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6화 〉10. 검은 달 아래 (5)
나는 백합물을 좋아한다.
이유? 그런 걸 굳이 설명해야 할까. 굳이 이유를 찾자면, 그냥 내가 보기에 좋았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예뻤고, 반짝였고, 달달했다. 순수하고 풋풋한─ 나에게는 없는 새하얀 감성. 사람은 자신에게 없는 것을 갈구한다고 하던가. 옛 말은 정말 틀린게 하나도 없다.
백합물을 보기 시작하고. 지금까지 나왔던 백합물을 찾아보고. 새로운 백합물을 훑고.
시간이 지날수록 내가 읽은 백합물의 숫자는 많아졌고, 내가 읽을 백합물의 숫자는 줄어들었다. 무엇부터 읽어야 할지 고민하던 나는, 어느 순간 새로운 백합물을 갈구하는 좀비가 되고 말았다.
내게 백합황녀는 보물과도 같았다. 단 하루도 빠짐 없이 매일 연재되어, 하루하루마다 내게 활력을 주었던 활력소. 목마름을 채워주는 단비.
그런 작품이었기에 더더욱 백합황녀의 결말을 용납할 수 없었다. 성별이라는 장해마저 넘어서 이어진 사랑이 현실에 부딪혀 이뤄지지 못한다는 것을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사실 성인이 가지기엔 퍽이나 유치한 생각이다.
하지만, 유치하다고 해서 이 생각이 잘못되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래. 나는 백합을 좋아한다. 자신있게 말할 수 있다. 귀엽고, 풋풋하고, 사랑스러운─ 그런, 마음을 간질이는 감각을 사랑한다고 단언할 수 있다.
그렇기에 결말을 바꾼다. 그렇기에 꽃봉오리를 지킨다. 그렇기에─ 싱그러이 피어난 백합을, 내 두 눈에 담고 싶다.
앞을 바라보았다. 검게 일렁이는 마수들이 막사 안으로 들어오려 하고 있다. 불꽃이검게 칠해진 그것들의 모습은, 이 곳에 있는 모든 사람을 잡아 먹어버릴 것 처럼 흉흉한 기세를 내뿜고 있다.
이번에는 뒤를 살짝 바라보았다. 위즈와 루아, 하스타가 아이들을 대피시키고 있다. 무서움에 질려버린 아이들의 수만 대충 잡아도 열이 넘는다. 아이들이 전부 도망치기 위해서는 시간을 벌어야 한다.
위즈가 나를 바라본다. 순간적으로 인상을 찌푸리며 눈을 피하는 모습이다. 본능 레벨에서부터 시작된 적의가 나에게로 발산되고 있다.
예상했던 반응인지라 입꼬리를 씨익 올렸다. 그래. 그렇게 나와줘야지. 여자의 몸 속에 남성 인격을 숨기고 있는 나 따위, 백합물에 있어서는 안 되는 이단이니까.
비유하자면 그렇다. 진흙과 뒤섞인 눈이며, 은행열매로 뒤덮인 도로. ts된 남자 따위, 싱그러운 백합과는 비교할 수 없는 가짜 꽃이다. 사실 조화라고 말하기도 조금 그렇고······ 그래. 백합에 눈독을 들이는 꽃사마귀같은 느낌이지.
그런 생각을 하며 지금까지 스스로를 가둬두었다. 백합황녀의 전개를 비트는 데엔 위즈 율릿 만으로도 충분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아니다.
내가 백합이 될 수 없다 해도. 꽃사마귀라는, 백합을 흉내낼 뿐인 모조품일 지라도─
"백합에 서원한다."
한 마리의 꽃사마귀가 되어, 백합꽃을 노리는 벌을, 나비를, 파리를, 모조리 도륙해주겠다.
"내 영과 육을, 세상의 모든 백합을 지키는데 바치겠어!"
"으하하하하핫!!! 힘이, 백합이!!! 넘쳐흐른다아아앗!!!"
"뭐라는 거에요?!"
"응? 뭐야. 아직도 나한테 신경쓰는거야?"
"저랑 똑닮은 얼굴을 한 사람이 저랑 똑같은 목소리로 이상하게 행동하는데, 어떻게 신경을 안 쓸 수가 있어요?!"
"나는 그대, 그대는 나! 나는 그대의 마음에서 태어난 백합의 정령!"
"······정말요?"
"거짓말이 약 68% 포함되어 있습니다☆"
"반 이상이 거짓말이라는거 아니에요?!"
"오, 똑똑한데?"
"아 진짜, 저 여자 뭐하는 인간인지 모르겠어요······."
위즈는 머리카락을 쥐어뜯으며 이를 악물었다. 시야가 어질어질하고, 머리가 지끈거리기 시작했다.
원인은 물론 백합 꽃잎을 쏴제끼고 있는 여자였다. 그 여자는 위즈 자신과 너무나도 똑같은 외양을 가진 채 미친짓을 벌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백합을 더럽히는 분충은용서하지 않아욧!"
"제발, 제가 다 부끄러워지니까 그런 이상한 말 좀 안하면 안돼요?!"
"무슨 소리를 하는거야. 이렇게 텐션을 높여야 마법도 잘 나간다니깐? 수업시간에 배웠잖아? 마음 상태와 마력의 밀도는 비례한다고."
"으윽······!"
수업의 내용을 지적받자, 위즈는 할 말이 없어져 입을 앙다물고 여자를 노려보았다. 끼요오옷, 하고 괴성을 지르며 백합폭풍을 난사하는 여자. 스스로와 똑닮은 외모를 가진 사람의 미친짓을 봐야 한다는 것은 상당한 고역이었다.
"애들 대피는 다 시켰어요! 위즈 님, 괜찮아요?!"
하스타가 막사로 되돌아오며 말했다. 루아 역시 하스타의 뒤에서 위즈를 향해 달려오고 있었다.
이대로 가다간 저 여자의 미친짓을 친구들이 보게 된다.
상상만해도 끔찍해져서, 위즈는 손사래를 치며 두 사람의 접근을 막으려 애를 썼다.
"오, 오지 마세요!"
"응? 왜─"
"몸은 백합으로 되어있다! 피는 꿀이며 심장은 꽃봉오리! 수많은 꽃밭을넘어서도 불패! 으하하하핫!!"
멈칫.
"저, 저런거, 보지 마세요······!"
위즈에게 달려가던 두 사람이 할 말을 잃은 채 여자에게 시선을 고정시켰다. 백합 꽃잎 수십장을마수에게 칼날처럼 쏘아내며 광소하는 여자.
그 여자의 목소리가 너무나도 위즈의 것과 비슷했기에, 하스타는 결국 웃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
"크흡, 아하, 아하하하, 아하하하하!!"
"우, 웃지 말아요!!!"
"누, 눈을 감으면, 위즈가 말하는 것 처럼 들려서─ 아하하하!"
"하스으으타······!"
위즈가 거의 울 것 같은 눈망울로 하스타를 원망스럽게 바라보았다.얼굴은 이미 한계까지 새빨개져, 조금이라도 자극을 받았다간 터져버릴 것 만 같았다.
"······저 사람. 마력. 본 적 있어."
단지, 루아만은하얀 눈을 빛내며 여자를 노려볼 뿐이었다.
"누나! 있어?!"
"데이건!"
조금의 시간이 더 지나, 마수의 수가 급격히 불어날 때 즈음. 하스타와 똑 닮은 소년이 용병을 이끌고 막사로 도착했다.
데이건 비즈. 하스타의 둘째 남동생이자, 상인 가문에서 태어난 검사였다.
말안장에서 능숙하게 내린 데이건은 자신의 누나의 안위를 살폈다. 흙먼지로 엉망이었으나 외상은 없어보였다. 다만, 왠지 모르게 눈가가 새빨갛다는 점이 마음에 걸렸다.
"누나, 울었어?"
"울어? 아, 아하하, 울긴 했지!"
"······울었다면서 왜 웃어?"
"아하하, 웃겨서 울었거든!"
"읏지믈르그여······."
이를 악 문 목소리가 들려왔다. 데이건은 목소리의 진원지를 찾아 눈을 돌렸고, 그 곳에 무릎을 껴안은 채 원망스러운 눈으로 하스타를 바라보고 있는 위즈를 발견하게 되었다.
"······누나 친구분?"
"그래. 위즈님이라고, 율릿 백작가 따님이셔."
"안녕하십니까, 율릿 님. 비즈 가의 둘째, 데이건 비즈라고 합니다."
"······안녕하세요. 위즈 율릿이에요."
데이건의 인사에, 위즈는 울먹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다시 무릎 속으로 고개를 파묻었다.
"······왜 저러셔?"
"아니, 아하핫, 저기 좀 볼래?"
데이건은 무심코 하스타가 손짓한 곳을 바라보았다.
발육의 차이를 제외한다면, 위즈와 너무나도 똑닮은 여자가 그 곳에 있었다.
"아하핫, 백합에 잠겨랏☆"
이상한 소리를 마구 내뱉으며 꽃잎을 난사하는 여자가 말이다.
데이건은 순간적으로 얼어붙고 말았다. 인간의 이해를 벗어난 광기의 심연을 들여다본 자는 사고가 정지한다고 하던가. 데이건이 지금 그 상태였다. 시선만이 여자의 움직임을 쫓을 뿐, 몸을 움직일 수는 없었던 것이다.
조금의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데이건은 정신을 차렸다. 그리고 하스타에게 물었다.
"저, 저 분. 율릿 님과 쌍둥이야?"
"모, 몰라. 그런데 있잖아, 저 사람 되게 재밌지 않아?"
"정신이 살짝 아프신 분이 아닌가 하고······."
"그런거 같긴 해. 설마 저 행동을 제정신으로 하겠어?"
움찔.
여자가 제정신으로 그런 행동을 벌인다는 사실을 알고 있던 위즈는 하스타의 말에 뜨끔 하고 몸을 떨었다. 하지만 하스타는 그런 위즈의 모습을 알아차리지 못한 채, 웃으며 눈가를 닦았다.
"하으, 너무 웃어서 배아파······. 그나저나 용병단은? 데리고 왔어?"
"바깥에 있는 아이들을 안전한 곳으로 대피시키고 있어. 나머지 인원은 전투준비를 마친 뒤 대기하고 있어."
"마수랑 싸우라고 하지, 왜 대기시켜 놨는데?"
"너무 강한 마력이 감지되어서, 대체 무슨 상황인가 싶었지······."
"하긴,4석급 정도 되는 마수들을 저렇게 학살하고 있으니······."
"우리가고용한 용병단장보다 센 것 같아. 내가 데려온 용병이 도움이 될까? 예비부대라서 전투력도 조금 떨어질텐데."
"방해만 되겠네."
끄덕. 하스타가 고개를 위 아래로 흔들었다. 그리고선 다시금 큽, 하고 웃음보를 터뜨렸다.
"웃지 말라구요!"
"재밌는 걸 어떡해요, 위즈님~"
"몰라요. 하스타 나빠요."
위즈가 얼굴을 부루퉁히 부풀리며 고개를 홱 돌렸다. 하스타는 그런 위즈에게 다가가 은근히 어깨를 문지르며 말했다.
"리네스트 가서 맛있는거 많이 사줄게요?"
"정말로?"
"네, 정말로요."
하스타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하스타를 힐끗 바라보고 있던 위즈는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로젤릿 베이커리 걸로 사 줘요."
"우와, 큰 거 바라네요."
"안 사줄거에요?"
째릿.
위즈가 다시금 하스타를 흘겨보았다. 하스타는 그런 위즈를 껴안으며 위즈의 양 볼살을 매만졌다.
"아하하, 당연히 사줘야죠~"
"······안 사주면 절교할거야."
"네에~"
귀여운 투정에, 하스타는 자신의 표정이 풀어짐을 느꼈다.
"누나, 남한테 그런 표정도 지을 줄 알아?"
"응? 아, 뭐 위즈한테는 그렇지. 왜?"
"토나와서. 우웩."
"죽을래?"
으쓱. 데이건은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선 여자를 바라보았다.
확실히 미친 사람과도 같은 행동이다. 하지만 그녀가 움직이고 있는 꽃잎은, 하나하나가 예리한 칼날이 되어 마수들을 도륙해내고 있었다. 비록 우스꽝스러운 모습이었으나, 그녀의 강함만큼은 의심할 여지가 없었던 것이다.
비록 크기가 소형이라고는 하나, 재앙으로 취급받는 마운무를 홀로 막아낸 여자.
정말 대단한 솜씨였다.
"휴우, 재밌었다."
마운무가 완전히 걷히자, 여자가 머리카락을 휘날리며 막사의 안으로 들어왔다. 반대쪽 입구에서는 용병단이 대기중이었고, 위즈와 루아, 하스타, 데이건은 막사 안에서 여자를 기다리고 있었다.
"왜 모여있어? 나한테 상이라도 주게?"
여자가 너스레를 떨었다. 하지만, 그런 여자의 앞을 루아가 막아섰다.
"······가까이 오지 마."
"응?"
"가까이 오지 말라고 했어, 가짜 위즈."
루아의 하얀 눈이 시리도록 여자를 노려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