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화 〉개똥도 약에 쓰려면 없다지만, 필요 없을 때는 온 바닥이 개똥이다.
'열 번 찍어 안 넘어가는 나무 없다.' 라는 말이 있다.
노력만 하면 못 이룰게 없다는 뜻의 격언인데, 사람이 살다보면 찍어선 안 될 나무도 있는 법이다.
"우리 데이린, 또 스튜 먹고 있구나? 데이린은 스튜를 참 좋아하네."
대표적으로 이 남자가 있다.
직접 말하기도 싫은지, 꼬맹이가 내 귀에 대고 속삭였다.
"아! 귓속말이라니! 오로넬씨 혼자만 치사하네요."
"불쾌하니까 꺼지라는데?"
"거짓말하지 마세요. 데이린이 그런 말을 할 리가.."
"꺼져."
꼬맹이의 따끔한 한마디에 훌쩍이며 자리로 돌아가는 제리스였다.
"야, 그냥 가지 말고 럼주 한잔이나 더 가져와라."
"네.."
"근데 방금 건 좀 심했다. 어린 애한테 무슨 말을 가르치는 거야. 너?"
마법사가 터덜터덜 걸어가는 제리스를 보며 말했다.
"어린 애니까 저런 나쁜 어른을 한방에 무찌를 수 있는 말을 가르쳐야지."
"그렇게 말하니까 그런 것 같기도 하네."
고개를 끄덕이는 마법사였다.
"근데, 쟤가 뭘 했다고 저렇게 싫어하는 거야?"
"몰라. 가까이 있으면 기분 나쁘데. 힘도 빠지고."
"힘이 빠진다고? 그러고 보니 나도 그래. 저 녀석 근처에 있으면 뭔가 힘이 안 들어간다고 해야 하나? 그런 게 있어."
"뭐? 당연히 저런 변태를 보면 힘 빠지지. 나도 빠진다, 야."
"아니, 그런거 말고. 진짜로 체력이 빨려 나가는 느낌이라니까?"
"무슨 헛소리를 하고 있냐."
"럼주 한잔 나왔습니다."
마침 제리스가 도착했다. 그 잠깐 사이에 벌써 우울함을 털어 내다니, 대단하다고 해야 할지, 답이 없다고 해야 할지 모르겠다.
"야, 온 김에 여기 가만히 있어봐 너."
마법사가 담배로 바닥을 가리켰다. 곧 불을 붙인다는 뜻이겠지. 등신들 지랄하는 건 막으면서 왜 가게에서 담배 피우는 건 가만히 놔두는지 모르겠다.
"네?"
"이상하게 너랑 가까이 있으면 힘이 빠진다는 사람들이 있어. 그게 사실인지 확인해 보자고."
너랑 꼬맹이 둘뿐이지만 말이다.
"그런 거라면 질릴 때 까지 확인해 드릴 수 있죠. 그동안 저는 어쩔 수 없이 여기에 서 있을 수밖에 없는 거죠? 그런 거죠 오로넬씨?"
"아, 몰라. 시끄러우니까 닥쳐."
"빨리 쟤 좀 치워줘."
꼬맹이가 제리스의 반대쪽으로 몸을 기울였다.
"이 아줌마가 뭐 확인할게 있댄다."
"으.."
"이거봐, 이거봐. 힘이 계속 빠지고 있다니까?"
마법사가 주먹을 쥐락펴락 하며 호들갑을 떨었다.
"뭘 보라는 거야? 존나 멀쩡하구만."
"넌 아무것도 안 느껴져? 난 힘도 안 들어가고 몸도 무거워 지는데."
"니 입에 문 거나 보시지."
흡연은 수많은 합병증을 동반한다.
"담배 때문이 아니라니까. 저거 봐, 꼬마도 축 늘어졌잖아."
꼬맹이는 그 좋아하는 스튜를 앞에 둔 채 엎드려 있다.
"진짜네."
그때였다.
갑자기 가슴이 뻥 뚫린 것처럼 상쾌한 공기가 전신으로 퍼져나갔고, 몸이 날아갈 듯이 가벼워 졌다.
"오! 나는 갑자기 힘이 넘치는데? 오오..! 한대만 때려 봐도 되냐? 인생 최강의 주먹을 날릴 수 있을 거 같은데."
"아, 여러분들이 말씀하시는 게 이거였군요?"
제리스가 자신의 눈을 가리켰다. 파랗던 왼쪽 눈이 금빛으로 변하고 있었다.
"이거 '조각'이거든요."
"그러냐."
"뭐야. 왜 안 놀라? 조각이잖아, 보기 힘든 거라고?"
마법사가 본인도 안 놀랐으면서 나보고 놀라란다.
"저기 여섯 개나 갖고 있다는 놈도 있는데, 한 개 쯤이야 개나 소나 가지고 있겠지. 너도 하나 가지고 있지?"
"뭐.. 있긴 하지."
진짜네.
"그래서, 그 눈깔로 뭘 할 수 있는데? 옷이라도 투시 되서 보이냐? 변태네 완전."
"아직 아무 말도 안 했는데요.."
"잠깐만, 받아 적을 테니까 기다려."
마법사가 펜과 종이를 꺼냈다. 나도 며칠 전이었으면 저러고 있었겠지. 이놈은 왜 받아 적는지 모르겠지만.
"어.. 그러니까, 이 눈의 능력은, 한마디로 '평등'이에요. 주변에 있는 사람들의 신체능력을 흡수해서 평균치로 재분배 해버리죠."
"그래서 이놈들은 죽상이고 나는 팔팔한 거냐?"
"네, 제가 잘 통제하고 있는 줄 알았는데, 무의식적으로 새어 나가고 있었나 봐요."
"그럼 빨리 원래대로 돌려놔. 이 새끼들 표정 좀 봐라. 내가 그렇게 평균을 깎아먹는 거냐?"
"이미 원래대로 돌려 드렸는데요. 체력 손실은 알아서 회복해야 하더라구요."
"흐음. 그럼 됐어. 오늘은 조용히 마시겠네."
나는 다시 의자를 돌려 술잔을 집었다. 제리스는 계속 뒤에서 꼬맹이를 바라보고 서 있었다.
"이제 됐으니까 꺼지라고. 그 눈깔 때문인 게 확실해진 이상, 이놈이 너한테 관심을 보이는 일은 평생 없을 거다."
"그..그럴수가..! 그럼 저는 어떻게 해야.."
"통제가 안 되면, 그 눈이라도 뽑던가."
"헛! 그런 방법이!"
뭐?
"이야아앗!!"
"야!! 뭐해!!"
그냥 던져 본 말이었는데 진짜로 눈을 뽑을 기세다.
"아, 괜찮아요. 이거 의안이거든요."
제리스가 손바닥 위에 올려진 의안을 보였다. 공허한 눈구멍이 날 쳐다봤다.
이 가게에서 보는, 아니. 살면서 여섯 번째로 보는 조각이다.
"어후, 미친놈이. 생눈 뽑는 줄 알았네."
"에이, 누가 생눈을 맨 정신으로 뽑아요? 아프게."
"소름끼치니까 빨리 저리로 꺼지라고. 하려면 내일부터 그러고 오던가."
"이렇게 하면 데이린도 더 이상 절 싫어하지 않겠죠?"
"그럴지도 모르지. 근데 최악의 경우는 그냥 너라는 인간 자체가 싫은 거일 수도 있어."
"으으윽.."
이제 입 밖으로 꺼내는 것조차 귀찮아진 나는, 손을 저으며 제리스를 쫓아냈다.
"그래서? 니 건 뭔데."
엎드려있는 마법사에게 물었다.
대답이 없다. 평범한 시체인 듯하다.
"저기요. 저기요? 대답 안 하시면 귀지 파서 다시 귀에 넣어 버립니다?"
"으어어얽"
"살아났네."
혹시나 싶어 꼬맹이 쪽을 쳐다봤는데, 이쪽은 진작에 일어나서 스튜를 먹어치우고 있었다.
"빨리 말해봐. 너도 조각 갖고 있다며. 니껀 무슨 능력인데? 시답잖은 얘기보다 그게 더 재밌겠다."
"그런 건 맨입으로 말 못하는데.. 한 세잔은 마셔야 술술 나올 것 같은걸?"
마법사가 잔을 내밀었다.
"더 마시면 개소리 하거나, 쳐 잘 거잖아."
"...내 조각은 이거야."
"너도 그럴 것 같지?"
마법사는 품속에서 요상하게 생긴 목걸이를 꺼냈다.
"이 목걸이는, 수명을 대가로 그만큼의 미래를 볼 수 있어. 지불한 수명은 계속 누적 되서, 사용량만 조절하면 아주 먼 미래까지 볼 수 있지"
"쓰면 늙는 거냐?"
"아니 젊어져."
"존나 좋은 거잖아! 그게 대가냐?"
"한 번에 너무 먼 미래까지 보게 되면 죽을 수도 있다고."
"미래 같은 거 알게 뭐야? 젊어진다는데. 나도 좀 쓰자, 딱 5년 치만."
"안 돼! 다른 사람이 사용하면 내가 저축한 수명이 초기화 된다고. 겨우 여기까지 볼 수 있게 됐는데, 그럴 순 없지."
"그래서, 지금 몇 년 뒤의 미래까지 볼 수 있는데?"
"천년."
"와.. 이거 완전 할망구였잖아!? 뭐가 스물다섯이냐? 이 사기꾼 같은 년아! 무슨 배짱으로 반오십이라고 했을 때 그렇게 화냈던 거냐고?"
"조용히 해, 이 새끼야! 더 말 안 해준다?"
"더 말할게 뭐가 있는데? 뭐 하는 물건인지도 들었고, 그걸로 니가 뭘 했는지도 들었는데? 아직 더 고백할 죄가 남았나?"
"조용히 하라고 했지!"
마법사의 손이 내 머리를 붙잡았다.
"조, 조용히 할게요.."
"아무튼, 내가 마가리스에서 만든 것들은 전부 천년 뒤의 미래를 보고 만든 거지."
"아, 그러셨습니까. 할머니? 대단하시네요."
"천 년 뒤는 대단하다고. 말없이도 움직이는 차와, 먼 곳에서도 서로 대화할 수 있는 막대기도 있지."
"그런 걸 저한테 말씀하셔도 제가 공감을 할 수 있을까요, 할머니? 이제 주무실 시간인데 약이나 드시죠."
"그만해라."
"그래."
더 놀려먹고 싶었지만 지금이 딱 그만둘 때다.
여기서 한마디만 더 하면 또 무력행사를 시도 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아슬아슬한 줄타기야 말로 인생을 살아가는데 가장 중요한 기술이다.
"다른 놈들 중에도 조각 가지고 있는 놈 몇 명은 더 있겠지? 심심한데 그거나 캐묻고 다닐까."
"그러고 보니 시트린도 하나 가지고 있다고 하지 않았어?"
"아, 걔 거는.."
"불렀어?"
용사의 목소리가 바로 뒤에 있는 테이블에서 들려왔다. 시끄럽게 놀다가도 자기 이름만 나오면 어디서든 달려온다.
"너도 조각 가지고 있지, 시트린?"
"응, 이거."
용사가 검집 째로 허리춤에서 검을 빼내 들어 보였다.
"그건 능력이 뭔데?"
"글쎄, 아직 한 번도 안 써봤는데. 아니, 뽑아 본 적도 없어, 이 검."
"그래? 그럼 이번 기회에 한번 뽑아보자."
왜 아직까지 미사용인지는 별로 궁금하지 않는가보다.
"그럴까?"
"잠깐만! 혹시 뽑으면 발동하는 것일 지도 모르니까, 나가서 뽑자."
"좋아. 구경할 사람 다 나와라!"
마법사와 용사가 나눈 몇 마디에, 등신들이 우르르 몰려나갔다.
이미 알고 있겠지만, 저 검은 예전에 내가 조사했었던 검이다. 뽑아도 보고, 휘둘러도 봤지만, 딱히 뭔가가 일어나는 일은 없었다.
"자, 그럼 뽑는다?"
등신들마저 숨을 죽이고 있는 가운데, 은백색의 날이 모습을 드러냈다. 달빛을 받아 한결 더 눈부신 빛을 자아냈다.
"음, 뽑을 때는 아무 일도 안 일어나네."
"그럼 한번 휘둘러봐."
마법사가 말했다.
"알았어."
용사는 양손으로 쥔 검을 얼굴을 향해 들고, 눈을 감고 심호흡을 했다.
"흐아아압!!"
우렁찬 기합소리와 함께, 은백색의 날이 허공을 가로질렀다.
그리고 잠시 후.
쾅!!
용사의 앞에 서 있었던 나무들이 우르르 쓰러지기 시작했다.
"됐어!!!"
용사가 들뜬 얼굴로 돌아봤다. 다른 등신들도 덩달아 들떠서는 용사와 손뼉을 치고 있다.
그 사이에 서있는 나는, 당황을 감출 수 없었다.
내가 휘두를 땐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던 검이, 용사가 휘두르니 닿지도 않는 나무를 베어냈다. 도대체 어떤 능력인 거지?
"그래서, 저게 뭔 것 같냐?"
턱을 잡고 머리를 굴리고 있는 마법사에게 물었다.
"모르겠는데?"
마법사도 한 번 본 것만으로는 잘 모르겠는 모양이다.
그러면 나한테 또 방법이 있지.
"야, 나도 휘둘러보자."
머리로 모르겠다면 직접 해보는 게 더 빠르다. 용사는 흔쾌히 검을 넘겨줬다.
"뭐야, 시발. 이거 왜 이렇게 무거워?"
"응? 별로 안 무겁던데?"
"으으윽..!!"
양손을 다 써도 드는 것조차 힘들다. 예전에 들어 봤을 때는 이렇게 무겁진 않았는데, 어떻게 된 거지?
"어?"
"거봐, 가볍지?"
갑자기 검이 가벼워졌다. 그냥 가벼워진 정도가 아니라 나무 막대기 보다 가벼울 정도다.
일단, 내친김에 휘둘러도 보자.
"흐아압!"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뒤에서 등신들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니가 다시 휘둘러봐."
다시 용사에게 검을 건넸다. 용사가 검에 손을 대자, 다시 아까처럼 무거워졌다.
"흐아압!!"
역시 용사가 검을 휘두르자, 또 한 번 나무들이 쓰러져 나갔다.
내가 자리로 돌아가자, 다른 등신들도 한 번씩 휘둘러보겠다며 앞으로 나왔다.
"뭔지 알겠어?"
자리로 돌아온 나에게 마법사가 물었다.
"글쎼, 조금 밖에 모르겠네."
"오, 뭔데, 뭔데? 얘기해 봐."
"일단 쓰는 놈에 따라 무게가 바뀌는 것 같은데, 기준을 모르겠어. 내가 쓸 때는 엄청 가벼웠거든? 그런데 용사 녀석이 쓸 때는 또 엄청 무거워졌어. 무작정 가벼워지기만 한다는 건 아니라는 거지."
"그럼 저 나무들을 베어낸 건?"
"나도 모르지. 애초에 저놈 말고는 아무도 안 되는구만."
방금까지 날 비웃던 놈들도, 누구하나 나무를 베어내지 못했다. 실패한 놈들은 머리를 긁적이며 자리로 돌아왔고, 더 이상 등신들은 다른 등신들을 비웃지 않았다.
그렇게 능력이 뭔 지는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채 시연이 끝났고, 등신들은 가게로 돌아왔다.
시연 덕분인지 가게가 더 소란스러워진 건 덤이다.
"역시 조각이었어! 고마워 시오. 니가 아니었으면 확인해 볼 생각도 안 했을 거야."
그건 니가 멍청해서 그렇지.
"그러고 보니 너 검술 연습 한다면서? 근데 한 번도 안 휘둘러 봤다고?"
문득 떠오른 의문을 입 밖으로 꺼냈다.
"검술 연습은 당연히 목검으로 하지, 진검으로 하다가 다치면 어떡할 거야?"
당연하긴 하지만, 그런 걸 걱정할 놈인 줄은 몰랐다.
"자고로 용사의 검은 악을 벌 할 때만 꺼내야 하는 것! 어때, 멋지지?"
"방금 꺼내서 휘둘렀잖아."
"아니.. 그건.. 사실 나무가 악이었어. 마왕 녀석이 만진 적이 있거든."
"그럼 그놈이 자주 오는 여기는 악의 소굴이냐? 그럼 너도 악이겠네?"
"아잇! 조용히 해! 어차피 난 은퇴한 몸이니까 괜찮아. 그런 거니까 이제 끝!"
"아 재미없게. 조금만 더 변명해 보지."
역시 놀리는 것도 어느 정도 지능이 돼야 할 맛이 난다.
"그런 거 재미없으니까 혼자서 해."
용사가 삿대질을 했다.
용사가 돌아가고 가만히 자리에 앉아서 생각해보니, 일 할 때는 나오지도 않던 고급 정보들이, 필요가 없어지자마자 하루에 몇 개씩이나 튀어 나온다.
"제리스, 럼주 한잔 더 주라."
"예~"
"토마토 비프스튜 한 그릇 더."
"갑니다~"
아무튼, 내 인생은 왜 이러는지 모르겠다.