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화 〉모르는 사람이 아는 척을 할 때는, 적어도 세 번은 무시해라.
'낄끼빠빠'라는 말을 아는가?
낄 곳에 끼고 빠질 곳에서는 빠지라는 말의 줄임말이다.
요컨대, 어울리는 곳에서 어울리는 짓을 하라는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보면, 이 가게에 있는 놈들은 다들 낄끼빠빠 하나는 잘 하는 놈들이다.
등신이 운영하는 가게에 등신들이 와서 등신같은 얘기를 하고 있으니 말이다.
그런데, 온 자리를 돌아다니면서 과학이니 철학이니 영문도 모를 개소리를 하고는, 수준이 안 맞는다며 신경질을 내고 있는 저 여자.
저 여자는 확실히 낄끼빠빠를 좀 할 필요가 있다.
목 까지 오는 파란색의 짧은 머리에, 허벅지까지 오는 흰색 가운, 그리고 입에 물고 있는 '담배'.
생긴 건 멀쩡한데 하는 짓이 제정신이 아닌걸 보니, 가게는 제대로 찾아 온 것 같은데, 뭐가 마음에 들지 않는지 모르겠다.
"아니, 왜 이런 것도 모르는 거야! 여기 진짜 전설의 술집 맞아?"
전설의 술집 소문의 피해자인 모양이다. 그게 의심되면 초라한 입구를 보고 돌아갔어야지, 무시하고 들어온 니 잘못이다.
이제 앉을 생각인건지 내 차례가 온 건지, 여자가 앞머리를 쓸어 올리며 카운터석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제발 애 달고 술집 오는 미친놈이라고 생각하고 아무 말도 걸지 않았으면 좋겠다.
난 그저 조용히 앉아서 이놈들이 씨불이는 쓰레기 같은 정보만 얻어 가면 된단 말이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 뭘 물어봐도 틀릴 수 있도록 머릿속으로 연습 하고 있어야겠다.
다행히 여자는 내 쪽을 한번 쳐다보기만 하고 얌전히 자리에 앉았다.
역시 멀쩡한 사람이 보면 애 달고 술집 오는 건 미친놈으로 보이는가 보다.
나도 이 술집 아니면 이런 짓 안했다. 애초에 여길 안 왔으면 이놈을 줍지도 않았지.
"마스터, 여기 맥주 한잔."
"예~ 갑니다."
그래도 술 취향은 맥주라서 다행이다. 다른 술을 시켰으면 분명 여기엔 있지도 않은 술이었을 것이다.
"토마토 비프스튜 더 줘."
"예~"
단어를 기억하는 법을 확실하게 배운 꼬맹이는, 이젠 주문도 혼자 잘 하게 되었다.
역시 무언가를 가르치는 일은 사람을 뿌듯하게 한다.
그건 며칠 전의 일이었다.
"어서옵쇼."
그날은 좀 이른 시간에 가게에 갔다. 사람이 적은 편이 꼬맹이 교육에도 편할 것 같아서이다.
"맥주 한잔."
"예~."
여느 때처럼 4번 자리에 앉아 맥주 한잔을 시켰다. 안주는 시키지 않는다. 맛이 없기 때문이다.
"그거 시켜줘. 그거."
내 것만 주문하자, 예상대로 꼬맹이가 소매를 잡아당기며 말했다.
마침 이 녀석 대신 주문해 줄 제리스도 자리에 없다.
오늘의 맥주 주문은 내가 처음이라, 저장고에 있는 맥주를 가지러 갔기 때문이다.
"야, 이제 니가 알아서 시켜 먹어라. 넌 입이 없냐 귀가 없냐."
"그치만, 그거 이름 몰라."
"그러니까, 모르면 물어보라고."
나는 입과 귀를 가리키면서 말했다. 꼬맹이는 그걸 멍하니 쳐다보고 있었다.
"그거 이름 뭐야?"
꼬맹이가 나에게 물었다. 이놈하고 말할 때는 주어를 확실하게 붙여줘야겠다.
"나 말고, 메뉴 알고 있는 놈한테 물어봐야 될 거 아냐."
그때, 저장고에 내려간 제리스가 술통을 들고 올라왔고, 곧바로 맥주 한잔이 내 자리 위에 올라왔다.
나는 꼬맹이에게 저놈한테 물어보라는 뜻으로 제리스 쪽으로 턱을 움직였다.
신호를 알아챘는지 꼬맹이의 표정이 썩어 들어갔다. 말은 못 알아먹으면서 이런 건 잘 알아먹는 놈이다.
"나 쟤 싫어."
"니가 먹을 거니까, 모르면 니가 알아서 해야지."
그렇게 말하고 맥주를 한 모금 마신 나는, 꼬맹이에게 들리게 '캬아' 소리를 냈다. 욕구를 자극하기 위해서이다.
"이제 제대로 외울 테니까 가르쳐줘."
꼬맹이가 끈질기게 소매를 잡아당기며 말했다. 이렇게까지 제리스를 싫어하다니, 나 없을 때 저 변태놈이 무슨 일이라도 저질렀었나? 불쌍한 새끼.
"근데 있잖아. 크흐흫."
아, 이걸 말하려니 웃음이 나왔다. 꼬맹이는 소매를 잡아당기던 것을 멈추고, 내 입에서 나올 말을 기다리고 있었다.
"나도 그게 뭔지 몰라. 흐흫흐흐."
넋이 나간 꼬맹이의 표정에 터져버린 나는, 이마에 손을 짚고 한참을 웃었다. 정신을 차리니 꼬맹이가 말없이 노려보고 있다.
근데 계속 노려본들 지가 뭐 어쩔 건가. 나는 진짜 모르는데.
나는 눈물을 닦고 꼬맹이의 양 어깨에 손을 얹었다.
"나도 가르쳐주고 싶은데 모르는 걸 어떡하냐, 응? 한번만 딱 참고 갔다 와라. 대신 오늘은 너 그만 먹을 때 까지 기다려 줄게."
무제한 식사권까지 받아내고 나서야, 꼬맹이는 똥 씹은 표정으로 제리스에게 향했다.
그렇다고 곱게 가진 않았고, 몇 걸음에 한 번씩 뒤를 돌아서 나를 노려보기를 반복했다.
꼬맹이의 목소리가 작아서 뭐라고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제리스가 펄쩍뛰며 좋아한걸 보니 꽤나 서비스 한 모양이다.
아무튼 원하는 것을 듣고 자리로 돌아오는 동안에도 나를 계속 노려봤던 꼬맹이는 토마토 비프스튜를 주문하고 나서야 원래의 멍청한 표정으로 돌아왔고, 그날을 기점으로 '그거' 라는 말이 꼬맹이의 입에서 나오는 일은 없었다.
담배 냄새가 내 자리로 스멀스멀 풍겨왔다.
이 여자는 왜 하필 많고 많은 카운터석 중에 내 옆자리에 앉아서 이딴 걸 빨고 있는지 모르겠다. 오늘은 나 말고 아무도 카운터석에 앉아 있지도 않은데 말이다.
"응?"
담배 연기를 따라가다가 여자와 눈이 마주쳤는데, 뭔가 놀란 표정을 짓는다. 나는 아무렇지 않게 다시 고개를 돌렸다.
저 응? 은 무슨 의미지? 보통, 모르는 사람이랑 눈 마주쳤을 때 응? 이라는 말이 나오던가? 뭔가 아는 사람을 오랜만에 만났을 때 나오는 반응이 아니던가?
"저기, 당신 혹시 마가리스 마법부에서 일한 적 있지 않아?"
적어도 저쪽은 그런 모양이다.
그런데, 가게에 있는 등신들한테 시비라는 시비는 다 걸어놓고 나랑 아는 사이라고?
지랄도 정도껏 해야지. 내가 반갑다고 하하호호 술이라도 마셔줄 줄 알았나? 설령 아는 사람이라 해도 너는 남이다.
다행히 저 여자도 확신은 없는 모양이니, 그냥 아니라고 잡아떼야겠다.
애초에, 나는 진짜로 기억에 없는 여자다.
"아니."
그보다 이 여자, 뭐하는 여자지?
마가리스 마법부는 수수께끼 투성이인 마가리스에서도 가장 깊은 곳에 숨겨져 있는 최고기밀 기관이다.
일반인들은 그 이름도 괴담 같은 것으로만 접할 뿐, 그곳이 무엇을 하는 곳인지조차 알지 못한다.
내가 거기 잠입했던 것은 물론, 거기에 있었다는 사실조차도, 그 당시의 마법부에 있었던 인간이 아니라면 알 수가 없다.
나는 몇 년 동안, 거기에 박혀서 마법부 전원의 정보를 수집했지만, 이 여자의 얼굴은 본적이 없다.
"그래? 뭔가 낯이 익은데."
앞머리를 쓸어 올리며 여자가 말했다. 머리 몇 가닥이 다시 이마를 향해 내려왔다.
"그럼, 마가리스에 가본 적은 있어?"
"아니."
"부모님이 마가리스 사람이라던가?"
"아니."
이런 부류를 상대할 때는, 묻는 것에 대해 부정적이면서 짧은 말로 대답하는 것이 좋다.
확실한 기억이 없어, 머리를 쥐어짜내서 질문하는 상대의 말을, 1초 만에 쳐내는 것이 중요하다.
그럼 짜증나서라도 말 안한다. 실제로 이 방법을 쓰다가 쳐맞은 적도 있다.
"사람 잘못 봤겠지."
나는 대화가 이 이상 길어지기 전에 선수를 쳤다.
상대가 더 할 말이 있었다고 해도, 이 말을 먼저 뱉어 버리면, 웬만한 확신이 없는 이상 닥치게 된다.
이 말 속에 '니가 찾던 사람 아니니까 꺼져'라는 의미가 내포 되어있기 때문이다.
내 말을 들은 여자의 표정이 갑자기 진지해졌다. 여자는 거의 다 피워가는 담배를 깊게 빨아들이고는 이렇게 말했다.
"마가리스 마법부 개발과, 등록번호 017986."
"..."
저건 내가 연구원 신분으로 마법부에 잠입했을 때 소지하고 있던 출입증에 적혀있던 내용이다.
그걸 떠올리니 머릿속에 뭔가가 번뜩였다.
한낱 연구원의 출입증까지 외우고 있고, 내가 잠입했던 시기에 마법부에 있었으며, 나에게 얼굴을 보이지 않은 인물.
생각해보니 딱 한명, 거기에 부합하는 인간이 있었다.
"너무 오랜만이라 자기 출입증에 뭐가 적혀 있었는지도 까먹은 거야? 이름까지 불러줄까?"
여자가 휴대용 재떨이에 담배를 지지며 말했다.
"글쎄, 그때 쓰던 이름이 뭐였지. 시..안 이었나? 시..유? 아, 기억났다. 시오."
나는 내 이름 대신, 마법의 도시 마가리스의 상징이자, 마법부의 수장인 대마법사의 이름을 불렀다.
"뭐야? 내 정보까지 털어갔었어? 내 자료에는 비밀번호가 걸려 있었을 텐데 대단한 걸?"
마법사가 웃으며 대답했다. 참고로 비밀번호는 1111이었다.
"그래도 얼굴은 방금 털렸잖아. 이게 제일 중요한 거라고."
나는 적당히 장단에 맞춰 줬다. 멍청한 놈만 아니면, 나는 꽤 신사적인 사람이다.
이 여자의 이름은 시오.
마법의 도시이자 그 자체가 국가인 마가리스에서 없어선 안 될 존재, 도시 내의 어떤 행정기관의 간섭도 받지 않는 마법부의 수장, 대마법사라고 불리는 과학자이다.
본인은 스스로를 과학자라고 칭하지만, 저명한 과학자들조차도 구조와 원리를 이해 할 수 없는 이 녀석의 이론과 발명품들은, 마법이라고 밖에 표현할 수단이 없댄다.
그래서 나도 그냥 마법사라고 부른다. 본인 입으로 아직 한 번도 연애를 해 본적이 없다고 했으니, 엄연한 마법사긴 마법사다.
"그래서, 마가리스에 없어선 안 될 놈이 여기서 뭐하고 있는 거냐."
마법부의 수장이 없어도 마가리스는 돌아간다.
하지만, 도시의 7할 이상이 이 녀석의 기술, 마법이라고 불리는 것으로 만들어진 시설들이니, 고장이 나도 고칠 능력을 가진 인간이 없다.
도시가 할 수 있는 것은, 이 녀석의 귀환을 기다리거나, 도시가 점점 무너져 가는 것을 구경하는 것뿐이다.
"좆같아서 도망쳤어."
그럴 줄 알았다. 하여튼 여기 오는 놈들은 다들 제멋대로다. 마가리스는 지금쯤 비상이 걸렸겠지.
대체 얼마나 좆같은 이유길래, 부족한 것 하나 없이 하고 싶은 연구만 주구장창 할 수 있는, 과학자라면 누구나 꿈꾸는 자리를 박차고 나왔단 말인가?
"아니, 옛날에는 내가 뭘 하던 다들 닥치고 따라왔거든? 근데 요즘은 이건 왜 이렇게 되고 이건 어떻게 작동하는 거냐면서 막 캐묻는 거야, 제대로 알아먹지도 못하는 것들이. 그것 때문에 작업 속도 늦어지는 게 짜증나서 그냥 나왔지."
질문충들 몇 명 때문에 도시 하나가 망하게 생긴 것 같다. 그놈들도 자기가 원인인 줄은 꿈에도 모르겠지.
"충동적으로 도시를 나오긴 했는데, 어디 갈만한데가 딱히 안 떠오르는 거야. 그때 마침 이 술집 얘기를 듣고 이렇게 온 거지."
왜 그 소문은 이런 놈들 귀에만 들어가는 건지 모르겠다.
"전설의 술집이라길래 기대하고 찾아왔는데 죄다 말도 안 통하는 멍청이들이잖아."
내 말이 그 말이다.
"그래도 아는 사람이 한명이라도 있어서 다행이야. 적어도 혼자서 마실 일은 없겠네."
마법사가 술잔을 내밀었다. 건배를 하자는 뜻이다.
나는 오른손으로 들고 있던 술잔을 왼손으로 바꿔 쥐고, 홀로 들이키며 중지를 내밀었다.
내가 같이 마셔줄 거라고 너무 당연한 듯이 말하는데, 지금 이 녀석은 저 놈들보다 엮이기 싫은 분뇨 덩어리다.
"나 같은 지식인보다 저런 멍청이들이 더 좋다는 거야? 앙?"
"아, 아! 잠깐만, 잠깐만, 잠깐만!"
마법사가 내 중지를 붙잡아 이상한 방향으로 꺾으면서 물었다.
나는 남아있는 왼손을 동원해서 필사적으로 마법사의 손이 움직이지 못하게 막았다.
이 방향으로 더 움직였으면 손가락에서 화산 폭발이 일어나는 것을 봤을 것이다.
"후, 이게 부탁하는 사람의 태도인가? 마가리스 지식인들은 일단 줘 패고 보나보지?"
오른손을 돌려받은 나는 무차별 공격에 나섰다. 이건 차라리 잘된 일이다. 이걸 빌미로 같이 못 마시겠다고 뻗대면 그만이니.
"부탁이라니! 술 정도는 같이 마셔줄 수도 있는 거잖아!"
"내가 여럿이서 마시는 게 싫을 수도 있잖아? 그런 사람이랑 같이 마시고 싶으면 부탁을 해야지 멍청한 년아."
"뭐? 멍청? 하! 지금 너랑 대화하고 있는 게 세상에서 그 단어와 가장 거리가 먼 사람이란 건 알고 그런 말을 쓰는 거야? 너야말로 멍청한 놈이네."
'멍청한 년' 한마디에 저렇게 발끈하다니, 저 녀석한테 꽤나 가성비가 좋은 욕인 것 같다.
"아, 맞네. 내가 멍청한 놈이었네."
"이제 알았어? 등신, 쪼다."
한번 져주는 척 하니까 의기양양해 지기는. 똑똑하다는 것 치곤 아주 다루기 쉬운 녀석인 것 같다.
"멍청한 놈이랑은 술 안 마신다고 했지? 수고해라."
나는 이제 할 말은 끝났다는 뜻으로, 나가라는 듯이 손을 저었다.
"아, 아, 잠깐만, 잠깐만. 내가, 내가 잘못했어. 내가 멍청했어! 한번만 봐줘! 이제 동대륙으로는 못 돌아간단 말이야! 여기서 영원히 혼자 술만 마실 순 없어어어."
마법사가 땅바닥에 주저앉아 내 팔을 잡아당기며 떼를 썼다. 이런 각오로 왜 혼술은 못하는 건지 모르겠다.
"아니, 나 진짜 멍청해. 지금 니가 뭐라고 하는지도 모르겠어."
오른팔을 잡고 있는 마법사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마법사는 억울한 듯이 나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1 더하기 1은? 하나, 둘, 셋!"
마법사가 기습적으로 질문을 했다.
이런 문제는 저놈들도 충분히 맞출 수 있는 것이다. 갑작스럽게 하는 이유는 일부러 틀린 답을 말하지 못하게 하기 위해 생각할 시간을 주지 않으려는 거겠지.
"3."
하지만 아까부터 연습하고 있던 나한텐 통하지 않는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생각한다."
"빨간색과 노란색을 섞어서 나오는 색은?"
"파란색."
이건 빨리 못 맞추는 문젠데?
멍청한 척도 생각보다 기분이 나쁘지 않다. 내 자신을 깎아내린다기보다는, 저 녀석을 엿 먹인다는 점에서 말이다.
"지랄하지 마! 일부러 틀리고 있는 거잖아!"
마법사가 일어나서 삿대질을 했다. 앉아 있었을 땐 몰랐는데, 생각보다 키가 작다.
"진짜 모르는 건데."
나는 어이없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날 우습게 보는 모양인데, 니가 마법부에 잠입했을 때부터 나는 이미 너에 대한 모든 조사가 끝나 있었다고."
"어쩌라고."
갑자기 기고만장해 하길래 나도 모르게 꼽을 줘버렸다. 공격이 제대로 들어간 건지, 마법사의 손가락이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니가 첩보원이라는 걸 알아도 이 가게에서 널 받아줄 것 같아?"
고작 한다는 협박이 저거라니, 여길 너무 과소평가 하는 것 같다. 이놈들은 첩보원이 뭔지도 모를 텐데 말이다.
"어~이 주인장. 나 첩보원인데 여기서 술 마셔도 되지?"
"고럼 고럼."
나는 마법사의 면전에 손가락을 튕겼다.
회심의 협박이 통하지 않자, 다시 주저앉아 버리는 마법사였다. 이제 한대만 더 때리면 울 것 같다.
이대로 울리는 것도 재밌겠지만, 등신들의 시선도 있으니 오늘은 관둬야겠다.
생각해보니 이 녀석이 앞으로 여기에 계속 올 작정이라면, 어차피 보고서를 써야 한다.
그렇다면 차라리 옆에 두고, 보고서 채우기 용으로 쓰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
하도 일이 거지같다 보니, 이 정도 임기응변에는 도가 텄다.
"야, 그럼 조건 두 가지가 있다."
"뭐? 같이 마셔 주는 거야? 뭔데?"
다시 한 번 벌떡 일어나는 마법사, 혼술이 대체 뭐라고 이러는 건지.
그보다 아까 혼자 맥주 시켜서 잘 마시고 있었잖아.
"일단 저 등신들한테 뭐라고 씨불이고 다닌 거 전부 사과하고 와. 제대로 대가리 박아서."
이 녀석과 아는 사이였다는 게 확실해진 지금, 이 녀석에게 이유도 없이 욕을 먹은 저 녀석들이 나까지 어떻게 할지 모르니, 사과를 시켜서 일단 안전한 상태로 만들어야겠다.
어차피 저놈들이니 사과하면 봐줄 거다. 화도 안 났을지도 모르고. 만약을 대비해서다.
"당장 갔다 올게!"
마법사는 곧바로 다른 테이블을 향해 달려가서는, 자기가 등신취급 하던 놈들한테 머리를 숙였다.
이래서 사람이 말보다 생각이 많아야 하는 거다.
"쟤 뭐하는 거야?"
꼬맹이가 물었다. 옆에는 하얗게 새척된 접시들의 탑이 있었다.
"사람이 생각나는 대로 말을 씨불이면 저렇게 되는 거란다. 너는 생각이 많은 꼬맹이가 되려무나."
턱을 괴고 마법사를 바라보며 말했다. 꼬맹이가 납득하듯이 흐음 하고 작은 소리를 냈다.
"허억, 허억. 갔다 왔어. 남은 하나는 뭐야?"
마법사가 거친 숨을 내뱉었다. 사과할 사람이 많으니까 지치지. 가게 한 바퀴를 전부 돌면서 시비 걸고 다닌 이 녀석도 대단한 놈이다.
"마지막 조건은 '럼주 없이는 나한테 말 걸 생각도 하지마라' 다. 알겠냐?"
같이 마시는 것도 충분히 짜증나는 상황인데, 술까지 이 모양이면 수지가 맞지 않는다. 럼주 정도면 충분히 타협할만한 여지가 있다.
어차피 이 녀석도 돈이야 썩어 넘칠 정도로 있을 테니, 이 정도 지출은 지출 축에도 안 낄 것이다. 이 조그만 마을에서 달리 돈을 쓸 일도 없고 말이다.
"럼주면 술 말하는 거 맞지? 여기에 없어?"
"그래, 그러니까 내가 이딴 거나 마시고 있지."
나는 그렇게 말하며 잔에 남아있는 마지막 한 모금을 비웠다. 마법사는 가만히 서서 무언갈 곰곰이 생각하고 있다.
"아무튼, 오늘은 늦었으니까. 다음에.."
"아, 그 술이구나! 지금 바로 갔다 올게!"
"야, 야!"
내 말을 다 듣지도 않고, 이번에도 마법사는 엄청난 속도로 달려갔다.
술을 사오려는 모양인데, 마을까지 내려갔다가 여기에 다시 올 시간이면 가게 문을 닫고도 남을 시간이다.
역시 머리에 든 게 많아도 그걸 쓰는 법이 중요한 것이다.
아무튼 난 필요한 만큼 말렸다.
내일 아침에 이 산에서 뭔가 발견 된다고 해도, 나와는 전혀 무관한 일이다.
술통에 '오로넬에게' 같은 거만 안 적혀있으면 말이다.
꾸물거리다간 다시 올라오는 녀석과 만날 수도 있다는 생각에, 오늘은 밤하늘을 구경할 새도 없이 빠르게 산을 내려왔다.
마을로 내려오자마자 도망치듯이 여관으로 향했기 때문에, 마을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는 확인하지 못했지만, 늦은 시간인데도 불구하고 묘하게 소란스러웠던 것은 어렴풋이 기억난다.
다음날, 일련의 소란에 대해서는 조사할 필요도 없었다.
아침을 먹으러 내려간 식당에서도 들을 수 있을 정도로 소문이 퍼졌기 때문이다.
판매가의 몇 십 배나 되는 돈을 들고 와서는, 마을 내에 술을 취급하는 모든 곳에서, 럼주란 럼주는 모두 털어 가버린 미친 여자의 이야기가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