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85화 〉10. 검은 달 아래 (4) (85/86)



〈 85화 〉10. 검은 달 아래 (4)

한숨을 내쉬며 침대에 몸을 던졌다.


캄캄한 자취방의천장이 시야를 가득 덮었다. 어두운 천장은 가을 밤의 하늘처럼 그 높이를 가늠할 수가 없었다.


나는 꺼져있는 형광등에 손을 뻗었다. 닿을 턱이 없는 형광등을 향하는 매끄러운 팔과 길고 가느다란 손가락. 굳은살이 이곳 저곳 박혀있던 원래의 손과는 영 딴판이다.

위화감.

몸을 살짝 일으켜 아래쪽을 내려다보았다. 발이  보이지 않는다. 와이셔츠 단추 아래를 가득 채운  덩이의 살덩이가 시야를 가렸기 때문이다.


다시 한 번, 위화감.

지끈거리는 머리를 부여잡으며 신음소리를 내었다. 거칠고 탁한 목소리가 아니다. 곱고 가느다란 목소리다.


또 다시, 위화감.


'찌꺼기'에 불과한 내가 느껴서는 안 되는 감각에, 나는 눈살을 찌푸렸다.

"······아오, 씨."

벌떡 일어나 침대에 양반다리를 하고 앉았다. 길고 부드러운 머리카락을 헝클어뜨리며 리모콘으로 텔레비전을 켰다.


위즈 율릿의 모습이 보였다. 지난 6개월  단 한 번도 눈을 뗀 적이 없었던 아이다. 때로는 오글거리고, 때로는 철이 없는 꼬맹이지만, 때로는 당차며, 때로는 해맑은─ 곧은 꽃송이와 같은 소녀.

누구보다도 그녀를 곁에서 지켜보았기에, 나는 그녀가 점점 바뀌어가고 있음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그녀의 소중한 친구들도 눈치채지 못했으며, 자신마저도 깨닫지 못한, 미묘한 변화.


위즈 율릿이 진유을의 기억을 잃어가고 있다는 것을 말이다.

나를 가둬놓던 결계가 풀렸을 때 부터였다. 위즈 율릿을 구성하고 있던 진유을의 기억이 조금씩 내게로 돌아오기 시작한 것이다. 위즈 율릿은 진유을이 가지고 있던 기억을 떠올리지 못하기 시작했다. 위즈 율릿은 진유을의 경험을 잃었으며, 진유을의 과거를 잊고 말았다.

더 이상 이렇게 흘러가서는  된다. 위즈 율릿이 진유을의 기억을 잃고, 끝내 백합황녀의 기억마저 잃는다면, 정략결혼이라는 파국을 막아내지 못할지도 모른다.

나는 현관문을 바라보았다. 내 손으로 닫아놓았을 뿐, 언제든지 열고 나갈 수 있는 문이다.

한 차례 혀를 찼다. 내키지 않았으나, 백합황녀의 엔딩을 바꾸기 위해서는 내가 움직여야 했다.
신념을 굽혀서라도, 반드시.

창문에 막을 가려놓아, 어두워진 막사 안.

옹기종기 모여있는 아이들의 앞에 루아가 앉아있다.


루아는 공연을 준비하고 있었다. 강제로 보살핌받는 나를 구하기 위해, 루아가 마법을 보여주겠다고 아이들을 불러모았던 것이다.
그 덕분에 나는 떨떠름한 보살핌에서 벗어날 수 있었고, 지금은 루아의 옆에 앉아있다.

루아가 조금 긴장하며 주위를살핀다. 나는 그런 루아의 손을 잡았다. 루아는 조금 놀라더니, 이내 한 차례 심호흡을 하고 천천히 입을 열었다.


"흰  아래의 세메일♬"


언제 들어도 예쁜 목소리가 노래를 시작했다. 손으로는 환상마법을 만들어낸다. 어두운 막사 안에 하얀 달이 떠올랐다.


나는 달 아래에 꽃을 깔아둔다. 하얀 달의 빛을 받아 은은히 빛나는 샛노란 달맞이 꽃이다. 루아는 나를 따뜻한 눈으로 살짝 바라보더니, 싱긋 웃으며 노래를 이어부른다.

"달밤의 꽃이되어 피어났지♬"


달맞이  사이에서 아지가지한 사람의 형상이 작게 피어오른다. 정밀한 환상은 아니다. 하지만 어린아이들의 시선을 사로잡기에는 충분한, 귀여운 환상이다.
푸르게 일렁이는 사람의 형상. 루아는 그것을 양손으록 감싸며, 계속해서 아름다운 목소리를 낸다.


"첫 날에 마음을 얻고, 둘째 날에 자신이 누군지 깨달았지♬"

색이 덧입혀진다. 하얀색, 붉은색, 푸른색.

"삼일 되어 눈을 뜨고, 넷째 날엔 사랑을, 마음속에 그렸어♬"


그리고 검은색까지.
색을 받은 형상이 흰  아래를 날아다니기 시작한다. 아이들은  광경을 멍하니 바라본다.

"흰 달 아래의 세메일♬"
"첫째 정령왕 세메일♬"


천천히  달이 사라졌다. 그리고, 그 자리를 사람의 형상이 대신하며, 공연을 마무리지었다.






짧은 공연을 마친 루아는 한 순간에 스타가 되었다.


루아 자신도 조금 얼떨떨한지 내 쪽을 바라본다. 나는 그런 루아의 등을 떠밀며 머리 위로 꽃을 뿌려주었다. 하얀 백합 꽃송이가 루아의 어깨에 내려앉았다.

"꺄아~!"
"와아아!"

어린 아이들이 꽃을 펄럭이며 기뻐한다. 열 세살 쯤 된 남자애들은 유치하다며 관심없는 척을 하고 있지만, 제각기 힐끔힐끔 루아를 바라보며 얼굴을 붉히곤 한다.

나 참. 나이도 어린 애들이 우리 루아 예쁜 줄은 알아가지고.

꽃을 한 방향에 잔뜩 뿌려 남자들의 시선을 가로막았다. 그러자 루아가 마침내 얼떨떨한 표정을 지워버리고 배시시 미소지었다.
아흐. 돈을 내고 싶어질 정도로 귀여운 미소다.

"저렇게 예쁜 마법은 처음 봐······."
"학교에다니는 걸까?"
"부럽다······."

나를 귀여워하던 세 명의 소녀가 루아를 힐끔거린다. 선망을 담은 눈빛에, 루아가 당황해하며 내 쪽을 바라보았다. 이런 시선을 받아본 적이 없었다며 당혹스러워하는 루아.

나는 그런 루아의 손을 잡아 이끌고 그녀들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있는 힘껏 루아를 자랑했다.

"대단하죠, 우리 루아!"
"엄청 예뻤어요. 저기, 언니. 학교에 다니는 거에요?"
"응······."

루아가 조금 부끄러워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소녀들이 탄식하듯 부러움을 표출했다.

"나도 학교다니고 싶다~"
"언니는 어디 학교 다녀요? 에스파다? 즈레바? 파르나?"
"하비셜인데······."
"하, 하비셜이요?!"

소녀들이 깜짝 놀라 새된 비명을 질렀다. 그리고는 잠시 머뭇거리며 우리를 번갈아 바라본다.

"저, 저기. 그러면요. 혹시. 귀족이신게······?"

움찔.

루아가 몸을 떨며 내 눈치를 살핀다. 나는 순간적으로 머리를 굴렸다.


우리가 귀족임을 내보이는것은 그리 좋은 선택이 아니었다. 상황에서 우리가 귀족임을 밝힌다면 아이들에게 중압감을 주고 말 것이다. 우중충했던 분위기가 조금 풀린 이 시점에서 괜히중압감을 주고 싶지는 않았다.

그래서 나는 루아를 대신해서 대답했다. 순간적인 재치로, 성을 조금씩 변형해서 우리들을 소개한 것이다.


"이 쪽은 루아 소크라테스구요, 저는 위즈 율······ 무차? 에요?"


무리수였다.


"율무차······?"


아이들이 눈살을 찌푸리며 정말이냐고 되묻는다. 루아마저도 그건 좀 아니지 않냐는 듯한 시선을 보내온다.


하지만, 어쩔  없다. 내뱉은 말은 주워담을 수 없으니,  번 말한 것은 끝까지 밀고나가야 한다.

"네. 율무차."

 어느때보다 진지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아이들이 서로를 바라보며 조금 당황해하더니, 조심스럽게 묻는다.

"대대로 율무차라도 만드니?"
"가업이에요. 저희 집 율무차, 맛있다구요?"
"농담이었는데······."
"그, 그러니?"
"네"


진지한 표정으로 대답을 계속하자, 아이들의 표정이 아리송하게 바뀌었다. 이게 장난인지 진심인지구분을 못하겠다는 표정이었다. 무리수도 계속 던지다 보면 언젠가 통하는 법. 좋아, 이대로 밀고 나가자─

"위즈, 그만 하자?"
"네······."

안쓰러움을 가득 담은 루아의 제지에 울상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막사 밖으로 뛰쳐나가고 싶어졌다.



서류를 가방에 집어넣었다.

끄으으. 책상에 엎드려 허리를  번 폈다. 조금은 아리기까지 한 손을 한 차례 주무르며,고개를 돌려 막사 안에 있는 두 소녀를 바라보았다.

위즈. 그리고 루아.

그녀들을 바라보고 있다 보면, 하스타는 저절로 표정이 풀어지곤 했다. 교섭의 기본을배운 덕분에 나름 포커페이스에는 자신이 있었으나, 그녀들 앞에만 서면 왜인지 모르게 표정이 무너져버리는 것이다.


두 사람의 엉뚱한 성격 때문일까, 아니면 착한 성격 때문일까? 확실한 답은 내릴 수가 없다. 다만  가지 확신할 수 있는 것은, 하스타에게 있어 두 사람이 너무나도 소중한 존재라는 것이었다.


하비셜에서 만난 첫 친구.
그리고, 그 친구가 소개시켜 준,또 다른 친구.


하비셜에 적응할 수 있을 지에 대한 하스타의 불안감을 말끔히 지워버리며, 망설이고 있던 손을 이끌어준 고마운 아이들.


그런 아이들이 자신을 따라와준다고 했을 때, 하스타는 심장이 터져버릴 것 같았다. 그것을 내색하지 않기 위해 일부러 퉁명스러운 태도를 내보였지만, 사실  듯이 기뻐하며 그녀들을 꼭 껴안아주고 싶었던 것이다.


만일 이 속마음을 들켜버린다면 부끄러워서 심장이 터져버리겠지. 하스타는 쓰게 웃으며 자리를 정리했다. 그리고 막사 안으로 들어가, 위즈와 루아를 도우려고 발을 떼었다.

"······응?"


그런 하스타의 발을 멈춘 것은, 하늘에 작게 떠올라 있는 작은 구름이었다.


언뜻 먹구름처럼 보였으나, 하스타는 그것이 평범한 구름이 아님을 깨달았다. 하스타는 얼굴을 새파랗게 물들였다.

마기를 두른 구름. 마수를 잉태하는 재앙의 씨앗.

마운무가, 어린아이들이 모여있는 막사 바로 위에 나타난 것이다.

용병들을 부르기엔 이미 늦었다. 마운무가 천천히 내려오며, 마수를 만들어내기 시작했던 것이다.


막사 안에 있는 아이들을 최대한 대피시켜야 해.

"위,즈─"

하스타는 막사 를 향해 입을 열었다. 갈라진 목소리가 새어나왔다. 아이들이 떠드는 소리에 묻혀버릴 정도로 작은 목소리였다.

성대가 제대로 움직여주지를 않았다. 폐가 기능이 정지되어 버린 것 처럼, 공기의 흐름이 멈춰 목소리가 잘 나오질 않았다.


하스타는 이를 악물었다. 덜덜 떨리는 손으로 자신의 뺨을 세차게 때렸다. 하스타의 몸을 감싼 채, 그대로 굳혀버리려는 마기를 쫒아내야 했다.

"위즈······! 루아······!!"

마침내, 하스타가 친구의 이름을 입에 담았다. 목소리가 닿았는지, 위즈와 루아는 동시에 하스타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경악하며 하스타에게 달려오기 시작했다.


그녀들을 향해, 하스타는 다시금 입을 열었다.


도망쳐.


하지만 목소리는 새어나오지 않았다.


아니, 새어나왔는지에 대한 여부를  수가 없었다.


하스타가 입을 염과 동시에 괴성이 울려퍼졌기 때문이었다.


"────!!!"


마운무가 만들어낸 마수가 하스타의 뒤에 나타난 것이다.



하스타가 주저앉았다.
다리에 힘이 풀린 것 같았다. 나는 아수라장이  막사를 지나, 하스타에게 달려갔다.

하지만 나는 느렸고, 마수는 빨랐다. 내가 하스타에게 닿기 전에 마수의 발톱이 먼저 닿을  만 같았다.


"피어나라!!!"

마수를 향해 커다란 백합을 쏘아냈다. 시야를 가려, 조금이라도 시간을 벌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백합의 환영은 마수의 앞발에 허무히 찢겨버리고 말았다. 루아가 황급히 쏘아 낸 얼음 마법도 소용없었다.

"하스타아아!!!"

마침내, 하스타의 위에 마수의 발톱이 당도했고,
그대로 하스타의 머리를 향해─

"우와, 아슬아슬 한 거 봐."

내리찍으려다, 백합 꽃잎  장에 가로막혀 멈추었다.

"······어?"


나는 얼빠진 소리를 내었다. 마수에게 찢겨 흩날린 꽃잎 사이에, 사람 하나가 갑작스럽게 나타났기 때문이었다.

분홍색 머리카락을 허리까지 내린 채,  많은 백합으로 얼굴을 가리고 있는 여자.

"될 줄은 몰랐는데. 그래도 시험하길 잘 했네, 뭐!"

여자가 씨익 웃는다. 마수를 눈 앞에 두고도 여유로운 모습이다.

"누, 누구······?"

하스타가 떨리는 눈동자로 물었다. 그러자 여자는 잠시 멈칫 하고 나를 바라보다, 꽃잎을 허공에 손수 흩뿌리며 가슴을 내밀었다.


"─나로 말할  같으면,  많은 꽃봉오리를 지키며, 한 떨기의 백합이 피어나기만을 염원하는, 백합의 수호자!"
"······뭐요?"
"이름하야, 백화가면!"

 손에 백합을  채, 우스꽝스러운 포즈를 취하는 여자.
뭔가 본능적인 혐오감이 드는 모습이다. 한 세상에 동시에 존재해서는 안 될  같은 본능적인 위기감. 나는 눈살을 찌푸리며 그 여자에게 항의했다.

"누군진 모르겠는데요, 장난치세요?"
"적당히 흘려 들어, 대충 지어낸거니까."
"지어냈다뇨?! 엄청 수상한 대답이거든요?!"


내 말에 여자가 고개를 으쓱하며 하스타를 일으켜세운다. 하스타는 얼떨떨해하다, 여자의 얼굴을 확인하더니 눈을 크게 떴다.

"위, 위즈?"
"사람 잘 못 보셨습니다."
"뭐······ 꺄아악?!"

여자가 한 차례 손짓하자, 백합무리가 소용돌이치며 하스타를 우리 쪽으로 운반했다. 나와 루아는 하스타를 받아들면서도 여자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나한테 신경 쓸 여유없지 않아?"
"네? 아······!"

여자를 멍하니 바라보던 하스타가문득 정신을 차리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막사 밖으로 빠져나간 아이들도 있었지만, 겁에 질린 채 울고 있는 아이도 꽤나 많았다.


"이, 일단 아이들을 데리고 막사를 빠져나가죠!"
"응!"

루아가 대답하고, 하스타도 고개를 끄덕였다. 저 멀리서 여자가 만족스러운  고개를 끄덕이는 것이 희미하게 보였다.

우리를 구해준 사람이니까, 고마운 마음이 들어야  텐데.


스스로에게 놀랄 정도로, 왠지 모르게 기분이 나빴다.






Bad ending 4.Miscreance



"······제길!"

쾅.


세렌은 책상을 내리쳤다. 책상에 금이 가며 방이  차례 진동했다.


"자책한다고 달라지는  없습니다. 잘 알고 있을 텐데요, 세리나 바른?"
"알고 있다.알고 있지만······!"


무언가를 입에 담으려던 세렌은, 이내 말을 삼키곤 자신의 손에 얼굴을 파묻었다. 분한 듯 떨려오는 손. 메디아는 그런 세렌에게 잠시 팔을 뻗었지만, 이내 다시 팔을 거두곤 눈을 돌렸다.


혹여나 세렌과 시선을 마주쳤다간, 자신의 젖은 눈을 들킬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침묵이 방을 얼렸다. 분노와 슬픔이 뒤섞여 있는 침묵. 조금의 자극에도 폭발해버릴 위태로운 침묵이다.

"······세리나 바른. 그 모습으로 위즈의 앞에 나설 수는 없다는 것, 알고 있겠죠."
"그래. 알지. 알다마다!"


세렌이 언성을 높인다. 메디아는 그런 세렌을 그저 안쓰러운 눈빛으로 바라볼 뿐, 제지하지 않는다.
그것은 두 사람의 심정이 같기 때문이다. 메디아는 세렌의 분노에 공감했고, 세렌은 메디아의침착함을 이해했다.


"눈 앞에서 친우들을 잃은 위즈에게, 이런 못난 얼굴을 보여줄 수는 없지 않은가······!"

세렌이 금방이라도 무너질  같은 표정으로 중얼거린다.

위즈 율릿.

검은 달의 계절을 보내고 돌아온 두 황녀를 맞이한 그녀는, 예전처럼 생기발랄한 소녀가 아니었다.


총기를 잃은 눈. 굳게 닫힌 입.

두 사람의 마음을 따뜻함으로 채워주었던 소녀는 이제 없다.

가뭄 속에 메말라버린 꽃나무처럼, 위즈 율릿이라는 아이의 정신은 비틀리고 말았다.

그것을 막을  없었던 두 황녀는, 껍질만 남은 위즈 율릿의 잔재를, 어쩌지도 못한 채 바라볼 뿐이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