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4화 〉10. 검은 달 아래 (3)
"위즈 님. 루아 님. 들어가도 될까요?"
"네에~!"
짐을 어느정도 정리했을 무렵, 문 바깥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내 대답이 끝나기 무섭게 방문이 벌컥 열렸다. 하스타였다. 정장을 입어서 그런지, 아니면 그녀가 주어진 일을 막힘없이 처리하고 있기 때문인지. 평소보다 조금 어른스럽게 느껴지는 소녀.
"일감이 들어왔습니다. 설마 멋대로 따라와 놓고 놀기만할 생각을 가지고 있는 건 아니겠죠, 위즈 님?"
"흐흥, 그럴리가요! 오히려 그 말을 기다리고 있었는걸요! 자, 일하기 편한 옷으로 갈아입은거 보이시죠!"
가슴을 쭉 펴며, 하스타에게 보란 듯이 옷차림을 보여준다.
나풀거리는 여행복에서 움직이기 편한 복장으로 갈아입은 상태다. 루아도 마찬가지로, 나를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으구구, 기특하네요. 우리 위즈 님이 저를 도와줄 생각도 다 하고."
"하스타네 집이 바쁘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부터 생각했던 거에요. 후후, 어때요! 똑똑하죠! 총명하죠! 칭찬받아야 마땅한 행동이죠! 자아, 어서 제게 칭찬을!"
"준비도 끝난 것 같으니, 어서 따라오세요."
양 손으로 허리를 잡으며 눈을 감고 하스타의 칭찬을 기다리는데, 하스타가 등을 돌려 방 바깥으로 나가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황급히 눈을 뜨고 하스타의 뒤를 쫒아갔다.
"무시하기에요?!"
"상인은 헛소리를 상대하지 않거든요."
"헛소리라뇨?!"
칭찬받을 생각에 들떠있던 내게 하스타가 킥킥 웃으며 찬물을 끼얹는다. 나는 울상을 지으며 루아에게 같은 편이 되어달라는 시선을 보냈지만, 루아 역시 하스타처럼 웃으며 내 시선을조금 피하고 있었다.
뭐지? 웃긴 상황이 있었나?
조금 당황한 내가 번갈아가며 두 사람을 바라보자, 웃음소리가 더욱 커졌다.
"왜, 왜 웃는건데요?!"
"재밌으니까 웃는거죠."
"위즈 너무 좋아~!"
"뜬금없이 고백은 왜 해요?!"
"진심인걸~"
조금 억울한 마음으로 물어보았지만, 두 사람 다 제대로 된 대답은 해 주지 않았다. 대체 어째서 웃는 건지 실마리도 찾을 수가 없다.
······으, 모르겠다. 그냥 두 사람이 즐거워하니까 됐다 치지뭐.
석연치 않은 표정으로, 떨떠름하게 하스타의 뒤를 따랐다.
하스타의 뒤를 따라간 곳은, 아이들이 뛰놀고 있는 큰 막사의 안이었다.
"여긴 어디에요?"
"열 네살 이하의 아이들이 모여있는 임시 보호소. 마수의 습격 때문에 보호자와 떨어진 아이들을 보호하는 곳이에요."
"······영원히 떨어져 버린 아이도 있어?"
루아가 조금 목소리를 떨며 물었다. 그러자 하스타가 무겁게 고개를 끄덕이며 언성을 낮추었다.
"사실 그런 아이들이 대부분이에요. 마수에 의해 헤어졌다 기적적으로 재회하는 가족도 있지만, 대부분은 마수에게 목숨을 잃고 말았으니까요."
"이렇게 많은 아이들이요······?"
덜컹, 하고 심장이 내려앉는듯한 기분을 느끼며 물었다.적게 잡아도 50명은 가뿐히 넘을 듯 한 숫자였던 것이다. 이렇게나 많은 아이들이 부모를 잃었다는 건, 피해가 내 상상 이상으로 심각했다는 것을 의미했다.
마수에게서 도망치지 못한 아이들도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대체 몇 가구가 마수에 의해 파괴되어 버린걸까.
꿈에서 막 깨어난 것 처럼, 정신이 번쩍 들었다. 대륙 곳곳의 영지에서 피해를 입었다는 소식은 자주 접했지만, 두 눈으로 그 피해를 확인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기 때문이었다. 이렇게나 많은 아이들이 마수의 공격으로 부모를 잃었다는 절박한 현실에 할 말을 잃고 말았다.
"어쨌든. 위즈 님과 루아 님의 일은, 이 아이들을 돌봐주는 겁니다."
"아, 아이들을요?"
당황스러운 눈빛으로 반문했다. 아이들을 돌보라니, 그런거 한 번도 해본적이 없는데.
"그렇게나 호기롭게 절 따라오셨으니, 이 정도 부탁은 충분히 들어주시겠죠, 위. 즈. 님?"
내 표정이 어두워지자, 하스타가 내 이름을 또박또박 한 음절씩 불렀다. 하기 싫으면 하비셜로 돌아가 버리라는 메세지가 담겨있는 눈빛이었다.
"다, 당연히 해야죠!"
"열심히 해볼게."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기다렸다는듯 루아가 나를 거들어주었다. 하스타는 만족스러운 듯 고개를 끄덕이더니, 근처의 의자를 빼 앉아, 가방 속의 서류를 꺼내 검토하기 시작했다.
"저는 여기서 작업을 하고 있을게요."
"하스타도 여기에 있는 거에요? "
"이것만 다 끝내면 저도 위즈 님을 도울 수 있을거에요."
"얼마나 걸리는데요?"
"글쎄요. 어제밤을 전부 써서 액수를 기입했으니까, 이제 두 시간 정도면 마무리지을 수 있지 않을까요.
순간, 하스타의 눈가에 희미하게 깃든 다크써클이 시야에 들어왔다.
"피곤해요?"
"응? 어, 아니요? 멀쩡한데요?"
하스타가정곡을 찔린 것 마냥 말을 더듬는다. 나는 다시 한 번 물었다.
"아무리 봐도 피곤해 하는 것 같은데요, 하스타"
"그래보여요?"
"엄청 그래요."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하스타가 잠시 눈을 감더니 양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렸다.
"뭐······ 어쩔 수 없죠. 어제부터 계속 이것들만 봤으니까······."
하스타가 얼굴에서 손을 떼자, 나는 다시금 하스타의 안색을 살펴볼 수있었다. 피곤함이 묻어나오는 얼굴이다. 어떻게 저걸 눈치채지 못한 거지 싶을 정도로 퀭했다.
"하스타."
"네?"
"아이들은 저랑 루아가 어떻게든 돌볼테니까, 그거 끝나면 좀 쉬어요."
"하지만, 원래 아이들을 돌보는 건 제 역할이었는데······."
"저희가 괜히 하스타를 따라온 게 아니잖아요. 이 정도는 맡겨주세요!"
"열심히 해볼게!"
나와 루아가 팔을 겉어부치는 시늉을 하며 하스타에게 말했다. 그러자하스타는 잠시 우리 둘을 바라보다, 이내 피식 웃으며 말했다.
"필요 없다고 해도 말 안 들을거죠?"
"당연하죠!"
끄으으.
하스타가 한 차례 고개를 숙이더니, 팔을 쭉 펴 스트레칭을 했다. 그리고 미소지으며 말했다.
"저 친구 참 잘 뒀어요. 그쵸?"
"후후, 친구 좋다는 말이 괜히 있겠어요?"
"그럼 부탁 좀 할게요. 고마워요, 둘 다."
하스타가 미소지으며 손을 흔들었다. 그리고 책상에 서류를 펼쳐, 숫자가 빼곡히 기입된 종이를 빠르게 훑어나간다.
"······하스타, 대단해."
아이들에게로 가던 도중, 루아가 하스타 쪽을 힐끔거리며 중얼거렸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저희도 열심히 해 볼까요, 루아?"
"응!"
루아가 자신의 풍성한 머리카락을 뒤로 묶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찰랑찰랑. 푸른 머리카락이 한 줄기로 흘러내리는 루아의 모습은, 폭포를 보는 것 마냥 아름다웠다.
"머리 끈 남는 거 있어요? 묶는거 편해보이네요."
"응. 묶어줄게."
"고마워요!"
루아의 손길에 머리카락을 맡겼다. 목덜미가 시원하게 드러나며, 한결 움직이기 편해졌다.
좋아, 준비는 만전이다. 이제 아이들을 돌보기만 하면 된다!
뭔가 이상하다.
분명 여기엔 열 네살 이하의 어린아이들만 있다고 하스타가 그랬는데.
"자, 자. 언니랑 놀자?"
"처음 보는 앤데. 우리 마을 애는 아니고······ 어디 마을에서 살다 왔어?"
"저, 저요?"
왜 내가 여기에서 애 취급을 받는거지?
"몇 살이야? 열 한살? 열 두살?"
"열 살일수도 있겠는데? 왜, 재스미랑 키 비슷하잖아."
"그런가?"
열 다섯살인데······?
사람은, 너무 당황스러운 상황에 직면하게 되면 말조차 제대로 나오지 않는다고 한다. 내가 그 상황에 봉착했음을 뼈저리게 느끼며, 루아 쪽을 바라보았다.
루아 역시 갑작스러운 상황에 맞닥뜨려서인지 나를 멍하니 바라볼 뿐 나를 도와줄 상태는 아닌 것 같았다. 나는 다시 나를 둘러싸고 있는 사람들을 바라보았다.
그녀들은 전부 나보다 큰 키를 가지고 있었다. 나보다 10cm정도가 큰 사람도 있었다. 마수의 습격이라는 변고를 겪었음에도 그녀들의 표정은 그리 어둡지 않았다.
문제는, 내가 이 곳에 발걸음을 들인 직후부터 계속, 이 세 사람에게 쓰다듬어지고 있다는 점이었다.
세로 구출된 아이냐는 둥. 귀엽다는 둥. 여동생 하나 가지고 싶었다는 둥.
그녀들은 나를 명백한 연하로 인식하고 있었다.
"저, 저기."
"응?"
그 때, 마침내 정신을 차린 듯 루아가 몸을 움찔거리며 의식을 각성했다. 그리고는 내 머리를 빗어주는 소녀에게 말을 걸었다.
소녀는 그제서야 내게서 시선을 떼었다. 루아는 그런 소녀에게 말했다.
"그 애 말인데······."
"응. 엄청 귀여워. 얌전하고."
"너도 이리 오지 그래? 두 사람 알던 사이로 보이던데."
"동화책 읽어줄게~"
내 옆에 공간을 만들며 루아에게 손짓하는 세 소녀. 루아는 그들의 반응에 다시금 몸을 굳혔다. 이 애들은 루아도 자신과 동갑이거나 한 살 아래로 보고 있음이 분명했다.
사실, 이 소녀들이 열 네살이라 한다면 충분히 이해가 가는 일이었다. 나는 4년간의 잃어버린 성장기 탓에 키가 열 한살 짜리와 비슷한 수준이다. 이 애들이 열 네살이라고 한다면 뭐 딱히 이상할 풍경도 아니지.
내 감성이 아무리 그래도 이건 아니라고 계속해서 신호를 보내고 있지만, 어쨌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