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3화 〉10. 검은 달 아래 (2)
비취빛 투명한 모래사막을 지나, 세상 끝까지 뻗어나갈 듯 한 들판을 건너, 마침내 바른에 발을 딛었다.
입학식 때 지나왔던 도로는 이제 완연한 겨울길의 모습이었다. 앙상한 몸을 눈으로 가린 나무가 바람에 맞춰 가지를 흔들면, 후두둑 떨어지는 눈더미에 하얀 털로 갈아입은 토끼가 놀라 달아난다.
아직은 익숙치 않은 바른의 경치가 천천히 스치운다. 저 멀리 펼쳐진 평야의 설원과, 눈을 털어내고 바위 위에 걸터앉는 작은 새의 모습까지. 빠르게 지나갈 때는 느끼지 못했던 정취에 취해버릴 것 만 같다.
"하암."
루아가 하품을 내쉰다. 이미 반 쯤 잠긴 눈동자를 억지로 뜨려는 루아. 상반신을 제대로 가누지조차 못하고 내 어깨에 몸을 기대온다.
하품은 전염된다고 하던가. 나 역시 크게 한 번 하품을 내쉬었다. 눈가가 촉촉히 젖어, 한 차례 눈을 꿈뻑 뜬 후 눈을 비빈다.
"졸려?"
장부를 뒤적이던 하스타가 피식 웃으며 물음을 건넸다. 나는 실없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루아는 이미 눈을 완전히 감은 채 작은 숨소리만을 내쉬고 있었다.
"더 걸릴 것 같으니까, 좀 쉬어."
"그러는게 좋을까여어······."
내 스스로의 발음이 뭉개지는 것을 자각하며 루아의 정수리에 뺨을 가져다댔다. 좋은 향기와 함께 부드럽고 가벼운 머리카락이 베개처럼 볼을 감쌌다. 여독이 스르륵 풀려감과 동시에 눈꺼풀도 사락 내려앉는다.
벌써 여덟 시간째 마차를 타고 있다. 진동방지 마법 덕에 멀미같은 건 나지 않았지만, 기숙사 반 칸 정도 되는 공간에 열 시간이나 있어야 한다는 것은 그것 만으로도 상당히 힘든 일이었다.
본래라면 벌써 도착했어야 했다. 하지만, 예상보다 도착시간이 늘어진 것은, 길이 빙판으로 뒤덮여 서행을 해야 했던 탓이었다. 아침을 먹고 바로 출발했는데도 도착하지 못하고, 벌써 해가 뉘엿뉘엿 저물어 간다. 이러다간 저녁도 저녁이지만 마차 안에서 잠을 자야 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아니면 야영을 해야 할까. 으음, 불은 마법으로 피운다 치고, 잠자리는 어떻게 만들지······.
의식이 점차 엷어진다. 힘이 풀려 벌어진 입에 작은 바람이 새근새근 오고간다.
부드럽고 따뜻한 천을 덮어주는 감각을 마지막으로, 나는 잠에 빠졌다.
"······나세요······."
"으응······."
도리도리.
잠을 갈구하는 본능에 따라, 고개를 저었다.
"······일어나세요······."
"조금만 더어어······."
인상을 찡그리며 칭얼댄다. 루아에게 배운 행동이다. 공부 잘하는건 안 배우고 왜 이런 것만 배웠냐고? 그거야 뭐, 사람의 본능이기 때문이다.
"······위즈님, 일어나세요······."
"5분, 5분마아안······."
이번엔 흥정을 해본다. 어차피 씨알도 먹히지 않을 걸 알지만, 이렇게 시간을 끄는 사이에 조금이라도 더 눈을 붙이고 있을 수 있기 때문에 흥정을 하고 본다.
그러자 나를 깨우던 사람이 한숨을 내쉰다. 그러고 보면 어디서 많이 들어본 목소리다. 말투만 좀 바꾼다면, 정말 익숙한 사람의 목소리인 것 같은데······.
휘리릭.
"아, 꺄악?!"
바닥에 엎드려 있던 내 상체가 갑작스럽게 확 하고 일으켜 세워졌다. 나는 갑작스러운 위치변화에 깜짝 놀라 눈을 떴고, 그 곳에는─
"이제야 눈을 뜨시네요, 위즈 님."
"하, 하스타?!"
"후후. 다음에는 바로 얼음 물을 끼얹어 버릴 거에요."
하스타가, 와이셔츠와 재킷을 입은 채, 내 겨드랑이 사이에 손을 넣고 있었다.
나는 멍하니 하스타를 바라보았다. 나와 똑같은 반응을 보이는 루아를 일으켜세우는 하스타. 단정하게 정돈한 머리카락과 와이셔츠, 그리고 무릎을 덮는 감색 치마까지.
하스타가 맞나 싶었다. 뭐라고 할까, 하스타 혼자 나이를 다섯 살 정도 먹어버린 것 같은 느낌이라고나 할까. 분위기가 너무나도 성숙하게 바뀌어 있어, 위화감마저 들었다.
"······하스타야?"
"그래요, 루아 님."
"하스타 아닌데······?"
"그게 무슨 이상한 소리에요, 루아님."
"하스타는 나한테 존댓말 안 써······."
잠에서 깬 루아가 경계심에 가득 찬 목소리로 내 팔에 엉겨붙었다. 그러자 하스타는 한숨을 내쉬더니, 나와 루아에게 얼굴을 가까이 대고 작게 속삭였다.
"이상한 소리 하지 말고 어서 내리라니깐. 한참 전에 도착했다구."
"하스타 맞네······?"
"여긴 하비셜이 아니잖아. 너희는 귀족이고, 나는 평민이고. 앞으로 하비셜에 가기 전 까지는 존댓말만 쓸 거니까 그런 줄 알아."
"굳이 안 그래도 되는데요······?"
"기초적인 법이잖아. 평민은 귀족을 하대해서는 안 된다. 어길시에는 벌금을 내야되고. 벌금 내기 싫단 말야."
조금 인상을 찌푸리던 하스타가 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는 한 차례 눈을 감고 고개를 돌리더니, 표정을 바꿔 미소지었다.
"그러니만큼, 부디 협조해주시길 바랄게요, 위즈 님. 루아 님. 아시겠죠?"
"······어색해."
"협조 안해주시면 하비셜로 돌려보내 버릴거에요?"
"이잉."
루아가 울상을 지었다. 나도 이 온 몸을 기어다니는 알 수 없는 위화감에 신음하며, 하스타를 따라 마차에서 내렸다.
중앙 산맥.
말 그대로 대륙의 중앙에 위치했기에 이름붙여진 이 산맥은, 하늘 호수와 바른제국의 사이를 가르는 장벽같은 존재다. 은빛 영철을 채광할 수 있어, 경제적인 가치도 굉장히 높은 곳이라고 배웠다.
하지만, 이 장소는 가치 만큼이나 위험한 곳이기도 하다. 이 산맥의 최고봉인 '넬'의 정상에서부터 끝을 알 수 없는 마기가 흘러나오고 있기 때문이었다.
대악마 나엘의 본거지였다고 하던가. 하여간, 그래서 이 중앙산맥은 위험과 기회가 공존하는 땅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지금 우리가 도착한 곳은, 중앙 산맥의 남부인 아시쿨라 영지다. 베르톨랑 후작가가 다스리고 있는 곳인데, 3주 정도 전, 산에서 내려온 마기가 마운무를 형성해내어 큰 피해를 입고 말았다. 그래서 하스타의 아버지가 운영하고 있는 상단인 글라서블 상단이 물자를 조달하기 위해 상주하는 중이라고 한다.
적절한 몸단장을 마친 후, 하스타를 따라가며 대략적인 설명을 들은 나와 루아는 어느 큰 건물로 들어섰다. 영주가 하스타네 아버지에게 빌려준 상단의 임시숙소라는데, 임시숙소 치곤 우리 본가의 저택보다 더 화려해보였다.
접객실에 도달하자, 하스타가 문을열고 먼저 들어가라며 손짓했다. 나와 루아는 얼떨떨해하며 그 안으로 들어섰고, 한 남자와 마주하게 되었다.
"허허, 안녕하십니까. 하스타의 아비인 소토즈 비즈입니다."
여유로운 웃음과 함께 소토즈가 고개를 숙인다. 거대한 풍채에서 배어나오는 특유의 넉살은 유전인가 싶을 정도로 하스타와 닮아있었다.
"안녕하세요, 위즈 율릿이에요."
"루아 소크타리에스에요······."
"이야기는 많이 들었습니다. 부족한 딸을 잘 돌봐주신다고 하더군요. 허허, 하스타도 인복이 넘치나 봅니다."
소토즈는 우리의 어색한 인사를 매끄럽게 받아넘기며 너스레를 떤다. 으음, 돌봄받는 입장은 오히려 우리 쪽인데.
"아버지, 별 소리를······."
조금 발끈하기라도 한 건지, 하스타가 작게 중얼거렸다. 그러자 소토즈는 빈 의자에 손을 탁탁 치며 말했다.
"왜 거기에 서있느냐, 하스타. 앉아서 친구분과 이야기를 나눠야지. 이제 곧 바빠질 터인데."
"······."
조금 못마땅한 눈치로 하스타가자리에 앉았다. 소토즈는 내 쪽을 향해 바라보았다.
"율릿 가의 위명은 저도 익히 들어 알고 있습니다. 모드루가 삼각주의 동부, 페르다 령을 훌륭히 지키고 계시다는 소문을 들었죠. 허허, 평민들의 존경을 한 몸에 받는 분이라고 명성이 자자하더군요. 위즈 님도 율릿 백작님만큼이나 따뜻한 심성을 가지신 분 같으니만큼, 부족한 저희 딸이지만 아무쪼록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네, 네······."
장황한 말과 함께 아버지에 대한 칭찬이 무수히 쏟아졌다. 조금 가슴 한 쪽이 간질간질해지는 기분이라 얼굴이 달아오른다.
"또 시작이네······."
하스타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조금은 안절부절 못하며, 혹시나 소토즈가 이상한 말이라도 하지 않을까 전전긍긍하고 있는 모습. 사춘기 소녀와 그 아버지 간에서 흔히볼 수 있는 그런 모습이었다.
"물론, 루아 님의 이야기도 많이 들었습니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다가, 소토즈가 루아의 이야기를 꺼냈다. 순간 온 몸에 긴장이 어렸다. 루아가 살며시 내 옷자락을 잡으며 조금 불안한 눈동자르 소토즈를바라보았다.
"착하고 조용한 분이라고 하스타가 그렇게 칭찬을 하더군요. 어떤 분인가 계속 궁금해왔었는데, 오늘에서야 그 궁금증이 해결되는 기분입니다."
"아, 아버지!"
"어디, 하스타가 보내주었던 편지라도 보여드릴까요?"
"저, 저, 만약 그 편지들 다 보여주시면 곧바로 하비셜로 돌아가버릴거에요?!"
"어이구. 그건 좀 곤란하지."
하스타가 저렇게까지 당황한 건 입학식 때의 첫 대면 이후로 처음 본다. 장난기가 많은것도 유전인가.
"딸이 저렇게 싫어하니, 아비 된 사람으로서 함부로 보여드릴 수가 없겠군요. 죄송합니다, 두 분."
"네, 네! 괜찮습니다!"
"허허, 감사합니다."
소토즈가 인자하게 웃었다.
그러고 보면, 루아의 가문에 대한 이야기는 일언반구도 없이 물흐르듯 자연스럽게 화제가 전환되었다. 일부러 그런 건가? 만약 노린거라면······ 우와. 저게 연륜인가 싶다.
"이제 저는 일을 하러 가보아야겠군요. 하스타, 숙소로 안내해드리거라. 4층으로 계속 들어가면 방이 있어. 나는 물자의 수량을 확인하러 가보아야 겠어."
"알겠어요, 아버지."
"안내해 드린 뒤에는 데이건에게 가보거라. 데이건이 서류 처리에 애를 먹고 있으니."
"아, 데이건도 있어요?"
"그래. 데이건도 내년이면 열 다섯이니, 실무에 들일 때가 됐지."
"알겠습니다."
하스타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우리 둘에게 손을 내밀었다.
"안내해드릴게요, 위즈 님. 루아 님."
순간, 어색해서, 할 말을 잊었다.
루아도 나와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는 것 같았다. 멍하니 하스타의 손을 바라볼 뿐 움직이지 않았던 것이다.
그렇게 조금의 시간이 흐르자, 하스타가 무안해진 얼굴로 말했다.
"응접실에서 주무실 거, 아니잖아요?"
"······아, 응······."
"아, 네, 네."
"저라고 존댓말을 좋아서 쓰는 건 아니라니까요. 적응 좀 해요, 두 사람 다."
진짜 하나도 적응이 안 되는데 어떡해.
하스타가 존댓말을 쓸 때마다 자꾸 소름이 돋는다. 하스타의 껍데기를 쓴 다른 사람같달까.
적응하는데 시간 좀 걸리겠네. 나와 루아는 한숨을 내쉬며 하스타를 따라가 짐을 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