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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화 〉애들 놀이가 더 무서운 법이다 [2] (9/108)



〈 9화 〉애들 놀이가 더 무서운 법이다 [2]

"잡았다!!"

아무런 망설임 없이 앞장서서 걷는 제리스의 팔을 향해 달려들었다.

어리석게도, 녀석의 몸에 접촉하기도 전에 승리선언을  버리고 말았지만, 녀석이 어떻게 해볼 수 있는 거리가 아니었다.

이미 내 손은 녀석에게 닿기 직전이었으니까.


그럴 터였다.


그러나 제리스는 예언이라도 한 듯, 간발의 차로 내 손을 피했다.

언제부터 눈치를 채고 있었는지는 모르지만, 아직 거리는 유효하다. 계속 쫓으면 충분히 잡을 수 있다.


"허억, 역시 오로넬씨가 술래였던 거군요? 허억, 하나 알려드릴까요? 저는 처음부터 오로넬씨 뒤를 따라다니고 있었다구요."

쫓기고 있으면서 잡담까지 하다니 여유가 넘치는 놈이다.


"대답도 안 하시는 걸 보니 많이 힘드신가 보네요? 그래서야 저한테 술래를 넘기실 수 있겠어요?"

눈밭을 뛰는 것도 충분히 지치는데, 눈에 가려진 나무 밑동마저 발을 걸어댄다.

"앗..!!"


그리고 기어이 밑동 하나가 날 넘어뜨리고 말았다.

몸을 일으키려고 해도 힘이 들어가질 않는다. 흰놈 때 너무 열심히 도망친 탓인가, 남은 힘이 하나도 없다.

평소라면 지구력이든, 속력이든,  정도는 아닌데, 전부 눈 때문이다.


눈밭에서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채로, 시간만이 흘러갔다.

땀이 식어간다.


몸이 싸늘해진다.


눈이 쌓인다.

시야가 흐려진다.

나는.. 이제 어떻게 되는 거지.

"아~ 여기 계셨네요."

의식이 희미해져 가는 중에,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언제부터 이렇게 되신 거에요? 저 혼자 한참 달리다가 왔잖아요. 이렇게 보여도 체력은 자신 있거든요. 뭐든 체력이 제일 중요하다더라구요."

뭐라고 중얼거리는 거지 이 사람.

"아, 일단 살려드려야겠죠? 술래잡기 하다가 죽기라도 하면, 신께서도 곤란할 거니까요."


무겁던 몸이 가벼워졌다.

"저기요?  치워드렸는데요? 오로넬씨?"


몸이 흔들렸다.

"이거 위험한 건가? 잠시 실례 할게요."

정신을 차리고 보니, 제리스가 뺨을 때리고 있었다.

짝! 짝!


"아, 아! 깼어, 깼어. 그만 때려!"


"제가 누군지 알아보시겠어요?"

물어 보면서도 계속 때리고 있는 제리스였다.

"제리스, 제리스. 변태새끼 제리스!!"


제리스의 팔을 잡으며 외쳤다. 처맞은 얼굴이 후끈해서 추위마저 확 가셨다.


"다행이다. 돌아오셨군요. 하마터면 시체 처리까지 해야 할 뻔했잖아요."


"니가 다시 죽이려고 했지만 말이지."

그래도 덕분에 살았으니 때리는  참았다.

"아, 그보다 지금 저 잡으셨네요?"

이 새낀 죽다 살아난 사람 앞에서도 술래잡기 타령이다.

"맘대로  시발. 거지같은 술래잡기, 더는 못해 처먹겠다."

술래잡기를 하다가 죽을 뻔하다니, 여기서는 평범한 놀이조차도 이렇게 되는 건가.

"일단 10초 셀게요."

제리스는 나를 나무에 기대어 놓고, 일어나 숫자를 셌다.

"..아홉, 열."


숫자를 다 센 제리스는, 몸을 풀기 시작했다.

"뭐하냐, 너."


"사실, 전 술래가 하고 싶었거든요. 아무 생각 없이 보자기를 냈는데, 오로넬씨만 빼고 전부 보자기를 낼 줄은 상상도 못했어요."

운이 좋은 건지  좋은 건지 모를 놈이다.

"그러면 왜 시작하자마자 나한테  뛰어왔냐? 아까는 왜 도망쳤고."

"아, 그건.. 제가 술래가 되고 싶은 건 맞는데, 생각해보니 오로넬씨가 이렇게 뻗어 계시는 게 저한텐 더 좋을  같아서요."

그 말을 듣고 이 놈이 하고 싶은 게 뭔지 단번에 알아차렸다.


"허허."

 꼬맹이에게 집적대 보겠다고 이렇게까지 하는 제리스를 보니 헛웃음만 나왔다.


"진짜 징하다 너도."

"에이,  정도 쯤이야 뭘."

"칭찬 아니다."


"아."


"그래. 한  해봐. 한 번은  봐야지? 니 대갈통이 깨지는 게 먼저일지, 꼬맹이를 잡는  먼저일지 한 번 해 보라고."


"참고로 그 꼬맹이 존나 세다. 여기 올라오는 길에 무너진 돌무더기들 있지? 그거 그녀석이 주먹으로 무너뜨린 암벽이거든? 알아서 잘 생각하라고.  뒤져도 책임 안 질 거니까."

"그래도  멈출 수는 없을 겁니다. 그렇게 정했거든요."

제리스가 돌아섰다.

"그럼, 먼저 가보겠습니다!!"


그 말을 마지막으로, 제리스는 자신의 가슴이 가리키는 곳을 향해 달려갔다.


문장만 두고 보면 멋진 말 같기도 한데, 저 녀석이 하려고 하는 짓을 생각하면 범죄 성명문이 따로 없다.


"야~ 저거 괜찮은 거야? 완전 변태새낀데?"


"넌  거기에 있는 거냐?"


누운 채로 위쪽을 바라보자, 나무에 매달려 있는 마법사가 보였다.

"왜긴, 여기 숨어 있었으니까지."


"그럼 내가 뒤져가고 있던 것도 다 보고 있었냐?"

"응."

"너 내가 못 움직이는 걸 다행으로 생각해라. 아니었으면 진짜 앉은뱅이로 만들어 버렸을 테니까."

"에이, 진짜 위독했으면 바로 내려왔지. 아까 그 친구가 잘 하길래 가만히 있었던 거야."

마법사가 나무 아래로 내려왔다.


"근데 진짜 못 움직이는 거야? 이렇게 건드려도?"


마법사의 발이 옆구리를 툭툭 쳤다.

"아무 느낌도 안나. 몸에 힘도 안 들어가고."


"오오, 진짜, 진짜? 그럼 이렇게 꼬집어도? 때려도?"

"구라지 이년아!"


깝죽대는 마법사의 목을 붙잡았다. 마법사는 몇  켁켁 거리더니 이내 항복의사를 밝혔다.

"하, 진짜 이제 그만하고 싶은데, 그만하면  되냐?"

마법사의 목이 생각보다 따뜻했다. '손 시리니까  좀 더 조르게 해 줘' 같은 말을 하면 처맞겠지?

"그러게, 생각보다 뛰기도 힘들고 무대가 너무 넓네."

결국에 제일 많이 뛴  나인 모양이다.

"그만 한다 해도, 이 놈들을 다 찾아야 그만둘  아니냐."


"그러게."


"그러게가 아니라 찾을 방법이나 생각하라고."

"어, 저기 두 명 찾았다."


"뭐? 어디?"


마법사의 손끝이 가리키고 있는 곳에서, 눈을 흩뿌리며 이쪽으로 달려오고 있는, 두 개의 형체가 보였다.

"데이리이이인ㅡ! 오빠랑 놀자ㅡ!"

변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저런 결과도 예측하지 못  건 아니지만, 눈앞에서 실제로 보니 솔직히 역겹다.

꼬맹이가 엄청난 속도로 옆을 지나쳐 갔고, 그 여파로 강풍이 불며 주변의 눈밭을 헤쳐 놓았다. 제리스는 바람이 그칠 때 쯤 나타나, 그 뒤를 쫓았다.


"일단 저놈들은 어디서도 찾을 수 있을 거 같으니까 남은  놈부터 찾자."

"그럴까."


마법사와 나는, 어딘가에 뻗어 있을 흰놈을 먼저 찾기로 했다.


돌아다니고 있을 용사보다, 엎어져서 움직이지도 못하는 놈을 먼저 찾는 게 더 빠르기 때문이다.

"나무밖에 없으니 어디가 어딘지  수가 없네."

술집에 갈 때야 그저 직진만 하면 됐는데, 방향을 잃으니 어디로 가야 할지도 잘 모르겠다.


"어? 저거 아니야? 저 끈, 아까 내가 묶어 놨던 거잖아."


"그럼 여기서 왼쪽으로 가야 되냐, 오른쪽으로 가야 되냐?"


끈의  방향에서 온 마법사와 나는, 왼쪽으로 갈지, 오른쪽으로 갈지를 선택해야 했다.


아까보다 눈이 더 쌓여서, 육안으로는 흰놈이 있는 위치를 파악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빨리 과학의 힘으로 어떻게 해봐."

"여기서 과학으로 뭘 어떡하란 건데? 그냥  군데  파봐야지 뭐."


"추워 죽겠는데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는 걸 찾을 때까지 파보자고? 그것도 맨손으로? 자, 따라 해봐. '생각을 하고 말하자'"


열 받은 마법사가 몸싸움을 걸어왔다.

몇 분의 실랑이 끝에야, 몸싸움에서 말싸움으로 넘어갈  있었다.

"그러는 너는 확실한 방법이 있냐고! 말해봐! 조금이라도 납득  되면 보자."

마법사가 으름장을 놨다.


"그 전에 말이야. 눈이 이렇게 쌓였는데, 이 정도로 오래 방치해두면 죽는 거 아니냐?"

"어."


"'어.'가 아니지 이 새끼야. 이거, 니가 죽인거지? 니가 놓은 함정에 걸려서 죽은 거지? 나는 아무것도 안했다?"

"잠깐만! 이건 널 도와주다가 일어난 일이잖아. 그러니까 너한테도 책임이 있지!"

"언제? 내가 언제 도와달라고 했지? 기억이 없는데? 애초에 그 함정도 나한테 쓸려고 했던 거 아니었냐?


"이게!!"

마법사가 내 멱살을 잡고 흔들었다.


"으악! 살인마가 날 죽이려고 한다! 살려줘! 날 죽인다고 니 죄가 없어질  같아? 아니, 오히려 더 늘어날 뿐이야! 지금이라도 속죄하고 싶다면, 당장 자수해!"

들은 척도 하지 않고 마법사는 하던 일을 계속했다.


"야, 잠깐만, 잠깐만!!"

마법사의 팔을 급하게 두드렸다. 뭔가, 뭔가 이상한 느낌이 든다.


"여기 이렇게 더웠었냐?"

"말 돌리지 마, 이 새끼야!"

"아니, 아니. 이거 봐. 눈이 녹고 있는데?"

눈은 계속 내리고 있는데, 마법사와 나의 주변에는, 내린 눈이 쌓이지 않고 오히려 녹아내려가고 있었다.


"어..? 저.. 저거..!!"

마법사가 소리쳤다.

마법사의 손끝을 따라, 녹고 있는 눈을 따라갔다.

그곳엔 죽은 줄 알았던 흰놈이, 두발을 딛고 서있었다.


"시발.. 귀신 아니야?"

"조용히 해 봐! 여기로 오잖아!"

마법사와 나는, 그 녀석이 이쪽으로 걸어오는 것을 그저 바라만 봤다.


터벅 터벅


흰놈이 가까워질수록 열기가 더 강해졌다. 자세히 보니 흰놈의 가슴 부근에 푸른색으로 빛나는 뭔가가 있었다.


흰놈이 내 앞에 멈춰 서자,  빛이 희미해지더니, 이내 열기도 사라졌다.


"뭐하는 놈들이냐 너희들."

-예?

뭐라는 거지 이 인간.

"이 숲은 길을 잃기 쉬워서 위험하다. 따라와라 출구까지 안내해주마."


"ㅁ, 뭐? 뭐라고? 너 뭐라고 했냐?"


"따라. 오라고."

"..."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파악하기도 전에, 길을 모르는 마법사와 나는, 다짜고짜 앞으로 향하는 흰놈의 뒤를 따를 수밖에 없었다.

"야, 그래서 저거 누구냐? 같이 술래잡기 하고 있던 놈이 아닌데?"


흰놈에게는 들리지 않게 작은 소리로 마법사에게 말했다.

"내가 어떻게 알아? 여기 온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넌 아무것도 몰라?"

"나야말로 저렇게 멀쩡한 인간을 보는 게 몇 달 만인지 모르겠다고! 이거 혹시 그거냐? 저놈 몸은 이미 죽었는데, 다른 사람 영혼이 들러붙었다거나 그런 거냐?"

"영혼 같은 소리 하고 있네. 좀 논리적인 대답을 해 봐라. 과학 몰라, 과학?"

"그럼 저걸 어떻게 설명할건데? 눈에 초점도 안 맞던 새끼가 저렇게 올곧은 눈으로 걸어 다니고 있는 게 믿기지가 않는다고!"

"혹시, 그때 끈에 걸려 넘어지면서 머리를 세게 부딪힌 건 아닐까? 그거 때문에 일시적으로 정상인으로 돌아온 거지."


"보통 머리를 다치면 비정상이 되지 않나?"


"정상인이 다치면 비정상이 되는 거지. 니가 저 사람 병신이라며?"


"내가 언제 병신이라고 했냐? 그냥 좀.. 좆같다고 했을 뿐이지."


"응? 무슨  있나?"


멀쩡한 흰놈이 멀쩡한 질문을 멀쩡하게 물어봤다.


"아, 아니. 아무 일도 없어."

마법사가 대답했다.


"그래, 조금만 더 가면 되니 힘내라."


"으, 응."


"근데 다른 놈들은 어떡해? 이거, 계속 따라가다간 우리만 마을로 내려가겠는데?"

듣고 보니 그렇다.

"난 챙겨야 될 꼬맹이도 있다고. 니가 한번 부탁해봐. 같이 온 친구들이 있다면서 찾아 달라고 해. 난 역겨워서 못하겠다."

"아, 알겠어. 해볼게."

그냥 해본 소리였는데 마법사가 의외로 흔쾌히 받아들였다.

"저기."

"음? 왜 그러지?"

"사실 우리 말고 일행  명이 더 있는데, 그 사람들도 같이 좀 찾아줄 수 있나 해서."


"세 명이나  있다고? 너희들은 대체  시간에 여기서  하고 있던 거지?"

'너까지 포함해서 술래잡기요' 라고 말해 봤자 내가 미친놈 취급당하겠지.


"어.. 그게.."

마법사가 이쪽을 봤다. 나보고 대답 하란 뜻이다.


"이 위에 있는 술집에 가려고."


"아, 거기 말인가. 용케도 알고 왔군. 그럼 일행들을 찾고 나서 그쪽으로 가면 되겠나?"

"어. 그러면 돼."

흰놈은 고개를 끄덕이며 방향을 바꾸어 걷기 시작했다.


"야, 아까 니가 말한 거. 그게 진짜면, 다시 머리를 줘 패면 원래대로 돌아온다는 거 아니냐?"

"뭐, 가설이 맞다면 그렇게 되겠지."


"방금 기가 막힌 짱돌 하나를 주웠거든. 이거 제대로 맞추면 어떻게 되지 않겠냐?"

한손에 딱 맞는 크기의 짱돌을 마법사에게 보여줬다.

"하지만 가설이라고 가설. 확실한 게 아니야. 맞을 확률이라 해봐야.."


"그놈의 확률. 세상에서 제일 쓸모없는 게 확률 계산이야. 세상만사 어차피 된다 아니면 안 된다 밖에 없다고. 알겠냐?"

"아무튼, 나는 오늘 별로 재수가 없는 거 같으니까, 니가 골라. 던져? 던지지 마?"

"던져."


이 여자. 확률이 어쩌니저쩌니 해놓고, 자기가 맞는  아니라고 바로 던지라는 것 좀 봐라.

그래도 일단은 전문가의 동의까지 얻었으니, 바로 치료에 들어갈 생각이다.


마침 여기는 평지에 바람도 별로 불지 않는다. 투구를 하기에는 최적의 조건이다.

내 발소리가 들리지 않으면 의심을 받을 수 있으니, 마법사에게 나무막대 하나를 쥐어주고 눈을 밟는 소리를 계속 내도록 했다.


“후..”

체내의 근육들에게 신호를 보낸 뒤, 오른발을 지면에 곧게 세우고, 오른팔을 뒤로 당겼다. 그리고 왼발을 들어, 모든 체중을 오른손에 실었다.


마지막으로.

모인 힘을 모조리 실어 오른손을 내질렀다.


"가라아아!!"


손을 떠난 짱돌은 흰놈의 머리를 향해 매서운 기세로 날아갔다.


마침내, 돌과 흰놈의 거리가 0이 된 그 순간..


팍!


들려야 할 소리가 잘못  것 같다. 머리에 맞았을 때는 팍이 아니라 딱하는 소리가 나야 할 터이다.

그리고 나는, 그 소리가 돌이 부딪히는 소리가 아닌, 깨지는 소리라는  직감했다.

멈춰선 흰놈의 손에 끼워진 반지가 빛나고 있었다.

그리고 고개를 돌려, 나에게 말한다.


"..이게 뭐하는 짓이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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