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11화 〉하라고 하면 하기 싫지만, 하지 말라고 하면 하고 싶은 법이다. (11/108)



〈 11화 〉하라고 하면 하기 싫지만, 하지 말라고 하면 하고 싶은 법이다.

'쉬는 날에는 무엇을 하십니까?' 같은 질문을 받으면 뭐라고 대답하는가?

악기 연주를 한다던가, 등산을 한다던가, 친구들과 술을 마신다던가, 책을 읽는다던가, 심지어는 쉬는 날인데도 애를 돌봐야 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무섭게도 악기 연주와 책을 읽는 것만 제외하면, 내가 쉬는 날이 아님에도 하고 있는 짓들이다.


이런 질문을 왜 하는가 하면, 바로 오늘 아침에 있었던 일 때문이다.


"아, 쓸  존나 없네."

전날 밤, 너무 늦게까지 술을 마시는 바람에, 오늘까지 제출해야 할 주간 보고서의 할당량을  채우지 못했다.

최근 들어, 일보다는 술을 마시는 것에 더 집중하고 있는 느낌이 든다.


하지만 이게 정상이다. 이딴 외지에 근무 발령이 났는데, 성실하게 일 할 수 있는 인간이 있다면 나와보라지.

만약 있다면 나랑 바꾸고 싶다.


아무튼, 그런 이유로 이른 아침부터 일어나, 밥도 먹지 않은  책상 앞에 앉아 백지와 눈씨름을 하고 있는 것이다.


펜을 돌리고, 인중에 올려보고, 아랫입술에 붙여보고, 귓등에 올려 봐도, 더 이상 적을게 떠오르지 않는다.


그 등신들 사이에서 오래 지내다 보니 웬만한 일은 그냥 넘겨 버릴  있게 되었는데, 제정신을 유지하는 데는 도움이 되지만, 보고서를 쓰는 데는 영 쓸모없는 능력이다.

"꼬맹아, 가게에서 있었던  중에 뭐 특별한 일 없었냐? 아무거나 좋으니까  말해봐라."


꼬맹이한테 묻는 날이 오다니, 나도 이제 퇴물이다.

"어제 먹은 스튜가 맛있었어."


꼬맹이는 침대에 반쯤 흘러내리는 상태로 널브러져 있었다. 쓸데없이 긴 머리가 바닥을 가득 덮고 있다.

"넌 맨날 그거만 처먹잖아. 그게 뭐가 특별한데."


응?

"그러고 보니..? 왜 나한텐 맛없는데 그놈들은 그렇게 맛있게 먹는 거지? 이건 분명 주인장이 음식에 무슨 짓을 해놓는 게 분명해. 틀림없어."

말도 안 되는 개소리이지만, 그저 앉아서 종이 쪼가리만 받아 보는 고용주놈은  방도가 없을 것이다.


첩보 보고서란  원래, 주기적으로 헛소리가 나올 수밖에 없는 물건이다. 오늘이 마침 그때일 뿐이다.

날로 먹을 수 있는 소재를 떠올린 나는, 집중력이 떨어지기 전에 최대한 글을 늘려 쓰면서 보고서의 내용을 채워갔다.


똑똑똑

한창 집중하고 있는 와중에, 묵직한 노크소리가 눈치도 없게 울려댄다.

"꼬맹아, 제리스 아니지 저거? 그럼 니가 나가봐라."


"응."


산발이 되어 버린 머리를 신경도 쓰지 않고 꼬맹이는 문을 열었다.


"어머, 꼬마 아가씨가 나오셨네. 아빠는 바쁘시니?"


여관 주인의 목소리다.


"아빠는 모르겠는데, 오로넬은 바빠."


"그렇구나. 그럼 이 편지  아가씨가 전해주지 않을래? 아침 식사 때 전해주려 했는데, 오늘은 내려오질 않더구나."

"알았어."


여관 주인은 편지를 전하자마자 돌아갔고, 꼬맹이는 받은 물건을 가지고 곧장 나에게로 왔다.


"여기. 편지래."

"보면 알아."


왕가의 인장이 찍힌 금색의 편지 봉투.

이곳에서 귀양 아닌 귀양생활을 한지 어언 몇  째, 드디어 고용주 놈에게서 편지가 왔다.

"근데 있잖아."


꼬맹이가 말했다.

"오로넬이 내 아빠야?"

"아닌데."

"근데 왜 사람들이 아빠라고 그래?"

"원래 너 같은 꼬맹이랑 다니면 그래."

"나 같은 꼬맹이가 뭔데?"

"멍청하고 작은 놈들."

"나 작아?"


"어."


"오로넬은 왜 커?"


"살다보니 커지던데."

"나도 많이 살았는데?"

"나만큼 되려면 몇 배는 더 살아야지 임마."

"오로넬은 그렇게 오래 살았어?


"그렇단다 꼬맹아. 이제 나는 일을 해야 하니, 다시 침대에 누워서 뒹굴거리려무나."


하나를 답해주면 또 하나의 질문이 튀어나온다. 그렇다고 그걸 기억하고 있느냐 하면 그건 또 아니다. 며칠이 지나면 같은 걸 또 물어보겠지.

이래서 꼬맹이들이 싫다.

내가 직접적으로 질문을 쳐내고 나서야, 꼬맹이는 흐음 같은 소리를 내며 다시 침대로 돌아가 엎어졌다.


그리고 내 눈앞엔 앞으로의 인생을 결정지을 수도 있는 한 장의 종이 쪼가리가 놓여있었다.


"후.. 제발. 제발 철수명령. 반드시 철수명령. 무조건 철수명령!!"


인장을 뜯어내며 천지신명에 빌었다.


신 같은 거 믿지는 않지만, 나를 여기서 꺼내만 준다면 믿어 주지 못할 것도 없다.

봉투 속에 밀봉된 편지를 열자, 상단에 큼직하게 쓰여 있는 글자가, 싫어도 눈에 들어왔다.

'임무 내용 변경 지시서.'

시발. 신은 죽었다.

당장 이 종이 쪼가리를 찢고 싶었지만, 뭔 놈의 임무가 뭣 같이 바뀌었는지는 알아야 했다.

「계절을 가리지 않고, 지역과 국가를 가리지 않고, 짐의 수족이 되어  곳에서 일해 주고 있는 그대의 노고를 치하하는 바이다.」


그래. 내 고용주는 왕놈이다.

일국의 왕인만큼, 표면적으로는 주종 관계가 되겠지만, 실상은 전혀 그렇지 않다.

「라고 하고 싶지만, 불충한 네놈의 노고는 굳이 치하하진 않겠다.」

봐라. 이게 어딜 봐서 신하한테 쓰는 편지냐?

예전에, 왕놈이 하도 지랄을 하길래 억지로 술을 같이 마셨던 적이 있는데, 자기 딴에는 부담을 주기 싫었는지, 격식 같은  차리지 말고 편하게 마셔라는 말을 했었다.


분명히. 내 귀로 들었다.


그런데 그날 이후부터 외지 파견이 잦아지더니, 지금에 이르러선 대륙마저 횡단한 상태다.


아마 서대륙에서 활동하고 있는 동대륙 첩보원은 나밖에 없을 거다.

「네놈의 보고서는 잘 봤다. 소문 이상으로 그곳에 체류하고 있는 자들이 가진 영향력이 크더구나. 알다시피, 짐이 걱정되는 것은 그 자들이 단합하여 동대륙의 평화를 위협하는 것이다.」

역시 동대륙 제일의 쫄보답다.


「헌데, 저번 보고서까지의 상황을 보니, 그 자들이 딱히 뭔갈  생각이 없어 보이는 것도 사실이다.」


어? 말하는 게..? 이거 설마..?

아직 모른다. 아직 모른다!!

「네놈이 불충하긴 하나, 그간 짐과 나라를 위해 해 온 과업들을 봐서..」

봐서???

「당분간 그곳에서의 휴식을 명하는 바이다. 보고서는 이전처럼 빼곡히 쓸 필요 없이, 특이사항 발생 시에만 작성하되, 최소  달에 한번은 작성해서 올리도록 하여라.」

 뒤에 찍힌 왕가의 인장을 마지막으로, 종이 쪼가리 위의 문자열은 끊어졌다.

"..하하."


"하하!!"


이마를 절로 치게 만드는 편지였다.

"캬~ 휴가란다, 휴가. 시~발 휴가는 무슨. 뒤질 때까지 여기 처박혀 있으라는 소리잖아!!!"

쓰고 있던 보고서를 찢어 휴지통에 내동댕이쳤다.

그리고 침대 위를 점거하고 있는 꼬맹이를 밀어낸  몸을 던졌다.

"아악!! 아아악!!!"

애꿎은 침대에 화를 풀어본다.

그러나 아파오는 건 내 손과 발뿐이었다.

"하.."

아무것도 하기 싫어졌다.

 이상 보고서를 쓸 필요는 없다. 그렇다면 자동적으로 술집에 갈 필요도 없다.

이곳에 와서 일상처럼 행해온 모든 일들이, 이제는 모두 필요 없는 일이 됐다.


꼬르륵.


내가 소리를 지르든, 자아성찰을 하든,  꼬맹이의 배꼽시계는 묵묵히도 움직이며 나에게 밥을 요구했다.

"배고파."

바닥에 널브러진 꼬맹이를 노려봤다.


하긴, 보고서 때문에 아침도 아직인데, 곧 점심이 다 돼 간다. 이 녀석 치곤 꽤나 오래 참았다고 볼 수 있다.


"하.. 옷이나 입어라."


"알았어!!"

순도 100% 기쁨으로 가득  목소리였다.

애초에 여기서  거라곤, 먹고, 자고, 싸는 것뿐이다. 이런 생활에서도 행복을 찾을 수 있다니, 역시 애새끼들은 속 편해서 좋다.

오늘의 점심은 토스트다. 향긋한 식빵 냄새가 2층에서도 느껴졌다.

이 여관에서 상위권에 드는 메뉴인만큼, 평소엔  먹지도 않던 다른 투숙객들도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오랜만에 맛이 나는 음식을 먹을 생각에, 나도 기쁜 마음으로 테이블에 앉았다.


"어, 저기 있다. 어이, 오로넬!"


아는 목소리지만 아는 척 하지 않았다.

"거 봐. 맞잖아.  꼬마를 잘못  리가 없지."

하지만 꼬맹이의 긴 머리는, 사람을 헷갈릴 정도로 흔한 게 아니었다.


기분 나쁜 담배 냄새가 코끝을 때렸다.

"..여긴 또 어떻게 알고 왔냐?"

등신들에게서 해방될  있는 내 유일한 안식처마저 빼앗아 가다니. 내가 죽어서 신을 만난다면 반드시 그놈 얼굴에 주먹을 꽂으리라.


자연스럽게 합석하는 용사와 마법사를 보며 굳게 다짐했다.

"저기 친절하신 분이 가르쳐줬지."


역시 저놈이었나.


멀리서 어색하게 손을 흔들며 다가오는 남자를 말없이 쳐다봤다.

눈을 피하는  보니, 자기가 무슨 짓을 한 건지는 알고 있는 모양이다.

"아.. 오로넬씨 안녕하세요..? 데이린도 안녕?"

"나는 너 때문에 존나 안녕하지 못 하다만?"


"왜, 왜 그러시죠? 어디 불편하신가요?"

"그래. 특히 눈이랑 귀."


이 등신들의 면상과 목소리를 여기서 까지 들어야 하다니.

"눈 아플 땐 자는  최고야."

빵을 쩝쩝거리며 마법사가 말했다.

"나는 귀가 아프면 고함을 질러. 그럼 괜찮아 지더라고."

용사도 거들었다.

"시발. 이렇게 우르르 몰려와서 뭔 볼일인데?"

"심심해서."


진짜 할 말 없게 만드는 대답이다.


더 웃긴 건, 심심해서 왔다면서 죄다 토스트에 정신이 팔려가지고는 허겁지겁 먹기에 바쁘다.


뭐. '그 음식'에 비하면, 이건 궁중요리에 필적하는 맛이긴 하다.

그나저나 다른 놈들은 여기서 뭘 하면서 시간을 허비하고 있을까?

내일부터는 나도 시간과의 지루한 싸움을 시작  텐데, 참고삼아 들어는 보자.

"야, 근데 니들은 가게에 가기 전까지 뭐하고 있냐?"

등신들이 빵을 문 채로 고개를 돌렸다.

"뭐, 이것저것 만들고 있지."

저건 재미없을 것 같은데.


"운동이나 검술 연습이려나?"


저것도 필요 없어.


"저는 책을 읽거나 악기를 연주해요."

 새끼는 왜 혼자서 교양 있는 척이지?

"그러는 오로넬씨는 뭘 하고 계시는데요?"


제리스가 카운터를 날리듯 나에게 물어왔다.


"자."


"네?"


"잔다고."


"아.. 뭐, 남는 시간을 굳이 자기개발을 하는데 쓸 필요도 없죠."

이런 놈한테 위로를 받다니, 인생 최대의 굴욕이다.

"근데 갑자기 그건 왜?"


마법사가 물었다.


"아니, 뭐. 하고 있는 일이 있는데, 업무량이 확 줄어서. 남는 시간에 뭐라도 할까 하고."


마법사 녀석은 내가 첩보원인 걸 알고 있으니, 내 말이 무슨 뜻인지 알아차렸을지도 모른다.


"오, 일을 하고 있었어? 무슨 일인데 맨날 술집을 와? 술 마셔도 지장 없는 있는 일이야?"


용사의 눈이 번쩍였다. 일 하는 게 그렇게 신기한가?


"뭐, 그렇지."


"그럼 내가 검술 좀 가르쳐 줄까?"

눈을 번쩍이던 건 이것 때문인 모양이다.


"아니. 어차피 쓸데도 없어."

검술 같이 재미없는  이미 첩보원 일을 하면서 호신용으로 배웠다.

"그럼 나랑 같이 잡동사니나 만들자. 마가리스에 있었을 때처럼. 그때 좋았잖아?"

"별로."


그때 이후로 연구기관 잠입은 은퇴를 시켜준다 해도 안 할 거라 못을 박아둔 상태다.

"여기서 조금만 가면 도서관이 있는데, 거기서 책이라도 빌리시는 건 어때요?"


"음.. 그건 한 번 생각해 볼만하네."


제리스 치고는 괜찮은 의견이다. 확실히, 변태인 것만 빼면 제일 멀쩡한 놈이다. 현실에선 빼는 거든, 더하는 거든, 불가능하지만 말이다.

"맛있었어."

큰일이다. 꼬맹이의 접시가 비었다.


더 달라는 말이 나오기 전에, 미리 선수를 쳐야한다. 여기에 계속 앉아 있을 바에야, 천장의 줄무늬 개수를 세는  낫지.

"됐고. 난 이제 올라 갈 건데. 니들은 뭐 계속 여기 있을 거냐?"

접시를 내밀려는 꼬맹이의 팔을 붙잡았다.

"에이~ 어차피 잘 거면서 같이 놀자."

용사가 말했다.


맞는 말이긴 한데, 이놈들이 하자는 '놀이' 보다는 잠을 자는  몇 배는 더 유익하다.


"뭐 할 건지나 말해봐. 마음에 들면 하고, 아니면 올라간다."


다시 자리에 앉지는 않았다. 어차피 이놈들이니, 되도 않는 말을 할 게 뻔하다.


"음..술래잡기?"


그럼 그렇지.

"그건 이제  번 다신 안 한다."

"소꿉놀이는요?"


"그것도 안 해."

"겨울의 별자리 찾기?"


"그건 지금 못 하잖아."


"그럼.. 낮술?"


용사가 손으로 마시는 시늉을 하며 이쪽을 쳐다봤다.


정말이지 때리고 싶은 얼굴이다.

"가게에 가시게요? 지금은 점장님도 안 계실 텐데.. 가신다면 먹을  제가 적당히 만들어 드릴게요."

결국 그 술집인가.


"아니, 니들끼리 마셔라. 난 안 가련다."


"에이~ 그런  말고 가자~ 럼주도 새로 샀어."

"맞아 맞아. 빨리 가자 오로넬."


"!#!^#&@^@"

만류하는 등신들을 내버려두고, 꼬맹이를 주워 방으로 올라왔다.


할 것도 없는데 잠이나 자자.

결국, 아무것도 할 생각이 없었던 나는, 잠드는 것을 선택했다.

그렇게 밤이 되었다.


더 자려고 해도, 이젠 눈도 안 감긴다.

오히려, 이 침대에 누워있으면 있을수록 정신이  맑아지는 느낌이다.

"오로넬, 가게 갈 시간이야."


꼬맹이가 내 몸을 흔들었다.  시간만큼은 자다가도 기가 막히게 알아맞힌다.


"이제 안 가도 돼. 거기."

"왜 안 가도 되는 거야? 일 한다고 했잖아."

"그 일을 할 필요가 없어져서 안 가도 된다고."


그래. 이제 그놈들을 조사할 필요는 없다. 그 등신 같은 면상들을 보지 않아도 된다.

"그럼, 그냥 놀러 가면 되잖아. 나 스튜 먹고 싶어 스튜우~"

꼬맹이는 스튜를 반복하며 내 몸을 흔들었다.

"스튜~ 스튜~!"

이거면 된 거다.

거기에 놀러 간다 한들, 그 등신들의 지랄에 어울려줄 생각도, 이유도 없..

다..


없다..


우우욱!

"으아아아. 그만 흔들어! 그만 흔들라고!"

"스튜~! 스튜~!!"

"알았다, 알았어! 그만하라고 갈 테니까!"

육지에서 뱃멀미를 느껴본 적이 있는가?


어느 누구라도 방금 그걸 당했다면, 어떤 다짐과 맹세도 번복할 수 있었을 것이다.

"진짜?!  옷  입었어!"


이럴 때만 준비성이 좋은 게 짜증난다.

"나도 입어야 될 거 아니냐, 이 새끼야."

방방 뛰는 꼬맹이를 치워두고 옷을 갈아입었다.

"으흐..! 존나 춥네."

내가 누워서 시간을 끈 탓인지, 평소보다 날씨가 더 추운 것 같았다. 밤도  깊어져, 산길을 오르려면 등불을 챙겨야만 했다.


"오오, 이거 뭐야?"

꼬맹이가 신기한 듯 물었다.


"등불도 모르냐?"

"내가 들래."

"그래라."

들고 있는 게 귀찮아서 그대로 꼬맹이에게 등불을 넘겼다.


등불을 받아든 꼬맹이는 이리저리 흔들어 보더니 갑자기 신이 나서는 제멋대로 달리기 시작했다.

"야! 뛰면 어떡하냐! 나 안 보인다고!"


이렇게 어두운 밤에 산에서 길을 잃으면 답도 없기에, 어쩔  없이 꼬맹이를 따라 달렸다.


허억, 허억.

정신을 차리니 어느덧 낯익은 조명 앞에 서있었다.


그 빛은 아무런 치장도 하지 않은 버려진 상자 같은 건물에서 세어 나오고 있었다.

문 앞에 서서 왠지 모르게 뿌듯해 하는 꼬맹이의 머리를 한대 쥐어박고는, 입구를 열어 젖혔다.


"어~ 왔네, 왔어."


"오늘은 많이 늦었네. 조금만 더 늦었으면 4번 자리 뺏길 뻔 했다고. 빨리 앉아."


가게를 가득 메운 등신들의 인사와, 비어있는 카운터석 두개가 눈에 들어왔다.


"이야~ 뺏길까봐 지켜준 거야? 기특도 하셔라."


용사가 등신같이 코끝을 문질렀다.


"내가 사둔 럼주는 다 비우셔야지?"


마법사가  어깨에 팔을 기대었다. 기분이 나쁘니 털어냈다.


"그래, 그래야지. 여기 안 온다고 내가  하겠냐?"

일이면 어떻고 아니면 어떠랴.


보고서에서 해방되었으니, 이제 아무래도 좋다.

럼주가 있고, 구경할 등신들이 있으니, 이곳보다 재미있는 곳도 없을 거다.

"주인장, 여기 토마토 비프스튜 하나랑 럼주 한잔, 존나 빠르게."

"갑니다~"


-하하하하하!!!


-야! 그건 내꺼잖아!


-마셔라! 마셔라!

-조용히 하세요, 손님!


"하여튼, 존나게 시끄러운 가게구만."


떨어질  같은 귀청을 붙들고. 나는 오늘도 술을 마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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