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화 〉애들 놀이가 더 무서운 법이다 [3]
"다시 한번 묻겠다. 이게 뭐하는 짓이냐."
흰놈이 검을 쥐었다.
외팔의 검사가 검을 쥐기만 했을 뿐인데, 분위기에 압도되어 몸을 움직일 수 없다.
일단 대답을 해야 할 것 같은데.. 그냥 던지고 싶어서 던졌다고 하면 저거 뽑으려나? 대답 안 해도 뽑겠지? 그럼..
"그ㄴ.."
"오로네에엘!!!"
응?
흰놈의 뒤편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흰놈에게 가려져서 모습은 보이지 않지만, 눈밭이 흩날리는 걸 보니, 꼬맹이임에 틀림없다.
"일행인가?"
흰놈이 마법사에게 물었다. 이 상황에서 용케도 담배를 태우고 있는 마법사였다.
아니면 죽음을 예견하고, 최후의 돛대를 피우는 걸지도 모른다.
"어 맞아."
꼬맹이가 오고 있다는 건, 뒤쪽에 제리스도 있을 것이다. 흰놈이 문제지만, 일단 저 두놈까지 합류하면, 남은 건 용사 뿐이다.
"..!"
흰놈의 눈이 무언갈 감지했다.
"어린아이가 쫓기고 있군. 뒤에 있는 저놈인가?"
그놈도 일행이다.
"저렇게 울부짖을 정도로 무서운 경험을 하게 하다니, 가만히 내버려둬선 안 되겠어.."
흰놈이 몸을 살짝 숙이는가 싶더니, 순식간에 시야에서 사라졌다.
겨우 찾아낸 그 뒷모습은, 검을 빼든 채 제리스에게 달려들고 있는 모습이었다.
조금 전, 제리스에게 죽어도 책임 못 진다고 말했던 것을 떠올렸다.
무사히 도착한 꼬맹이는 숨을 헐떡이지도 않고, 그저 내 뒤에 숨어 있을 뿐이다.
어떻게 되먹은 몸인지 놀라울 따름이다.
"술래잡기.. 무서운 놀이야."
하긴, 나도 죽을 뻔 했으니까 이해한다.
"야, 근데 쟤들 왜 안 움직이냐?"
순식간에 달려든 것이 무색하게, 흰놈은 제리스와 마주한 채 멈춰 있다.
"그러게. 일단 가볼까?"
재떨이 통을 닫으며 마법사가 말했다.
흡연을 한 덕분인지, 마법사의 얼굴에는 평정이 돌아와 있었다.
어느 정도 다가가자, 이 녀석들에게 일어나고 있는 일을 자세히 확인 할 수 있었다.
검을 내려찍기 직전인 흰놈과, 그 팔을 붙들고 서 있는 제리스.
안 움직이는 게 아니라, 서로의 움직임을 상쇄하고 있던 것이었다.
"..내 앞에서 그런 짓을 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나?"
제리스는 대답이 없다.
으윽으윽 앓는 소리를 내며, 자기 머리가 두 조각이 나지 않도록 애쓰는 중이다.
한 가지 신경 쓰이는 점이 있다면, 제리스의 왼쪽 눈이 금빛으로 빛나고 있는 것이다.
아니, 원래 금빛이었나? 잘 모르겠다. 변태의 눈 색까지 기억할 정도로 나는 한가하지 않다. 확실한 건, 저렇게 밝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야, 야!"
마법사가 흰놈을 불렀지만 대답 하지 않는다. 마법사는 그대로 흰놈의 정강이를 걷어찼다.
흰놈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다리가 땅에 닿으며 자세가 무너졌고, 제리스는 잡고 있던 팔을 놓고 뛰어 나올 수 있었다.
"고맙습니다. 시오씨! 덕분에 살았어요."
제리스가 헐떡이며 말했다.
"뭐하는 짓이지? 너도 한패인가? 그런가, 같이 죽여 달라는 뜻인가."
자세를 바로잡은 흰놈이 마법사에게 검을 겨누었다.
"아니, 일행이라고 이 녀석도."
마법사가 검을 옆으로 밀어내며 말했다.
"뭐라고? 그럼 저 아이는.."
흰놈이 꼬맹이를 쳐다봤다.
"일행인데."
내가 말했다.
"뭐?"
흰놈의 머릿속에서 수많은 물음표가 찍히고 있다는 걸, 여기서도 알 수 있을 정도로 어이없는 표정이었다.
그래, 어느 세상에 피해자와 가해자를 같이 데리고 다니는 미친놈들이 있겠는가.
멀쩡한 사람들이 보면 그렇게 생각할 수 있다.
근데, 그 미친놈들 대장인 니가 그러면 안 되지.
"응? 가만, 너 혹시 제리스인가?"
"그렇다고 아까부터 말씀 드렸잖아요!"
제리스는 억울한 듯 했다.
"아."
모든 것이 담겨져 있는 한 마디였다.
"응? 제리스는 어떻게 알아보는 거야?"
"그러고 보니 그러네. 이 녀석 지금 제정신도 아닌데, 어떻게 넌 알아보냐?"
마법사의 의문에 똑같이 의문을 느낀 나는, 그걸 다시 제리스에게 물었다.
"무슨 말씀이세요. 제정신이 아니라니. 이게 제정신일 때의 지크씨인데요?"
???
이번엔 내 머릿속에 무수한 물음표가 찍혔다.
"뭐?"
"이게 원래 지크씨라니까요? 술 한 방울도 안 마신 순도 100% 지크씨요."
"사람이 술 처먹었을 때랑, 깼을 때랑, 이렇게 다르다고? 차라리 대갈통이 깨졌다는 말을 믿겠다!"
어느샌가 의문은 분노로 변해있었다.
"제정신이라는 걸 믿는다 쳐도, 어떻게 우리를 모를 수가 있지? 나는 여기 온지 얼마 안 됐다지만, 오로넬은 꽤 됐잖아?"
"아, 그건 두 분 다 항상 지크씨가 취한 다음에 오셔서 그래요. 빨리 취하시는 주제에 항상 일찍 오시거든요."
"아니, 부가설명 할 게 틀렸잖아! 빨리 취하면서 일찍 오는 게 아니라, 왜 취했는데 사람을 기억 못하는 건데! 맨날 그렇게 죽으라고 마시는 것도 아니잖아."
과음하면 그 전날이 기억 안 나기도 한다만, 그 정도로 과음하면 머리통도 깨지고 속도 박살나고, 며칠간은 술 냄새도 맡기 싫을 텐데.
"그러게요."
제리스도 그것까진 모르는 모양이다.
원래 위에서 아래는 잘 보이지만, 아래에서 위는 잘 안 보이는 법이다.
저 녀석을 이해하려면, 저 녀석 이상의 미친놈을 데려와야 한다는 말이다.
"가만 듣자하니 네 녀석들, 당사자 앞에서 못 하는 말이 없군."
너도 취하면 못 하는 말이 없는 건 마찬가지다.
취해있던 사이의 기억이 없는 흰놈에게, 제리스가 여태까지 있었던 일을 설명해 주었다.
"술래잡기인가, 나도 별 이상한 짓을 다 하고 있었군."
취했을 때 있었던 일을 들은 건 이번이 처음인 모양이다. 이거 말고도 미친 짓은 얼마든지 했었는데 말이다.
"그래서? 이제 그만두는 건가? 더 한다고 해도 난 어울려 줄 생각도 없다만."
흰놈이 팔짱을 꼈다.
"난 처음부터 하기 싫었는데, 니가 협박해서 한 거거든? 그러니까 지랄 좀 하지 마라."
"힘이 없으니까 협박 같은 걸 당하는 거다. 인간은 힘이 없으면 아무 것도 할 수 없다. 잼의 뚜껑조차도 열수 없지."
"은근 맞는 말만 하는 게 더 좆같네 이거."
나는 주먹을 쥐어 제리스를 때렸다.
"아! 왜 때리세요!"
"아, 난 약해서 이 놈은 못 때리겠다. 그러니까 니가 대신 맞아주라."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논리에요! 게다가 저도 싸우면 이기진 못해도 지지는 않거든요?"
제리스가 고래고래 고함을 질렀다. 뼈를 맞은 모양이다.
"에휴, 그래서? 마지막으로 남은 놈, 용사는 어디 있냐?"
"뭐? 용사라고? 레기아? 레기아를 말한 거냐, 네 녀석!?"
흰놈이 갑자기 흥분하며 멱살을 잡았다.
"아니, 그건 또 누군데!? 시트린 말이야, 시트린. 20대 용사 시트린. 니가 핥고 빠는 시트린, 이 새끼야."
"아, 시트린을 말한 거였나. 용사라는 말을 너무 오랜만에 들어서 흥분했군."
흰놈이 손을 놓고 헛기침을 했다. 나는 한껏 아니꼬운 표정으로 옷을 가다듬었다.
"아무튼, 아무도 모르냐? 마지막으로 그 여자 본 사람? 꼬맹이 너. 너 마지막으로 같이 있지 않았냐?"
"응, 쟤가 뛰어 오기 전까진 같이 있었어."
꼬맹이가 제리스를 가리켰다.
"뭐 하고 있었는데?"
"눈사람이란 걸 만들고 있었어."
"뭐?"
"눈.사.람."
"아니, 그걸 왜 만들고 있었냐고."
"그게 더 재밌데."
미친년.
자기가 술래잡기를 하자고 해놓고선 뛰지도 않고 숨어있더니, 마지막엔 눈사람? 답도 없는 년이다.
"오, 확실히 그게 더 재밌었겠는걸. 처음부터 그거나 할 걸 그랬네."
마법사가 정답이라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할 말이 있지만 하지 않았다.
"일단 그쪽으로 가서 그 여자나 찾자고. 어이, 꼬맹이. 아까 그 나무 맞지?"
"맞아."
"제리스! 길은 니가 알지?"
"ㄴ, 네? 네. 거긴 알죠."
"그럼 그쪽으로 안내해. 빨리 끝내고 집에 가고 싶다고."
"아, 네. 이쪽이요."
지친 몸을 이끌고 제리스를 따라갔다.
희미하게나마 남아있던 햇빛도 사라졌고, 의지할 것은 달빛뿐이다.
"그나저나 너네는 얼마나 뛰어다닌 거냐? 아까 본 뒤로 꽤 됐던 것 같은데."
제리스에게 물었다.
"그러게요. 조금만 더 손을 뻗으면 데이린에게 닿을 것 같아서 멈출 수가 없더라구요."
거리를 보니 전혀 조금이 아니었는데.
"결국 한 번씩 뛰기는 뛰었구만."
한숨이 절로 나왔다.
"배고파."
꼬맹이가 말했다.
"그러고 보니, 지금 몇 시쯤이려나? 가게, 아직 안 닫았겠지?"
마법사는 아무래도 술이 부족한 모양이다.
정신없이 뛰어 다니느라 전혀 몰랐는데, 이제 눈도 제법 그쳐서 하늘이 잘 보인다.
달의 위치를 보니 아직 그렇게 늦은 시간은 아니다.
"아직 닫을 시간 까진 안 됐을 걸요? 아까의 점장님 상태로 봐선 주무시고 계실지도 모르겠네요."
"어? 그럼, 지금 가도 술 더 못 마시는 거야?"
"술이라면 제가 내 드릴 수 있어요. 어차피 돈 받는 가게도 아니구요."
"아 맞아, 그거 물어 보려고 했었어. 대체 술값도 안주값도 안 받는데 술이랑 식재료는 어디서 구해 오는 거야?"
"아~ 그거요? 술은 산에 있는 과일이나, 주인이 누군지도 모르는 밭에서 서리하는 곡식들로 점장님이 빚으시는 거고.."
"식재료는 먹고 싶은 음식이 있으면 손님이 재료를 가지고 오셔야 하는 게 규칙이에요. 몇몇 손님들이 매 번 가져오기 귀찮다고 한 번에 왕창 사오신 게 쌓이고 쌓여서 이렇게 된 거구요."
역시 돈과 시간이 남아도는 놈들이 한곳에 모여 있으면 이렇게 된다.
"흐~음, 그렇구나."
마법사가 끄덕였다.
"야, 이 근처였던 것 같은데? 아닌가?"
어딜 가도 나무뿐이지만, 이곳은 익숙한 느낌이 든다.
목숨을 위협받으며 쫓겼던 곳이니, 몸이 확실하게 기억하고 있다.
"저기 눈사람도 있네."
마법사가 가리키는 곳에 커다란 눈 덩이 두개가 맞물려 있는 조형물이 보였다.
눈사람이라기엔 눈도 없고 코도 없고 팔도 없었다. 그냥 눈덩이 두개를 붙여 놨을 뿐이다.
"그런데 시트린은 어디 있지?"
흰놈은 아무튼 용사가 제일 중요한 듯하다.
"일단 저기 까지 가보죠."
"그래, 여기서 눈알만 굴려봐야 뭐하겠냐."
그렇게, 눈사람을 향해 걸어가고 있을 때였다.
"앗..!"
제리스가 사라졌다.
"뭐야, 제리스 이 녀석 어디로 갔어?"
"어, 그러게. 뭐지?"
갑자기 사라진 제리스의 행방에 모두가 의문을 느끼고 있을 때, 그 녀석이 나타났다.
"이제야 왔구나, 너희들!!"
나뭇가지 위에서 용사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래, 이제 술래잡기는 끝났다. 됐지? 난 간다."
놀이를 끝낼 때에는 모두에게 통보해야 한다는 술래잡기의 암묵적인 규칙에 따라, 나는 이 등신들 전원에게 이 짓을 그만 두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이제 집으로 돌아갈 자격이 생겼다는 뜻이다.
"잠깐!!"
용사가 뒤돌아서려는 날 불러 세웠다.
"너희들, 제리스가 어떻게 됐는지 궁금하지 않아?"
"별로."
"너희들이 서 있는 이 일대부터 가게까지 가는 길에는, 내가 파놓은 함정들이 가득하다구. 제리스도 그 중 하나에 빠졌지. 그리고 그 장소는 나만 알고 있어."
어쩌라는 거지.
"이 함정 레이스에서 한명이라도 가게에 도착한다면, 제리스가 숨겨진 곳을 알려 줄게! 그러니까 제리스를 살리고 싶으면 모두 참가해!"
술래잡기를 하자고 했다가, 눈사람을 만들었다가, 이제는 함정까지 파놓고 레이스라니, 정말 할 짓도 없는 놈이다.
"만약에 한명도 통과 못하면, 제리스는 죽는 거냐?"
"물론이지! 그러니까 무조건 참가해!"
"그럼 니가 죽인 거 아니냐? 니 함정에 걸렸고, 니가 위치를 알고 있는데, 안 구해준거잖아. 용사라는 놈이 그래도 되는 거냐? 와, 세상 무섭다 정말."
"아, 아니. 그건.. 그래! 그때는 내가 구해주도록 하지! 그러니까 참가해!"
"그럼 참가할 이유가 하나도 없지 않냐? 보는 사람만 재밌는 걸 왜 해?"
"그러게."
"맞는 말이군."
마법사와 흰놈도 내 말에 동의했다.
"그, 그럼.. 그럼.."
용사는 있지도 않은 지혜를 짜내고 있었다.
"그럼 그냥 가자. 생각해보니까 그러네. 나만 재밌어서 뭐해?"
역시, 아무것도 없는 것을 쥐어짜면 아무것도 나오지 않는다.
용사는 벌써 질린 건지, 나뭇가지에서 뛰어내린 뒤 이쪽으로 걸어왔다.
"그래서, 이제 집으로들 가는 거야? 아니면 가게에서 좀 더 마실까?"
용사가 말했다.
"배고프아아."
대답도 하지 않고 집으로 가려는데, 꼬맹이가 다리를 붙잡고 늘어졌다. 무언의 압박이다.
이대로 질질 끌고 가고 싶지만, 그러기엔 내가 너무 지쳤다.
"아오, 알겠다, 알겠어. 나도 한잔 마실 테니까 그거 다 마실 때 까지만 먹어라. 이 망할 꼬맹아."
"아싸! 그럼 오로넬도 가게로 가는 거지? 오랜만에 한잔 하자고!"
가게에 간다는 말에, 꼬맹이 뿐 아니라 용사도 환호했다.
"너 존나 못 마시잖아."
"아이, 참. 한 번 더 해!"
"안 해~"
결국 오늘도, 나는 등신들과 함께, 술을 마신다.
"지크씨? 시오씨? 오로넬씨?? 누가! 좀 도와주세요오오오!!!"
그리고 그날 밤, 산에서는 비탄에 젖은 남자의 목소리가 마을까지 울려 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