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2화 〉술은 알딸딸해질 때까지만 마셔라. (2/108)



〈 2화 〉술은 알딸딸해질 때까지만 마셔라.

"토끼구이 나왔습니다. 아마 오늘은 잘 구워졌을 거야."


오늘의 개밥이 나왔다.


악의없이 순수한 표정으로 쓰레기를 내미는 주인장의 얼굴에선 공포마저 느낀다.


얼마 전, 용사의 주문으로 처음 만들어 봤다는 주인장의 토끼구이.

주인장의 손에서 탄생하는 온갖 잡요리에도 '맛있다' 일색이던 용사도 '이건 좀..' 이라고 말하게 하는 수준의 물건이다.

그러나 자신의 삶의 방식을 굽힐 생각이 없는 용사는, 수없이 데이고도 정신을  차렸는지 혼자서 가게에 올 때엔 늘 토끼 한 마리를 잡아온다.

술도 요리도 공짜지만, 가게에 재료가 없는 요리를 주문하려면 재료는 자기가 직접 구해 와야 하기 때문이다.


"와아, 오늘은 맛있겠는걸. 잘 먹을게 아저씨."


확실히 오늘 고기는 때깔이 곱다. 노릇노릇한게 잘 구워졌다.


솔직히 맛은 둘째 치고 음식은 제대로 익혀서 나와야 하는  정상 아닌가?

주인장 기분에 따라 고기가 익었다 안 익었다 하는 게 새삼스레 정신 나간 가게임을 환기시켜 준다.


눈앞에 '예의상' 놓여있는 나이프와 포크를 가볍게 무시하고, 용사는 흰색 셔츠를 걷고 있었다.

하긴, 저만한 고기에 나이프와 포크를 들이대는 게  귀찮을  같긴 하다.

용사는 오른손으로 다리의 끝부분을 잡아 뜯고는, 기름기가 흐르는 다리 살을 큼직하게 베어 먹었다.


크기도 뭣만 한 토끼고기는 저 부분을 먹고 나면 먹을 게 더 있나 싶다.

"음~ 맛있어."


열 번에 아홉 번을 데여도, 그나마 먹을 만한 저 한 번의 존재 때문에 계속 주문을 계속하게 되는 걸까? 역시 탈출은 지능 순이다.


그건 그렇고 오늘은 왠지 모르게 한산하다.

이른 시간이라곤 해도 두 명이 전부라니, 다들 놈들은 어제 과음이라도 했나 보다.

술은 알딸딸해질 때 까지만 마시는 것이 정석인데 말이다.

 이상은 과음이다. 그리고 과음은 기억손실의 가능성을 동반한다.

 당시에 아무리 신나게 마셔도 기억이 나지 않는다면, 눈떠보니 머리만 아픈 미친 음료일 뿐이다.


머리 아픈 게 좋아서 그러는 거라면, 길바닥에 떨어진 돌멩이에 머릴 박는 게 돈도 아끼고 시간도 아끼는 길이니 참고 바란다.

"4번 아저씨."

조용한 실내에 용사의 목소리가 울렸다. 4번이라는 메뉴가 있었던가.


"4번 아저씨ㅡ!"

나는 그제야 내 테이블 번호가 4번인 것과 용사의 목소리가 내 쪽을 향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나보고 아저씨라고  건가? 초면에? 몇 천 살도 더 처먹은, 마왕하고는 친구라면서 나한텐 아저씨라고?


"왜."


 거지같은 기분이  녀석에게 잘 전해지도록, 낮고 거칠게 대답했다.

일반적인 지식이 있고, 매너와 에티켓에 대해 조금이라도 알고 있는 사람이라면, 이걸 '너랑 말  생각 없으니 꺼져.'  알아듣는다.


"아저씨는 맨날 가게에 오네. 술을 좋아하나봐?"


이놈들이 상식이 통했으면 이 고생 안한다.


"그런 것 치곤 맥주 밖에 안 마시던데?"


주인장이 대화에 끼어들었다. 취미로 빚는 술만 내놓아서 선택지도 별로 없는 주제에, 맥주만 마시는 걸 하수취급 하는 것 같아서 기분이 더럽다.

"나는 신나게 마실 수 있는 달달한 벌꿀주가 좋아. 맥주는 쓰기만   같아서 별로야."

니 눈앞에 있는 인간이 만들어서 그렇다.


"묘하게 배도 부른 것 같고 그치?"


니가 만들어서 그런 거다.


"다 같이 마시는데 뭔가 혼자만 안 취하려고 하는 것 같아서 야비해 보여."

너네처럼 마시면 물만 마셔도 취한다.

애초에 등신들의 9할이 맥주를 마시는데, 갑자기 맥주로 나에게 시비를 거는 건 심심해서인가? 아니면 내 화를 돋우는  자체가 목적인가?

믿기 힘들겠지만 이 가게에는 '무력을 사용하지 말 것' 이라는 단 하나의 규칙이 있다.

평생을 무력으로 살아온 놈들에게서 갑자기 그것을 빼앗아버리니 멀쩡하던 놈들도 이렇게 멍청해진 게 아닌가 하는 게  가설 중 하나이다.


아무튼 술집에서 분쟁이 없을  없으니, 무력을 쓰지 않는 선에서 이것저것  오다가 정착하게 된 것이 주량승부라고 한다.

즉, 내가 저걸 받아치면, 저놈들과 나는, 상대에게 주량승부를 걸 수 있는 명분이 생기는 것이다.


딱 보아하니 주인장은 손님이 나와 용사, 둘 밖에 없으니  게 없어서 심심하고, 용사는 혼자 마시려니 심심한 모양인데, 아무리 그래도 가게 주인이 심심하다는 이유로 자릴 비우고 술을 마실 수는 없는 노릇이니, 주량승부를 이용해 어쩔 수 없이 술을 마셨다는 이야기로 밀고 나가겠다는 생각이다.

하지만 어림도 없지. 순순히 이용 당해줄 내가 아니다.


조금만 더 있으면 다른 등신들이 모여들 시간이다.

같이 마실 등신들이 나타나면 이놈들도 날 포기하겠지. 그때 까지만 무시 하도록 하자.


그리고 약 한 시간 동안, 어떻게든 술을 마시고 말겠다는 주인장과, 혼자서는 절대 못 마신다는 용사의 처절한 재롱잔치가 시작됐다.

십분도 되기 전에 둘의 어휘력에 한계가 왔고, 말이 안 되면 몸으로라도 이 짓을 이어가겠다는 의지로, 머리를 흔들고, 혀를 내밀고, 방귀소리를 내고, 트림소리를 내며 들러붙었지만, 내 입에서 나오는 말은 '맥주 한잔 더' 밖에 없었다.


사람이 이렇게까지 무시를 당하면 화를 못 이기고 패버리거나 쪽팔려서 가게를 나가거나 둘  하나인데, 정말 뒤가 없는 사람들이다.

그리고, 마침내 구원이 찾아왔다. 등신 두 놈이 문을 열고 나를 구해주러 오고 있었다.

"오~ 마스터, 시트린 안녕. 근데 뭐하는 거야?"


평소엔 다른 자리에서  하든 신경도 안 쓰고 술부터 시키는 놈들이지만, 주문 받는 사람까지 이러고 있으니  녀석들도 궁금한가 보다.

"이거 봐. 이 아저씨 아무리 놀려도 반응을 안 한다?"


용사가 혀를 내밀고 머리통을 흔들기 시작했다.


"와, 진짜네."

"대단하다."

보통 이럴 땐, 왜 가만있는 사람을 놀리고 있냐 라는 반응이 자연스럽다고 생각하는데.

대체 왜  칭찬하는지 알 수가 없다. 칭찬만 하면 양반이지, 아마 이것들도 옆에서 한 번씩 따라 해볼 것이다.

"에벱베ㅔㅂ"

거봐라. 저걸 보니까 이제 대충 견적이 나온다.


이제 단념할 때다. 인간은 살다보면 오기로도 어떻게  수 없는 일이 있는 법이다.

쾅!


"그만! 알았으니까 그만해 이 새끼들아! 닥치고 가게에서 제일 센 술 가지고 뒤쪽으로 따라오라고."


나는 놈들이 그토록 원하는 주량승부를 선언해 주었다.

이 녀석들의 목적이 술 마실 사람을 구하는 게 아니라, 나를 도발하는 것으로 변질되었음을 확인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옆에서 같이 머리통 흔들고 있는 저 두 놈. 저 꼴을 보니 가게에 들어오는 놈들 전부  번씩은 머리통을 흔들어 재낄게 뻔하다.


저걸 몇 시간 동안 더 참느니 원하는 대로 한번 해주는 게 낫지.

생각해보니 어차피 보고서를 쓰려면 싫어도 이놈들이랑 한번은 접촉해야 한다.

그래, 그렇게 생각하도록 하자.

나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바로 뒤에 있는 테이블석으로 가서 앉았다.

주인장은 콧노래를 부르며 저장고로 내려갔고, 용사가 내 뒤를 따랐다. 멍청하게 머리통을 흔들고 있던 두 놈도 어째선지 합석했다.


"그럼, 술 올 때까지 우리끼리 통성명이나 하고 있을까? 난 시트린이야. 아저씨는?"


아니, 이름도 모르는 사람한테  시간동안 그 짓거릴 했단 소린가 이 여자는.


"내가 너보다 빨리 뻗으면 가르쳐 주도록 하지."

엿 같아서라도 안 가르쳐 준다.


너희는 여럿이서 술을 마실 수 있으니 목적을 이뤘다고 생각했겠지만,  목적은 진짜 승부다.

오늘  가게의 천장과 바닥 사이가 얼마나 넓은지 깨달게 해주마.

"좋아. 역시, 술자리엔 게임이 빠질 수 없지~"

쿵!


"자, 아마 이게 우리 가게에서 제일 센놈일 거야."

주인장이 가져온 술을 테이블에 내려놨다. 이 양반도 어지간히 술이 당겼던 건지, 술을 통 째로 가지고 왔다.


어차피 양조주 밖에 못 만들면서.

하지만 주인장이 뚜껑을 열자, 양조주에선 나올 수 없는 강력한 술의 냄새가 내 코를 타고 온몸을 향해 뻗어나갔다.

"미친, 이거 럼주잖아! 당신 만들 수 있었어?!"


맡은 것만으로도 뻑 가버리는 이 황홀한 냄새는, 석 달 동안 찾아 헤매던 럼주가 틀림없다.


"아, 저번에 누가 재료 갖다 주면서, 몇 통 구했다고 준거야. 왜, 못 마시나?"

"아니, 당장 까! 니들은 오늘 다 뒈졌어."


쓰레기 같은 술을 가져오면 어쩌나 싶었는데, 내  종목인 럼주다. 이걸로 붙는다면 가게 놈들 전부 덤비더라도 내가 이길 자신이 있다.

"하하, 아저씨 완전 신났네. 빨리 아저씨 이름 듣고 싶다."

"닥치고 빨리 술이나 따라."

이제 다른 건 상관없다. 3개월 동안 먹지 못했던 럼주를 마시고 싶을 뿐.


"자."


용사가 다른 등신들의 잔을 채워주고 마지막으로 내 잔에 술을 따랐다. 가득 따르지 않고 7할 정도만 채운, 평범한 술자리에서의 잔이다.


"이리 줘, 니 건 내가 따라줄게."

하지만 말했다시피 나는, 니 새끼들 전부를 죽이는 게 목적이다. 당연히 가득 차게 따른다.

"오~ 역시 승부다 이거지?"


용사가 웃으며 말했다. 일단 선빵은 내가 더 세게 쳤으니, 이대로 잔을 가득 채우는 흐름으로 가더라도, 내가 조금  마실 수 있다.


"좋아 그럼 건배하자고!"

등신 한 놈이 말했다.

-건배!

"자, 바로 다음 잔 받으시지."

3개월 만에 먹는 진짜배기 술이라 그런지, 평소보다도 도수가 세게 느껴진다.

술이 장기를 따라 내려가는 이 느낌, 이게 느껴지지 않고서 술이라는 이름을 가질 자격은 없다.


"오우, 빡세구만 이거."


"나디아 녀석, 이런 걸 갖다 주다니."

몇 잔이 지나자, 오만상으로 얼굴을 찌푸리는 주인장과 다른 등신들과는 다르게, 용사는 여전히 웃고 있는 얼굴을 유지하고 있었다.

"잡술만 마시던 놈이 꽤 버티는군."

"훗, 확실히 독한 술이긴 한데, 승부인 이상 질 수는 없지. 나는 용사거든."


"아니, 오늘은 지게  걸. 그것도 평범한 민간인한테 말이야."

"하하. 그건 두고 볼 일이지."

그때부터 나는, 이미 가득 찬 잔에, 넘치지 않을 정도까지 더 부어버리는, 이른바 '표면장력'이라는 기술까지 써가며 등신들을 압박하기 시작했다.


"으으으, 아무것도  먹었는데 토할 것 같아.."

아무것도 안 먹어서 토할 것 같은 거다.

이제야 용사의 얼굴이 좀 볼만해졌다. 등신 한 놈은 진작에 엎어졌고, 주인장과 남은 등신 한 놈도, 조만간 쓰러질 기색이다.

"맨날 쓰레기 같은 양조주만 먹는 놈들이, 나한테 이길 생각을 하다니. 이게 진짜 술이란 거다. 알겠냐? 빨리 잔이나 대."

"으으으..."

그렇게 시간이 지나고, 한통을 거의 비웠을 무렵.


쿵!

기억이 끊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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