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화 〉여자 앞에서 폼 잡는 건 제정신일 때 해라.
온 몸에 잔 상처들이 가득하고 오른팔을 잃은 남자를 보면 무엇이 떠오르는가?
다른 건 몰라도, 이 남자가 피바람이 몰아치는 전장에서 살아 돌아왔다는 건 한눈에 알아차릴 것이다.
들리는 말로는 고고학자들이 사족을 못 쓴다는 '조각'이라는 물건도 소유하고 있다고 하는데, 아무튼 이런 조건들만 보면 이 남자가 여러 사연을 품고 있는 백전노장으로 느껴질 것이다.
"야아 제리스! 빨리 술 더 갖고와아!!"
실상은 술 한 잔에 훅 가버리는 알코올 쓰레기다. 처음 봤을 때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제정신일 때의 모습을 본 적이 없는 미친놈이다.
저 흰머리의 이름은 '지크'.
믿기지 않겠지만 마왕 토벌대 출신이라고 한다.
100년 마다 선출되는 용사와, 그에 준하는 동료들로 구성된 마왕 토벌대.
그 목적은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마찬가지로 100년 마다 부활하는 마왕을 저지하고 그 목을 가져오는 것이다.
그러니까, 일단은 시트린의 선배라고 할 수 있는데, 용사는 아니었다고 한다. 토벌대 따까리 1, 2였겠지.
아무튼, 후배 사랑이 지나친 건지, 저걸 여자로 보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시트린이라는 이름만 들어도 달려와서 설쳐대는 모습이 아주 보기 역겹다.
"헤라나 왕국에서 온 오로넬씨! 안녕?"
"너 이새꺄, 너 시트린이랑 무슨 관계야!! 아앙!!!"
지금처럼 말이다.
카운터석 끝에서 내 자리까지 달려와서는, 하나 뿐인 팔로 자리를 치며 욕을 퍼붓는다. 하나 밖에 안 남은 팔, 의미 있는 곳에 사용했으면 하는 바람이다.
그나저나 그렇게 마시고도 며칠이 지났는데, 내 이름을 기억하고 있는 용사도 대단하다.
이쪽은 그걸 말해 준 사실 조차도 제리스한테 들어서 유추하는 수준인데 말이다.
그냥 그대로 까먹어 버렸으면 지금 내가 이런 상황에 처해 있지도 않았을 텐데, 굳이 그걸 기억해내서 민폐를 끼친다.
"지크 아저씨도 안녕. 오랜만에 같이 마실까? 오로넬도 잘 마시던데, 어때? 한잔 하자."
지금 이놈이 내 자리에서 하는 짓을 보고서도 같이 술을 권하는 건가?
계속 알아듣지도 못할 욕을 하고 있던 흰놈은, 용사의 합석제안과 동시에 정신을 차리더니 곧바로 의미 없는 파괴공작을 멈추고 용사의 테이블로 향했다.
대답을 하면 흰놈이 또 뛰어 올까봐, 나는 고개를 저어 대답을 대신했다.
그보다, 지금 내 옆에는 얼마 전에 주워온 데이린이라는 꼬맹이가 앉아있다.
애 달고 왔는데 술 권하는 용사놈도 그렇고, 술잔을 두 개 갖다 주는 주인놈도 그렇고, 일관성 있는 미친 짓에 술맛이 달아날 지경이다.
이 녀석이 있어서 그런지 오늘따라 제리스도 저장고에 가지 않고 얌전히 홀을 지키고 있다.
그러다 주방에 들어갈 일이 생기면 어김없이 이 녀석과 눈을 마주치려 시도했지만, 번번이 실패로 돌아갔다.
이 녀석의 관심은 온전히 먹을 것뿐이었기 때문이다.
주인장의 끝내주는, 아니, 끝내버리는 요리에도 굴하지 않고, 나오는 족족 음식을 먹어치우고 있다.
맛있다고 계속 먹어주니, 주인장도 은근히 기분이 좋은 모양이다.
용사의 권유를 받은 등신들이 테이블에 하나둘 모여들기 시작했다.
왜 저 녀석들은 용사한테 치근대도 괜찮고, 나는 오히려 용사 쪽에서 먼저 말을 걸었는데도 욕을 먹어야 하는 건지 알 수가 없다.
같은 등신들끼리는 괜찮다 이건가? 학창시절에도 당해보지 못한 왕따를 등신들한테 당하리라곤 생각도 못했다.
그래도, 한 가지 좋은 점은 있다. 아직 확실하진 않지만, 저 흰놈이 가게에 있으면 마왕이 나타나지 않는다.
뭐 마왕 토벌대와 마왕이니 서로 면식은 있겠지만, 딱히 그 이상 이유가 궁금하지는 않다.
어찌됐든, 가게에서 가장 멍청한 놈을 하루라도 안 볼 수 있는 건 좋은 일이기 때문이다.
그러고 보니 이 녀석은 조사 자료가 많이 부족하다. 애초에 멀쩡할 때가 없는데 어떻게 정보를 캘 수도 없다.
마왕 토벌대 출신이란 것도 용사한테 들어서 기억하고 있는 수준이니 말 다했다.
잠깐만, 그럼 이 새끼 나이가 대체 몇이지?
토벌대를 100년 단위로 뽑고, 용사보다 기수가 빠르다고 했으니..
최소 120살이라는 결론이 나온다.
그런데 지금 내 눈앞에 있는 저 인간의 껍데기는, 많이 쳐봐야 30대의 것이다.
그렇다면 역시, 조각인가 뭔가의 힘인가? 조각은 나도 실제로 본적이 없어서 뭐라 정확히 말할 수가 없다. 애초에 진짜 조각인지 아닌지도 모르고.
이럴 줄 알았으면 그때 좀 더 제대로 들어둘 걸 그랬다.
~
그래, 그건 분명 20대 용사인 시트린의 출정식을 위한 준비로 공사가 한창일 때의 일이다.
현장을 관리하던 감독관이 귀해 보이는 검을 발견했는데, 성실하게도 그것을 왕궁으로 가져온 것이 그것의 시작이었다.
그 검은, 지금의 검과는 상당히 이질적인 모양을 하고 있었는데, 수도에 있던 내로라하는 대장장이들에게도 감정을 의뢰해 봤지만, 제작 시기는 물론, 소재마저 파악할 수 없었다.
일류 대장장이들도 모른다고 하니, 왕놈도 그냥, '아, 존나게 옛날에 만든 물건인가보다.' 하고 평소처럼 왕좌에 앉아서 멍청하게 웃고만 있으면 될 것을, 자기 '직감'으로는 이 검이 '조각'이 틀림에 없다며 나에게 일을 떠맡겼다.
조각이란 말을 그때 처음 들었던 나는, '그게 뭔데' 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누가 제정신으로 왕의 면전에서 그런 말을 할 수 있겠는가. 그냥 알겠다고만 하고 나왔지.
아무튼, 오래된 물건 조사하는 데는 고고학자만한 놈들이 없다.
나는 빨리 일을 끝낼 생각으로 가장 가까운 곳에 살고 있는 아무 고고학자의 집에 찾아가서 검을 보여줬다.
"그래서 이게 조각인지 젓갈인지 그거인거 같냐?"
솔직히 그놈이 잘 모르겠다고 했으면 '고고학자들도 모르겠답니다.' 하고 바로 조사를 끝낼 생각이었다.
"와!! 조각!! 아시는구나!! 혹시 모르실까봐 말씀드리자면, 엄청 옛날부터 존재해 온 물건으로, 물건 하나하나마다 세상의 법칙을 뛰어넘는 신기한 힘을 갖고 있는데, 진.짜.겁.나.희.귀.합.니.다. 학계에선 전부 합쳐서 대략 50개 정도가 있을 거라고 추정하는데ㅡ."
근데 하필 찾아간 놈이 미친놈이었다.
솔직히 중간까지 듣고 있던 것도 그놈의 '조각'이 대체 뭔지 궁금해서였다.
뭐, 50개 밖에 없고? 그리고 뭔 법칙을 뛰어넘는? 아무튼 그까지만 들어도 충분한 것 같았는데, 이놈의 말이 끝나질 않는 것이다.
"그래서 이게 그거냐고. 그거만 말해."
나는 말을 끊고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아, 그거 말인데요, '조각'인지를 확인하려면 우선, 이 테스트를 해서 이 반응이 나오는지, 저 테스트를 하고 요 테스트를ㅡ."
"아, 때려쳐 미친놈아!"
미친놈의 집에서 뛰쳐나온 나는, 곧장 왕궁으로 가서 왕에게 이렇게 보고했다.
"이거 조각 맞답니다."
그 말을 들은 왕은, 자기 촉이 맞았다며 무릎을 치며 환호했고, 다른 대신들도 덩달아 신이 나서 춤을 췄다.
그 꼴을 보고, 아무튼 대단한 물건이라는 것은 제대로 알게 된 것이었다.
근데, 아직도 그것밖에 모른다.
세상의 법칙을 뛰어넘는다길래 무슨 짓을 할 수 있는지 궁금해서 왕실 도서관까지 뒤져가며 자료를 찾았는데, 그렇게 모은 자료에도 별로 건질게 없었다.
제일 중요한 능력에 대한 말은 없고 '아무튼 대단함'이 전부다. 조각을 가지고 있던 놈들도 어지간히 알려주기 싫었나보다. 쩨쩨한 새끼들.
~
"그러고 보니, 지크 아저씨도 조각 가지고 있었지? 나도 하나 가지고 있는데."
용사가 자기 허리춤에 있는 검을 두드렸다.
참고로 저 검이 내가 거짓으로 보고한 그 검이다. 그 뒤로 이런저런 일들이 있어서 용사의 손에 넘어가게 되었다.
하지만, 아직 본인도 사용해 본적 없는 모양이고, 그 이상한 테스트도 받지 않았으니, 조각인지 아닌지는 아직 아무도 모른다.
"그럼, 난 6개나 가지고 있다고."
흰놈은 취기 때문에 자꾸만 풀어지려는 발음을 간신히 붙잡으며, 용사의 앞에서 품위를 유지하려 애썼다.
내 자리에서 설쳤을 때부터 그건 이미 끝난 거라고 생각하는데, 저놈 생각은 다른가 보다.
그보다 6개라니, 아무리 용사 앞이라지만 자기가 전 세계에 있는 조각의 1할 이상을 가지고 있다고 하는 건가? 웃기는 소리를 하는 놈이다.
-오오오! 보여줘 보여줘!!
저쪽 테이블은 웃기지 않은 모양이다.
"훗, 오늘은 기분이 좋으니 특별히 보여주도록 하지. 하지만 만지지는 말라고? 이 녀석들 체력을 엄청나게 빨아먹으니까."
흰놈은 그렇게 말하며 테이블 위에 소지품들을 올려놓기 시작했다.
척 봐도 귀해 보였던 검이 제일 먼저 올라왔고, 그 뒤로 시간이 멈춘 회중시계, 어디 쓰는지도 모를 작은 정육면체, 하나 남은 왼팔의 약지에 고이 끼워져 있던 반지, 마지막으로 입고 있던 외투까지.
조각이란 놈들은 별의 별 물건으로 둔갑해 있나 보다.
그리고 산수 좀 배운 사람이라면 알겠지만, 이거 6개가 아니라 5개다. 저놈들은 개의치 않는 것 같지만 말이다.
"쓰는 거 한번만 보여주면 안 돼, 아저씨? 한번만, 한번마안."
용사가 떼를 썼다. 하마터면 잔을 던져버릴 뻔 했다.
그에 비해 흰놈은, 기분이 좋으면 그냥 활짝 웃어버리고 말 것이지, 쓸데없이 분위기를 잡겠다고, 애써 얼굴을 구기고 있다.
입꼬리는 올라가 있는데 눈은 찡그리고 있으니 예술 작품을 보고 있는 것 같다.
"어, 어쩔 수 없네에. 그, 그럼 하나만 보여줄게."
말과 표정관리를 동시에 이행하기엔 흰놈의 머리가 받쳐주지 않는가보다.
그나저나, 정말로 조각의 힘이란 걸 볼 수 있는 건가? 지금? 여기서? 보고서 수십 장은 날로 먹을 수 있는 일이?
역시 사람은 착하게 살아야 한다. 불쌍한 꼬맹이를 데려와서 보살펴 줬더니 이런 행운이 찾아오지 않는가.
흰놈은 테이블에 있는 물건들 중 반지를 집어 들더니, 가게에 있는 등신들을 둘러보기 시작했다. 가게에 있는 모두가 하던 것을 멈추고 그것을 지켜보고 있었다.
4번 자리에 앉아 있는 두 명만 빼고.
"이거 더 줘."
이 꼬맹이가 한동안 조용히 있나 싶더라니, 소스까지 핥아먹어서 새것과 다름없는 접시를 내밀며 같은 것을 내놓으라고 한다. 뭐지? 접시를 더 달라는 뜻인가?
"어이, 너."
꼬맹이에게 뭐라 되받아칠 새도 없이 흰놈이 나를 지목했다.
"그 접시를 나한테 던져봐라. 너한테도 특별히 조각의 힘을 보여줄 테니."
흰놈은 꼬맹이가 나에게 들이밀고 있는 접시를 가리켰다. 아무리 멍청해도 누군가의 음식이 담겨져 있던 접시를 던지라고 하지는 않을 텐데, 역시 이 녀석의 눈에도 새 접시로 보이는 보양이다.
"야! 접시가 내꺼지 니꺼냐!"
부엌에서 잠자코 듣고 있던 주인장이 식칼을 든 손으로 삿대질을 하며 말했다. 가게와 관련된 일이라 진지하게 말해서 그런지, 잠깐이지만 이 양반이 정상인으로 보였다.
"걱정하지 마. 이거 하다가 부서진 건 다 새걸로 바꿔 줄게."
"어~ 하던 거 계속해~"
새걸로 바꿔준다는 한마디에, 다시 평소의 주인장으로 돌아왔다. 아무튼, 가게 밖에선 다들 대단한 놈들이라 그런지, 돈 만큼은 썩어 넘치나보다.
"그래서, 이걸 니 머리통에 던지면 되는 거냐?"
나는 꼬맹이가 들이밀고 있는 접시를 집어 들었다. 상대의 동의하에 폭력을 행사할 수 있는 기회는 그리 흔치 않다.
"그래, 그걸 던지면 내 몸에 접시가 닿기도 전에 그 접시가 깨질 거다. 이 조각의 힘이지."
흰놈이 다시 용사 쪽으로 몸을 돌리며 말했다. 이쪽을 보지 않고도 접시를 막아내는, 그런 멋진 모습을 보여주고 싶은 모양이다.
그보다, 접시에 맞아서 머리가 깨져도 복구되는 능력이 아닌 거냐.
그럼 이건 그저 흥을 돋우기 위한 역할일 뿐이지 않는가. 등신들의 유흥거리가 되는 건 마음에 들지 않는다.
어차피 누가 던져도 상관없는 것 같으니 꼬맹이에게 접시를 쥐어줬다.
그리고 대충 던지라고 할 차에, 이 녀석을 닥치게 할 방법이 떠올랐다. 나는 꼬맹이의 귀에 대고 이렇게 말했다.
"저놈 머리 맞추면 아까 그거 더 시켜줄게."
흰놈은 용사에게 멋진 모습을 보여줄 수 있으니 좋고, 나는 보고서에 쓸 내용도 얻고, 꼬맹이의 '더 시켜줘' 공격에서 벗어 날수 있으니, 이것이야말로 모두가 이득을 볼 수 있는 최상의 선택지이다.
"그러니까 이 반지로 말할 것 같으면, 눈앞에서 쏘는 화살도 막을 수 있ㄴ.."
철푸덕!
그때, 가게에는 두 가지 소리만이 들릴 뿐이었다.
접시가 흰놈의 머리통에 닿아 박살이 나는 소리와, 강한 충격에 중심을 잃은 흰놈의 몸뚱아리가 바닥에 처박히는 소리가 그것이었다.
"어?"
놀랍게도 가장 먼저 의문을 표한 건 용사였다.
어울리지도 않는 떼를 부려가며 얻어낸 관람권인데, 저 꼴이 난다면 누구라도 어이가 없을 것이다.
"됐지?"
모두가 적막에 휩싸인 가운데, 꼬맹이가 무덤덤한 표정으로 이쪽을 쳐다봤다.
분명히 흰놈이 엎어지기 전에, 눈앞에서 날아오는 화살도 막을수 있다는 식으로 말하고 있었던 것 같은데, 거짓말을 한게 아니라면 이 녀석이 활 보다 빠른 속도로 접시를 던진게 된다.
이 녀석의 나이대에 맞지 않는 악력과, 암벽에 부딪혀도 상처 하나 없었다던 제리스의 목격담 등을 감안 해 봤을 때, 불가능 하진 않아 보이긴 하다.
"시킨 대로 했잖아. 빨리 아까 그거."
애써 무시하고 있었는데, 내가 계속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자, 꼬맹이는 양손으로 내 팔을 잡고 흔들기 시작했다.
대체 여기 있는 수십 가지 쓰레기 중에 뭘 처먹었길래 더 시켜달라고 이 지랄을 하는지 모르겠다.
나는 눈앞에 일어난 일을 이해하는 게 급선무란 말이다.
"보아하니 좀 전에 우리 데이린이 먹은 음식이 뭔지 기억이 나지 않는 모양이군요 오로넬씨."
제리스가 갑자기 끼어들었다.
얼마 전에 꼬맹이의 이름이라도 가르쳐 달라고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애원하길래, 어쩔 수 없이 가르쳐 줬더니, '우리' 같은 소리나 지껄이고 있다.
"우리 데이린이 방금 전에 먹은 건, 바로 토마토 비프 스튜였다구요! 제가 없었으면 어쩔 뻔했어요? 그치 데이린?"
제리스가 역겨운 미소를 지으며 꼬맹이에게 친한 척을 했다.
"그럼 빨리 그거 한 접시 더 가져오고, 3초 안에 내 눈앞에서 꺼져."
나는 계속해서 들러붙으려는 변태를 경멸하는 눈빛과 파리 쫓는 손짓으로 격퇴하였다. 저놈한테 맞는 취미는 없는 게 천만다행이다.
"나 쟤 싫어."
변태가 주방으로 사라지자 꼬맹이가 소신발언을 했다.
"나도."
이제 맥주도 거의 다 비웠고 기대했던 조각 건도 저 꼴이 났으니, 오늘은 더 이상 건질게 없을 것 같다.
이 녀석의 접시 세척이나 보고 귀가 하도록 해야겠다.
"예에~ 건배!"
-건배!
용사의 테이블에서 요란스러운 건배 소리가 들려왔다.
지들끼리 노는 건 좋은데, 왜 아무도 저기 엎어져 계신 분의 뒤처리를 하지 않는 건지 모르겠다.
구석진 곳에 옮겨 놓지는 못하더라도 생사여부는 확인해 줄 수 있다고 생각하는데. 가게 한가운데에 깨진 접시와 함께 내버려두니 쪽팔려서 일어날 것도 못 일어나고 있는 것 아닌가.
바닥에 흥건한 눈물이 저 녀석들에겐 침으로 보이는 모양이다. 아무튼 전후사정이야 어찌됐든, 등신들의 기대를 배신하면 어떻게 되는지는 덕분에 잘 알게 됐다.
"더 시ㅋ.."
"간다."
더 시켜 달라고 말 하려는 꼬맹이의 입을 막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설마 했는데 이렇게 먹고도 더 먹고 싶다고 할 줄이야. 먹는 족족 똥으로 싸고 있는 것은 아닌지 의심되는 수준이다.
꼬맹이도 자기가 많이 먹었다고는 생각하는지, 내가 일어나자 별다른 저항 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는 두고 가는 물건은 없는지 확인한 다음, 용사가 있는 테이블로 향했다. 가게에서 나가기 전에 한 가지 확인하고 싶은 것이 있다.
"어이쿠!"
나는 흰놈에게 걸려 넘어지는 척을 하며, 용사가 먹다 남긴 과일이 담겨져 있는 접시를, 테이블 아래에 있는 흰놈의 머리로 떨어뜨렸다.
저 반지가 진짜 조각인지 확인하기 위해서이다.
만약 머리에 맞는다고 해도 어쩔 수는 없지만, 적어도 이 녀석이 좋아하는 용사가 쓰던 접시를 떨어뜨려 줬다.
자, 빨리 떨어져라.
머리로 깨든, 조각의 힘으로 깨든, 접시가 깨지는 것은 필연적인 사항이다.
그렇다면 확인해야 할 것은, 접시가 머리에 닿느냐, 닿지 않느냐다.
넘어지는 척을 하고 다시 일어나려 하는 지금 이 자세가, 그것을 확인하기에 가장 알맞은 높이이다.
쨍그랑!
"..읏!"
흰놈의 몸이 살짝 떨렸다. 눈물로 얼룩진 바닥에 불그스름한 액체가 스며들었다.
결과는 나왔다.. 라고 생각한 순간이었다.
"괜찮아. 오로넬?"
"괜찮긴 한데, 이것 좀 어디로 치워라. 넋 놓고 가다가 걸려 넘어졌잖아."
"미안, 미안. 지금 치울게."
그제야 용사는, 흰놈의 다리를 잡고 가게의 가장 구석진 곳으로 끌고 갔다.
흰놈이 질질 끌려 지나간 자리에는 붉은 얼룩이 남아, 돌아올 길을 표시해 주고 있었다.
그 얼룩을 눈으로 쫓고 있던 나는, 그것을 발견하고야 말았다.
얼룩의 시발점이자, 저 녀석이 뻗어 있던 곳, 그곳에 덩그러니 놓여있는 반지를 말이다.
끼지도 않았잖아 미친 새끼가.
상대가 언제 접시를 던질지도 모르는데, 뒤돌아서 설명까지 하고 있길래, 당연히 끼고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이러고 있는 줄 알았으면 내가 던졌다. 가게에서 등신 한 놈을 줄일 수 있는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
"병신."
나는 한숨을 쉬며 가게를 나왔다.
가게 끄트머리에서 잘 가라는 용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요즘, 저놈 때문에 가게에서 등신들의 주목을 받게 될까봐 걱정이다.
가뜩이나 이 꼬맹이 녀석을 달고 다니게 되면서 묘한 시선이 느껴지는데 말이다. 아, 이건 제리스인가.
아무튼 더 이상의 주목은 첩보원으로서 위험한 일이다.
가게 놈들의 지능으로 내 신분을 알아챌 일은 없겠지만, 앞으로는 눈에 띄지 않게 행동 하도록 해야겠다.
"내일도 올 거야?"
꼬맹이가 물었다. 집에 갈 때마다 이 소리를 한다.
"그래. 내일도, 모레도, 내일 모레도, 맨~날 와야 된다. 쉬이벌."
터덜터덜 산길을 내려가며 대답했다.
이 녀석은 내일도 여길 오는지 궁금한 모양이지만, 나는 내일도 여길 와야 하는지 궁금하다.
틈틈이 보고서를 왕국으로 보내곤 있지만 왕국에서의 답신은 한통도 오지 않는다.
사실 이건 임무가 아니라 좌천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가끔 들곤 한다.
"그럼 내일도 그거 시켜줘."
이 녀석은 '그거' 하나로 세상 만물을 다 표현할 수 있는 줄 아는 모양인데, 당연히 나는 '그거'가 뭔 줄 모른다.
먹고 싶으면 제리스한테 부탁하시던가. 그럼 뭣 같아서라도 외우겠지.
"그래~. 많~이 처먹어라~"
대답을 들은 꼬맹이의 표정이 밝아졌다. 비꼬아서 말한 건데, 말 그대로 알아먹은 모양이다.
역시 모른다는 것은 행복한 것이다. 그것으로 인해 곤경에 처하기 전 까진.
돌멩이를 발로 차며 걷다보니 어느새 숲을 빠져나와, 산 중턱에 이르렀다.
구름 한 점 없는 밤하늘이 눈앞에 펼쳐졌다.
별빛 하나는 존나게 아름다운 곳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