 조금 피곤했나보네요. 기분 탓이랍니다, 위즈."
"하, 하지만요?!"
"걱정 말아요. 화상은 입지 않아요."
"메디아가 한 거 맞잖아요?!"
"어머. 저는 모르는 일이랍니다?"
천연덕스럽게 대꾸하며 춤을 추는 메디아.
대체 갑자기 나한테 왜 저러는지 모르겠다. 뭐지, 벌인가? 루아의 숙제를 빌렸던 걸 들키기라도 했나?!
뭐가 뭔지 알 수가 없었다.
한참동안이나 무도회는 계속되었다. 샤오리드와 로이아의, 왠지 모를 어색함이 깃든 춤과, 모든 학생들의 환호를 모은 시하와 유클리드의 무용. 그리고 수 많은 학생들의 제각기 다른 춤사위.
그 중 백미는 메디아와 세렌의 커플댄스였다.
누구와 추는 것이 더 편했냐는 두 사람의 물음에 내가 대답하지 못한 결과였다. 한참동안이나 아옹다옹대던 두 사람은, 결국 자신의 실력을 증명하기 위해 마주섰던 것이다.
그녀들은 서로에게 우아한 인사를 보낸다. 양 팔을 좌우로 늘어뜨리며 고개를 숙이는 메디아와, 오른손을 가슴에, 왼손을 등에 가져다 댄 채 허리를 굽히는 세렌.
언뜻 보기엔 하나의 그림과도 같은 모습이었으나, 두 사람의 눈빛은 금방이라도 터질 것 같은 폭탄과도 같았다.
"지지 않아요."
"마찬가지다."
같이 춤을 추는 파트너에게 저런 흉흉한 시선을 보내도 되는지에 대한 의문이 들었다. 하지만 다음 곡의 연주가 시작되었고, 두 사람도그에 맞춰 서로 발을 떼었다.
부드러운 세렌의 발걸음과, 그에 맞춘 메디아의 유려한 발걸음. 언뜻 극명한 대조를 이루는 두 사람이었으나, 빨강과 파랑이 섞여 아름다운 보라색을 만들어내듯, 두 사람에게 없는 새로운 매력을 선보였다.
세렌의 코트자락이 펄럭이며, 메디아의 드레스가 넓게 펴진다. 세렌의 손을 잡으며 메디아가 한 차례 가볍게 몸을 돌리고, 메디아가 허리를 뒤로 뉘이면 세렌이 아무런 부담 없이그녀의 허리를 떠받친다. 어쩜 저렇게 호흡이 척척 맞을 수가 있는지.
내 입장에선 감개무량한 일이었다. 비록 눈은 저렇게 서로를 잡아먹을 듯 뜨고 있으나, 두 사람이 내 눈 앞에서 춤을 추고있지 않은가. 세상에. 내일 당장 시력을 잃는다 해도 후회 없을, 평생을 간직할 풍경을 눈에 담았다.
다사다난한 크세닉스였지만, 그럼에도, 행복한 기억이 너무나도 많이 남은 크세닉스였다.
뒷준비를 끝내고 기숙사로 돌아갔다. 세렌은 무슨 일이 있는지 나를 먼저 돌려보냈고, 나는 지친 몸을 이끌고 하비셜 본관을 빠져나왔다.
그런 나의 앞을 어떤 신사가 가로막았다.
모자를 깊게 눌러 쓴 사람이었다. 나는 순간적으로 경계심을 가졌으나, 남자가 모자를 벗고 인사하자, 얼떨결에 마주인사하며 힐끔 그 사람의 안색을 살폈다.
인자한 얼굴이었으나, 언뜻 음울함이 엿보이는 얼굴이었다. 남자는 내게 말했다.
"너로구나."
"······누구세요?"
"연구자라고밖에 소개할 수가 없구나."
남자가 미소지었다. 해가 뉘엿뉘엿 저물어가는 하비셜 본관. 크세닉스가 끝난지 조금 시간이 지났다고는 하나, 주변에 사람이 이상할정도로 보이지 않았다.
조금 불안한 눈빛으로 남자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남자는 그런 내게서 한 걸음 물러서며 두 손을 들었다.
"이런, 이런. 겁 먹을 필요 없단다. 나는 네게 해를 끼치러 온 사람이 아니니까."
"······그럼, 왜 오신 거에요?"
"감사인사를 하러 왔지."
남자가 다시금 음울하게 웃는다. 인자한 얼굴고 부조화를 이룬다.
기괴하다. 그렇다고밖에 설명할 수가 없는 사람이다.
"······무슨, 인사요."
"내 연구에 네가 지대한 성과를 내어 주었단다. 네가 아니었다면 실패했을 수도 있으니."
"저는, 연구같은거 한 적이 없는데."
"그래? 흐흐, 그런가. 그렇다면 됐다."
"······저, 가봐도 될까요?"
"그래, 당연하지. 내가 네 시간을 빼앗고 말았구나."
남자가 모자를 한 차례 들어올리며 목례했다. 나는 남자를 최대한 피해서 그 자리를 벗어났다.
"오늘은 수고했다, 아가야."
등 뒤에서 퍼지는 듯 한 목소리가 들렸다.
조금 소름이 돋아 뒤를 돌아보았지만, 이미 남자는 어디론가 사라진 뒤였다.
그와 함께, 그에 대한 기억이 희미해진다. 목소리도, 얼굴도, 체격도, 무엇 하나 선명하게 기억나는 것이 없다.
그리고 마침내, 내가 잊어버렸다는 사실조차 망각한 나는, 이내 별 일 없었다는 듯 기숙사로 돌아갔다.
해가 저물고, 별이 그 자리를 대신하는 아늑한 밤. 기숙사의 문을 열자, 그곳에 루아가 있었다.
"······루아?"
조금 놀라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루아는 손을 모은 채 기숙사 방 안에 서 있었다.
"위즈."
가녀린 목소리가 나를 부른다. 한참동안이나 기다린 것 같은 모습이었다.
내가 루아를 보고 놀란 이유는 다른 것이 아니었다. 그녀가 드레스를 입고있었기 때문이었다. 장식은 별로 없었으나, 새하얗고 아름다운 순백색 드레스였다.
"오늘 크세닉스, 왔던 거에요?"
"으응."
루아가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는 책상 위에서 구슬 하나를 내게 보여주었다.
"하스타가 준 거야. 하스타가 위즈의 모습을 보내줘서, 위즈를 볼 수 있었어."
"······그래요."
순간 가슴이 먹먹해졌다. 내가 크세닉스를 즐기는 동안, 루아가 그 모습을 보며 방 안에 홀로 있었던 것을 상상하니, 절로 그렇게 될 수 밖에 없었다.
루아는 그런 나를 바라보며 우물거리듯 말했다.
"······그런데, 위즈가 춤을 추는 걸 보니까. 나도 추고 싶어졌어."
루아는 고개를 숙인 채 나를 힐끔 올려다보았다. 그리고는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춤, 같이 추고 싶어. 위즈."
두근.
심장이 아려왔다. 누군가가 쥐어짜내는 듯 한 감각을 버티며, 루아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그 어깨를 감쌌다.
루아가 깜짝 놀라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루아의 목을 안았다.
"당연하죠."
"······정말?"
"네. 루아가 이렇게나 오랫동안 기다려줬는데, 어떻게 거절할 수가 있겠어요."
한참을 기다렸을 것이다. 크세닉스가 끝난 후부터 기다렸다고 해도, 대략 세 시간이다. 세 시간동안이나 아무도 없는 방 안에서 드레스를 입고 나를 기다려준 사람을 어떻게 내칠 수가 있을까.
조금 차가워진 루아의 어깨를 어루만지며 루아와 얼굴을 마주댔다.
"루아. 저 춤은 잘 못 춰요?"
"나도 그런걸."
루아가 부끄러운 듯 다시금 고개를 숙였다. 나는 웃으며 루아의 허리에 손을 대고, 다른 한 손으로 루아의 손을 잡았다.
차가운 손이다. 나는 그 손을 꼭 쥐고 루아에게서 조금 떨어졌다.
"음악은 없지만요."
"이거라도······."
루아가 눈 앞에서 작은 별 하나를 만들어내었다. 그리고는 방의 천장에 띄웠다.
별빛이 어두운 방을 비춘다. 그리 밝지는 않았으나, 서로의 눈을 비추어 보기에는 충분했다.
하나, 둘.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발걸음을 내딛는다. 어색하고, 볼품없는 춤이다. 리드해야겠다고 마음은 먹었으나, 몸이 뜻대로 움직여주지를 않는다.
하지만, 그럼에도 루아는 행복해했다. 미소지으며, 배시시 웃는다.
손도 점차 따뜻해진다. 그리고 이내 세렌과 춤을 추었을 때 만큼이나 뜨거워져, 이제는 차가웠던 기색이라곤 찾아볼 수 조차 없다.
"앗?!"
"위즈?!"
내 발에 내가 걸려서, 균형을 잃고 말았다. 내 손을 따라 루아도딸려들어왔다.
다행히 옆에는 침대가 있었다. 나와 루아는 침대에 쓰러졌다. 드레스자락이 엉망으로 구겨졌다.
하지만, 재미있었다.
"아하하, 넘어져버렸어요!"
"응, 넘어져 버렸어."
고개를 돌리며 웃었다. 루아가 내 옆에서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나는 그런 루아의 손을 잡았다. 루아가 움찔 하고 어깨를 경련하듯 움직였다.
"위즈, 뜨거워······."
"이상하네요. 저도 그래요."
"아······."
루아가 잠시 멍하니 나를 바라보다, 얼굴을 붉혔다.
마력이 다 되었는지, 방 안을 밝히던 별빛이 사라졌다. 창문을 통해 들어오는 희미한 별빛만이 우리를 비춘다.
"위즈."
"네?"
"정말, 정말 좋아해."
"흐흥, 매일 듣는 말이지만 기분 좋네요."
웃으며 장난치듯 루아의 옆구리를 찔렀다. 매일같이 했던 장난이었다. 하지만 오늘만큼은, 조금 반응이 달랐다. 내가 옆구리를 찌르면 배시시 웃곤 했던 루아가, 미동조차 하지 않았던 것이다.
"루아?"
"위즈."
"네, 네."
조금 진지한 어조다. 갑작스러운 루아의 목소리에 당황한 나는 말을 더듬고 말았다. 표정이라도 알 수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조명이 꺼져있어 무슨 표정을 짓고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위즈는 날 좋아해?"
"당연하죠!"
"얼만큼?"
"루아가 저를 좋아하는 것 보다 조금 더요!"
"······."
대답이 없었다.
한참동안이나 없었다. 내가 체감하기론 30분 정도 지난 것 같았다. 실제로는 1분 정도가 지났겠지만, 그 정도로 적막은 길고 조용했다.
그리고 그 적막을, 루아가 끝냈다.
갑작스럽게 루아가 내 품으로 안긴 것이다. 루아의 머리카락에서 좋은 향기가 훅 하고 밀려들어왔다.
"루아?"
"이대로 자고 싶어."
"드, 드레스는 벗어야죠?"
"싫어. 이대로 잘래."
"옷 다 구겨져요?"
"괜찮아······."
루아가 나를 안은 채 천천히 잠에빠져들었다. 이내 새근새근 숨소리를 내는 루아.
······이 옷, 구김 펼 수 있을까. 본가로 돌아가면 옷이 왜 이렇게 됐냐며 앨리스에게 혼나지는 않을까.
으으.
모르겠다.
불편해도, 그냥 이대로 자는 수 밖에.
루아의 머리카락을 정리하며, 나도 잠에 들었다.
정말, 말도 많고 탈도 많은 긴 하루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끝이 이렇게도 평화로울 수 있어, 정말 다행이었다.
그러고 보면 내일 쪽지시험이 있었던 것 같은데.
으응··· ··· 몰라. 어떻게든 되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